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도마 위에 툭 떨어진 통통한 베이글 하나. 존의 손엔 빵칼이 들려 있었다. 왼손으로 베이글을 누르고 옆구리에 칼날을 문질러 두 조각낸 후, 토스터에 각각 한쪽씩 넣고 스위치를 내렸다. 냉장고 안에서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은 양상추와 일부분이 물렁해진 토마토 하나를 찾아내는 동안 팬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그 위에 얼른 베이컨 몇 줄을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지글지글 고소한 냄새가 죽은 것처럼 조용하던 플랫을 깨우고, 곧 토스터가 잘 구워진 베이글을 틱, 하고 셜록처럼 퉁명스럽게 뱉어냈다. 존은 베이글 반쪽을 도마 위에 놓고, 버터를 바르고, 양상추와, 베이컨, 얇게 자른 토마토를 쌓았다. 베이글 반쪽으로 뚜껑을 덮어 샌드위치를 완성한 후 이 빠진 접시에 올린 다음 베이글 하나를 더 잘라 토스터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한편에서는 커피포트가 투둑 투툭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부엌으로 내려온 존이 냉장고 조명 때문에 오만상을 쓰며 물을 마시고, 볼일이 끝나자마자 얼른 냉장고 문을 닫고, 몽롱한 머리로 어둠 속에 멍하니 서 있었던 오전 여섯 시.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 언제나 영업 중이지만 비싸게 물건을 파는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어쩔 수 없는 값을 주고 베이컨과 양귀비 씨앗 베이글을 산 후 플랫으로 돌아왔을 때는 여섯 시 반 정도. 푸르스름한 빛이 기웃거리는 거실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을 뿐, ‘요리’에 열중한 나머지 거실 소파에 누운 곱슬곱슬한 머리 하나가 동터오는 빛에 천천히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셜록이 오랜 침묵을 깨고 새벽의 기운에 잠겨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다 됐어?”


라고 물었을 때, 주머니로 손부터 뻗으며 소리 없이 경기를 일으킨 게 당연했다. 총이 만져지지 않아서 그가 느낀 찰나의 강렬한 절망감이란.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나서는 바로 마음을 놓았지만, 이미 입 모양으로는 험한 욕을 만든 후였다.


“놀랐잖아, 셜록 홈즈!”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시큰둥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안적으로 들고 있던 빵칼을 허탈이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짜증과 한숨으로 달랬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새벽 네 시쯤.”


셜록은 붉은 담요로 몸을 만 채 제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늘어져 있었다. 두 발목을 교차시켜 존의 소파에 걸치고서. 창밖에서 들어오는 서늘한 빛이 어지러운 책상과 디딜 수 있는 카펫과 셜록의 윤곽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아무렇게나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밑에서 눈을 감고 있는 셜록의 피부가 유난히 창백해 흡혈귀를 연상할 때, 그런 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셜록이 번쩍 눈을 떴다.


“배고파 죽겠어.”


긴 다리를 접어 내린 셜록은 담요 자락을 바닥에 끌며 비틀비틀 부엌으로 다가갔다. 더 정확히는 존이 만든 샌드위치를 향해.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거미 같은 손으로 샌드위치를 들고 한 입 크게 무는 셜록을 보며, 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서 식욕을 인정하는 발언을 들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셜록이 입을 우물거리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커피?”


예전 같았으면 제게 권하는 말로 오해했을 것이었다. 기다리는 셜록을 위해 존은 머그에 뜨거운 커피를 부었다. 찬장을 열고 양철통에서 직사각형 각설탕을 꺼내어 종이 포장지를 바스락 벗긴 후 커피 안에 퐁 떨어뜨려 티스푼으로 따각따각 젓고 있던 존은, 문득 자신이 언제 이렇게 길들여졌나 싶어 스푼 채로 셜록에게 머그를 들이밀었다. 덜 녹은 설탕을 알아서 저어 마시거나 스푼을 빼 마시거나 하리란 존의 예상과 달리, 셜록은 머그 안에서 굴러다니는 티스푼을 무시하고 입술부터 대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몸에 두른 담요가 떨어지지 않도록 겨드랑이 사이에 붙잡은 불편한 자세로 먹고 마시는 것이나, 티스푼이 볼을 찌르는 게 거슬리는 건 존뿐인 듯, 머그에서 입을 뗀 셜록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뜻밖의 발언에 존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자신의 머그에도 커피를 부었다. 토스터가 두 번째로 베이글을 튀어 올렸다. 금세 제 몫을 해치운 셜록은 존이 버터를 바르는 동안 꾸준한 시선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했다. 할 수 없이 베이컨을 끼워 넣은 존은 까만 양귀비 씨만 남은 손을 비벼 털어내며 놀리기나 했다.


“많이 발전했어, 음식 앞에서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도 보일 줄 알고.”

“말했잖아, 배고파 죽겠다고.”

“그러니까.”


셜록은 대답 없이 머그를 기울였다. 티스푼도 같이 기울어 그의 볼을 찌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존은 베이글을 한 개 더 갈라 토스터 안에 집어넣었다. 그것도 빤히 쳐다보는 꼴이 어쩐지 권하면 권하는 족족 받아먹을 것 같아서, ‘이건 내 거야’ 존이 못 박자 셜록은 머그 안에 코를 박은 채로 눈을 굴렸다. 드디어 커피 한 모금을 입술에 붙인 존이 가볍게 한숨을 쉬듯 물었다.


“불면증?”

“그래, 누구처럼.”


셜록이 눈을 깜빡거려 이번엔 존이 커피에 코를 박고 대답을 회피했다. 퀭한 존의 눈엔 실핏줄이 서 있었다. 여섯 시경, 존이 계단을 내려오는 태연한 속도가 어둠에 이미 익숙해진 시야를 가늠케 했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평소와는 달리 베개 자국 없이 푸석한 얼굴이 비쳤기에, 잠에서 깬 후 다시 잠들려고 뒤척였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이라고 셜록은 추측했다. 아무리 위험과 스릴을 즐기는 취미가 있어도 온몸에 폭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기억이 엄습하면 등골이 서늘하겠지.


물론 제 몸을 돌보는 것만큼이나 셜록도 챙기는 그라서, 문득 마주하는 시선에 답하듯, 셜록은 실험기구들 사이에 머그를 비집고 내려놓았다.


“난 완벽하게 괜찮아.”

“새벽 네 시부터 거실에서 새우잠을 자는 게?”

“꼭두새벽부터 바비큐 파티를 여는 채식주의자가 걱정할 일은 아닐걸.”


셜록의 지적에 잠깐 말문이 막힌 존도 샌드위치를 반쯤 먹어치우고 있는 그를 지적했다.


“지금 네가 하는 짓이 정상이라는 거야? 마지막 식사를 하는 사형수보다도 맛있게 먹고 있잖아?”

“나도 사람이니까.”


핀잔에 도리어 눈썹을 꿈틀이는 존을 보고 셜록이 입을 우물거리며 변명했다.


“내 뇌에서 감정을 처리하는 부분이 평소보다 더 쾌락적인 자극제를 탐하는 현상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진단한다면 할 말 없지만.”


존의 미간이 더 좁아 들었다.


“쾌락적인 자극제?”

“하아, 존. 이거 말이야. 맛이 있다고. 맛이 존재해. 맛있는 맛이 느껴지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뭐라고? 관자놀이에 총구라도 닿은 듯 억지로 뱉어낸 셜록의 말이 칭찬인지 의심스러워 존은 양 눈썹을 더 모았다. 이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나머지 감정이 자랄 공간을 챙겨 줄 틈이 없었다는 주장을 심장도 동정심도 없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데 써먹는다면 몰라도, 감정이란 게 저에게도 존재한다는 발언을 들을 줄이야. 그도 사람이니 식욕은 물론 성욕도 있겠지만 연관 짓기 어색한 건 전적으로 셜록 책임이다. 호소가 아니라 고문을 통한 자백처럼 느껴지는 어조에 도리어 존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차라리 농담으로 무마하기로 했다. 검지를 세워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양귀비 씨앗. 취했군.”

“이 정도 양으로는 어림도 없어.”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걸. 두 개 먹고 도핑에 걸린 사람도 있어. 네 몸이 마법을 부려서 블랙홀로 보내 버리는 게 아니라면 성분이 어디 안 가고 그 안에 있겠지. 쾌락도 물론…….”


존이 검지를 내려 셜록의 배를 가리키다가 헛기침으로 모든 짓을 그만두었다. 셜록이 코로 가볍게 비웃었다.


