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적인 관계가 나오지는 않으나, 스폰서물이라는 소재가 활용되니 혹시 불편하신 분들께서는 살포시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피스틸버스 : 관계 시 피스틸의 등에는 스테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꽃이 새겨진다는 설정. 꽃의 갯수는 관계 횟수에 비례하고, 꽃의 종류는 관계를 맺은 스테먼의 수를 뜻함.

 

 

 

 

w. 도화

 

 

 

 

"...놔."

"이제야 제대로 봐주네."

"..."

"놔?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야?"

 

준면의 한 마디에 세훈이 매섭게 그를 몰아세웠음. 자신에게 붙들린 이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봐라봐 주지 그가 미웠어.

준면이 세훈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어. 낮게 가라앉은 세훈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플 줄이야. 전부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세훈의 앞에 서자마자, 버거운 울림이 심장을 뒤 삼키고 있었지.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이렇게 네 앞에 서 있는 날 한심하고, 또 한심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준면이 세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또다시 비틀었음.


하지만 세훈은 그런 준면의 행동을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지. 심장이 타들어 가고 또 타틀어 갔어. 상처받을 거란 걸 알면서도, 바보 같은 김 준면은 또 스스로를 탓할 걸 알면서도. 못되디 못된 말만이 입안을 맴돌고 있었음. 세훈이 준면의 턱을 느릿하게 잡아채 자신에게로 돌렸어.

 

 

"지금 네 처지를 모르는 거야?"

"....오 세훈."

"함부로 이름을 담으면 어떡해."

"...."

"응? 김 준면씨."

 

자신을 바라봐 주지도 않는 준면에, 오히려 무너지는 것은 자신이었음. 비 오던 그날보다, 단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자신이었지. 이기적인 마음, 그저 치기 어린 유치함, 더럽고 추잡한 질투. 한심해, 오 세훈. 세훈이 눈을 꾹 감아올리며 헛숨을 삼켰어. 됐다. 그만하자. 준면의 이런 모습이나 보려고, 그를 여기에 데려온 게 아니었음. 뒤늦은 후회가 또 찾아왔지.

 

그 순간, 준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음.

 

"...이사님."

 

바닥으로 처박힌 자존심에 준면의 고개는 옆으로 홱 돌아가 있는 상태였어. 세훈이 그런 준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어. 자신을 부르는 저 말에 이성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었음. 우리 관계는 이미 진작에 전부 끝났다는 듯. 모든 것을 외면하는 저 말.

 

"하,"

"..."

 

세훈의 입술 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음.

 

"지금 네가 할 일이 뭔 거 같아?"

"...."

 

정적을 따라 준면을 향해 세훈의 물음이 천천히 쏟아져 내렸음. 준면을 만나면 이렇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스폰서를 찾고 있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 자신도 모르게 한다고 했지만, 준면은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음.

하지만 자꾸만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뒤로 몸을 주춤 물리며, 자신의 검은 셔츠 자락만을 꾹 잡고있는 준면을 보니 자꾸만 엇나가는 마음이었지.

 

왜, 왜 그렇게 날 피해?

등에 얼마나 많은 꽃이 피었으면, 이렇게 안 보여주려 하는 거야?

 

세훈이 상처받은 얼굴로 준면을 연신 담아냈어.

 

하지만 준면은 이와는 정반대의 마음이었지. 자신의 등에 오직 붉은 동백꽃만이 새겨져 있다는 걸 세훈에게 도저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음. 그걸 보고 오해할 세훈이 싫었어.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했다고 생각할까 봐, 그런 오해를 할까 봐. 세훈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걸 세훈이 아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

세훈이 어느새 자신에게서 두어 걸음 멀어진 준면에게로 천천히 다가갔음. 그리고는 착잡한 얼굴로 준면의 단추를 톡톡 풀기 시작했지.

 

그 순간, 준면의 머릿속으로 위로 헤어지던 날, 그날의 잔상이 덮쳐오기 시작했음. 그날도 이렇게 자신의 셔츠를 풀었던 세훈이었는데. 우린 왜 항상 끝과 처음이 이럴까. 차마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물음이었지. 어느새 마지막 단추마저 풀리자, 그제야 멍했던 준면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음. 준면이 급히 놀라, 자신의 셔츠를 움켜쥐고는 서둘러 뒤로 물러섰지.

 

"...놔, 놔주세요."

"....김 준면."

