#린


김서은이 이상하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원래도 매번 피곤해 보이는데 요즘엔 그게 더 심하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는 와중에 밥알만 셀 뿐 말조차 하지 않는다. 기껏 좋아하는 갈치까지 사다가 구워줬는데. 나는 결국 참다못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어?”

서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다기보단 단순히 지친 것 같다. 나는 한숨과 함께 생선 살을 발라 그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아니. 요새 너무 피곤해 보여서. 멍때리는 시간도 잦고.”

서은은 머뭇대는 것도 잠시 내가 준 생선 살을 삼키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이번 사건이 좀 많이 힘들었어.”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기만 했는데, 서은은 제 발 저리다는 듯 말을 늘어 놓았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어쨌든 사건도 끝났고 하니까 이젠 괜찮아. 진짜야. 그냥 좀 힘들어서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내 말에 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마저 먹었다. 사실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은근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 일단은 별말 없이 넘어갔다. 안 그래도 예민한 사람을 더 물고 늘어졌다간 싸울 것 같아서였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각자 씻은 뒤 침대에 누울 뿐이었다.

“잘 자.”

서은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습관처럼 말했다. 서은은 내게 짧게 입 맞춘 뒤 등을 돌리고 누웠다. 피곤해서 머리만 대면 잘 줄 알았는데 그는 계속 몸을 뒤척이며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잠 안 와?”

“응. 좀 답답하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말했다.

“괜찮은 거 맞아?”

내 말에 서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중에 시간 되면 어디 나갔다 올까? 가고 싶은데 있어?”

“괜찮은데...”

“답답하다며. 오랜만에 바깥 공기 쐬면 좋잖아.”

표정을 보니 마냥 싫진 않나 보다. 그는 약간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바다 가자. 안 간지 꽤 된 것 같아. 아니면 내일 갈래? 일요일이라 시간 괜찮은데.”

“내일?”

“응. 혹시 일 나가?”

내일 마침 일이 없어 시간은 많았다. 하지만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나를 옭아맸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서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니. 지금 가자. 원래 이런 건 결심하고 바로 가야 해.”

“뭐? 야!”

서은이 뭐라 더 잔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옷을 챙겨 입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잠옷으로 입고 자는 다 늘어난 체육복 바지에 티셔츠만 입은 채로 차에 올라탔다. 내가 시동을 걸 때까지 서은은 지금 뭐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안전벨트를 해 주고 차를 몰았다.

“넌 대체...”

“왜. 밤바다 좋잖아.”

내 대답에 서은은 고개를 젓더니 습관처럼 조수석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덕분에 운전을 하다말고 짜증이 확 났다.

“아 차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오늘 한 대밖에 안 피웠어.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짜증을 내든 말든 그는 신경쓰지 않고 차창을 내려 담배를 피웠다. 나랑 같이 살면 좀 끊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물론 그도 끊으려 노력을 하긴 했다. 하지만 도저히 못 끊겠다고, 차라리 양을 줄이겠다고 거의 울다시피 빌었고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하루에 딱 2대만 피우기로 타협을 봤다.

“어디 바다로 갈 건데?”

그가 빈 콜라 캔에 재를 털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동해 가고 싶은데 너무 머니까 그냥 가까운데 갔다 오자.”

“그래.”

나는 차를 몰아 가장 가까운 서해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가 본 적이 있어 길을 헤매지 않으니 서은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전에 가 본 적 있어? 네비 안 찍고도 잘 가네.”

“응. 최영원이랑. 근처에서 볼일 보고 잠깐 바닷가 가서 술 마셨지.”

“아하.”

“술 마시고 물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하긴 했는데 나름 재미있고 좋았어.”

내 말에 서은은 대체 어디가 재미있고 좋았던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사람인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후회됐다.

“아니 그러니까... 그때는 철이 없었지.”

“넌 지금도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야.”

반박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차를 몰았다. 급커브를 도는 구간에서 최대한 부드럽게 차를 몰자 서은이 대뜸 말했다.

“너 잘하는 거 하나 찾았네.”

“응?”

“운전 말이야.”

내가 알바를 시작할 무렵, 서은은 무작정 아무거나 하는 것도 좋은데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걸 찾으라 그랬다. 나중에 뭘 먹고 살든 웬만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도 해당될 줄은 몰랐다.

“난 또 뭐라고. 이 정도는 다들 하지 않나?”

“그렇긴 한데 사소한 거라도 하나하나 다 찾아봐. 요리던, 집안일이던, 노래던, 운전이던, 뭐던. 다 찾아보고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로 골라. 너 아직 젊어. 다 해 보고 도전해 봐. 내가 최대한 도울 테니까. 이제 너도 진짜 새 출발 해야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바로 말하라 한 게 빈말은 아니었나보다. 사실 내 재산이 서은 재산보다 배는 더 많아서 누가 누굴 지원해 준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 결의에 찬 모습이 귀여워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살 거긴 한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너 혼자 독립할 정도의 힘은 있어야지.”

말하는 투가 확실히 어른스럽다. 이러니 내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나 보다.

“와. 좀 감동인데.”

“감동은 무슨. 신호 바뀌었어. 앞이나 봐.”

말 해 놓고 민망한지 서은의 귀가 빨개졌다. 나는 그런 그가 귀여워서 한참을 키득댔다.

“네. 네. 그런데 나랑 오래 살 거면 자기 담배부터 끊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알겠어. 나도 노력해 볼게.”

