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초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마왕이야기 회지에 여섯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캐릭터 사망 요소 있음.




며칠 내내 유중혁은 자고 일어나면 다리가 저릿하고 아픈 것을 느꼈다.

김독자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걱정하더니, 우리 중혁이 아프면 어쩌지? 아니 우리 중혁이가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여기서 벌써 아플 리가 없는데, 따위의 말들을 중얼거리며 서재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었다. 먼지 쌓인 낡은 고서들을 꺼냈다, 집어넣었다 하며 앗 이거 내가 잃어버렸던 흑마도서! 어 내 네크로노미콘 여기 있었네? 하고 사방팔방 오만 방정을 다 떨었다. 유중혁은 자신이 다리가 아파서 죽는 것보단 김독자가 이 방대한 서가의 먼지에 질식해서 폐렴(유중혁은 폐렴이란 단어도 잘 몰랐지만)으로 죽는 게 더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수많은 책을 일일이 꺼내 책등에선 바랜 제목을 앞표지에서 확인하고, 집어넣기를 한참 반복하던 김독자는 기어이 책 하나를 찾아내었다.

[인간 백과]

김독자는 백과사전을 한참 뒤지며 통증이란 통증에 관한 모든 항목을 다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에도 며칠은 걸리겠지. 유중혁은 새삼 김독자가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다리가 좀 욱신거리긴 했지만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몸살이 났을 때의 통증은 아니었고, 뻐근하거나 자세를 잘못 잡은 느낌이었다. 유중혁은 정말정말 들어가기 싫었지만, 혼자 식재료 창고의 입구 부근을 뒤져 저녁 찬거리를 준비했다. 그래도 유중혁이 김독자를 위해 요리를 공부하고 시작한 이래로, 재료창고의 입구에 있는―최근에 들어온 재료들은 죄다 인간이 먹을 만한 거리였다. 아까 눈을 잘못 돌려 도마뱀의 눈알이나 원숭이의 심장, 박쥐 훈제 따위를 본 기억은 잊고 싶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건 좀 그만 구비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김독자는 그날부터 유중혁이 차려준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속이 상했지만, 유중혁이 안 아프도록 원인을 찾겠다고 저러는 것이니 뭐라 하기도 좀 뭐했다. 이번엔 저 두꺼운 책에서 별로 도움도 안 되는 결과를 찾아내는 데에 얼마나 걸릴까? 유중혁은 나흘에 걸었고, 다행히도 자신과의 내기에서 패배했다. 김독자는 이틀 만에 인간 백과를 집어던지고 폴짝폴짝 뛰어왔다.

중혁아, 나 알아냈어! 그거 아픈 거 아니래.

그럼 뭔가?

성장통이래.

김독자는 어찌 되든 유중혁이 아픈 게 아니라는 일이 기쁜지 말갛게 웃었다. 분명 지 말로는 유중혁의 몇백 배는 살았다던데, 거 참 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통?

응, 그거 키가 크려고 그러는 거래! 원래 키 크려는 나이의 인간 아이들은 다리가 좀 아프대.

유중혁이 읽은 책에서는 없던 내용이었다. 아마 김독자도 알 법한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유중혁은 새삼, 김독자가 단 한 번도 인간 남자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다고 말한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군.

우리 중혁이 키 재 볼까?

김독자는 신나서 유중혁의 팔을 붙잡고 복도 구석에 있는 벽으로 이끌어 갔다. 유중혁은 내심 탐탁지 않았지만, 김독자가 끄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유중혁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김독자가 손톱으로 긁어 새겨온 유중혁의 키의 흔적들이 있었다. 맨 처음 유중혁이 이곳에 왔던 해부터 시작해서 김독자는 대체로 한 겨울이 지날 때마다 유중혁의 키를 기록했다. 김독자의 손톱으로 벽을 긁어내릴 때 떨어져 내리는 돌가루들을 보며 유중혁은 김독자와 함께 한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마음 속으로 기록하는 편이었다.

야, 너 키 진짜 많이 컸다!

유중혁은 벽에 발과 머리를 대고 섰을 뿐인데 김독자의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유중혁이 이만큼 키 큰 게 못내 자랑스러워 죽겠는 모양이었다.

중혁아, 네가 여기 온지 몇 번의 겨울이 지났지?

열 번이다. 네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왜 자신한테 묻는지, 김독자는 본인은 나이를 먹지 않다시피 하는 주제에 유중혁의 나이는 집착적이고 강박적으로 세는 편이었다. 중혁아 넌 이제 여기서 세 번의 겨울을 지냈어. 너는 이제 여덟 살이다? 중혁아 일곱 번째 봄이 왔네. 너 열두 살이야, 대단해! 그런 말들. 그리고 꼭 유중혁한테 그걸 상기시켰다. 네가 몇 살인지 내가 몇 살인지, 김독자의 나이를 알 수 없던 유중혁으로서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고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나이 타령은 조금 짜증이 났다. 유중혁이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말을 이었다.

너 이제 열다섯이네.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독자는 잠시 벽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한순간에 웃음이 싹 사라지고 가라앉은 눈은,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인지라 유중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김독자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지문 하나하나로 유중혁이 커온 그 세월의 자욱들을 매만지며 한참 동안 눈을 깜박였다. 그러더니 정말로 뜬금없게도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 키가 이보다 다섯 뼘은 더 커지고 커져서 어느 날 스무 살 되면 말이야…그때가 오면 중혁아,

김독자의 어조가 전에 없이 차분했다. 마찬가지로 거의 없는 일이었다.

…네가 날 죽여줄 거야.


그 어느 햇볕이 맑고 바람이 선선한 날 김독자는 그렇게 말했다.

마왕은, 어떤 상상을 하는지 생각에 잠겨 눈이 반짝였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너무나 예기치 못한 말을 해서 한참 동안 그 말이 무슨 상징이나 비유인지 고민했지만 아니었다. 김독자는 정말로 유중혁이 자신을 죽일 생각을 하며 꿈에 잠겨 있었다. 유중혁은 그럴 일은 세상에 절대 없으리라 여겼지만, 김독자는 확고했다. 그가 말할 때의 표정이나 목소리로 보아 그 확신은 굉장히 깊고, 오래되고, 황홀하고, 단단하게 김독자의 심장에 붙박여 있는 것 같았다. 마왕은 자기 심장에 줄곧 붙어있던 말을 했다. 참으로 수상하고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유중혁은 김독자가 그런 해괴한 말을,

마치 사랑을 고백하듯 말했다고 느꼈다.



마왕 이야기




유중혁은 커다란 마왕성에서 자랐다. 성은 흔히 보기 어려운, 희귀한 새하얀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미색이 뛰어나고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렸다. 유중혁은 노상 그 돌벽을 보고 자랐기에 그 돌이 구하기 어렵고 비싸다는 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성주의 코트처럼 하얀 옷이었다. 성주의 얼굴처럼도 하얗다. 유중혁은 처음 그 성에 왔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그 성에 왔을 때.

유중혁이 그 성에서 태어났을까? 기억을 더듬으면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니까 유중혁에게도, 이런 동화 같은 성의 풍경이 아니라 어느 비루먹은 집안의 낡고 허름한 나무 판잣집에서 살았던 기억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여느 아이와 같이, 어머니와 아버지도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라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평범하게 검은 머리색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던 평민 집안이었다. 매일 먹는 것도 시원찮았고 노상 일하느라 바쁜 부모들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와 살아보기 전까지 집에 거의 혼자 있었다.

혼자 있던 것이 부모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집 밖에 나갈 때마다 안 좋은 표정의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사람들은 유중혁을 보고 불길하다고 했었던 것 같다. 유중혁의 눈이 이상하게 금빛이라, 짐승과도 같은 안광을 발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등에 마치 용이 얽힌 것 같은 크고 화려한 모양의 반점이 문신으로 새긴 것처럼 또렷한 모양을 띠고 있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유중혁이 집 밖으로 나오면 흘끔 쳐다보았고 가끔 어린아이들은 돌을 던졌다. 이유 모를 악의는 유중혁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독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김독자를 부르는 호칭이 '마왕'이었기 때문에 유중혁은 김독자의 이름이 김독자인지도 몰랐다. 일단 도망가야 할 것 같으니 도망쳤는데, 마왕이 무언가 말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무서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어리석은 인간들 같으니.

그 속에 느껴진 흉흉한 분노는 어린아이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고 뚜렷한 바람에,

자기들을 구해줄 ■■ 하나 몰라보고 손을 휘둘러?

유중혁은 그가 무섭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마왕이라는 단어는 아마 그런 형언할 길 없는 공포에 붙이는 호칭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유중혁은 실제로 마왕이 왜 공포의 대상이 되는지 눈으로 보게 되었다. 자신에게 돌을 던졌던 한 아이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유중혁은 잠시 정신을 잃은 것도 같았다. 인간의 비명소리가 어땠는지, 열다섯이 된 지금의 유중혁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유중혁은 자주 그리 생각했다. 그 일을 조금 더 제대로 기억해낸다면, 김독자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중혁은 그때에 대해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김독자를 싫어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피바다 속에 김독자가 자신을 안아 들고 했던 말만큼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한다.

…늦어서 미안해, 중혁아.

유중혁은 분명 마왕을 처음 봤었다. 누구냐고, 왜 내 이름을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린 유중혁은 그 순간 , 하고 대답했었다.




김독자는 세상에 유중혁을 키우는 일과 책을 읽는 일 말고는 아무 낙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아니, 사람 아니지. 마왕이지. 언젠가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아왔냐는 말에 김독자는 책 읽었어, 하고 대답했으니 정말 그게 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하나를 더 찾자면 마물을 기르는 것 정도?