 

보여주고 싶지 않아….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몰랐음. 이리 당당히 성공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훈에 대한, 자신의 우매한 고집일지도 몰랐지. 하지만 준면은 도저히, 도저히 이를 보여줄 수 자신이 없었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세훈에게만은 숨기고 싶은 마지막 비밀.

하지만 그런 준면의 행동에 세훈의 눈이 더 깊게 가라앉길 시작했음. 잔뜩 상처받은 눈으로 세훈이 하던 행동을 멈췄음. 그리고는 눈을 꾹 감았다가 올리며, 뒤에 놓인 소파로 걸음을 옮겼어. 자신만큼이나 상처를 받은 준면의 표정에, 자꾸만 감정이 복잡해졌음.

 

아직 나는 네 앞에서 내 감정조차 감당할 수 없는 어린애구나.

 

세훈의 눈가가 굳게 닫혔지.

 

"곧 대본 들어갈 거야."

"..."

"읽어 보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 두 작품 다 괜찮은 거니까, 둘 다 해도 좋은데. 그럼 또 입방아에 오르는 건 너니까 잘 생각하고."

"..."

"이번에 다시 이름 알리면, 다른 것도 넣어줄게."

"...."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사님."

 

준면의 입술 새로 그제야 세훈을 향한 부름이 터져 나왔음. 준면이 차마 풀린 셔츠 단추를 잠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세훈만을 바라보고 있었어.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말을 잇는 세훈의 행동에 왠지 모르게 심장이 콕콕 쑤셔오고 있었지.

 

"조건이 있어, 그 대신."

"...조건이요?"

"아무하고도 연락하지마, 내 연락만 받아."

"..."

"오피스텔 알려줄 테니까, 연락하면 거기로 오고."

"..."

"대답."

 

길게 이어졌던 세훈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그 시선이 자신에게로 옮겨졌어. 준면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세훈이 원하는 게 뭘까. 그 물음 하나조차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었지. 준면이 입술을 몇 번이고 벙긋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음.

그저 고개 한 번 끄덕인 게 다였지만, 세훈은 꽤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음. 세훈이 그제야 등을 뒤로 기대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어. 뭐가 이렇게 다 어려운 걸까. 세훈이 잠시 눈을 꾹 감아 내렸지.

 

"..."

"..."

 

그런 세훈의 모습을 준면이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 자꾸만 뒤엉키는 이 마음이 뭔지 몰라,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음. 준면이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푹 숙였어. 울렁이는 목울대가 준면의 마음만큼이나 복잡해 보였음.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세훈이 아닌 거 같았어. 언제나 시선을 잡아챘던 눈매는 더욱 진해졌고, 그 시선 역시 더욱 짙어졌지.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건 오직 자신 하나라는 점은,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그 이별의 날과 별반 다를 게 없었음.

 

 

 

 

***

 

 

 

 

 

그 후 세훈의 말대로 준면에게는 두 개의 대본이 들어왔음. 준면이 조금 멍하게 시선을 던지다 매니저가 건네주는 대본을 받았어. 이 작가님 드라마 엄청 출연하고 싶었던 건데. 준면이 괜스레 대본을 느릿하게 매만졌어. 조금은 기쁘기도, 또 그만큼 쓸쓸하기도 한 기분에 눈가가 끝도 없이 아래로 쳐졌음.

 

그래도 세훈에게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지. 준면이 옆에 놓인 핸드폰을 한 번 만지작거렸음.

 

[대본 받았어요. 감사해요.]

 

하지만 느릿느릿 문자를 친 게 무색하게 준면은 다시 문자를 지울 수밖에 없었어. 고작 두 마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마디가 참으로 어려웠어.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하고, 또 누르려다 결국엔 지우고야 마는-.

 

그때였음. 그런 준면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준면의 핸드폰이 웅- 울리기 시작했음. 짧은 문자 하나가 화면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

 

[대본 받았어?]

 

예전과 달라진 것 없는 번호 열한 자리가 화면 위에 나타났다 사라졌음. 그 번호에 준면의 심장이 괜스레 쿵- 울렸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번호에 볼마저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지. 준면이 괜스레 볼을 꾹꾹 누르며 서둘러 메세지창으로 들어갔어.

 

세훈이 보낸 심플한 메세지 하나에 왜 이리도 멋대로 뛰어버리는 심장인지. 준면이 몇 번이고 그 문자를 바라보았음. 대본 받았냐는 그 말이 이렇게나 복잡한 말이었던가. 또다시 한참 동안 이를 내려다본 준면이 그제야 답을 보냈음.