“두고 봐, 쾌락에 관해서라면 내가 너보다 잘 알아.”

“뭐?”

“고작 씨앗 몇 개로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일 정도라면 축복이지. 끌릴 때마다 가게에 가서 빵 봉지를 집어오기만 하면 되니까.”

“오, 그럼.”


그렇지. 토스터가 틱 하고 세 번째로 노릇한 베이글을 뱉어내자 존은 잡념을 블랙홀로 보내 버렸다.


“나보다 더 잘 아시겠지.”

“시간도 절약하고 돈도 굳고 말이야. 위험한 거래를 하느라 불필요한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고. 왜 가게에서 팔지 않는 거지? 제 몸 간수 못 하고 중독에 빠지는 나약한 인간들 때문에?”

“니코틴 패치를 세 개나 붙이는 사람들 말이로군?”


베이컨을 제외한 남은 재료를 긁어모아 샌드위치를 만들던 존이 빙긋 웃었다. 멈칫, 저작을 멈춘 셜록이 다시 우물거렸다. 여전히 티스푼이 돌아다니는 머그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도 새 둥지를 지어놓은 존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잠을 잘 때 많이 뒤척이는 편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추측일 뿐.


“네 말이 맞아.”


셜록이 머그 안에서 말했다. 보통은 듣기 반가운 대사였으나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은 존이었다.


“농담이야, 셜록. 니코틴 패치로……”

“내 안에 있다는 거. 어디 안 가고 말이야. 아주 극미한 소량이라 외향으로 발현할 정도의 효과는 없지만 내 세포들은 아편제에 반응하고 있을 거라고. 단지 내가 모르는 것일 뿐.”


말을 마치더니 잠깐 넋을 놓은 셜록의 눈이 흐리멍덩해서 존이 눈썹을 일자로 굳혔다. 그러나 천천히 머그를 기울인 셜록이 드르르 기운 티스푼에 볼을 쿡 찔리자, 결국 아, 진짜, 짜증 섞어 탄식한 존이었다. 손을 뻗어 셜록의 얼굴을 치우고 그 망할 것을 빼낸 존은 한숨을 쉬며 샌드위치 뚜껑을 닫았다.


“내 상담사 연락처 줄 테니까 생각 있으면 말해.”

“사양하지. 효과 없어. 게다가 나는 의사가 있지.”

“나는 마음이 아니라 몸을 고치는 의사라고.”

“나한테는 그 이상이야.”


존은 하마터면 기껏 만든 샌드위치를 떨어뜨릴 뻔했다.


“세상에. 상태가 심각한데.”


셜록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져서 중얼거리는 존과는 달리, 셜록은 표정이 없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는 건가, 존이 의심할 때 위층 침실에서 알람시계가 삑삑거렸다. 더욱 이상하게도, 셜록이 머그를 실험대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먹어. 내가 끌 테니.”


입까지 빙긋 모양 짓고 붉은 담요를 스르륵 끌며 복도로 나가는 셜록의 뒷모습에서 존은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미간만 좁혀질 뿐 소득이 없어서, 일단 입안을 샌드위치로 채울 뿐이었다.



개를 위한 카모마일


 

모리아티와의 게임을 즐기기만 한 줄 알았더니, 셜록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것일까. 저도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셜록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자신이 더 소시오패스처럼 무정했던 것 같아, 존은 대기 중인 환자가 없는 틈틈이 후유증에 관해 찾아 읽었다. 그가 악몽에 시달릴 때도 한 적 없는 일. 내키지 않아 해도 가장 쉬운 방법은 상담을 받는 것이겠으나, 셜록을 감당할 수 있는 상담사를 찾을 자신이 없었다.


낯설긴 하지만, 셜록 홈즈라는 사람의 특수한 환경을 놓고 보면 오히려 반가운 일일지도. 저 스스로 소시오패스라고 칭하며 대인관계를 당연스레 회피하는 사람이니까. 일반인에게는 불안, 긴장 등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후유증이 어째서 셜록에게는 반대로 나타나는 것 같을까. 늘 괴팍하고 불쾌한 사람이라 후유증이 나타난들 티도 나지 않는 것일까, 존은 피식 웃었다. 셜록 홈즈의 몹시 친절한 태도가 그를 불안에 떨게 하긴 했지만, 상담사가 되어 내면을 들어 달라고 하면 기꺼이 들어줄 존이었다. 불면증은 해결법이 비교적 간단했다. 카모마일. 자기 전 따뜻한 차 한 잔이 도움이 되지 않을 리 없다.


존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창 쪽으로 바퀴를 굴려 평화로운 거리를 내다보았다. 진행 중인 사건이 있다면 발품 팔기 좋은 봄날. 셜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외출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존은 기억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지금쯤 따스한 햇빛이 플랫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을 테니, 얼굴 위에 책을 펼쳐 덮고 낮잠을 자고 있을지도. 점심을 먹었다면 더더욱. 여전히 파란색 가운 위에 붉은 담요를 몸에 감은 채로. 하얗고 마른 손목을 늘어뜨리고. 전화해서 그런 짓은 불면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러준다면, 셜록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할 것이었다. 어쭙잖은 추리로 정당화할 생각 말고 졸리면 그냥 자. 안 돼, 이미 근무시간에 졸다가 세라에게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존은 흠칫 몸을 떨며 현실로 돌아왔다.


근무가 끝나고 베이커 가로 돌아온 존은 221B 문 앞에 서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면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은 그 소년은 분명한 볼일이 있다는 듯 221B라고 쓰여 있는 금색 표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왜인지, 카모마일 차 통을 손에 든 남자가 뒤에 멈춰설 때까지 문을 두드리지는 않고 있었다. 손이 안 닿나? 존이 그 앞으로 가서 인사했다.


“안녕.”


소년은 불쑥 앞으로 끼어든 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눈이 부신지 오렌지 색 눈썹을 찌푸리며.


“안녕하세요.”


한 아홉 살쯤 되었을까? 물끄러미 존을 볼 뿐, 오도카니 서서 무슨 용건이냐고 되려 묻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존이 입을 뗐다.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셜록 홈즈라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목소리였다. 의외의 대답에 존이 눈썹을 들고 잠깐 멈춰 있자 소년이 말을 이었다.


“근데 집에 아무도 없나 봐요. 대답이 없어. 여기 살아요?”


의뢰인? 셜록의 활동이 차츰 알려지는 탓에 직접 찾아오는 의뢰인이 늘고는 있었으나 어린아이가 문을 두드린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가 따지기 전에, 셜록과 허드슨 부인이 둘 다 동시에 집을 비우는 경우는 잦지 않았기에 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날씨가 좋다고 선뜻 산책을 나설 성격도 아니거니와, 최근 존이 관찰한 바에 근거하면 지루함에 몸 둘 바를 몰라 의뢰인이라면 맨발로라도 뛰쳐나와 맞이할 셜록이었다. 그 옆에 있다 보니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 ‘추리’라는 것을 할 때가 있었다. 셜록이 듣는다면 ‘추리’라기 보다는……‘생각’이라고 정정하겠지만. 존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 아, 맞아……. 나 여기 살아.”

“아저씨가 셜록 홈즈예요?”

“아니. 친구이긴 해. 존 왓슨. 안녕.”

“아, 역시. 블로그에서 봤어요.”


소년의 말에 존이 눈썹을 올렸다. 사건 이후로 방문자가 늘긴 했지만 이렇게 어린 독자를 두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정말 의뢰할 사건이 있는 거구나?”

“당연하죠, 아니면 왜 왔겠어요?”


이상하다는 듯 묻는 소년의 표정에 존이 입을 다물었다. 셜록이 옆에 있었다면 내용을 듣지도 않고 거절할 열 가지 이유를 나열해 주었을 것이었다. 문득 존은 셜록을 향한 의심을 걷어낼 방법이 떠올랐다. 뒤로 몇 걸음 성큼성큼 걸어가, 휙 고개를 쳐들어 위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닫힌 창문 안에서 플랫의 흰 커튼이 살짝 움직이는 게 아닌가! 존을 쳐다보던 소년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들려 했기에, 존은 얼른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주의를 끌었다.


“보니까 집에 없네. 없어. 나간 모양이야. 응, 나간 게 확실해.”


그러니 소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차 위를 확인하며 물었다.


“정말?”

“정말…… 그런 것 같아. 누가 있었다면 분명히 문을 열어주었을 거야. 뭐, 보통은 그래. 건물주인도 여기 사니까.”