김독자는 종종 눈이 다섯 개 달리고 코가 없으며 다리에 빨판이 달려 기어 다니는, 강아지와 흡사한―그걸 강아지랑 흡사하다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아이들에게 호랑이의 뼈다귀를 던져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한 번은, 여덟 살의 유중혁이 그냥 평범한 강아지를 키우면 안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중혁아, 저거 원래 그냥 강아지였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의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그렇게 깔깔 웃었다. 중혁아 나 마왕 맞아. 내가 데려오면 평범한 고양이도 저렇게 되고 막 그래.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두 달이면 마물화되더라. 그래도 보다 보면 쟤네 좀, 귀엽지 않니? 유중혁은 김독자의 웃음이 불쾌했지만 동시에 김독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김독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것들을 쓰다듬고, 껴안고, 옷에 매단 채, 질척한 점액질에 옷이 젖은 채로 성안을 활보했다.

가끔 김독자는 유중혁을 보며 넌 특별하다고 이야기했다. 열세 살의 유중혁은 어느 날 늘 듣던 그 말을 듣는 순간 촉수가 달린 강아지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유중혁은 왜 자신이 마물화되지 않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어쩌면 김독자가 자신을 특별히 여기는 것은 모두 그런 점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몰랐다. 유중혁은, 마을 사람들이 쑥덕거렸던 대로 자신 역시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그게 싫었다. 지금은…….

중혁아, 밥 먹자!

유중혁은, 적어도 지금은 그게 아주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유중혁은 어느 날 이러다가 자신의 몸에서 빨판과 촉수가 돋고 식탁을 녹이는 침이 흘러내려도 놀라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유중혁에겐 유감스럽게도 그는 마왕과 어울리는 괴물이 되지 않았다. 유중혁은 항상 마음속에 김독자에게 나는 언제 저 '강아지'들처럼 되냐고 묻고픈 충동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결국은 그 질문을 꺼내지는 않았는데, 만약 김독자가 '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내가 그래서 널 사랑하잖아.'라고 대답한다면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망해버릴 것 같아서였다.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마왕의 미래는 늘 지금의 생활에서 딱히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 대신 유중혁은 늘 김독자의 과거에 대해 묻곤 했다.

책 읽는 거 말곤 뭐 하고 살았나?

포포랑 놀았는데…….

포포는 김독자가 유중혁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촉수 다섯 개 눈 네 개에 지네 다리 이십 개를 달고 있는 유중혁 크기만 한 '기니피그'였다.

그거 말고.

어, 포포랑 치치랑 애들 밥 주고…….

치치 역시, 포포랑 많이 다르게 생겼지만, 근본적인 관점에선 비슷한 존재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매한가지의 끔찍한 외양이다.

그 전에는?

포포랑 치치 엄마 아빠 되는 애들 키웠지.

그런 거 말고는 하는 일 없었어?

…청소?

이런 대화를 수십 번쯤 하다 보면 제아무리 유중혁이라도 결국 지쳐 나가떨어졌다. 김독자의 대답은 한결같았고, 유중혁이 얻을 만한 흥미로운 과거사는 전혀 나오지도 않았다. 김독자의 대답은 간결해서 김독자라는 마왕의 삶 자체를 참 간단하게 축약시켜버리곤 했다. 그런 대화를 끝내고 나면 유중혁은 한동안 서가에 가지 않았고, 그러다가 마음이 다 가라앉으면 다시 거대한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기도 했다. 역시 제일 먼저 읽는 책은 인간들의 동네에서 낸 [악랄한 마왕들의 악행 이천 가지]라는 책이었다. 유중혁은 대답에서 김독자가 생략한 그의 삶이, 책에서 본 것처럼 마왕의 본분대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었을지 궁금해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유중혁은 자라면서 김독자를 따라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반 정도는 김독자의 의도대로기도 했다. 김독자는 본인이 책밖에 안 읽고 살아와서인지 몰라도 유중혁한테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주기 시작했는데, 죄다 인간 동네에서 나온 책이었다. 김독자가 읽는 고서들과는 표지조차 산뜻하게 다른 그 책들이, 유중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곱 살의 유중혁은 김독자의 피땀 어리고 어눌한 설명 끝에―사실을 이야기하자면, 김독자는 인간 세상의 글씨를 거의 몰랐기에 유중혁을 데리고 온 순간부터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자책]을 사서 혼자 배우고 있었다―겨우 글자를 깨쳤는데, 깨치자마자 김독자가 읽는 고서들을 읽고 싶어 했다.

김독자는 고서들을 철저하게 어린 유중혁의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두었다. 이듬해 여덟 살의 유중혁은 기어이 사다리를 놓고 김독자의 고서 하나를 꺼내어 펼쳤다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피 묻은 손의 악령들에 기절해 버렸고, 잠시 후 깨어난 유중혁에게 정체불명의 약을 먹인 김독자는 전에 없이 무서운 얼굴로 금지령을 내렸다. 유중혁은 열다섯이 될 때까지도 다시는 김독자의 고서에 손대지 않았다. 어쨌든 그 책들이 김독자나 되어야지 펼쳐보기라도 하고 목숨이 붙어있는 종류지, 함부로 손대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그게 재밌어 보이면 재밌었지 인간 동네의 책은 영 재미가 없었다. 김독자가 사준 인간 동네 어린이용 동화책은 죄다…어리고 용기 있는 남자아이가 자라나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님을 구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유중혁은 그 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게 김독자의 해괴한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마왕성에 물건을 들여오는 유일한 존재는 김독자뿐이었다. 성안에는 김독자와 유중혁, 그리고 더 따지자면 포포라든가 치치 같은 귀여운 이름을 가진 귀엽지 않은 존재들이 전부였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존재 모순적인 책 선정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읽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 옆의 김독자는 마왕이라기보단 자기가 키워줘야 할 부모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유중혁은 점차 그렇게 자라갔다. 옛날 용사 모험담 같은 걸 읽고 자라서인지 말투는 고풍스러워지고 있었다. 아니, 어떤 기준에서 보면 조금 이상하거나 딱딱할 말투였지만 그걸 김독자와 둘이서만 사는 유중혁이 알 도리는 없었다. 유중혁이 나이를 먹자, 김독자는 그제야 조금 더 다양한 책을 사주기 시작했다. 열 살의 유중혁은 이제 용사 모험담을 포함해서 사회, 인문, 교양, 과학, 무술 전반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무술, 특히 검술이나 창술과 실용 격투법에 관한 책이 유난히 많았지만, 그것들은 썩 유중혁의 마음에 들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그때에야 유중혁은 사회 교양 도서 어쩌구를 읽으며 김독자가 혹시 남성 여성에 대해 지나치게 고전적인 가치관을 가진, 그래서 남자아이는 멋진 모험담을 읽고 자라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부모 유형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유중혁의 눈에 김독자는 강박에 빠졌다기보단…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아니 마왕이었다.

십 년의 세월 동안, 유중혁이 보아왔고 기억하는 김독자의 모습은 항상 덜렁거리고 나사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지만, 솔직히 말해서 영 멍청이 같았다. 어쩌면 그게 유중혁한테만 보여주는 모습일지라도 그랬다. 아니 세상에 지나가다가 의자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쳐서 한참을 주저앉아 괴로워한다든지, 식사하다가 토마토를 일일이 골라낸다든지 하는 모습에서 공포나 두려움을 느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유중혁이 자라면서 둘의 식사를 도맡아 준비하게 되자 괴리감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요리 대부분에는 감자, 토마토, 마늘, 양파가 요긴하게 들어갔는데 김독자는 매번 음식을 씹다 말고 토마토를 주르륵 뱉어내곤 했다. 유중혁은 마왕에게 편식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면서 어쩐지 책에 나오는 부모의 형상과 자신을 겹쳐본 적이 많았다. 

쟤가 마왕이면 난 사탄이다.

유중혁의 주된 생각이었다. 사실 김독자는 그냥 별명이 ‘마왕’인 부유한 성주 아닐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마왕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어서 이야기를 부풀린 게 아닐까? 김독자는 마왕 중에서는 유달리 하찮은, 돌연변이 같은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치와 포포 같은 생물체를 보면 유중혁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정상적인 자연의 형태가 아니라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고, 다섯 살 때의 기억은 드문드문 예기치 못한 악몽처럼 머리를 비집고 나타날 때가 많았다. 서가에 꽂힌 고서들은 어딘지 불길한 주문 같은 것만 잔뜩 있으니 결국, 그래, 김독자는 마왕이긴 마왕이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동화책에 적힌 것처럼 용사에게 물리쳐져야 할 법한 마왕은 아니었다.

적어도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중혁의 열네 살 가을.

열네 살의 가을 어느 날에, 유중혁은 김독자가 정말로 ‘그런’ 마왕인지를 물었다. 김독자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곤 눈을 한참 깜박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유중혁의 생각을 빤히 알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중혁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마왕이 뭔데?

유중혁은 동화책에서 본 마왕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다. 취미로 사람을 찢어 죽이고, 인간에게 저주를 걸고, 한 나라의 왕을 유혹하여 나라를 파멸로 이끌고, 역병을 돌게 만들고, 마물을 키워 인간을 공격하게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을 좋아하여 사람의 피로 목욕을 하고 그 한숨과 절망을 먹으며 쾌감을 느끼는 사악한 존재들. 유중혁은 말하면서도 참 남의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독자는 한참을 표정 변화 없이 진지하게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리를 꼬곤 웃었다. 김독자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곧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할 답은 명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김독자 입장에선 또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런 사악한 존재일 리가 없었다. 그럼 왜…답을 고민할까?

나는 마왕은 맞는데, 사람을 죽이는 걸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드물게, 인간들 입장에선 납치를 하긴 했지만.

‘납치’라는 말에 강세를 두었는데 억양이 좀 이상했다. 유중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되물었다.

내 얘긴가?

너는……납치…그래. 납치긴 하지.

말끝에 쓴맛이 따라붙었다. 김독자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유중혁은 괜히 물었나 싶었다. 조금의 후회가 머리 뒤로 뱅뱅 돌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김독자는 마왕이었고, 그 모든 오해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유중혁이 그걸 묻는 게 유쾌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유중혁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나 말고 네가 ‘납치’한 다른 사람들은, 여기 오래 있었나?

키운 적이 없었다며? 유중혁은 김독자가 아니라고 대답하길 바랐다. 그리고 김독자는 유중혁이 원하는 대답을 했다. 눈치를 보니 없는 대답을 지어내서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오래는 못 있었어.