 

[네. 감사합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한 게 무색하게 짧게 답을 보낸 준면이 옆에 놓여있던 대본을 집어 들었어. 그래도 출연하고 싶었던 드라마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건 나름 좋았던 것인지, 준면은 자꾸만 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숨길 수가 없었지. 이번만 이렇게 하고. 다음엔 진짜 내 실력으로 올라가야지. 또다시 마음을 다잡은 준면이었지.

 

 

 

***

 

 

 

 

"오는데 차는 안 막혔어?"

"네. 괜찮았어요."

 

준면이 오피스텔 문을 열어주는 세훈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어. 세훈은 그렇게 준면을 만났던 그 날 이후, 자신의 오피스텔을 문자로 알려주었지. 이곳에 몇 번이나 더 와야 하는 걸까. 준면이 신발을 벗으며 멍하니 생각했음. 아직 주연 배우가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기에 대본 리딩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어. 준면이 먼저 안으로 들어서는 세훈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미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벅벅 문질렀음. 차라리 스케줄 때문에 바쁘기라도 하면 세훈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도 생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터져 나왔음.

 

"저녁은 먹었지?"

"...네."

 

세훈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짧게 이어진 대화의 끝은 언제나 한 뼘은 깊어진 정적이었음. 세훈의 일방적인 물음에 준면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건넬까 싶어서 괜스레 물었던 세훈은 벌써 여덟 시가 훌쩍 넘은 걸 확인하곤, 더이상 할 말을 찾지도 못했음. 세훈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어. 한참 동안 공허함이 이어졌지.

 

시계만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숨 막히는 시간. 준면을 힐끔 바라보는 세훈의 얼굴로 왠지 모를 긴장이 스쳐 지나갔음. 세훈의 목울대가 깊게 울렁였어. 아무런 행동도 없이 거실 한쪽에 서 있는 준면의 모습에 속마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어. 결국 세훈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음.

 

"대본 들어간 건 다 봤어?"

"...네. 하고 싶었던 작품이어서."

"...그래."

 

하지만 세훈은 자신과 눈도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그저 멍한 시선으로 답을 뱉는 준면을 보며, 자신도 역시나 짧게 대답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음. 세훈이 짙어진 한숨을 억지로 삼켜냈어.

아니, 그 무엇보다 자신을 향해 이어지는 준면의 저 존댓말이 자꾸만 심장을 욱신거리게 만들었지. 입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음.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자신이면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면서-. 저 감정 없는 대답이 이렇게 멀어진 둘 사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 세훈은 착잡한 마음을 좀처럼 숨길 수가 없었음.

 

세훈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소파로 자리를 옮겼어. 준면의 눈동자가 그런 세훈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음.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느릿하게 물었다 놓았지.

저번엔 어찌어찌해서 넘겼다고 하지만, 오늘은 이 밤이 어떻게 지나갈지 모를 일이었음. 자신의 등 뒤에 붉은 동백꽃만이 새겨져 있다는 걸 세훈이 알게 된다면-. 준면이 두 눈이 아래로 질끈 내려갔음.

 

"…피곤할 텐데 앉아서 쉬어."

"…."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서 있는 준면을 보며 세훈이 나지막이 말을 뱉었음. 자신이 많이 불편하겠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도 벅차겠지. 여전히 바닥만을 보고 있는 준면을 보며 세훈이 착잡한 듯 마른세수를 한 번 했음.

자신이 바라던 모든 것이 그대로 어그러진 기분에 숨이 턱- 막혀올 거 같았어. 자신이 바라던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준면아."

"…."

"…준면아."

"…네."

 

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준면을 담아냈어. 몇 번이고 뱉어도 그립고 또 그리운 이름이었음. 하지만 또다시 이어진 준면의 존댓말에 세훈이 짙은 숨을 턱- 하고 뱉을 수밖에 없었어.

결국 세훈이 조금은 다급히 준면에게로 걸어갔음. 그리곤 준면의 팔을 붙잡았어. 갑작스러운 세훈의 행동에 준면 역시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 결국 두 눈동자가 그대로 공중에서 부딪혔어.

 

"…."

"…."

 

한참 동안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돌았음.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그 무엇도 꺼낼 수 없는 침묵만이 가득 맴돌고 있었어.