열심히 고개를 까딱이는 존을 보고 소년이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따라서 어깨를 으쓱 올린 소년이 발길을 돌렸다.


“안녕히 계세요.”


서툴게 둘러대는 티가 난 것인지, 아니면 포기가 빠른 것인지, 쉽게 돌아서는 소년에게 미안해진 존이 등에 대고 소리쳤다.


“왜 셜록 홈즈를 찾는데? 네가 여기 온 거 부모님도 아시니?”


존의 목소리에 발길이 붙잡힌 소년이 돌아서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쁜 일에 엮인 거라면 경찰에게 이야기하는 게 나아!”

“경찰은 내 닭을 찾아 주지 않을 거예요.”


주머니에 손을 낀 채로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존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지나가는 차 소음 때문에 잘 못 들었을 수도 있을 테니까…….


“뭐? 뭘 찾아달라고?”

“내 닭이요!”


*


예상대로, 셜록은 존이 출근하기 직전 본 모습 그대로였다. 파란색 로브에 붉은 담요를 몸에 말고 긴 소파에 몸을 뉘인 이후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모양새. 나름 반갑다는 표시라도 되는지, 빤히 응시하는 셜록의 시선을 받으며 존은 부엌으로 걸어갔다. 실험기구들 틈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느라 벌인 흔적, 그 사이에 용케 자리 잡은 두 머그들도 아침에 두고 간 그대로였다. 존이 실험대도 아니고 식탁도 아닌 그 난장판에 카모마일 차 통을 끼워 넣을 때, 셜록의 묵직한 목소리가 플랫 한구석에서 퍼졌다.


“의뢰인?”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말라는 듯한 목소리. 먼저 말을 꺼낸 게 놀라워 존은 걸음을 옮겨 부엌과 거실 사이에 섰다. 셜록의 얼굴에 권태라고 쓰여 있었다. 존은 입술을 조금 늘리고 되물었다.


“누구?”

“방금 네가 만나고 온 어린 남자.”


존은 뜸을 들였다. 궁금해할 것이면 직접 내려가서 문을 열어줄 것이지, 창문 밖으로 내다보기만 하고는 그러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이유가 뭔가. 어린 애를 문전박대한 이유가 시시한 사건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면 의뢰 내용을 듣고 나서도 마음을 바꿀 리 없을 것이었다. 셜록의 추리는 대부분 맞으니까.


“궁금했으면 네가 직접 맞지 그랬어?”

“안 궁금해. 의뢰인인 거 알아.”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버리는 셜록을 보고 존은 턱을 당겼다. 사람을 사귀는 데 짧으면 짧다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을 보통 사람들보다 알차게 보낸 두 사람이었다. 속내가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의 관심을 표출하지 않을 셜록을 존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시치미를 떼거나 말거나, 그렇구나, 존은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는,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소파에 파묻혀서 벽난로 위에 놓인 해골을 응시하고 있던 셜록은 존의 뜻밖의 전술에 흥미로워하며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가, 잠시 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에 시선을 해골로 되돌렸다. 무슨 내용이든 간에 분명히 존이 다시 입을 열 것으로 생각했다.


“카모마일을 좀 사 왔어. 자기 전에 한 잔 마시면 도움이 될 거야.”

“지금 한 잔 마시면 안 되나?”

“직접 만들어 마셔, 이 소파 감자야. 난 나가.”


존의 말에 셜록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정말 나갈 것처럼, 늦은 밤에야 돌아올 것처럼 외투를 팔에 걸친 상태였다. 셜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딜?”


닭 찾으러. 라고 말할 뻔한 존이 헛기침을 하고 되물었다.


“궁금하지 않다며?”


그러자 셜록이 얼른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의뢰인 때문이겠지.”

“안 따라올 거야?”

“안 따라갈 거야.”


준비한 듯 즉각 대답하는 셜록의 반응이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천장에 눈을 고정하고 누운 그의 모습이 어쩐지 말문을 닫은 것 같지는 않아서 존이 다리를 삐딱하게 고쳐 섰다.


“이유는?”


셜록의 시선이 슬쩍 존을 향하려다가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많지.”


셜록이 교묘하게 대답을 피하자, 수고가 무색하도록 존이 정곡을 찔렀다.


“살인사건이었다면 앞장섰을 거지? 저렇게 어린애를 문밖에 세워두지도 않을 거고 말이야.”

“안타깝게도 아니니까.”

“다행히도, 셜록.”


존의 단호한 목소리에 셜록이 눈을 위로 드륵 굴렸다.


“다행히도. 걷다가 곯아떨어져 턱이 찢어질 바에야, 차라리 여기 누워서 네 작은 의뢰인의 사건이 덜 지루하도록 행운을 비는 편이 더 안전할 테니.”


지루함이 짜증스러울 정도라면 가만히 있기보다는 지루한 사건이라도 맡을 것이지, 무슨 고치처럼 담요를 몸에 감고 긴 얼굴에 난 입만 조곤조곤 놀리는 셜록의 꼴을 보고 존이 비아냥댔다.


“폭탄이 장식된 조끼를 입고 네 앞에 나타날 일이 아니라서 아쉽겠군.”


존의 경고에도 셜록은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존의 빈정거림이 오늘 셜록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핵전쟁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겠지. 장난감 총을 잃어버렸다든지. 만화책을 빌려 간 친구가 돌려주지 않는다든지.”

“고작 장난감 총이나 만화책 때문에 널 찾아온 거라고 추리했다면, 안타깝게도 네가 틀렸어.”


흥미를 더 끌기는 했는지, 흘끗 보는 셜록의 시선에 대고 존이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누군가를 납치해야 한다구.”

“납치? 네가?”

“그래. 모리스 씨를 납치해야 해.”


그렇게 말한 존도 어처구니없어 난처한 웃음이 터졌다. 소년의 입에서 모리스 씨라는 중년 남성의 이름을 가진 닭에 대해 들었던 때에도 숨기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셜록도 모리스 씨의 종을 묻지는 않고 눈썹만 구겼다.


“열 살도 안 먹은 꼬맹이가 의뢰한 내용이 납치라니, 네 블로그에 무슨 소설을 쓰고 있는지 의심스럽군. 그래서?”


천장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잇길 기다리는 셜록을 보고 존이 목을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셜록’을 구슬리고 있는 제 행동을 명확히 인지하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말을 고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뭐, 경미한 수준의 범죄 행위지. 모리스 씨는 지금 납치된 상태니까.”

“네가 모리스 씨를 납치해야 한다며? 그런데 이미 납치가 된 상태라고?”

“그렇다더라고.”

“예상치 못한 전개군. 계속해 봐.”

“그게 다야. 당연히 보수는 없지만, 하겠다고 했어. 네가 그 애를 이십 분이나 밖에 세워둬서 미안하기도 하고 말이야. 아무래도 혼자 가는 게 눈에 띄지 않겠지. 납치냐 구출이냐의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아는 경찰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테니. 나간 김에 저녁도 먹고 올까 해. 이제 냉장고에 인육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셜록이 벌떡 일어나며 몸을 감고 있던 담요를 발치에 풀썩 떨어트렸다.


“오 분.”


그리고 정확히 오 분 후에 셜록은 보라색 셔츠로 갈아입고 존 앞에 등장했다. 셜록에게는 유니폼이나 다름없는 차림이지만 볼 때마다 주목하게 했다. 재킷 자락을 휘날리며 팔을 끼워 넣는 셜록을 보고 존이 물었다.


“데이트 가?”

“그럴 리가.”


짧게 대꾸하며 벌컥 문을 열고는 존이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


변덕스러운 런던 날씨가 그 짧은 사이에 비를 뿌려 바닥이 젖어있었다. 오후 일곱 시의 런던거리는 퇴근하는 행렬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셜록과 함께 걸을 땐 그런 일상이 존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거의 늘 시신을 보러 가거나 범죄현장을 찾아가는 길이었으니. 긴장감 없이, 만나야 할 공무원도 없이, 내켜서 저녁이나 먹으러 가는 듯, 셜록과 플랫 밖의 일상을 걷는 순간이 새삼 낯설면서도 묘해서 존은 문득 셜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먼지를 씻어내린 깨끗한 공기로 폐에 쌓인 플랫의 먼지를 씻어내고 있었다.


“목적지는?”


눈이 마주치자 셜록이 슬쩍 물었다. 제 대사를 하는 셜록에게 존은 목구멍을 울리며 웃어 주었다.


“기다려 봐. 놀라게 해 주지.”

“확실해?”

“오, 그럼. 아주 사랑스러운 곳이야.”