왜? 그 인간들은 나보다 별로였나?

그렇진 않아.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대답에 유중혁은 약간 빈정이 상했다.

그럼 왜?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던 김독자가 기어이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애기, 지금 질투해?

유중혁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유중혁이 뭐라고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김독자가 웃음을 멈추더니 중얼거렸다.

…한 달.

뭐?

한 달이 넘으면 그 친구들이 마물화가 되니까…….그러고 싶진 않아서.

김독자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어두웠다. 유중혁은 문득, 김독자가 혼자 성에 있는 걸 외로워했는지 묻고 싶어졌다.

마왕도 외로움을 타는가?

그러나 당시의 김독자의 표정을 보며 유중혁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그 후로, 그 질문은 차마 꺼내지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훗날 유중혁은, 그때 그 질문을 기어이 못 하고 만 자신에게, 배려였는지 동정이었는지, 아니면 두려움이었는지를 자주 추궁하게 되었다. 후회할까봐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못다한 질문은 시효가 지나면 영원히 후회로 남는 법이었다.





열다섯 살이 된 여름, 유중혁은 처음으로 몽정을 했다.

상대는 마치 정해져 있단 듯이 김독자였다. 유중혁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치겠다. 미쳤다. 나는 미쳤다. 미친 것이 틀림없다. 뭐, 편식하는 김독자에게 잔소리하는 부모 뭐? 부모자식? 아니,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어제 김독자가 갖다 준 로맨스 소설에 괴상망측한 표현이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건 다 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무 책이나 대중없이 다 갖다 준 김독자 때문이다. 아니 내가 왜? 아니, 살면서 본 상대가 김독자밖에 없었다 해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유중혁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인간 세상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마왕이었고, 그래서인지 김독자가 가져다주는 책은 청소년이 읽기에 유해성이 다분한 것도 제법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하지만 그 책들을 읽는다고 모두가 자신을 키워주는 마왕에 대해 몽정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다른 아이가 키워졌어도 김독자를 상대로 그런 꿈을 꿨을까? 다른 아이였어도 꿈속에서 김독자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씨발! 꿈속 김독자의 얼굴을 상기해버린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다리 사이는 아직도 뻐근했고, 계속 문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유중혁은 차라리 김독자가 너무 많은 책을 갖다 준 탓에 야매 성교육이라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긴 한데…아는데, 알긴 아는데…….

유중혁은 심호흡하곤 제 방 창문 바깥을 곁눈질했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김독자가 바지런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그가 먼저 방에 올 것이다. 중혁아, 아직도 자? 하면서, 아프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방문을 따고 들어올 것이다. 빠르게 해결해야 했다. 빨리 가라앉히고 이불빨래를 다 새로 해야만 했다. 유중혁은 천천히, 생각했다.

지금의 몸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생각할 게 하나밖에 없었다. 유중혁은 다시 꿨던 꿈 생각을 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유중혁은 김독자 생각을 했다.

꿈은 대중이 없었고 앞뒤도 없었고 인과도 없었다. 그냥 김독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니, 좀 야하게 누워있었다. 유중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꿈속에서의 유중혁은 김독자의 다리를 잡고, 입을 맞추고, 아, 처음으로 뺀질대는 말들이 아닌 울음소리 같은 뭉개진 억양을 들으면서 흥분하고, 하얀 피부에 빨간 손자국을 남기고, 날아가지 못하게 가끔 펼치는 그 날갯죽지를 잡아 쥐고 당겨서는, 흔들리는 허리를 감싸안았다. 틀어쥔 날갯죽지 때문에 상체가 들어 올려지면 가는 몸선과 하얀 등이 적나라히 보였다.

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는데도 유중혁은 단 한 번도 김독자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었다. 보나 마나 꿈속의 그 목덜미처럼 새하얗고 자국이 잘 남을 것이다. 김독자는 항상 어딘가 모서리에 박을 때마다 무릎에 뻘겋고 퍼런 멍을 남겼으니 유중혁의 이로 씹어도 자국이 아주 잘 남을 것이다. 피부를 씹으면 부끄러워할까? 아파할까? 목울대를 쓸어내리면? 살결을 건드리며 쓸다가 힘을 주어 그 목을 조르면? 하지 말라고 할까? 아니, 아니다. 유중혁에게는 김독자가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반쯤 있었다. 어떻게 하찮은 인간 남성이 몇천 년을 살아온 마왕에게 그런 오만을 품을 수 있을 수 있는지 모르면서도, 유중혁은 확신했다. 유중혁이 하고 싶다고 하면 김독자는 기꺼이 몸을 내어줄 것이고, 그럼 유중혁이 김독자의 다리를 벌려도, 배려 없이 목을 졸라도 김독자는 기꺼이 받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유중혁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다. 어떻게 해 주는 게 좋은지 묻고 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생전 유중혁한테 낯부끄러운 얘기는 안 하는 마왕의 입에서 좋다는 소리가 기어이 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유중혁의 허리가 뻐근하게 당겼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마왕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어디를 어떻게 하면 그 얼굴이 무너지는지, 자신을 애라고 무시하고 인간이라 얕보지 않을지 찾아내고 싶었다. 어린아이였던 자신이 어른인 김독자에게 휘말리는 게 아니라, 어른인 김독자가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걸 보고 싶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숙인 채 헐떡였다. 그렇게 첫 자위는 짧게 끝났다. 온몸이 찌릿하게 달아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더러워.

스스로가 했던 생각을 되새기며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김독자가 마왕성에 없었다. 종종 마왕으로서의 일이니 뭐니 하며 나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워낙에 드문 일이었다. 유중혁은 안심하고, 이왕 빠는 김에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김독자의 이불까지 죄다 회수하여 새것같이 싹 빨았다. 그러면서도 자꾸, 김독자의 이불을 물에 담가 주무를 때 떠오르는, …김독자는 이런 거 했을까? 오래 살았으니까 많이 했겠지? 혹시 마왕은 안 하나? 마왕은 성기가 있나? 꿈에서 본 김독자의 것은…씨발! 그러니까 씨발같은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 이불과 침대보에 누웠을 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유중혁은 서가에 인간 백과 대신 마왕 백과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있을 리가 없었다.


열다섯의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김독자 생각을 자주 했다. 특히 밤에 더 자주 했다. 몽정하지 않은 날에는 자기 손으로 스스로 먼저 움직여 자위하는 날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잘 안 되는 게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중혁은 마왕성 안에 갇혀 삶의 반 이상을 김독자랑만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책 속의 그림으로만 그려진 가상의 사람들이 사춘기 소년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새삼 돌이켜보니 유중혁의 세상에는 김독자밖에 존재하질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아버리고야 만 유중혁은 그제야 김독자가 조금, 많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자주 성질을 부리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또 열흘 밤낮 인간 백과를 뒤져 [사춘기]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혼자서 그 단어를 중얼거리며 혼자 납득하고 혼자 만족한 듯한 김독자를 보고, 유중혁은 방안에 들어가 조금 울었다. 유중혁의 열다섯 살 사랑은 그렇게 조악한 세 글자로 쉽게도 축약되었다. 그 너무나도 쉬운 명명을 생각할 때면, 유중혁은 가끔 상상 속에서 김독자를 범하기보단 차라리 찢어 죽이고 싶기도 했다.





그 사춘기 때 즈음, 김독자는 한참 어디론가 나갔다가 오더니 어마어마한 수량의 검을 보따리째 들고 돌아왔다. 연습용 목검부터 시작해서 어린이용 검, 청소년용 크기의 것, 어른들이 전쟁에나 쓸 법한 투박한 검이나 아주 미려하게 세공된 고급스러운 검, 김독자의 몸 크기만 해 들을 수도 없는 무거운 검까지 종류는 각양각색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쓸 것인가, 착각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 어느 것도 김독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로 생각하기엔 김독자는 마왕이었고, 자기 입으로 싸움을 잘한다고 했으니,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에게 검을 내밀기 전까지는 그게 자신의 것이라고도 생각하질 못했다.

―자.

유중혁은 김독자가 내미는 초보자용, 연습용 검을 받아들었다.

너 지금까지 책 완전 많이 읽었잖아? 이제 실전으로 연습해 보자.

그렇게 당당히 말하길래 유중혁은 드디어 김독자가 자신에게 싸움을 가르쳐 주나 싶어서 조금 두근대었다. 전설 속 마왕에게 싸움을 배우는 것은 자신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웬걸, 김독자는 유중혁한테 검 몇 개만 덜렁 던져버리더니 자기는 그대로 서가로 돌아가 책이나 한 장 펼치는 것이었다. 유중혁이 자세도 모르고 잡는 법도 모르는데 자기 혼자서 뭘 어떻게 하냐고 항의했지만, 김독자는 천하태평이었다.

중혁아, 너는 잘할 거야. 걱정하지 마!

유중혁은, 니가 내가 잘할지 뭘 어떻게 아냐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랬다간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꼴이 되기에 꾹 참았다. 꾹 참고, 그냥 김독자 말처럼 검을 한 번 훅 휘둘러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중혁에게는 책을 읽거나, 빨래를 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김독자와 대화를 하는 일 말고도 새 일과가 생겼다. 단연코 검이었다. 안 그래도 밤에 김독자를 가지고 이상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걸 피하고자 마왕성 마당이라도 돌던 유중혁에게 검 연습은 좋은 핑계였다. 김독자는 내심 유중혁과의 대화가 줄어든 것을 조금 서운해하는 눈치기도 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유중혁이 검을 연습하는 일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위해 성 뒤뜰에 검을 연습할 수 있는 가짜 주술인형들을 만들어주었다. 유중혁은 인형 하나하나마다 김독자를 대입해서 열심히 후려패기 시작했다. 김독자에 대한 악의가 있었다기보단, 대입하기 위해 떠올릴 수 있는 아는 얼굴이 김독자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김독자에 대한 생각을 조금 지우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생각을 지운답시고 인형에 김독자 얼굴을 상상하며 패다 보면 그것조차 김독자 생각을 하는 꼴이긴 했다. 유중혁은 그럴수록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더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김독자가 가져다준 물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중혁이 정말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검은 손아귀에 착착 맞아들어갔다. 연습용 목검의 손잡이가 손때로 누덕누덕해질 때까지 유중혁은 죽어라 검만 휘둘렀다.