서은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여튼 웃긴 사람이다. 나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재빨리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얼굴이 온통 빨개지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차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밤바다라 너무 어둡고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나름 운치있고 좋았다. 나는 해변가에 가기 전 잠시 근처 편의점에 차를 세웠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폭죽을 사려 했다. 서은도 마실 걸 좀 사야 한다며 나와 함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나는 서은이 음료수를 살 동안 폭죽을 골랐다. 바닷가 편의점이라 그런지 확실히 폭죽이 많았다. 이것저것 종류별로 사고 있는데 갑자기 젊은 여자 2명이 키득대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좀 시끄러운 것말곤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아서 무시하려는데 갑자기 둘 중 한 명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요.”

비쩍 마른 여자애였다. 많이 쳐 줘봤자 스무살일 것 같은 애가 내게 말을 걸 리가 없기에 계산이나 하려고 자리를 떴다. 그때 그 여자애가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았다.

“저기요!”

“예? 저요?”

“네. 그쪽이요.”

영 예감이 좋지 않다. 뒤에 친구로 보이는 다른 여자애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대고 있었다. 뭘 바라는지 눈에 뻔히 보이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하고 장단을 맞춰줬다.

“왜요?”

“번호 줄 수 있어요?”

그럼 그렇지. 나는 졸지에 양손에 폭죽을 가득 안고 어떻게 하면 얘들을 깔끔하게 쳐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거 어쩌죠. 저 결혼 할 사람 있는데.”

“네?”

여자애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서은이 계산대에서 나를 불렀다.

“최린. 뭐해.”

그 부름에 나는 강아지마냥 해맑게 웃으며 여자애에게 말했다.

“저기 부르네요. 이만 가 볼게요. 잘 놀다 가세요.”

나는 당황한 나머지 뭐라 말도 못하는 여자애들을 내버려 두고 서은에게 달려갔다. 서은은 저 애들이랑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어보려다가 내가 계산대에 올려놓은 폭죽 양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너... 너 이게 무슨...”

“왜? 많이 하면 좋잖아. 계산해주세요.”

서은이 뭐라 더 잔소리를 하기 전에 카드를 내밀었다.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해변으로 향했다. 밤바다는 내 예상과 달리 꽤 괜찮았다. 바람도 선선하고 뭣보다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하긴. 누가 밤 11시에 바다를 보러 오겠어. 어둡고 사람이 없어서 좀 어수선하긴 한데 서은이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 밝아진 표정으로 바닷가를 거닐고 내가 사 온 폭죽에도 관심을 보였다. 진짜 불꽃놀이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 반짝거리는 게 꽤 예뻤다. 우리는 순식간에 사 온 폭죽을 모조리 써 버리고 모래사장에 앉았다.

“나오길 잘했지?”

마지막으로 남은 스파클러에 불을 붙이고 이리저리 흔드는 서은에게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또 설레서 나는 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아까 편의점에서 그 여자애들이랑 뭔 얘기 했어?”

스파클러가 거의 다 탔을 무렵 서은이 물었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나름 궁금하긴 했나 보다.

“그냥. 번호 물어보던데.”

“아.”

“결혼할 사람 있어서 안 된다 그랬어.”

“어?”

스파클러의 불이 완전히 꺼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난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

“나... 해외로 나갈 생각 없어.”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내가 한참이나 웃기만 하자 서은은 덜컥 화를 냈다.

“네가 결혼하자며!”

“아 미치겠다. 나도 해외 갈 생각 없어. 영어도 못 하는데 무슨... 그냥 평생 같이 살자는 얘기야. 혼인신고도 못 하는 거 아는데 우리끼리라도 결혼한 셈 치고 같이 살자고.”

서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놀릴 생각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왜? 별로야?”

당황하며 징그러우니 저리 가라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전혀.”

“좋다니 다행이네. 그럼 우리 신혼집부터 알아볼까?”

농담이긴 해도 꽤 진지하게 한 말인데 서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 말에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결국 대답 대신 핸드폰을 꺼내 통장 잔고를 보여줬다. 액수를 확인한 서은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전직이 회장 딸인데 당연히 많아야지. 자기 하나 평생 먹여 살릴 돈은 있어. 다 합법적인 돈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는 아직도 넋이 나간 서은의 손에서 핸드폰을 채간 뒤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말했지. 나한테 시집오면 평생 발 뻗고 살게 해 주겠다고. 그거 거짓말 아니야.”

“너...”

“좀만 기다려. 반지도 맞춰 올게.”

서은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넌 너무 무모해.”

“매번 무모하게 굴도록 만드는 게 누군데?”

“말은 잘하지.”

“널 위해서라면 난 평생 무모하게 굴 수 있어.”

서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어두운 밤바다. 적당히 부는 바람. 다 타버린 폭죽 냄새와 희미한 담배 냄새. 그리고 언제 느껴도 질리지 않는 그의 입술까지. 마음만 같아선 차에서라도 뒹굴고 싶은데 참기로 했다. 대신 나는 그가 숨이 차 나를 밀어낼 때까지 입을 맞췄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뗐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본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너무 행복하면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온기와 향이 지나치게 달았다. 숨이 멎을 정도였다.

나와 눈을 맞춘 채 눈을 길게 감았다 뜨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 모든 걸 다 포기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차마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한 내 모든 감정을 뒤섞은 말을 고르고 골라 입 밖으로 꺼냈다.

“사랑해.”

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숨을 고르는 것도 잠시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대답했다.

“나도.”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품에 안은 채 바다를 바라봤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미소를 보며 반드시 그를 지키겠다고.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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