자신만만한 어조였다. 그러나 인파로 혼잡한 소호 한복판에서는 사람에 치여 길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수첩에 경로를 적어 두었기에 그것을 토대로 길을 찾았는데, 저보다 약 삼십 년을 덜 산 사람이 불러준 경로를 토대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소년은 제가 드나드는 길에서 접근하는 법밖에 알지 못해서 반드시 ‘중국 등 많이 걸린 곳’에서 출발해야 했으며, 신호등 기둥에서도 존의 허리 정도 되는 높이에 새겨진 ‘알렉스’라고 쓰인 작은 그라피티 따위를 찾아야 했다. 결국, 그곳에 살지 않는 이상 들어올 일이 없을 것 같은 습한 골목에 서고 나서야 존은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의심을 했다. 셜록의 눈에는 명백했다.


“길을 잃었군.”

“아니. 다 왔어. 바로 저 앞이라고.”


수첩을 들여다보며 고집스럽게 걷는 존의 뒤를 한 걸음 뒤처져 따라가던 셜록은 잠시 후 존이 ‘바로 저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자 그 옆에 슬쩍 섰다. 존은 수첩에 소년이 남긴 듯한 어떤 게임 캐릭터의 그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인가 보군? 네가 말한 사랑스러운 곳.”


그제야 존이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성인용품 상점의 진열대 너머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고 넋을 놓은 것도 잠시, 창에 비친 저의 얼빠진 얼굴과 무미건조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어 예의상 웃는 게 노골적으로 티 나는 셜록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마네킹이 대체 무얼 입고 있었던 거지? 제 눈을 의심하며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얼버무리는 존을 셜록은 느긋하게 놀렸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거짓말.”

“조용히 해. 방해되잖아.”


도시의 빛이 어두워진 거리를 밝혔다. 앞으로 일 분만 더 목적지를 못 찾고 인파 속에서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면 투덜거릴 기회로 삼을 참이었다. 마침 존이 짧은 손가락으로 길 건너를 가리켰다. 레이스를 연상시키는 하얀색 간판에 검은색으로 간단하게 상호만 적혀있는 작은 가게였다. 셜록의 날카로운 눈이 진열대 앞에 서 있는 마네킹들 너머로 묘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온몸의 깃털이 하얗고 빨간 볏과 검은색 꼬리 술을 단 멋진 닭이었다.


“역시 모리스 씨가 사람이 아니었군.”


놀랍도록 시시한 내용으로 셜록을 즐겁게 해 줄 속셈이었는데, 목적지에 다다른 것으로 모든 기쁨을 소진한 존이 크게 숨을 내보내며 물었다.


“그래. 닭을 납치할 좋은 방법이라도?”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날 여기로 데려온 건 넌데.”

“난 혼자서 어떻게든 잠입해서 몰래 빼낼 생각이었는데, 네가 따라오니까 무슨 기린이랑 같이 걷는 것 같다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기린이라, 나쁘지 않군. 하고 셜록은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배운 네 몸놀림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말한 셜록이 간단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그 상태로 서로 잠시 바라본 결과, 존은 정말로 여기에 서서 구경만 하려는 셜록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순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셜록은 당황한 존을 보고 입이 근질거리는 걸 굳이 참지 않았다.


“혹시나 구금되면 병원에 전화 한 통은 내가 넣어 주지. 체면이 있으니 닭을 납치하다가 체포당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존은 셜록에게 얄미운 말을 계속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고 싶지 않아서 획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그 뒷모습을 보는 셜록의 얼굴은 아들의 등교 첫날이라도 보는 듯 흐뭇했다. 용감하게도 가게의 정문으로 곧장 직행하는가 싶더니, 역시나 방향을 꺾어 가게 뒤로 돌아 들어가는 존의 등짝에도 욕지거리가 써 붙어 있는 것 같아서, 거기에 손가락질하며 크게 웃어 주고 싶은 충동은 간신히 참았다. 도움을 청했다면 거절할 생각은 물론 아니었지만, 존이 그럴 리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악행을 구경하는 쪽에 더 구미가 당긴 셜록이었다. 어떻게 저 작은 조류에게 접근할지 상상했다. 어떻게 가게 점원을 따돌릴지. 어떻게 가게 안을 빠져나올 것인지. 성공한다면, 새장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며 씩 늘릴 그 입이 벌써 익숙했다.


셜록은 존의 비행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다. 벽에 몸을 숨긴 채 유리 쪽으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니,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규모에 적당한 야간용 보안장치가 전부였다. 빠르게 변하기 바쁜 주변의 상점들과는 달리 세월의 흔적이 오래 묵은 종이처럼 스며든 작은 옷가게. 몸에 꼭 맞는 하얀 원피스에 하얀 스타킹과 검은색 구두를 신은 오십 대 여성으로 보이는 주인 혼자였다. 뒷문이 있군, 물론. 성인 여성의 마네킹이 두 개, 아동의 마네킹도 두 개. 그것들이 밟고 선 어두운 나무로 만든 낮은 진열대에는 가방과 구두와 가격표가 놓여있었다. 오늘의 주인공 모리스 씨는 밤색 나무로 짜인 계산대 한편에 놓인 새장 안에 갇혀있었다. 비록 조금 꼬질꼬질해 보이긴 했지만 작은 조류를 위한 새장과도 전혀 어색함 없이 어울렸다. 통통한 몸 때문에 새장이 작아 보임에도 제 집인 듯 매우 얌전했다. 탈의실을 포함해 존이 그의 작은 몸을 숨길만 한 곳은 세 군데 정도. 이런 정보들을 충분히 수집했겠지, 존. 주인은 손님이 입어보고 나갔을 옷가지들을 제자리에 걸어놓았다.


그때 갑자기 뒷문 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주인은 놀란 나머지 모든 행동을 멈춘 채 그쪽을 주시했고, 셜록은 씩 웃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계산대를 지나쳐 가게 안쪽으로 사라진 얼마 후, 신의 이름과 함께 고양이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이 소란을 피워놓은 것이 분명했다. 셜록은 근질거리는 몸으로 존이 등장하길 기다렸다. 그때 천장을 이룬 패널 하나가 움찔거리더니, 쑥 안으로 빨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존의 얼굴이 나타나니 셜록에게도 예상 밖의 책략이었다. 함께 지내며 꾀가 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도둑질에도 재능이 있는 것인지 셜록은 즐겁게 혼란스러워졌다.


존은 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셜록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신난 표정으로 구경만 하고 서 있는 셜록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손바닥을 펴서 까딱거리며 인사까지 하는 그를 애써 무시하고, 존은 자신이 어느 정도 천장을 기어왔는지 가늠하고자 용기 있게 구멍 밖으로 갈색 머리통을 내밀었다. 슬프게도 닭을 지나쳐온 존은 눈을 굴리며 다시 머리를 집어넣고 패널을 제자리에 맞추었다.


존이 사라진 직후에, 소란을 수습하길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벌써 정리를 마쳤는지 예상보다 일찍 주인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손을 탁탁 털며 걸어 나오는 주인을 본 셜록은 문득 자신이 어느새 대놓고 가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잽싸게 몸을 피하는 것도 다 보일 타이밍이라는 것과, 그렇다면 여성복 가게를 구경하다가 주인과 눈이 마주쳐 황급히 몸을 숨기는 장신의 남자는 도둑으로 보일 것인가, 변태로 보일 것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은 남자 손님으로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새장 바로 위의 패널이 꿈틀거리자 어쩔 수 없이 얼굴에 상업적 미소를 구현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맑은 종소리가 셜록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안녕하세요.”


주인은 좀 전까지 고양이를 저주하던 목소리가 무색하도록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셜록을 반겼다. 종소리와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천장은 잠잠해졌다. 어두운 천장에서 쥐똥과 먼지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존이었다.


“선물하시게요?”


잘생기고, 큰 키에, 옷을 입을 줄 아는 청년이 친근한 미소를 띠고 자신의 가게로 들어올 때는 단골손님을 맞이할 때보다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가끔 그러한 손님이 자신의 옷을 고르는 때도 있었기에 그렇게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었다. 주인이 안심하도록 셜록이 답했다.


“당연하죠.”


다른 손님이 오기 전에 신속히 일을 끝내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재촉하는 제 맘을 읽을 순 없을 테지. 어떻게 이 사태에 대응해야 하는지 잠잠히 고민하는 듯 천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제 가게는 아름다운 드레스로 유명하죠. 거기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표현할 구두와 가방, 액세서리도 물론 있구요. 옷을 입는 데 있어서 그런 조화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는 분 같군요.”