어쩌면, 이 정도로 연습하다 보면, 정말 김독자 말대로 자신이 검의 천재라면, 어쩌면 잘 될 수도 있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동화책 속에서 검을 연습하는 사람들은 다 공주님의 기사들이었다. 유중혁은 참으로 웃기게도, 그리고 김독자가 전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마왕성의 기사를 꿈꾸고 상상했다. 자신이 기사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김독자는 공주가 아니라 마왕인데. 마왕에겐 기사가 필요할까? 필요하지 않을까? 아, 아니다.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유중혁은 조금 다른 질문을 떠올리다 지워버렸다.


김독자에게는 유중혁이 필요할까?




열여덟 살이 된 여름. 유중혁은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왕성 뒤뜰 마당에서 한여름의 땡볕을 받으면서도 죽어라 검술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김독자가 유중혁을 위해 세워둔 마법 목각 인형이 끊임없이 연습용 목검에 패였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하던 도중이었다. 이마에 땀은 송골송골 맺히고, 등은 흠뻑 젖어 간지럽게 옷감이 달라붙은 채였다. 진이 빠지고 불쾌할 때도 되었지만, 꾸준한 연습 덕인지 유중혁은 그렇게 힘들다고 느끼진 못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이제 굳은살이 박인 손은 더 이상 물집조차 잡히지 않았다. 혼자서 인형만 냅다 패는 게 실전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는 종종 유중혁이 연습하는 걸 보러 와선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곤 흐뭇하게 웃으며 돌아가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몇천 년을 산 마왕을 웃게 한 실력이라면(비웃음이 아니었다면) 제법 괜찮은 게 아닐까?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십삼 년간 마왕과 산 유중혁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

사실 인형이 아닌 김독자가 유중혁을 상대해주었다면 일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유중혁은 항상 김독자가 검술 상대를 해주길 바랐지만, 김독자는 손을 내저었다. 분명히 마왕이니까 싸움을 못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허여멀건 해서 겉보기에 비실대 보이는 김독자가 누군가와 전투를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몇 천 년이 되는 세월에 몸 쓰는 법 하날 안 배웠을 리가 없었다. 고작 사 년쯤 검을 배운 유중혁에게 김독자가 치명상을 입을 리도 없었다. 유중혁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가도, 서가에서 김독자와 책을 읽다가도, 산책하다가도 김독자에게 넌지시 대련 요구를 던졌다. 그때마다 김독자는 싫다 소리뿐이었다.

유중혁이 그렇게까지 요청하는데도 김독자가 거부한 일은 처음이었다. 유중혁은 자존심이 좀 상했다. 검술을 더 가르쳐주지도 않을 거면 외부에서 인간 선생이라도 포섭해줘야 할 게 아닌가? 유중혁은 처음으로 성 밖에 나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졌다. 당시엔 깨닫지 못했지만, 김독자가 유중혁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적이 유중혁 인생에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유중혁은 서가에서 인간에 관한 책들만 잔뜩 골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특히 실제 인간들의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과 생활상을 상세히 묘사한 종류의 책만을 골라 읽었다. 유중혁이 검술 연습을 줄이고는 다시 책만 읽기 시작하자, 김독자는 괜히 책을 읽는 유중혁 곁을 기웃거렸다. 유중혁이 읽는 책 표지를 본 김독자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책에 집중한 유중혁은 알 수 없었다.

김독자가 갑자기 답을 한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유중혁이 바깥세상을 꿈꾸기 시작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김독자는 괜시리 유중혁 옆을 기웃거렸다.

특히 인간 세상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책을 아예 키처럼 쌓아두고 읽을 때 제일 많이 왔다 갔다 했다. 별일도 없으면서 서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통에, 유중혁은 종종 책을 덮고는 읽을 거 없으면 좀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삼사 년간 혼자 검술 연습을 하든 말든 내버려 둘 때는 언제고? 유중혁은 배알이 꼴렸으나 일부러 김독자를 그냥 놔뒀다. 김독자가 그렇게 자기 눈치를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놈의 ‘사춘기’ 때도 그런 적이 없었다. 솔직히 조금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못한다 못한다 염불을 외며 유중혁의 요청을 다 쳐내던 김독자는, 어느 날 두 손을 들고 뜬금없는 말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시기는 별로 적절치 못했다. 유중혁이 더 이상 김독자한테 검술 대련 상대가 되어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인세에 관한 책만 몇 달째 들입다 파던 때였기 때문이다. 다만,

야, 사실 나 니 검술 대련 상대는 못 하는 저주에 걸렸거든.

김독자가 꺼낸 내용이 너무 뜬금없는지라 유중혁은 통쾌하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저주는 마왕이 당하는 쪽이 아니라 거는 쪽 아닌가? 유중혁은 생각했다.

헛소리 마라.

아니 진짜야. 너 스무 살 되기 전에 널 공격하면 깩하고 죽어버릴지도 몰라.

무슨 헛소리인가.

아니면 천사님한테 엄~청 혼나거나.

천사는 무슨 동화 같은 소리냐, 유중혁은 되묻고 싶었지만, 마왕이랑 같이 사는 사이에 천사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도 웃기긴 했다. 믿기지 않는 소리긴 했으나, 김독자는 예전에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너 저 책들 절대 읽으면 안 돼. 저거 펼치면 저 속에서 손이 쑥! 나와서, 너 끌고 간다? 그걸 일종의 겁주기라고 생각했던 여덟 살의 유중혁은 실제로 그 책을 펼치고 피범벅의 손들을 보고 기절했었다. 되짚어보면 김독자는 필요 없는 위협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안 진지하게 들려도 진실일 가능성도 있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저주인지, 혹시 그것이 자신의 등의 문신이라거나, 저주받았다고 쑥덕거려진 것과 관계가 있는지 유중혁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마치 장난을 건 것처럼 말하고는 헤실거리며 도망가 버렸다. 퍼뜩, 유중혁은 깨달았다. 거짓말을 말한 건 아니지만,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대련은 물 건너갔고, 확실히 유중혁이 사람을 상대로 무언가를 연습하려면 마왕성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김독자가 그 일을 막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유중혁은 생각했다. 마왕성과 인간 마을 쪽 거리는 굉장히 멀었다. 아주 먼 길이 될 것이다. 김독자가 부리는 강아지(?)와 비슷한 말(?)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런 걸 타고 가면 금방이겠지만, 가자마자 공격당하겠지. 걷자면 아주 긴 시간을 잡고 여행 계획을 짜야만 했다. 그러면 아마 김독자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 성에 남겨질 것이다. 김독자랑 같이 나가자고 해 볼까? 아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김독자가 인간 근처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마물이 되는 인간이 많아진다고 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중혁은 인간 마을과의 거리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기 위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억을 끌어당겨 모았다. 그러나 가슴이 자꾸 아니라는 말을 했다. 아니, 아니다. 여기엔 김독자가 있었다. 유중혁은 여기서 떠나지 않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도대체 그가 어떻게 김독자를 놔두고 떠날 수 있겠는가?

유중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도 해 본 적이 있는 생각이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을 할 때면 유중혁은 아주아주 작아져서 아주 평범한 인간이 되었고……. 김독자는 너무너무 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마왕이 되어버렸다.

김독자는 정말 마왕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유중혁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존재하기에 나가기를 포기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은 기왕이면 김독자와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도 그렇기를, 마음속으로 오래오래 빌었다.





열아홉 살 성인이 된 여름. 유중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러니까……김독자랑.

유중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김독자랑 키스도 했다. 그러니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멋이 없게 키스를 한 날에 곧바로 섹스까지 나가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키스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은 아주 별 것 없는 대화들이었다.

구름이 많이 꼈어, 내일은 비가 오겠다. 내일 뒷뜰에는 못 나가겠네. 성 안에 인형 만들어줄까?

아니, 됐다. 이제 인형은 별로 소용없는 것 같다.

우리 중혁이 장하네. 그럼 아마 나도 필요 없을걸?

필요하다. 도대체 상대가 없는 연습이 말이 되기나 하나?

중혁아, 세상의 모든 건 혼자 할 수 있어.

혼자?

그 순간 왜 그렇게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순간 욱하는 감정에 입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유중혁이 그 말을 뱉은 것은 실수였다.

―너는 혼자 잘 살 수 있어서 나를 데려왔나?

김독자의 몸이 덜컥 멈추는 순간을, 유중혁은 기억했다.

…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말에 담긴 힘이 없었다. 유중혁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김독자에게 크게 한 방을 먹인 것을 깨달았다. 기왕이면 검으로 먹이고 싶었는데, 이런 방식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김독자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빨개진 얼굴로, 아주 침착하게―본인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군말을 덧붙이곤 힘없이 웃었다.

너 아직도 사춘기냐.

유중혁은 그제야 자신이 그놈의 ‘사춘기’때부터 꾸준히 김독자에게 화가 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금 화가 났다.

사춘기? 김독자 너는 내 감정이 고작 그런 거로 보여?

그럼, 아니면 뭔데. 야 니가 나한테 근 몇 년간 성질부려오고 틱틱대던 거 죄다 인간 백과에 나온 그런 전형적인…….

김독자!

유중혁은 김독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당황한 얼굴이 코앞까지 딸려오며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김독자가 기어이 뱉지 말아야 할 뒷말을 뱉었다.

…너, 왜, 그러는데?

유중혁은 그냥 입술로 그 입을 막아 버렸다. 처음 시도한 키스는 거칠었고, 몇 초 되지도 않아 김독자가 밀어내는 손길에 막혀 그마저도 허무하게 끝났다. 유중혁은 당황한 김독자의 얼굴을 보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야? 김독자……너는 아닌가?

유중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너는, 너도……

…너도 내가 필요하잖아!