 

 

"..."

"..."

"...네, 이사님."

"..."

"말씀하세요."

 

하지만 그 정적을 서둘러 깬 것은 준면의 느릿한 대답이었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준면이 세훈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매만지며,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어.

 

세훈아-.

 

차마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사라졌음. 세훈 역시 그런 준면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지. 이대로 준면을 끌어당기고 싶었음. 모두 다 자신이 잘못했다며 그리 울기라도 하고 싶었음.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냐고,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되겠냐고-. 그렇게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결국 세훈이 조금은 거칠게 등을 돌렸어.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음. 세훈이 애써 무너졌던 얼굴을 감춰내며 말을 이었어.

 

"난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서 자."

"..."

"..."

"...저 혼자요?"

 

그리곤 소파에 털썩 앉아 앞에 놓인 서류들을 집었지. 그런 세훈의 모습에 준면의 얼굴 위론 또 다른 당황이 번져가기 시작했음. 그냥 먼저 가서 자도 되는 건가.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건가. 준면이 자신의 셔츠 끝을 매만지며 세훈을 다시 힐끔 바라보았어. 하지만 세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서류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음.

결국 준면이 아무런 말도 없는 세훈을 보다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어. 그냥 차라리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때 피하는 게 나을 거 같았음. 내가 가서 잔다고 한 것도 아닌데, 뭘. 준면이 여전히 땀이 범벅인 손을 슥슥 문지르며 입술을 꾹 깨물었어. 그리고 현관 옆쪽으로 자리한 손님방의 문고리를 잡았지.

 

"...거기 말고. 내 방 가서 자."

 

하지만 준면은 어느새 자신의 뒤에 온 건지, 바로 뒤에서 들리는 세훈의 목소리에 그대로 숨을 흡- 들이킬 수밖에 없었어. 문고리를 잡은 자신의 손 위로 겹쳐지는 세훈의 큼지막한 손에 괜스레 심장도 쿵- 떨어졌음.

결국 줌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돌려세우는 세훈의 손길을 그대로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 세훈이 그저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있는 준면을 보다 터지는 한숨을 애써 삼켜냈어. 그리곤 준면을 천천히 이끌어 자신의 침실로 향했지. 몇 번 사용한 적도 없는 손님방에서 준면을 재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

 

“….”

“….”

 

하지만 아무런 말 없이 세훈의 손에 이끌려 방에 도착한 준면은 순간적으로 훅- 끼치는 세훈의 짙은 향에 숨을 또다시 들이켤 수밖에 없었지. 늘 언제나 자신을 안아주던 그 향이 폐 속까지 가득 번지는 기분이었어.

 

이렇게 변한 건 없구나.

 

준면의 목울대가 한 번 울렁였지.

 

“누워.”

“…아. 아니에요. 그냥 소파에서 잘게요.”

 

누우라는 듯 세훈이 침대를 가리켰어. 준면이 그 말에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소파로 걸음을 옮겼지.

 

“얼른. 소파에서 재울 거였으면 방으로 들여보내지도 않았어.”

“….”

 

결국 준면은 세훈의 꽤나 완강한 고집에 세훈의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음. 그런 준면의 어깨까지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세훈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표정을 유하게 풀었지.

 

"이만 자. 앞으로 바쁠 테니까 많이 자 둬."

"..."

"..."

"...네."

 

하지만 짤막하게 뱉어진 준면의 존댓말에 세훈은 또다시 씁쓸함을 억지로 삼켜낼 수밖에 없었지. 세훈이 어느새 눈을 꾹 감은 준면을 연신 담아내다, 그제야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음. 그리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꾹 잡았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엔 터져버릴 것만 같았어.

 

"...그리고, 둘이 있을 땐 존댓말 하지 마."

"...이사님?"

"그 이사님이란 소리도."

 

그 말을 끝으로 세훈이 방문을 나섰음. 둘이 있을 땐.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아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했다간 허튼 소문이 돌면 준면이 피해 볼 게 분명할 테니까. 세훈이 눈을 꾹 감았다가 올렸어.

 

그래, 이렇게 천천히-.

 

살며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꾹 감겨 있던 준면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어. 준면의 눈동자가 잔뜩 흔들리고 있었음. 준면이 쿵쿵- 울리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며 자리에 앉았어.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너무나도 많은 데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지.

 

"…어떡해."