“물론이죠.”


잘 관찰하셨다는 듯한 셜록의 대답에 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더 크게 지었다. 그 사이 천장 패널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곧이어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존의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고,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이마와 두 눈까지 천장에서 내려왔다. 존은 자신을 등진 주인의 반가운 뒷모습과 그 앞에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셜록을 발견했다. 셜록은 존과 눈이 마주치자 더없이 상냥하게 입을 뗐다.


“밖에서 봤는데, 제 연인의 갈색 머리와 이 옷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네요. 파티를 할 거예요.”


존은 셜록이 마네킹 중 하나를 길쭉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몸매가 드러나는 어두운 초록색 원피스였다. 갈색 머리란 말에 왜인지 표정이 굳어졌지만, 깊이 생각하기 싫어서 원래의 목표물, 닭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순진무구하게 앉아있는 닭의 볏 위, 정확한 위치에 와있었다.


“아,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편안하면서도 내구성이 좋은 고급원단이에요.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완성도 높은 퀄리티에서 나오는 우아함이 파티에도 딱 어울리죠. 참 그렇지, 여기에 어울리는 토끼털 조끼도 같이 입혀 놨었는데 손님이 입어보신 후에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걸 깜빡했네요.”


하며 뒤를 돌아 존의 완벽한 파티 의상 코디를 도와주려는 주인을 셜록이 얼른 말렸다.


“아니, 토끼털 조끼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제 연인은 동정심이 많고 공감 능력이 깊은 사람이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파티에서 동물 사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대신 부인이 신은 구두가 아주 예쁘고 편해 보이는군요. 판매하시는 건가요?”

“오, 그럼요! 제 철학인걸요. 좋은 상품이 아니면 입지도 않고 팔지도 않죠. 이 작은 가게를 몇십 년 동안 찾으시는 단골손님이 여러 계신 이유이기도 하답니다. 구두 또한 공장이 아니라 제가 잘 아는 런던의 오래된 제화점에서 직접 골라오죠.”


주인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존은 자꾸만 신경이 분산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털고 목표물에 집중했다. 창고에 잠입해 찾아냈던, 높은 곳에 있는 옷을 꺼낼 때 쓰는 고리가 달린 긴 나무 장대를 구멍으로 내렸다. 그래! 인간은 도구를 쓰는 동물이지, 곁눈질하는 셜록을 눈치채지 못하고 주인이 물었다.


“그런데 물론 치수는 아시겠죠?”

“음…….”


장대의 쇠고리가 새장 끝에 달린 손잡이에 걸릴 듯 말 듯 자꾸 비껴가는 바람에 셜록의 시선이 계속 붙들렸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직접 손으로 걸어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이백칠십이요.”

“이백칠십이요?”

“그래요, 제대로 들었어요.”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존은 장대가 자꾸만 빗나가는 것을 셜록 때문이라 탓하며 이를 물었다. 그때 제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휙휙 움직이는 것을 눈치챈 닭이 존을 올려다보았다. 닭과 눈이 마주치는 생소한 경험보다, 놀라서 난동을 부릴까 봐 등골이 서늘해졌다가, 자신을 구해주는 것을 아는 것인지,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존을 못 본 척하는 것인지, 닭이 외면하기에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리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 든 것도 그때였다.


“새 구두를 보여드릴 순 있지만, 여자 구두는 이백육십오까지만 준비해 놓는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구매하시려면 따로 주문해야 해요.”


주인이 미안한 기색으로 셜록에게 대답했다. 셜록은 주인의 등 뒤로 새장의 닭이 공중부양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옷도 마찬가지인가요? 이 드레스의 치수는 뭐죠?”

“라지까지 있어요, 물론 맞지 않는다면 교환해드려요. 애인 분의 치수가 어떻게 되죠?”


새장이 공중에서 흔들리는 바람에 닭이 퍼득퍼득 의미 없는 날갯짓을 하자 셜록이 급한 목소리로 소음을 묻었다.


“백, 백육십구센티미터칠십킬로그램가슴둘레는백센티미터허리는 삼십인치라서작고귀여운! 네, 네……. 제가 작고 귀엽다고 했나요? 작고 귀엽긴한데그게마치마치충성스럽고앙칼진소형견이다! 이라는, 네. 그러니까 이 옷이 맞을 겁니다.”


뭐?! 어두운 천장 안에서 행동을 뚝 멈추며 입 모양으로만 격하게 되묻는 존이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 곧바로 신중하게 새장을 끌어 올렸으나 닭보다 셜록에게 더 신경이 곤두섰다. 갑작스럽게 과도하도록 불필요한 정보를 공유받아 다소 놀란 주인은 셜록에게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정말 죄송하지만, 이 드레스의 제일 큰 치수도 조금 빠듯하겠네요.”

“이게 아동복이었던가요? 성인이 입을 옷으로 보이는데요. 분명히 맞을 겁니다.”

“아뇨, 아뇨. 성인복인데 다만 이 옷은 조금 작게 나왔답니다. 안 맞을 거예요.”


되묻는 셜록의 목소리가 태연하기만 해서 존은 소리 없이 저주를 씹었다. 충성스럽고 앙칼진 소형견이라니! 더러운 환풍구에서 거의 기예를 펼치고 있는 와중에 셜록의 헛소리 때문에 새장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을 셈이었다. 할 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새장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벼르는 건 셜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낯선 인간에게 점점 끌려가 겁에 질린 닭이 날개를 퍼덕이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런유감스러운일이네요아니오히려이아름다운드레스를제연인이보지못해서다행입니다분명히실망했을테니까요저도그꼴을보지못해서실망스러운걸요!정말짜증스러운일이아닐수없으며자꾸이러면옷을사서! 선물해버릴지도모르겠군! 휴! 제 잘못이 아니니 저에게화를낼권리가없고저는그저돕고자이러는것이지만혹시총을가져오진않았는지, 아니그럴리가없죠총을가져올만큼위험한일이아니니까총기류에중독된인간이아니라면옷가게오는데총을가져올리가없으니!부끄러운줄알아야지! 평소엔 자상하거든요, 제, 아니 당신의남편처럼, 물론좋은사람이었으면술을마실때마다폭력적으로변하지도않았겠지만어쨌든사별축하드립니다. 흠! 다행스럽게도 제 연인은 인내심이 대단하죠. 그래서 말해두건대 충성스럽고 앙칼진 소형견이라고 칭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답니다, 전혀, 전혀그렇게생각한적없으니분명태평양같은자비심으로저를용서해주리라믿어의심치않으며조용히!좀!조용히좀넘어가리라믿습니다! 아예 언급도 않는 수준으로 말이죠. 없었던 일인 것처럼요. 정말 악몽 같군요. 정말 그랬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존. 나단! 조나단, 그의 이름은 존이 아니라 조나단이죠. 조나단. 전 도움이 필요한 소시오패스일 뿐이며 더는 여기 있기 싫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진 존이 패널을 욱여넣느라 부주의하게 울리는 소음까지 묻으며 열심히 유감을 표한 셜록은 천장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해지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감히 제게 무슨 짓을 하게 한 건지 믿을 수가 없군. 마찬가지로 할 말을 잃은 주인에게 셜록은 입으로만 웃으며 묵례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존이 향했던 가게 뒤편으로 가서 존의 악행들을 곱씹었다. 가게 뒤에 지어진 작은 창고의 문.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았다. 건물 외벽에 난 환풍구로 통하는 철제 패널이 분리된 채 발치에 놓여있었다. 여기서 고양이 같은 짓을 했단 말이지. 셜록이 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존이 끙끙대던 소리를 뚝 멈췄다. 그 최소한의 반응만으로 존의 반응을 예상한 셜록은 패널을 도로 끼워 존이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타협을 시작해야 하는지 잠깐 숙고했다.


“비켜,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야.”


차분한 목소리였다. 셜록은 비켜서서 그나마의 빛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협조했다. 곧이어 그곳에서 닭이 쑥 나왔다. 셜록이 새장을 받아 들었다. 그다음엔 닭을 들어 올리는데 쓴 장대가 나왔다. 셜록은 그것도 받아 들고 한쪽에 세워두었다. 마지막으로 존이 머리며 얼굴에 온통 검댕을 묻힌 채 고개를 내밀었다. 셜록은 입가를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존이 신음을 내며 그곳을 빠져나와 패널을 다시 끼워놓을 때까지, 셜록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지 않기 위해 십 대였을 때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회상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존은 고개를 돌린 채 떨고 있는 그를 무시하고 온몸에 묻은 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손으로 탁탁 털어내다가, 셜록이 못 참겠다는 듯 입가로 손을 가져가서는 짐짓 딱하다는 듯 눈썹만 구기자, 저렇게 대놓고 웃는 경우는 연쇄살인 사건이 터졌을 때 이후 처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럭 소리쳤다.