김독자의 멱살을 잡은 채로, 유중혁의 두 다리가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꼴사납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머릿속에는 못다 한 말만 구구절절 맴돌고 있었다. 나는 네가 필요한데, 나는 너 때문에 바깥세상도 포기하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너를…….

깊은 침묵 사이로 히끅임만 몇 어절이 쌓였다. 유중혁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기에 김독자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도저히 볼 자신이 없었다.

…중혁아, 울지 마…….

말이 부드러웠던가, 아니면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던가. 유중혁은 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별로 정신이 없었다. 말한 직후의 김독자가 그대로 유중혁의 등을 토닥이다가…다시 입을 맞췄기 때문인 것 같았다. 뒤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상의를 벗기고 하의까지 벗기던 순간 김독자가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것도 같았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사랑한 걸 후회할 일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고, 김독자는 막지 않았다.

대신, 김독자는 관계를 마친 후 무엇을 생각했는지 방 밖으로 나가서 조금 울었다. 문을 열고 나온 유중혁은 그걸 보며 순간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김독자가 싫어했을까? 역시 늘 해왔던 생각처럼 유중혁이 요구했기에 그저 김독자가 받아들인 거였을까? 혼란이 깊어지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온몸에 덕지덕지 유중혁의 손자국을 단 채로, 김독자는 유중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유중혁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이 대답해주었다.

거절할 생각 없었어. …내가 바랐던 적이 있었지.

바랐던 ‘적’이 있었다고?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면 김독자는 대체 왜 울었을까. 유중혁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그저…버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다음 날부터 김독자는 어제가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둘의 감각은 삐걱댔지만, 시간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둘은 그 이후로도 서너 번 더 관계를 했지만, 항상 다음 날이 되면 김독자는 잠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함구했다. 유중혁은 그 모든 태도에 불만이 쌓였으나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유중혁은 도무지 김독자가 자신을 성애적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확답을 요구하기엔 무서웠다. 그리고 김독자는, 유중혁의 열아홉 살이 끝나던 겨울부터 섹스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 사이는 다시 예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유중혁은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기어이 김독자를 기억해냈다.


기억해내지 말았어야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의 몸을 갈라 심장을 꺼내 드는 장면을 기억해냈다.

처음에는 그것이 꿈인 줄 알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자기가 잠이 들어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리 파편 같은 기억들이 날아들어서 계속 뇌 속을 채우려는 바람에 머리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 속에서 유중혁은 방금 자신이 본 장면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김독자가…김독자가 유중혁의 가슴과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드는 장면이 무엇이었던가를.

그 장면을 대체 뭐라고 명명해야 하는가? 유중혁은 그 기억에 악몽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애를 썼다. 머릿속이 나방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부산했다. 그러나 꿈인가보다 하면 할수록 심장이 아팠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의 상반신을 세로로 갈라 심장을 집어드는 장면을 똑똑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김독자의 손에서 피범벅으로 펄떡펄떡 뛰던 자신의 심장을 기억했다. 돌려달라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그 어느 스물여덟 살의 자신을, 마왕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자신을 김독자가 무자비하게 찢어발겼던 기억. 그리고 쓰러져 헐떡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있다가…소름 끼치게 웃는 김독자.

그런 참으로 이상한 기억, 아니 참으로 이상한……

…기억‘들’?

유중혁은 제 양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머리칼을 손으로 쥐어뜯었지만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아니,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도 좋았다. 두통이 계속되어도 좋으니 이 빌어먹을 이미지만 누가 머릿속에서 도려내 가주면 좋다 싶었다. 유중혁은 제 검을 들어서 자기 머리를 파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김독자가 자신을 죽인 기억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한 번은 배를 통째로 갈라 내장을 들어내었고, 한 번은 간단히 머리와 몸을 분리했다. 한 번은 마왕의 이상하리만치 긴 손톱이 눈을 꿰뚫었다. 아니, 어딜 어떻게 뚫고 찢고 파괴하여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유중혁은 아홉 번의 죽음을 겪었고, 그 아홉 번 모두 다 김독자는 한결같이 유중혁을 죽이면서 웃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서 어쩌니. 네 가족이 어디 살았더라. 덕분에 고마웠어, 즐거웠어. 오랜만에 나도 인간 세상에 좀 나가 볼게. 네 가족부터 손가락 마디마디 썰어서 찢어 죽일 테니까 지옥에서 만나렴. 그러니까, 아, 중혁아,

나를 증오해줘.

거기서 기억이 멈추기를 바랐다. 유중혁은 그런 말들이 거짓말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김독자한테 찾아가서 왜 그랬냐고,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보고 나서 사과를 받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유중혁은 기어이 더 기억해냈다.

유중혁은 되살아나 환생할 때마다 기억해내고 있었다. 이전의 자신이 태어났던 지역을, 따뜻했던 부모님과 상냥했던 마을 사람들을. 스무 살이 되어 기억을 모두 되찾으면, 유중혁은 어김없이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황량한 폐허를 마주했다. 몇십 년 만에 가더라도 피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폐허들이었다. 유중혁은 수소문 끝에 제가 사랑했던 자리들의 종막을 알 수 있었다. 소문은 참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토막난 마을 사람들과 광장에 피로 가득 찬 분수대, 그리고 살아 있는 채로 장기가 꺼내졌다던…부모님.

마왕이 했던 말은 예언이었고, 사실이었다.

유중혁은 마왕을 증오하게 되었다.




유중혁이 검을 쥐고 나온 것은 충동이었다. 유중혁은 처음에, 끔찍한 두통 때문에, 여차하면 자신의 머리를 파내버리기 위해서라도 검을 집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로 검을 쥔 채 방문을 박차고 나가, 복도를 달려가서, 로비 의자에 앉아있는 마왕을 보자, 유중혁은 순간 자신이 왜 검을 들고 나왔는지 깨달았다.

너…….

숨을 헐떡거리던 유중혁이 부르자 마왕이 웃으며 고개를 돌아보았다. 순간, 유중혁의 전신에 엄청난 공포와 혐오감이 함께 엄습했다. 그때부터 유중혁은 너무나 이상하게 마왕이 싫어졌다. 기억 때문에? 고작 그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기억 때문에? 그리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가 식은땀이 배기 시작했다. ‘저것’은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었고, ‘저것’은 언제든지 자신을 갖고 놀 수 있었다. ‘저것’은 언제든지 나를…….

…왜 나를 죽였어?

유중혁이 입을 열자마자 성안에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왕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유중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유중혁은 차라리 영원히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모든 게 사라지면 아침이나 같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전신에 깃드는 두려움과 혐오감이 그 모든 바람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마왕은 여전히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런데……,

…기억했어?

김독자가, 아니 마왕이, 웃기 시작했다.

너 정말 스무 살이 되었구나, 유중혁?

그 말을 듣자마자 유중혁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로 열이 확 쏠리면서 어지러웠다.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왜? 대체 무슨 이유로? 유중혁은 횡설수설하면서 추궁을 쏟아냈다. 혼란에 뒤엉켜 말은 이어지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마왕은 그 모든 말을 듣지도 않고 한 마디로, 간단히 끊어버렸다.

멍청한 새끼.

뭐?

넌 대체 지금까지 ‘마왕’을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유중혁이 단연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던 목소리였다. 마왕은 세상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하등한 생물을 바라보는 눈길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이 단 한 번도 그에게서 받아본 적이 없던 눈빛이었다. 유중혁의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며 목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왕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마왕이 자신의 ‘애완견’에게 지어주는 웃음도 그것보단 부드러울 터였다. 유중혁은 더 참을 수가 없어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가 엎어졌다. 유중혁은 그대로 마왕의 멱살을 쥐고 바닥에 패대기쳐 깔아뭉갰다. 마왕은 아프지도 않은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미친 듯한 웃음이었다. 유중혁은 우는데 마왕은 웃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었다, 마왕은, 마왕은, 마왕은, 아니, ■■■는…

…대체 너는 나를…!

잘 즐겼지.

마왕이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네 덕분에 즐거웠어. 너 같은 장난감은 처음이었고.

…….

뭘 기대했어?

할 말은 잃은 유중혁의 귓가로 마왕의 신랄한 빈정거림이 떨어졌다.

사랑한다는 말?

유중혁은 검을 빼어들었다. 누가 봐도 알아볼 만큼 검신이 선명하게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검에 반사되는 불빛이, 손의 떨림에 따라 난잡하게 반사되며 로비 벽에서 무수히 많은 빛의 단면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칼날 끝에 마왕의 목덜미가 있었다. 떨림 때문에 미세하게 그어지는 생채기 사이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왕은 그런 유중혁을 올려다보다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중혁아, 죽이고 싶으면, 죽여 봐.

…….

못 하지?

유중혁의 손에서 천천히, 그리고 비스듬히 검이 떨어졌다. 허무하게 목을 비껴간 검이 뎅강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몇 번을 굴렀다. 마왕이 빈정거렸다.

못 하면 죽일 수 있을 때 다시 찾아오던가.

그리고 딱, 하고 마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마왕성에서 유중혁이라는 한 인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중혁은, 어느 한 마을의 들판에서 눈을 떴다. 유중혁은 한참 후에야 그곳이 마왕성에서 굉장히 떨어진 어느 평화로운 인간 마을이라는 것을 알았다. 유중혁은 지난 기억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그리고 유중혁은 마왕의 예언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용사는, 제일 먼저 자신이 쥘 검부터 찾기 시작했다.

인간이 사라진 마왕성은 조용했고 지루했다. 또다시 찾아온 고루한 정적과 부재를 받아들이며 김독자는 서가에서 책을 하나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 언젠가 글자를 처음 읽게 된 유중혁에게 사준 첫 동화책이었다. 책 제목은, [용사와 공주님]. 진부하고 간단했다. 용사는 험난한 모험 끝에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못된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한다. 그리고 나라에서 큰 상을 받고 명예를 얻으며 공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김독자는 책을 덮었다. 그렇게 유중혁이 용사가 된 첫 날이 시작되었다.

김독자는 삼천 년이 넘게 산 마왕이었다. 시간의 흐름에는 아주 익숙했다. 하루를 일 년 같이 보낼 수도 있었고, 일 년을 하루같이 보낼 수도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김독자는, 하루를 일 년 같이 보내보기로 했다.