 

준면이 눈을 질끈 감아 내렸어. 세훈의 손길이 닿았던 모든 곳이 멋대로 날뛰고 있었음.

 

 

 

 

 

***

 

 

 

그날 이후로 준면은 생각이 자꾸만 많아졌음. 혼자 착각한 거라고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자꾸만 세훈에게 기대하게 되는 자신이 미워졌어. 자신의 등엔 늘, 언제나 세훈 하나였던 것처럼. 그에게도 항상 자신이 먼저이지 않았을까.

 

"...미쳤어."

 

하지만 준면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몇 번이고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지.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준면이 아직 첫 촬영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음.

 

그리고 그건 세훈 역시 마찬가지였지. 점심시간이 막 끝나가는 시간. 이사실에서 제대로 된 점심도 챙겨 먹지 못하고 일을 하던 세훈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음. 바로 앞에 걸려 있는 시계는 한시를 막 가리키고 있는 중이었지.

 

"...밥은 먹었으려나."

 

자신 역시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으면서. 세훈은 자꾸만 생각나는 준면에 일을 하다 멈추고, 펜을 움직이다 또 멈추길 반복하고 있었음. 결국 자꾸만 엉겨가는 생각들에 낮은 숨을 뱉은 세훈이 들고 있던 서류마저 책상으로 내려놓았음.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어 준면의 번호를 꾹 눌렀어. 자신이 이렇게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나, 우스운 생각마저 몇 번이고 차올랐지.

 

[...이사님?]

 

그러자 준면 역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모양인지, 금세 핸드폰 너머로 말간 목소리가 들려왔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층은 밝아진 그 목소리에 세훈의 얼굴로도 알게 모르게 웃음이 서렸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준면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사님이란 소리는 그다지 기분 좋지 못한 것이었음.

 

"..."

[아. 세…, 훈아.]

 

하지만 그런 세훈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곧바로 준면에게서 그의 이름이 뱉어졌음. 그날 이후 준면은 세훈과 전화를 할 때나, 단둘이 있을 때는 곧잘 이름을 부르곤 했지. 물론 그렇게 불러 달라는 세훈의 요구 아닌 요구 때문이었음.

 

"…응. 밥은 먹었어?"

 

그 부름에 세훈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정신을 붙잡았어. 불러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이면서. 자신은 매번 준면이 저렇게 불러줄 때마다 발끝까지 저릿하는 온몸을 참을 수가 없었음. 고작 그 이름 하나가 뭐라고. 결국 세훈의 입술 새로 헛웃음이 또다시 뱉어졌음.

 

참으로 지독하게 좋아하긴 하는구나.

 

[…아니. 별생각이 없어서.]

"….“

[….]

”….“

[…무슨 할 말 있어?]

 

핸드폰 너머엔 세훈의 얕은 숨소리만이 울리고 있었어. 잠시 입술을 축인 결국 준면이 천천히 물음을 뱉었지. 세훈의 오피스텔로 가려면 아직 3일이나 남았는데. 준면이 핸드폰을 다시 고쳐 쥐며 세훈의 답을 기다렸음. 헛된 기대의 끝은 결국 파멸뿐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어. 준면이 자꾸만 커지는 기대를 억지로 누르며 마음을 고쳐잡았지.

 

"..."

[...]

 

준면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서 긴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음. 멈칫함을 잔뜩 머금은 준면의 물음에 세훈 역시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어. 그냥 궁금했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너도 혹시 내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저 그 말 한마디면 되는데. 못된 자존심인지, 그것마저 되지 못하는 자신의 얄팍한 마음인지는 모르겠다만. 입술이 잠긴 것 마냥 그 한 마디를 뱉기가 어려웠음.

 

"…몸 신경 써. 곧 드라마 들어가잖아."

 

결국 자신이 선택한 것은 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그 허울뿐인 틀. 스폰서인 관계를 그렇게나 부정하고 싶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면서. 세훈은 결국 또다시 드라마 핑계를 대고야 말았음.

 

[…응. 신경 쓸게.]

 

세훈의 말에 준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음. 그래, 뭘 기대한 거야. 김 준면. 준면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바보 같은 모습에 어깨를 아래로 축 내렸음. 혹여나 싶었던 마음이 다시금 아래로 잠기기 시작했지.

 

"..."

