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대상을 직시하지 않고 화상으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미지에 대한 기억은 순식간에 왜곡되고, 그 이전에 이미지에서 왜곡‘되어야’ 하는 부분을 취사선택하여 왜곡‘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곡이 가능하려면, 바라보아야 한다. 그림을 그릴 때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사실 거짓말이다. 대상을 보는 시선에는 이미 주관이 개입되며, 주관을 개입하기도 전에 우리의 뇌와 눈은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하지만 그러한 응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왜곡이라는 단어의 심상과는 달리, 사실은 정말 ‘보여지는 대로’ 볼 뿐이다. 무엇을 볼건지 이전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선행되는, 그러니까 본 것을 어떻게든 제대로 보기 위한 그 전쟁을. 


진실과 사실 사이를 가르는 치명적인 차이점처럼, 왜곡된 시선은 우리에게 진실만을 알려준다. 인간이 왜 그토록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지, 그래서 얻는 감정적 위안은 무엇인지. 어쩌면 사랑은 그 간극에서 피어나는지.


영화에서 여러가지 시선에 대해서 그리고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러한 공간의 결과로 고립을 보여주되 동시에 오롯한 안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정과 고립은 왜 함께하는지, 반대로 서 있는 관념의 짝패들은 어째서 서로의 근거가 되고 있는지. 또는, 어떠한 것들은 자신의 소멸이 존재 목적이 되는지.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어째서 죽음은 인간의 젊음을 담보해야하는 것인지. 늙음의 귀결은 죽음이지만, 죽음이 늙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어째서 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젊음’을 표상하는지. 죽음이라는 사실, 그리고 죽음의 전제는 늙음이 아니라 젊음의 결과라는 점.


어찌 되었든 회화는 바로 보는 일과 바로 보지 않는 일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을, 전투가 아닌 전쟁을 기록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그려놓은 그 그림 한 점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혹은 보지 않았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선택의 기로에 놓여져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기만적인 것일까. 

그 기만을 매우기 위한 전쟁이 삶일런지도.

@dug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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