28세가 된 유중혁이 자신을 찾아오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아주 긴 시간을 그렇게 보내기로 했다. 하루, 일 년. 그렇게 삼백육십오 년이 지났다. 딱히 큰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삼백육십오 년이 지나고, 도합 칠백 삼십 년이 지나자 영역 가장자리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마왕성의 근거지와 영토를 맞댄 나라들이 전쟁을 통해 통일을 한 것 같았다. 그들은 군대를 모았고 또 주변의 위험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기를 바랐다. 진부한 레퍼토리였다.

김독자는 또다시 그렇게 혼자서 삼백육십오 년을 더 보냈다. 인간들의 삼 년이 지나고, 김독자는 그동안 천 년 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딱 천 년 정도를 보내고 나자,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이 금쪽같이 키워 내놓은 마물들이 꽤 많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인간의 땅에 들어가 인간을 괴롭히길 허락한 적은 없었으나 마왕성의 영토에 넘어오면 인간을 공격하도록 해 놓았다. 그런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제국이 사냥을 시작했다는 신호다. 김독자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천 년간 질리게도 반복해온 이야기이다. 스타스트림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낡은 레파토리를 지들끼리 좋다고 반복하고 질리도록 씹어 먹는다. 김독자는 이골을 내며 읽던 책을 집어 던졌다.

다시 삼백육십오 년이 지났다. 또 삼백육십오 년이 지났다. 김독자는 두 번의 겨울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때부터는 색다른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국에 혜성같이 나타난 어떤 실력 좋은 젊은 장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주변의 마물들을 쓸어버리며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중혁이가 이제 스물다섯이던가. 제법 열이 많이 받았나 보다. 이번에는 빨라도 상당히 빨랐다. 김독자는 손가락을 세어 앞으로 자신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를 생각해보고, 치치와 포포를 불렀다. 그들은 나름의 애교로 무수히 많은 촉수들과 다리들을 흔들면서 재빨리 기어왔다.

얘들아.

그것들이 끼잉거리는 소리로 화답했다.

지금부터 너네 친구 만들러 가자.




유중혁의 등장으로 활기를 띠었던 마물 소탕 작전은 잠시 주춤했다. 마왕이 활동을 재개한 탓이다. 지금까지 거의 몇십 년 동안 아무 움직임이 없던 마왕이기에 이번에도 그럴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분명 마물을 소탕했었던 지역에서 다시 마물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촉수를 내뻗고, 다리들을 흔들며, 빨판으로 흙 위에서 굼실거렸다. 군대는 진군을 하다가 후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제국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모든 현상은 마왕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할 정도로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대신들은 강력하게 진군을 원했고, 마물들이 소탕되어 쓸만한 경작지가 늘어난 도시들과 마을들도 힘을 보탰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전투를 반복했다. 베다 보니 처음에는 징그러웠던 마물들의 모습이나, 베는 감촉도 좀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그것들을 베면서 치치와 포포라는 이름을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잊었다.

그렇게 삼 년.

글쎄. 삼 년이 맞았던가. 유중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로 오래 전쟁을 지속했다면 잠시 쉬겠다는 말이라도 나올 법한데, 유중혁은 마왕성으로 진군하길 개의치 않았다. 왕실에서는 저의를 의심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큰 공을 세워서 이목을 받으려는 속셈이 아닌가? 그러나 유중혁이 그 삼 년간, 단 한 번도 수도로 돌아오지 않고 잠시도 쉬지 않고 진군하는 꼴을 본 대신들도 이내 험담을 줄였다. 왕은 만족했다. 유중혁은 철저히 권력에 관심 없이 마물 소탕에 미친 놈이었다. 그 소문의 크기와는 다르게 유중혁의 얼굴조차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국민의 대다수였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시대에 마왕성을 정복하는 하나의 신화가 쓰일 것이라는 기대에 벅차올랐다. 제국은, 계속 그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싸움에도 끝은 기어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마왕성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병사들은 축배를 들었다. 술을 마셔라 부어라 간소한 연회가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마신 것은 단연 총사령관의 위치에 있었던 유중혁이었다. 병사들은 처음 보는 상관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삼 년간 성실하게도 삶의 목표를 마왕성으로 잡아 왔던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그렇게 한 번 망가져 주니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부관은 완전히 술에 취해 쓰러져버린 총사령관을 둘러업고 조용히 막사에 눕혔다. 다음날, 총사령관은 어김없이 일어나 다시 진군을 명령했다.


삼 년,

유중혁은 정확히 스물여덟에 마왕성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되었다.

아주 좋은 상황은 아니긴 했다.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마물들의 종류는 위협적이고, 흉포하고, 끔찍하게 변했다. 병사들 모두가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유중혁을 지켰다. 어떤 점액질에 살이 녹고 촉수에 심장이 꿰뚫려도 유중혁이 죽는 것만은 막았다. 이미 삼 년을 넘게 함께한 병사들에게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유중혁이 정말로 마왕을 잡을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졌던 마지막 병사, 그의 심장을 꿰뚫은 마물 두 마리를 유중혁은 한 번에 베었다. 그 두 마리가 마왕성을 지키던 최후의 마물이었다. 유중혁은 어쩐지 그 둘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아니, 사실 유중혁은 그것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뭘 좋아하고 어떻게 놀아주면 기뻐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놀아주는…아니, 아니다. 유중혁은 그런 것들을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유중혁은 전멸한 병사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죽은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시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새겼다. 그리고 그 숫자만큼 증오를 불태우며, 성의 문을 열었다.

성은 정말 그 크기에 비해 황량하게 아무도 없었다. 유중혁은 그것이 익히 익숙한 정겨운 풍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용사는 마음속에서 ‘정겨운’이라는 수식어를 철저하게 지우고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유중혁은 이 복도를 지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앞으로 쭉 걸어가서, 오른쪽 앞에서 세 번째 방문을 지나,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면,

돌면, 거기에, 누군가가 손톱으로 긁은 듯이 돌 자국마다 새겨놓은 긴 자국들이 있었다. 유중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국들 중 그 어디에도 키가 맞지 않게 커버린 유중혁은 무심히 그 자국들을 지나쳐서 전진했다. 유중혁은 ■■■가 키를 재어주던 용사는 한때 알았던 흔적을 지나 그대로 전진했다. 유중혁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하고, 로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로비 한가운데에 어떤 사내가 있었다.

허여멀건 해서는, 이 커다란 성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마르고, 그리고 아주 반가운 증오스러운……

…마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용사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인간 마을에 나갔던 유중혁은 자신의 첫 검을 구하자마자 곧바로 검술을 배울 수 있는 스승을 찾아갔고, 자세가 엉망이라며 검 쥐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질은 뛰어나다 칭찬을 받았다. 그래도 고쳐야만 하는 자세라는 게 있었다. 말인즉슨 유중혁은 마치 난도질을 하듯 검을 휘두른다고, 스승이 말했는데…….

용사는 자신이 마왕을 향해 그저 난도질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검격은 마왕에게 간신히 닿기도 했고, 닿지 않기도 했다. 피가 좀 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마왕을 본 순간부터 유중혁의 손길에는 대중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배웠던 기억을 되살리는 그동안 배웠던 것을 모두 까먹은 것처럼. 유중혁은 용사는 그것이 자신이 미련이 남았기긴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 번, 난잡하게 휘두른 검날 끝에 스걱, 하고 마왕의 살점이 조금 베였다. 마왕의 얼굴에서도, 팔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사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오랜 전투로 피곤해진 몸은 지쳐가고 있었다. 빨리 끝내야 했다. 빨리 저 펼친 날개를 잡아 꺾어버리거나 아니면 심장을 칼로 뚫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했다. 용사는 마왕이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을 때 오른쪽 다리를 절룩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용사는 주저 없이 마왕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아!

잡았다. 검 끝에 무언가 걸렸다. 용사는 손끝에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살덩이에 밀려나는 반동을 느끼며 속으로 비명을쾌재를 불렀다. 앞에서 피가 튀어 올라 시야를 가렸다. 용사는 마왕의 몸에 무자비하게 검을 쑤셔 박았다.


김독자는 자신의 다리를 자르고 지나가는 칼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엘을 생각했다. 근 8년간의 김독자의 기준으로, 이천 구백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천 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우리엘이 김독자를 직접 부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안과 별개로 김독자는 몇 안 되는 익숙한 얼굴을 보아서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이네요, 우리엘.

오랜만이야, 독자.

몇천 년을 사는 존재들끼리 할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인사했다. 김독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반대로 우리엘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마왕 네가 회귀자를 직접 키우고 있다고.

우리엘, 저는 규정을 지켰습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회귀자한테 어떤 손도 대지 않았어요. 공격한 적이 없습니다. 도우면 도왔지.

우리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김독자가 웃었다.

말했잖아요. 저는 그 회귀자를 꽤 좋아합니다.

이번이 열 번째 회귀야. 알고 있지?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 말린다고, 우리엘은 생각했다. 개연성에 위배되는 짓은 안 했을 테니 김독자가 멀쩡하긴 했겠지만, 설마 마왕이 직접 용사를 키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법 천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우리엘은 김독자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마왕치고는 제법 우습고 특이한 종자였다. 김독자는 항상 스타스트림의 개연성을 채워줄 정도로만 ‘마왕의 일’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왕으로서, 세상의 선악의 밸런스가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인을 했고, 병을 일으켰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김독자가 마왕으로 있는 동안이 인간들에게 마왕의 피해가 가장 적었을 때였다. 꼴에 선한 척 한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가브리엘이었던가? 대다수는 비꼬았지만, 생전 마왕에게 ‘선’의 수식어를 붙일 일 없던 천사들이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로 김독자의 존재는 의미가 있었다.

어쨌든 이제 용사는 마지막 회귀를 했고…

우리엘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회귀자의 영혼은 그 난이도가 어려운 만큼, 회귀자를 죽인 마왕은 영생을 산다.

…축하해. 이제 넌 영생을 살겠구나.