 

하-. 하지만 얼핏 들어도 축 처진 준면의 목소리에 또다시 한숨이 터진 건 세훈이었음. 세훈이 자신의 머리를 한 번 헝클이며 입술을 몇 번이고 축였어. 안 그래도 자신에게 마음조차 열지 못한 애한테 지금 무슨-. 세훈이 자꾸만 타들어 가는 속을 다잡으며 조금은 다급히 말을 꺼냈어.

 

"오늘, 집에 올래?"

[…어?]

"아니, 저녁 약속 없으면. 밥이라도 먹자고."

 

서둘러 말을 덧붙이는 세훈은 꽤나 초조해 보였음. 아무래도 스폰이란 관계 때문인지, 집에 오라는 그 말 하나조차 조심스러웠음. 밖에서 단둘이 보는 것도, 이렇게 집으로 부르는 것도. 사진이라도 찍히면 그것은 그것대로 꽤 골치 아픈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준면을 집으로 부르는 건, 그에겐 더 큰 고역이겠지. 뭘 해도 답이 없는 기분에, 세훈은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 기분이었음.

 

"…내가 너희 집으로 가도 돼."

[…세훈아.]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세훈아. 왜 이래.

 

답지 않은 세훈의 행동에 준면의 입술이 벙긋 열렸어. 그리곤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숨을 흡, 들이켰지. 오늘 무조건 봐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준면이 저 멀리 걸려 있는 시계를 힐끗 보곤 입술을 꾹 다물었음.

왜 이렇게 다 어려운 걸까. 준면이 괜스레 몸을 바르작거렸음.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어. 우리가 서로의 집에 찾아가고, 이렇게 점심시간을 틈타 전화하고. 이런 사이는 아니잖아. 그럼 안 되는 거잖아.

 

[….]

”….“

 

아무런 말이 없는 준면에 세훈 역시 덩달아 입술을 다물었음. 자신이 복잡한 만큼이나, 아니 자신보다 더 복잡할 준면을 모를 리가 없었지.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준면을 결코 이대로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음. 세훈이 괜스레 튀어나올 것 같은 재촉을 억지로 삼키곤 준면의 답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음.

 

준면 역시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세훈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올렸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아. 자신의 집으로 세훈을 부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었음.

늘 드나들던 세훈의 오피스텔도 아니고 자신의 집? 자신의 스폰인 세훈이? 결국 줌면이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번 했음. 세훈의 스폰을 받겠다 했을 때, 자신이 무슨 기분으로 그곳까지 갔는데. 어떤 기분으로 거기에 갔는데. 준면이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고쳐잡았음. 그리곤 꽤나 단호한 목소리로 답을 뱉었지.

 

[3일 뒤에 네 오피스텔로 갈게.]

"…김 준면."

[…이건 아닌 거 같아, 세훈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게 얼마나 큰 욕심인지 알고 있었음. 자신이 얼마나 큰 것을 욕심을 내는지. 준면이 숨을 안으로 연신 삼켜내며 눈을 깊게 감았음.

세훈 역시 그런 준면의 말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지. 이건 아닌 거 같아, 세훈아. 이 말이 왜 이리도 심장에 박혀 떨어 지지가 않는지.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자고 그렇게나 마음을 먹었는데. 늘 자신은 제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한심한 어린 애일 뿐이었음.

 

그리고 그건 오늘도, 역시나.

 

"…그럼 네가 와."

[오 세훈]

"오늘 스케줄 없잖아."

[….]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잊은 건 아니지, 준면아."

 

못되게 쏟아지는 말. 준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해서 내리꽂히는 그 말에 세훈이 자신의 주먹을 한 번 꾹 쥐었음. 이 잔인한 관계를 이용해서라도 준면을 봐야겠는 이 마음에 자꾸만 심장이 아렸고, 준면을 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에 자꾸만 온 얼굴이 무너져 내렸음.

 

[….]

”….“

 

세훈의 말에 준면은 한참 동안 답이 없었음. 그리고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 자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공허한 침묵과 함께 전화가 끊겼음.

 








생각보다 썰이 길지 않았어서, 피스틸버스 썰은 이 편이 마지막 백업본 입니다ㅠㅠ! 뒤에 조금 남았는데 별로 안 되서, 그것만 그냥 백업할지 아니면 뒤를 붙여서 같이 올릴지 고민중이에요! 뒷부분을 포타에서 이을지 트위터에서 이을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혹시 좋은 의견 있으시면 plz...

그럼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桃花 도화 / RPS 찬백 세준 @dohwa_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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