“닥쳐! 닥치라고!”

“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안 하기는!? 닥쳐! 총 가져왔으니까!”

“그럴 줄 알았지! 도대체 닭 훔치는 데 총을 왜 가져 와?”


두 손을 흔들어 보이느라 결국 한껏 즐거워하고 있는 셜록의 얼굴이 드러났다. 웃음기 가득한 셜록의 목소리도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런 소시오패스를 앞에 두고 엄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존에게 불가능한 일이라 닥치라는 말 한 번, 지조 없이 늘어나는 입술 굳히기 한 번, 그만두라는 말 한 번, 삿대질을 한 번 하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고 먼 곳이나 보았다. 가게 안에 있을 때 제가 의식 없이 늘어놓은 말들에 굴뚝 청소 소년이란 단어를 보태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셜록의 입술도 모르고. 결국 웃음이 옮아 한껏 인상을 쓴 존이 따졌다.


“그만 좀 키득거리지그래. 무서울 지경이니.”

“하아, 미안, 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군. 이상한 일이야.”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웃음을 가시게 하는데 효과가 탁월하지. 내가 도와줄까? 아주 몹쓸 의사를 알아.”

“아니, 사양하지. 내 의사가 나아. 필요해. 하, 그, 쾌락적 자극제 말이야. 가끔은.”


손끝으로 눈물까지 훔치며 진정을 찾아가는 셜록을 보며 존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옷가게 주인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장 안에서 푸드덕대는 닭을 들고 달렸다.


저녁을 즐기고자 점점 더 사람들이 몰리는 소호에서 관심을 한몸에 받고자 한다면 새장에 닭을 넣고 걸으면 된다. 옷가게에서 멀어지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그러다 보니 안젤로의 레스토랑에 다다라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둘은 늘 그들에게 특혜처럼 주어지는 창가 쪽 테이블에 마치 예약이라도 한 것처럼 앉았다. 저녁 시간이라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셜록은 긴 의자 한쪽에 새장을 올려놓았다. 곧 안젤로가 험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서 셜록과 존에게 악수를 청했다.


“셜록.”

“안젤로.”

“데이트.”

“존이요. 데이트 아니라고요.”


존이 그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짚고 넘어가려는데 안젤로가 둘 사이에 놓인 닭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리켰다. 셜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금방 다시 올게, 미안. 주방이 조금 바쁘네.”


안젤로가 테이블 위에 메뉴 두 개를 놓아주었다. 존은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셜록에게 시선으로 물었으나 셜록은 답을 않았다. 촛불을 가지고 오는 건 아닌지 경계하며 안젤로의 너른 등짝을 주시하는 존에게 셜록이 물었다.


“뭐 먹을 거야?”

“음. 빠에야.”

“다시 생각해.”

“뭐? 왜?”


그들의 테이블에 촛불을 놔 준 건 웨이터였다. 존의 의사는 듣지도 않고 셜록이 웨이터에게 메뉴를 돌려주며 제멋대로 음식을 주문했다. 존은 촛불에 대해 지적하려고 기회를 보던 중 메뉴를 마음대로 정하는 셜록에게 항의하는 것으로 우선순위를 바꿨으나 제 몫으로 정상적인 양의 음식을 주문하는 셜록을 보고는 아무 말 못 하고 의외라서 눈썹을 올리기만 했다. 웨이터가 주방으로 향하자 셜록이 중얼거렸다.


“빠에야 냄새 싫어.”

“하지만 내가 먹을 거잖아!”

“쳐다도 보기 싫어.”

“그럼 내가 봉골레인가?”

“아니. 넌 토마토야.”

“너 여기 스페인 레스토랑인 거 알지?”

“오, 정말? 그렇다면 이탈리아 음식을 내는 이유가 있겠지.”


셜록은 코트를 벗으며 몰랐다는 듯 과장했다. 더 토를 달아 봤자 얻을 것이 없어 존도 한숨을 푹 쉬었다.


“적어도 닭요리는 아니라서 다행인가.”


그리고 외투를 벗어 의자 한쪽에 놓아두려는 데 셜록의 손이 쑥 와서 그것을 받아 들더니, 새장 위를 덮었다.


“닭은 이렇게 가려주면 더 안정감을 느껴. 멍청하거든.”

“네 옷으로 덮어주면 되잖아?”

“더러워질까 봐.”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셜록을 나무라려던 참, 웨이터가 다가오는 바람에 존은 입을 닫았다. 웨이터는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에 담긴 붉은 상그리아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갔다. 존이 물었다.


“갑자기 웬 술?”

“경미한 범죄를 성공적으로 저지른 것을 축하하며.”


셜록이 상그리아 두 잔을 따르며 답했다. 고개를 젓던 존은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거기에 더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저기에 검댕투성이였다. 어쩐지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더라니! 이번에야말로 셜록에게 항의하려고 하자,


“내가 닦아주길 바라는 거야?”

“알려주기만 하면 안 돼?”

“뭐하러? 여전히 존 왓슨인데.”


그렇게 태연하게 되물으니 딱히 할 말이 없는 존이었다. 왜곡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냅킨으로 더러운 것을 문질러냈다. 셜록은 그런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두 손을 입가 근처에 모았다. 존의 등 뒤, 창 너머로 캄캄해진 길거리가 셜록의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가 빨간 불빛을 깜빡이고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다.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일렁이는 촛불 때문에 존의 얼굴은 따뜻해 보였다. 촛불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의 음영이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일 뿐인데 다른 사람인 듯 낯선 얼굴로 인식하는 제 눈을 알았다. 귀가 고르게 발개야 하는데 검댕이 있는 건가, 저도 모르게 존의 귓바퀴로 손을 가져간 셜록은, 존이 눈을 도륵 굴려 쳐다보자 검지로 대충 그 근처를 가리키는 시늉만 했다. 곧 딴청을 하는 셜록을 수상쩍게 쳐다보며 존은 냅킨으로 귓바퀴를 문질렀다.


제 메뉴를 멋대로 주문했다고 항의했으면서, 음식 맛을 보고는 입에 맞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존을 보며 셜록도 포크를 잡았다. 외투에 덮여 있는 새장에서 모리스 씨가 기척을 내자 존이 옷을 들춰 안을 살폈다. 사람들을 관찰하느라 심심하지 않은 셜록에게 대화를 시작하는 건 늘 존이었다.


“궁금한 거 없어?”


존의 물음에 셜록이 입 근처에서 기울이던 유리컵을 도로 내려놓았다.


“네 치수가 틀렸나?”

“그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걸. 모처럼 일반인처럼 먹으면서 체하기 싫으면.”

“그렇지. 좋은 생각이야.”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른 개 한 마리 때문에 인상이 구겨지는 건 존도 어쩔 수 없었다. 슬쩍 눈을 들어 기색을 살피는 셜록에게 결국 작게 이를 갈았다.


“앙칼진 소형견이라니!”

“너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야. 맹세해. 오다가 봐서 머릿속에 남은 것뿐이야, 존. 넌 소형견이 아니야.”

“앙칼진! 말이야! 셜록!”


어느새 식칼을 쥐듯 포크를 쥔 채 테이블 위로 낮게 굽어서 으르렁대는 존에게 셜록이 얼른 엄숙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앙칼지지도 않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그리고는 산뜻하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자, 이제 모리스 씨에 관해 이야기해 줘. 내 의사가 도둑질에도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너도 공범이니까 조용히 해. 게다가 내 이야기 듣는 데 관심 없는 거 다 알거든?”


셜록은 상그리아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시다 존을 눈에 담았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일반인보다 많은 부분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저에 대해 옳은 말만 하는 타인을 보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문득 도는 식욕은 새콤하고 달큰한 붉은 술 때문일 것이었다.


“공범이라니. 난 거기에 우연히 애인의 옷을 사러 갔다가 일반적 기준에 들지 못해 실망했던 손님일 뿐이야.”

“셜록 홈즈.”

“게다가 훔친 게 아니라 구출한 거잖아.”

“어떻게 알지?”

“타당한 이유 없이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니까, 내 의사는.”