김독자는 우리엘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답이 이르기까지 정적이 길다.

……그러게요.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번이 유중혁의 열 번째 회귀였다. 열 번째가 끝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유중혁이 김독자를 죽여야 한다. 안 그러면 유중혁은 소멸한다.

우리엘은 물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회귀자랑 가깝게 지내보니 어땠어?

김독자는 부자연스럽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최악이던데요.

우리엘은 그 말이 거짓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타스트림 세계에서는 종종 모든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참 쓸모없는 억지력이 작용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개연성이라고 불렀다. 김독자는 그 모든 시스템이 정말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으나, 김독자처럼 강하면 강한 존재일수록 개연성에 얽매이는 정도는 더 심해졌다.

마왕은 천 년마다 한 번씩 자신을 물리칠 용사의 영혼을 직접 선택해야 했다. 준비된 영혼은 한결같이 잘 자라기만 한다면 자라서 충분히 마왕을 물리칠 용사가 될 만한 자질이 있는 아이들이었고, 그중에 한 명을 고르면 마왕은 그가 20살이 될 때까지 그에게 그 어떤 물리적 행사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이 할 수 없었다, 이지 개연성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짓이라면 어떤 짓도 가능했다. 대부분의 마왕들은 용사가 자라는 도시를 추적해 그 도시로 통하는 물자를 끊거나, 그곳과 맞닿아 있는 곳들의 마물을 흉포하게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게 한다거나, 근방의 다른 나라를 악하게 물들여 용사가 사는 곳에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게 했다. 마왕이 적당히 수완만 좋으면 지역을 경제적으로 조종할 수도 있었고 물리적으로도 압박할 수 있었으니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대놓고 2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공물로 내놓아 알아서 죽이라고 요구하거나, 반대로 불길한 것을 타고 난 마왕의 자식이 도시에 태어날 것이니 그가 파멸을 몰고 오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거짓 신탁을 퍼뜨려도 좋을 터였다.

그러나 김독자는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너무 재미없었고, 비인간적이었다. 마왕인 김독자가 ‘비인간적임’을 이유로 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는 삶이 재미가 없었다. 인간을 죽이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암흑의 존재들과도 교류하고 싶지 않았다. 김독자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책을 읽거나,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거나, 텃밭에서 상추를 기르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걸 해도 삶이 재미가 없었다. 몇천 년을 살아야 하는 삶에서 그 일만으론 모든 게 충분하지가 못했다.


마왕이 하기에 웃긴 말이었지만 김독자에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김독자는 자신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이름붙일 수는 없었다. 인간들과 친구가 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설명해야 했고, 설명하고 나서 적대 받지 않아야 했고, 그리고 한 달을 넘기면 안 되었다. 마물화가 진행될지도 모르는 위험까지 곧이곧대로 말하면서 한 달만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사치였다.

김독자는 마물화되지 않는 인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일하게 존재하는 인간이 딱 한 명 있긴 했다.

용사들.

용사들은 마물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선택된 존재들은 그런 마왕의 권능에서 일체 제외되어, 순수하게 전투 능력으로만 합을 가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만, ‘친구’로는 완벽한 조건이 아니었다. 용사들은 모두 스무 살이 넘으면 마왕을 죽이려고 마음먹기 시작했고, 마왕을 죽이려고 찾아왔다.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상대에게 차 한 잔을 권유하기는 마왕이라도 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을 싸움에서 제압하여 살려 놓으면 그들은 다시 김독자를 죽이려 들었고, 죽이면 그냥 죽었다. 인간의 생명은 빌어먹게도 유한했다.

몇십몇백 년이 넘게 지나야 만나는 딱 한 번의 만남. 그래도 김독자는 그 만남 한 번이라도 즐겁길 바랐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물리칠 용사의 영혼을 고를 때면 제 입양할 아이라도 고르는 듯이 신중하게 굴었다. 우리엘은 그의 그런 기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왕들에게 용사의 영혼을 주선해 주는 우리엘은, 항상 최선을 다해 영혼을 골랐다.

김독자가 용사의 영혼을 고르기 시작한 지 딱 세 번째 주기였다. 삼천 년 째, 김독자는 우리엘이 보여준 영혼들 중 유별나게 색이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다른 용사들처럼 색이 강렬하질 않고, 투명하고, 맑았고, 엄청나게 비어 있었다. 마치 그 안에 축적될 것이 참 많은, 아주 거대한 그릇 같았다.

이 영혼은 뭐죠?

우리엘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설명했다.

회귀자의 영혼이야. 지금껏 소멸한 마왕들은 대부분 회귀자의 영혼을 가진 용사한테 죽었지.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거든. 그 영혼의 경우 한 번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죽은 후 회귀하여 환생해. 그리고 성년이 되면 전생의 기억을 하나 둘 되찾기 시작하여 전생에 수련했던 힘까지 다 물려받지. 열 번 넘게는 회귀할 수 없지만, 회귀할수록 강해져서 보통 열 번째에는 어지간한 마왕들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되어버려. 대체로, 소멸한 마왕들은 회귀하는 용사를 우습게 본 케이스가 대다수지. 반대로 회귀자가 열 번을 회귀했는데, 마지막 열 번째 삶에서 마왕을 죽이지 못한다면……그 회귀자의 영혼은 산산이 조각나고.

설명을 듣는 동안 김독자의 눈빛이 변하는 걸 우리엘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는 얘로 할래요.

우리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굳이 성가신 것을 택하냐는 눈치였다. 김독자는 웃었다. 대답은 뻔했다.


나도 좀, 오래 사는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독자와 유중혁은 친구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김독자는 굳이 유중혁의 어린 시절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했고, 집안에서 적당한 보호와 함께 잘 자란 유중혁은 어김없이 자신의 운명을 따라 검을 배우고 마법을 연마하며 성인이 되었다. 그는 스무 살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정의감과 사명에 휩싸이고, 짓눌리면서, 동시에 지배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왕을 죽일 토대를 쌓기 시작한다. 김독자는 늘 유중혁의 탄생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고, 스무 번의 겨울이 지나면서부터 소문을 들었다. 자신의 관할 영역 가장자리에서부터, 자신이 기르고 키운 마물들을 잡아 죽이며 들어오는 용사의 소식을 들었다. 유중혁은 항상 김독자를 향해 착실히 나아와 주었고, 끝내는 김독자의 성안에 들어와서 외친다. 네놈이 마왕이냐? 김독자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목숨을 노리는 관계가 친구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종종 김독자는 유중혁이 자신의 목으로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꾹꾹 참아가면서 유중혁한테 말을 거는 상상을 했다.

중혁아 안녕. 우리 또 봤네.

중혁아 네가 오길 정말 기다렸어.

중혁아 지난 몇천 년간 내 친구들은 다 죽거나 소멸했거든.

중혁아 너는 그래도 아직 있네. 좋다.

중혁아 저번엔 내가 너무 외로워서 인간을 데려왔는데…….

중혁아 그 애는 나를 좋아했는데, 근데 걔도 날 못 버티더라.

중혁아 그래서 그 애를 집에 돌려보냈는데,

중혁아 글쎄, 그 애는 우리 집에 얼마 안 있었거든?

중혁아 근데, 걔를 이단심문관들이 잡아가서 처형해 버린 거 있지…….

중혁아 그래서 내가 걔네 있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

중혁아 나는 후회 안 해, 그래서 네가 여기 나를 잡으러 왔잖아.

중혁아 이번 생은 어땠어?

중혁아 너 이번 회차에는 검술을 좀 더 많이 연습했구나? 많이 나아졌네.

중혁아 이건 좀 아프다.

중혁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 중이야?

중혁아 너 역시 정말 잘생겼구나.

중혁아 그 잘생긴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마. 무서워.

중혁아 이번에도 너는 나를 싫어하니?

중혁아 이건 정말 많이 아파.

중혁아 너 실력 많이 올랐구나.

중혁아 아, 아, 이건 정말 아프다…….

김독자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고 또 걸었다. 유중혁이 들을 리가 없겠지만 김독자는 행복했다. 그리고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주 웃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입을 열고, 그 수많은 하고 싶던 말을 아끼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했다.

이렇게 되어서 어쩌니. 네 가족이 어디 살았더라. 덕분에 고마웠어, 즐거웠어. 오랜만에 나도 인간 세상에 좀 나가 볼게. 네 가족부터 손가락 마디마디 썰어서 찢어 죽일 테니까 지옥에서 만나렴. 아, 중혁아,


나를 증오해줘.


웃으면서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 만한 최소한의 일들을 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태생지를 찾아 쑥대밭으로 만들며 짧은 묵념을 했다. 회귀하여 다음 생에 태어난 유중혁은 자신이 살았던 곳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문을 들을 것이다. 용사가 마왕을 증오할 만한 기억이 늘면 늘수록 각성이 빨랐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기억을 하지 못하던 초반과 다르게 회차를 거듭할수록 유중혁은 더 빨리 각성했다. 유중혁은 그렇게, 자신의 매 삶마다 김독자를 찾아왔다. 스물여덟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자신과 칼을 맞댔다. 아끼던 인간들이 모두 죽고 또 죽어버리는 김독자로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해주는 존재는 없었다. 비록 유중혁은 늘 김독자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김독자는…….

…김독자로서는 그것도 좋았다.

김독자는 차라리 그것이 너무 행복했다. 겨울이 스물여덟 번 지날 때마다 딱 한 번 만날 수 있는 인간. 운명에 새겨져 절대 자신을 잊지 않고 계속 찾아올 사람. 죽은 후 십 년 또는 이십 년, 그리고 자라면서 이십 팔 년째 되는 해마다 나와 함께하는,

아, 중혁아,

내 유일한 친구.





