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43. 합격을 맞이하는 자세

44. 묘안




43. 합격을 맞이하는 자세


“고시원 짐은 언제 뺄 거야?”

유리가 운전을 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아무렴 어떨까. 적이 다가와 뺨을 내놓으래도 오늘은 기분 좋게 양쪽 다 내놓을 수 있었다. 적이 다가와 돈을 달래도 주머니에 양말까지 뒤집어 탈탈 털어 줄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정말이지, 모든 것이 가능한 날이었다.

“당장 뺄까? 빼박 합격이니까.”

유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천천히 웃음을 그치고 묻는다.

“합격 발표는 언제 나는데?”

“한 달쯤 걸리는 것 같던데.”

“천천히 하자.”

유리는 운전을 하면서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다리고 열망하던 것을 이뤄냈을 때의 심정이란, 상상 이상으로 황홀하고 짜릿했다. 

“창문 열어도 돼?”

내가 묻자 유리가 대신 창문을 열어주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시원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 저마다의 모습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각양각색의 건물 그리고, 달콤한 공기의 냄새. 남김없이 아름다웠다. 빠짐없이 향기로웠다. 내가 있는 모든 공간이 천국처럼만 느껴졌다. 

신호에 걸려 잠시 차가 멈춰선 동안, 유리의 손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창문에서 고개를 거두고 유리를 바라봤다.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그 손을 꽉 잡아주었다. 유리가 내 손을 조물거리면서 말했다.

“너 잘 되려고 그간 일들이 많았었나 봐.”

많아도 너무 많았지. 시험을 치고 나오면서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다.

“맞아. 미신 같은 거 안 믿는데, 이젠 그런 거 믿을 거 같아.”

“합격 기운도 있었다며.” 

“맞아, 그것도 그랬지!” 

합격운이란 게 정말로 머리 위에 떠 있었나 보다.

“그 점집 엄청 용하지? 너도 같이 가볼래?” 

유리가 손을 놓고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난 시험 안 치잖아.” 

“아 참, 그랬지.” 

신호가 바뀌고 유리가 다시 핸들을 잡았다. 운전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다 네 덕분이야.”

앞으로 향해있는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유리가 되묻는다.

“응?”

“네가 나 고시원에 남도록 노력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합격은 없었을 거야.”

유리가 내 얼굴을 짧게 쳐다본다. 다시 정면을 보면서 말한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뭐.”

코를 쳐들었다. 

“그렇긴 해. 놀았던 것 치고 이렇게 단기간에 합격하는 사람 절대 없을걸?”

“민들레 아직 안 죽었네.”

“푸흐흐흐.”

결국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어버렸다. 에헴, 기분이 좋아져서 턱 끝이 다 올라갔다. 그간 내가 제멋대로 굴었던 건 스펙도 돈도 빽도 없는 스물여덟 한 여자의 벼랑 끝에 몰린 자기 보호일 뿐이었다는 걸 유리가 알아줬으면 했다. 

나도 이제 너처럼 여유로울 수 있어. 악마여서 지옥에서 사는 게 아니야. 지옥에 살아서 악마가 되는 거지. 이제는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착한 들레가 될 수 있어.

“잘할게, 유리야.”

“지금도 잘하고 있어.”

유리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리는 늘 나를 비추는 깨끗한 거울 같다. 내가 멱살을 잡으면 저도 멱살을 잡고, 내가 다정하게 속삭이면 더욱 달콤한 말들로 속삭인다. 앞으로 유리와 함께 걸을 길들은, 모두 내 손에 달려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잘하긴 잘했지.”

멈출 줄을 모르는 자아도취에 유리는 못 말린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창문에는 행복한 듯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비쳐, 응? 차는 산이 아닌 낯선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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