답지 않은 발언을 계속하는 게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존은 입을 오물거리기만 했다. 무뚝뚝한 태도 때문에 그것이 칭찬인지 단순한 관찰결과의 서술인지 분간하기는 힘들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을 자주 던지는 것은 확실했다. 셜록에게 그러한 행동을 요구하긴 했었으나 실제로 겪으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리라. 어쨌든 이 내키지 않는 사건에 대한 셜록의 의견이 궁금하기는 해서 나불댈 기회를 주었다.


“고맙긴 한데,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아니지. 이 닭은 애완용이야. 사람에 익숙하니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지. 농장에서 키우는 식용 닭이라면 네가 그렇게 ‘조용히’ 꺼내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했어도 들켰겠지. 냄새도 나지 않고,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한눈에 보아도 관상용이니 옷가게 주인이 가게에 둘 만했던 거야. 의뢰인이 주인이고.”

“그럼 가게 주인이 이 닭을 훔친 건가?”

“그 여자가? 뭐 하러?”


존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뭐, 탐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 여자가 이 닭이 맘에 들어서 설령 훔치기까지 했더라면 그렇게 대놓고 장물을 전시하지도 않았을 테고, 더더욱 빵 쪼가리 따위를 주진 않겠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콩으로 보아 닭이 무엇을 먹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군. 그리고 이것 좀 봐, 더럽잖아. 관리를 안 했잖아.”


셜록이 외투 한쪽을 걷어 드러난 새장 바닥을 가리켰다. 손톱만 한 빵 조각들이 배변과 함께 뒤엉켜 있었다.


“또 의뢰인이 닭을 도난당한 거라면 굳이 나를 찾아와서 닭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진 않았겠지. 경찰을 부르면 되니까. 그리고 방금 네가 왼쪽 위로 시선을 향했다는 건 거짓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고, 넌 그 옷가게 주인이 이 닭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나에게 혼란을 주려고 한 거야.”

“그러시겠지.”


놀랍지도 않아서 존은 짧게만 대답하고 말았다. 셜록은 유독 거짓말을 잘 감지하긴 하지만 가까이 앉아있어서 눈에 뜨였을 뿐이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려다가, 본론으로 돌아가기 위해 관두었다.


“그리고 이 새장. 장식용이야. 문이 없잖아. 배변판도 없어. 밑에서 통째로 여는 구조에 조립도 허술해. 옷가게 벽에 똑같은 재질의 고리가 박혀있었어. 화분이나 구두 같은 걸 넣어놓고 매달아 두는 용도였겠지. 그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이 닭을 맡게 된 거야. 주인이 찾으러 오길 기다렸고, 분명히 다시 올 것을 알고 있었어.”


존은 플랫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년을 떠올렸다.


“뭐, 네 말이 맞아. 그 남자애 말에 의하면 그 닭이 제 소유래.”

“문제는 거기부터지.”

“그렇지.”


존이 빙긋 웃었다. 제아무리 셜록이라도 의뢰인의 사연과, 닭을 훔치기로 결심한 이유까지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상 추리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헌데 셜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존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문제는, 네가 의뢰인의 말을 믿는다는 거지.”


말한 셜록이 포크로 조갯살을 쿡 찔러 올렸다. 존이 되물었다.


“뭐라고?”

“그 아이가 무슨 이유로 닭을 찾아달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거짓말이야. 집 근처를 삼 일이나 어슬렁거리며 고민한 거라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니까. 제 소유의 닭이 엄한 곳에 갇혀있는데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셜록은 포크를 허공에 휘젓기만 했다. 존의 머릿속에서 거짓말이라는 단어는 삼 일이라는 말에 잊혔다. 셜록에게서도, 소년에게서도 들은 적 없는 내용이었다.


“삼 일이라고? 그 어린애가 삼 일이나 고민한 문제를 너는 여태껏 외면해왔단 말이야?”

“그 나잇대의 인간도 제 행동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갖추기 마련이니까, 존. 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 나이지. 약점을 파악하고 마음을 조종할 수도 있고.”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흐릿하게 뜬 눈이 존을 놀리고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셜록에게 존이 차분히 되물었다.


“……좋아, 내가 아홉 살짜리의 거짓말에 속았을 것 같아, 아니면 설득해서 자초지종을 들었을 것 같아?”


“제법 짜증스러운 부분이지. 일부러 생명체를 방사해 가게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작을 생각해낼 만큼 똑똑하다가도, 그 뒤까지는 수습을 못 하고, 또 제가 한 짓을 크게 소문을 내고 싶지 않아 나를 찾아왔으면서, 사흘 동안이나 망설이고, 이유를 꾸며냈더라도 존 왓슨에게 설득당해 사실대로 털어놓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어.”

“귀엽고 순수하다는 뜻이지?”

“그래. 그 귀엽고 순수한 존재가 널 쥐똥이 가득한 천장을 기어 다니고 절도까지 저지르게 했네.”


존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었으니까. 딱한 눈으로 보는 셜록의 흰 얼굴에서는 이미 ‘물렁한 존 왓슨’에 대한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다급해서 입부터 열었다.


“물론,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어. 닭을 잃어버렸는데 그 가게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달라고 했더니 주지 않더래. 부모님이나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니까 당황해서 말을 지어내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다고 하니까 일부러 닭을 가게 안에 풀어놨다고 하더군.”


“단순히 장난을 친 거라면 나이를 앞세워 용서받을 수 있었겠지. 그 가게에서 주인의 관심을 돌린 다음에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도 그게 의아했어. 사탕 가게도 아니고, 장난감 가게도 아니고 남자아이가 관심을 가지기엔 터무니없는 분야잖아.”

“그게 의아하다고 한 적 없어. 남자아이는 옷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건가?”


존은 파스타를 씹던 입을 뚝 멈췄다. 방금 실수한 건지, 셜록의 눈치를 보니, 매끈한 보라색 셔츠를 입은 셜록도 빤히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방금 실수한 거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존이 닫혔던 말문을 억지로 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 말은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니 일반적이라고 하기보단…… 나로서는 언뜻 납득이 가지 않았단 말이야.”


셜록은 존이 당황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반적’이라는 부분에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손짓을 해보았다. 존이 이마를 검지 끝으로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여성복을 파는 가게 같았던 데다가, 남자가 옷을 산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드레스가 떠오르진 않는다고. 훔칠 때도 마찬가지고.”


존은 자신을 부담스럽게 응시하고 있는 옅푸른 시선을 견뎌냈다. 셜록이 지적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진땀을 빼진 않았을 것이었다. 상그리아를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었으나, 셜록의 응시는 집요했다. 존이 억지로 마무리했다.


“어쨌든, 괜찮다고. 남자든 여자든 옷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입겠다면 입는 거지.”

“물론.”


셜록의 낮은 목소리가 존에게 따지듯 엄숙하기까지 했다. 스트레이트인 내 시각으로는 그랬었다, 고 속으로만 덧붙였다. 셜록이 청한다면 그와 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었으나, 그러고자 하는 의향이 전혀 없는 사람인 게 존으로서는 은근히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깐의 침묵은 계속 이어졌고, 식기를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만 백색소음처럼 둘 사이를 채웠다. 셜록은 먼저 침묵을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늘 그렇듯 존이 말했다.


“어쨌든 그 애는 거기서 마네킹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훔쳤다고 고백했어.”

“그리고 이유는?”

“여자친구 주려고.”

“그걸 믿는 거야?”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거짓말쟁이에 간악한 꼬맹이니까.”

“의뢰인의 성격까지 신경 쓰는 줄 몰랐네.”

“도덕적 잣대가 쓸만한 내 동료로 하여금 범죄씩이나 저지르도록 꼬드기는 의뢰인이라면 더더욱.”


후유증이겠지. 태연하게 말하는 셜록을 믿지 못해 새벽의 대화를 떠올리는 존이었다. 그것밖에 내릴 수 있는 답이 없었다. 타인에게 교육적 책임감을 느낄 리 없었고, 상의 없이 사건을 맡아 버려서 심술이 났다면 어떤 식이든 비아냥대서 알렸을 것이었다.


셜록의 말대로, 떳떳잖고 수고롭고 하찮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생일이 다가오는 여자친구를 위해 예쁘다고 감탄했었던 목걸이를 사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장식으로 걸린 새장을 발견하고는 하얀 닭을 안고 중국 등이 많이 걸린 곳부터 옷가게를 찾아가 안에 닭을 던지고 그것이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니는 동안 목걸이를 슬쩍 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나치게 얌전한 모리스 씨의 성격 때문에 주인에게 금방 잡혀버려 구해올 수 없었을 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셜록도 분명 소년의 사랑스러운 자백을 듣고 웃었을 것이며 훈계와 처벌은 닭을 찾고 나서 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존이 설명하자, 무표정하던 셜록에게 표정이 생겼다. 레스토랑에서 쥐라도 발견한 표정이었다.