그러니까 유중혁을 데려온 건 순전히 계획에 없던 일이긴 했다. 스타스트림의 개연성 문제도 있었고, 김독자는 유중혁과 오랜 친구가 되고 싶었지 아주 사적으로 연을 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괜히 얼굴이라도 익혔다가 유중혁에게 죽어버려도 곤란했고, 유중혁의 용사로서의 사명이 틀어져도 곤란했다. 그냥 김독자는 몇십 년마다 한 번씩 유중혁의 얼굴을 보면 그걸로 족했다. 비록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죽어버리면 영원히 소멸할 테니, 결국 늘 마지막은 김독자가 유중혁을 죽여야 했지만. 그리고 그의 심장을 터뜨릴 때 주저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애초에 그렇게 돌아가는 삶이었다. 유중혁이 몰라도 상관없었다. 김독자는 제 마음속의 유중혁과 놀며 살았다. 그 정도면 김독자는 충분했다. 만족 중이었다.

그러니까 어린 유중혁을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정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씨발, 그 새끼들이 우리 중혁이를 때리고 있었다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섯 살의 기절한 유중혁을 침대에 눕힌 김독자는 자기변명을 수만 가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완전 큰일 났다. 마왕이 마을을 몰살시키고 데려간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에야 다시 돌려보낼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커서 소문도 잦아들고 외모가 많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 딱 삼 년만.

김독자는 아이가 여덟 살쯤 될 때까지만 키우기로 했다. 인간 어린아이용 음식을 만드는 게 많이 어렵긴 했지만 못할 건 없는 일이었다. 성은 충분히 넓었고 자신에게는 돈도 물자도 충분히 많았다. 아이는 자주자주 김독자를 어려워했고 포포나 치치를 무서워했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김독자는 생애 처음으로―유중혁을 몇백 년째 만나서 알고 지내던 생애, 처음으로,

생애 처음으로 유중혁과 이야기하고,

생애 처음으로 유중혁과 밥을 먹고,

생애 처음으로 유중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생애 처음으로 유중혁의 포옹을 받았다.

그것은 일종의 황홀함이었다.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되었던, 절대로 관계를 쌓을 수 없었던 상대와의 첫 관계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새삼스러웠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쉬웠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변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이 유중혁의 마지막 회귀라는 것을,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열 번의 기회 중 아홉 번의 기회를 모두 아주 짧은, 한 번의 전투로 끝내버린 관계였다. 김독자는 자신이 오래도록 용사에게 아무 손도 대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개연성이 용서해주길 바랐다. 실제로 개연성이 작용하는 부분은 마왕이 스무 살이 되지 않는 용사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부분이었지, 반대의 케이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김독자는,

딱 삼 년만, 더, 유중혁과 같이 있기로 했다.

물론 그 삼 년 후에도 다시 새 변명을 줄줄 읊어댔음은 물론이였다. 애가 아직 어리니까. 열한 살이 뭘 알겠어? 이 마왕성에서 풍족하게 사는데 인간 마을 가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겠어? 중혁이는 아직 뭘 잘 모르잖아. 열한 살이면 고아원에서도 퇴출당하지 않을 나이라고. 김독자는 한참, 거울을 보면서 서너 시간을 중얼거린 뒤에야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중혁아, 밥 먹자.

그렇게 또 삼 년, 그렇게 또 삼 년, 그렇게 또. 유중혁의 스무 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김독자는 그런 사태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열아홉 살 때의 일 말이었다. 그대로 성적인 함의들을 속행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자기변명을 해도 입이 모자랐다. 김독자가 하다못해 제 애완마물들처럼 입이 삼십 개, 아니 삼백 개였더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 날, 김독자는 깨달았다.

아, 내가 실수했다.

김독자는 울며 생각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 유중혁의 영혼을 산산조각낼 순 없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여야만 했다.





다시 생각에서 빠져나왔을 땐, 이번엔 용사의 칼이 팔을 자르고 지나가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제야 웃었다. 아, 드디어. 머리에서 자꾸 피가 흘러내려서 눈을 뜨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도 자신에게도 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김독자는 별로 용사에게유중혁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프기는 너무 아팠다. 안 울기엔 조금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니, 이건 다른 고통인가? 김독자는 자신의 심장이 아픈 이유가 용사가 유중혁이 칼을 찔러넣어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잠시 고민했다. 서늘한 금속성의 것이 몸을 찢고 들어왔다. 아, 드디어.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용사를유중혁을 쳐다보았다. 피거품이 솟아올라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차라리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아, 중혁아, 나를…….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몇 번 입을 뻐끔대다 이내 피 한 움큼과 살점들을 뱉어냈다. 유중혁의 얼굴에서도 흘러 떨어 내려진 피가 김독자의 입에 흘러 들어갔다.


정신을 잃으면서 김독자는 그 맛에 대해서 생각했다. 유중혁의 피의 맛.

김독자는 어쩐지 그것이 비릿하기보단 좀…….


…좀 짠 것 같았다.




그렇게 용사가 마왕을 죽였다.

용사는유중혁은 드디어 마왕을김독자를 죽이고는

홀가분함을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니,



용사는유중혁은 드디어 마왕을 김독자를 죽이고는

홀가분함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사람들은 축배를 들었다. 돌아온 용사의 귀환에선 성대한 잔치가 이루어졌다. 대신들과 왕은 용사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부와 영예를 약속했다. 유중혁은 잔치에 참여하여 의례적인 말을 몇 마디 했고, 피곤하다는 간단한 이유를 들어 자신에게 준비된 훌륭한 대저택으로 돌아왔다. 하인들이 몰려와서 유중혁의 옷을 갈아입히고 편히 쉴 수 있게 침대에 눕혔다. 하루종일 제정신이 아니었던 유중혁은 그제야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웅웅 울렸다.


드디어 용사가 마왕을 죽였다!


아니, 아니었다. 용사가 마왕을 죽였다는 명제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당연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 말의 다른 변형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의 다른 진실은,

그 말의 다른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유중혁이 김독자를 죽였다.


유중혁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말이 성립할 수 있지? 어떻게? 유중혁은 검을 집어 들고, 강박적으로 물건을 때리고, 긋고, 부수기 시작했다. 소리에 놀란 하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용사의 첫 발작은 아주 작은 해프닝처럼 소문조차 되지 못하고 그렇게 피곤과 트라우마로 인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유중혁은 마무리 짓지 못한 생각을 매일 밤 계속했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여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용사가 아닌 유중혁은 죽고만 싶었다.


돌아온 유중혁은 성인聖人으로 추대되었다. 사람들은 용사에 대해 칭송했다. 비석을 새기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유중혁을 본 적도 없고 유중혁한테 잘 대해준 적도 없던 사람들이 유중혁이 자라난 마을을 찾아 성지로 만들었다. 그 도시에서 아주 옛날 유중혁이라는 아이를 학대하다가 마왕에게 죽은 사람들이나, 마왕에 의해 구출된 유중혁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20년 전쯤 용사를 죽이려는 마왕에 의해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중혁'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혼자서 수련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마왕을 잡은 유중혁은 사실 마왕성에서 자라나 마왕의 호의를 받으며 적당히 풍족하게 생활했다. 마왕을 잡은 유중혁은 사실 마왕에게 첫 검을 선물 받아서 수련을 시작했다. 마왕을 잡은 유중혁은……씨발!


마왕을 잡은 유중혁은, 마왕의 기사가,

김독자의 기사가 되려고 검을 연습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진짜 유중혁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 어디에도 진짜 유중혁과 김독자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불어 마왕에 관한 이야기도 부풀려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마왕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포악한 일을 저지른 적이 거의 없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이 있었던 마을에 대한 학살들은 그 본래 규모의 다섯 배 크기로 둔갑했다. 작은 시골 마을들은 갑자기 어떤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풍요롭고 비옥한 거대한 귀족의 영지가 되었다. 수천 년 전에 다른 마왕이 다른 지역에서 저지른 일조차도 마치 김독자가 저지른 일인 것처럼 끌어와 졌다. 음유시인들은 신이 나서 간악한 마왕의 횡포를 토로하는 노래를 만들어냈고, 어린아이들은 잠들기 전에 '구원의 마왕'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왔는지 들으며 벌벌 떨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곤, 얌전하게 잠든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김독자의 이야기는 없었다. 사람들은 아주 멋지고 선량하고 흠결 없는 용사와 사악하고 괘씸한 마왕만을 이야기했다.

그 모든 새빨간 거짓들.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그래서는 안 됐는데, 유중혁은 너무나도 간절히, 김독자가 보고 싶어졌다.


유중혁은 몇 번의 발작을 더 거쳤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몇 주와 몇 달이 지났다. 유중혁은 발작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물건 부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문득, 마왕성 안에 책으로 가득 차 있었던 서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이상 유중혁의 발작이 발작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유중혁은, 그 어느 날인가부터 발작이 시작되면 검이 아닌 깃펜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유중혁이 물건을 부수는 대신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용사는 글재주가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서툴게 이야기를 썼다. 이야기를 다 끝내고 제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다. 무얼 붙이든 너무 과하거나 왜곡된 것만 같았다. 크고 자극적인 제목일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은 마왕을 물리친 용사가 직접 쓴 책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얼마든지 책은 세간에 퍼진 마왕에 대한 이야기들을 뒤덮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수차례 고민한 끝에 가장 단순한 제목을 붙이고, 용사는 책을 마감했다.

마왕을 무찔렀던 성인이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용사가 직접 쓴, 마왕에 대한 책이 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책의 내용에 이상한 부분이 많다더라는 소문이 만연했다. 사람들이 책을 맘에 들어했는지 아닌지, 용사는 알 수 없었지만, 이단 심문관들이 그 책을 정말 싫어했다는 사실만큼은 무엇보다도 확실했다. 세상을 구한 용사에게 영예와 작위 대신 쌓인 마른 장작과 타오르는 화형 불을 주었으니, 분명 아주 마음에 안 든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는 알 수 없었지만―용사가 죽은 이후에도 알음알음 그 책은 잘만 퍼져나갔다.

사실 용사는, 마왕의 손에서 자라났고, 마왕을 ■■했었다더라…….

이야기가 너무 사실같이 않아 마치 어떤 전설처럼, 신화처럼, 민담처럼 그 내용은 알음알음 전해져 나갔지만, 책의 제목은 늘 똑같았다.

용사가 직접 붙였던, 바로 그 제목이었다.




[마왕 이야기]



end.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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