“사랑스럽다고?”

“그래.”

“날 데려갔던 성인용품 가게를 사랑스러운 곳으로 칭했던 것처럼?”


황당함이 목에 엉긴 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살면서 이보다 빨리 웃음기를 잃어 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테이블에 두 손바닥을 내려놓고 조용히 정색했다.


“내 말 왜곡하지 마, 셜록. 무슨 뜻인지 알잖아.”

“거기에 데려갔던 것도 너고 그렇게 말한 것도 너잖아. 네 말대로 길을 잃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게 아니면 무슨 뜻으로 말 한 건데?”


존은 입맛을 잃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셜록에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길을 가다 날벼락을 맞는 수준으로 황당하고, 정말 몰라서 묻는 경우와 모르는 척 묻는 경우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조금 곤란할 뿐. 다만 자신을 오해하도록 두는 범위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라, 존은 궁리했다.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어, 조금 많이 궁리했다.


“토끼가 잠을 자는 모습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내가 이해를 못 하는 이유는 알겠군.”

“그래, 좋아, 그럼 네 관점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터졌을 때의 기분을 떠올려 보라고.”

“비유가 적절치 못한 것 같아, 존. 연쇄살인 사건이 터졌을 때의 내 기분을 네가 정말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셜록은 의심스럽단 표정을 지었고 존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오늘 밤 일은 기필코, 절대적으로 블로그에 쓸 것이었다. 문득 손으로 닭을 가리켰다.


“모리스 씨를 봐.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둥근 몸과 흰 깃털과 귀여운 부리를 보라구. 그래, 그래! 사랑스럽다는 말은 곧 귀엽다는 말이야. 이해를 못 하겠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은 취소하고, 대신 귀엽다고 하지. 여자친구의 환심을 사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이 귀여웠다구. 옷가게도 귀여웠지. 분명히 소년도 제 여자친구를 귀여워할 테지.”

“십 년도 살지 않은 주제에 뒷감당 못 할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멍청하다는 뜻 같은데.”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잖아.”


감흥 없이 중얼거린 셜록의 시선을 되돌리기 충분한 말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하얀 가면 같은 셜록의 얼굴이 천천히 존을 향해 돌아갔다. 맙소사. 존도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셜록 홈즈라는 인간 앞에서 읊기는 죽을 만큼 싫었지만 셜록이 점점 눈을 흐릿하게 뜨고 쳐다보자 마침 보라색 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을 꽉 막힌 인간으로 취급하며 해명을 요구했던 것이 떠올라 도리어 따질 수 있었다.


“왜? 뭐? 꼭, 성인 남녀가 서로 좋아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영리하게도 셜록은 답 대신 더욱 눈을 흐릿하게 떴다.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존이 이마를 긁었다.


“꼭 성적인 관계어야 사랑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 네가 일이랑 결혼했다고 한 말을 지금 생각해 보면 너도 사랑이란 걸 하는 거야. 관찰하는 거. 추리하는 거. 사건을 해결하는 거, 그것도 사랑이지……. 네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그 대상을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하기도 하고. 끼니도 거르잖아. 그게 사람이든지 일상이든지, 다 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잖아. 물론 내가 너한테 이런 설명을 할 주제는 아니다만, 내 말은, 너무 낯간지럽고 뭔가 좀 이상하지만, 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공허하지 않은 것도, 음. 관두자. 잊어버려. 잊어버려.”


마무리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존은 얼른 항복하듯 테이블 위에 두 손등을 얌전히 올렸다. 열리지 않을 문에 이마를 대고 중얼중얼거린 기분을 들켰을까 봐, 그 무감각한 얼굴에 대고 사랑이 무엇인지 얼굴을 붉히지 않고 말할 수도 없으면서, 감정의 수용력이 우위에 있다고 믿으며 이것저것 가르쳐주려 했던 제가 우스워 보였을까. 친구라고 생각지 않기에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는 소시오패스와, 수시로 그 얼굴에 주먹을 꽂아 주고 싶은 제 마음이 다칠까 봐 동료라고 꼬박꼬박 정정하던 자신의 속내도. 말한 적 없는 신체 치수까지 알아맞힌 그 초록 눈이 제 마음까지 들여다본다고 갑자기 버럭 문을 닫아 버리다니, 새삼스럽게. 제가 초대했으면서. 사실 저 자신도 무슨 말을 지껄인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으니 셜록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존은 자위했다. 셜록이 묘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입을 뗄 때까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음…….”

“조리 있는 설명은 절대 아니지만 내가 똑똑한 덕에.”


젠장.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제가 지껄인 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놓쳤으리라 간절히 기도하며 존은 상그리아를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갑작스러운 머리의 과부하를 식혀 주길 바랐다. 술기운이 오르기 전까지는. 갑자기 식욕이 돋은 것처럼 파스타를 꿰어 입에 넣었으나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떠나 버린 말들이 문자화되어 레스토랑 안을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갑작스런 자기개방에 놀란 것은 셜록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에 많은 것이 포함된다고, 그리고 너란 사람도 들어가 있다고 멱살을 잡고 외칠 줄이야. 그래놓고 실수였다는 듯 얼른 입을 닦아버리니, 횡설수설 중에 얻은 정보들로 추론하는 존 왓슨이라는 인간의 과거와 내면을 하나하나 꼬집어 봤자 그의 마음의 평화엔 도움이 되지 않겠지. 재미는 있겠지만. ‘작고 귀여운’의 출처는 근처에도 가기 싫으니까. 셜록은 왜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관심을 표현하는데 그렇게 안달인지, 성냥탑을 위협하며 존이 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멱살 잡힌 채 들은 말치고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좌심실 부근을 존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긁적거리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 거길 왜 건드리느냐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싶은. 대신 셜록은 느슨해지는 마음을 감싸듯 테이블에 두 팔꿈치를 놓고 입술에서 두 손을 모았다. 후유증이겠지. 양귀비 씨앗이나.


둘이 침묵하는 동안 안젤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리스 씨는 존의 외투 아래에서 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울었다. 테이블엔 아직도 촛불이 조용히 타고 있었고, 유리병에 맺힌 물방울이 소리 없이 뭉쳐 주륵 흘러내렸고, 메뉴를 멋대로 주문했다고 타박했으면서, 존의 접시는 빠른 속도로 비어가고 있었다. 이런 소소한 일상, 이런 별것도 아닌 즐거움이라면 개 훈련법보다는 낫지 않은가. 존은 파스타를 우물거리며 넋을 놓은 채 사람들이 내는 소음 속에 몸을 숨기고 회복 중이었다.


“새 둥지.”


셜록이 뱉어냈다. 존은 테이블을 들르며 손님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는지 말을 거는 안젤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되물었다.


“뭐?”


셜록도 꿈 같은 관찰 속에서 벗어났다.


“토끼나 미성년자는 몰라도 새 둥지는 조금 사랑스럽더라고.”

“……새 둥지가 사랑스럽다고?”

“왜, 전혀 공감이 가지 않나 보지?”


어디 한번 그렇게 말해보라는 듯 셜록이 존과 시선을 맞췄다. 솔직하자면 시체에 난 멍이 우연찮게 하트 모양을 그릴 때나 사랑스럽군, 이라고 말하는 셜록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 존의 최선이었다. 그러나 존은 컵을 쥐며 짐짓 산뜻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사랑스럽고말고. 새를 건너뛰고 둥지를 떠올릴 수 있는…… 섬세함, 도 꽤 놀라운걸.”

“내가 말했잖아. 존 왓슨은 의사 그 이상이라고.”

“오, 그럼 이 훌륭한 무보수 주치의를 위해 계산은 네가 하면 되겠군. 자기 전에 카모마일 차도 한 잔 만들어 주고. 이 더러운 닭도 네가 들고 가. 생존하는 가장 친절한 소시오패스로 만들어 줄 테니.”


이마가 주름질 정도로 눈썹을 들고 진지한 존의 얼굴을 셜록은 외면하며 가볍게 웃었다. 안젤로가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섞인 두 영국인의 테이블에 혼란을 더했다. 보나페티, 라고. <끝>


2020.02.29 DANGCHU님께서 그리신 멋진 작품 같이 보아요 ㅜ.ㅜ 매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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