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31일이다. 서른두 번째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날이다.


작년 8월 31일에는 이런 일기를 썼다.


팔월 삼십일일 여름의 끝날에 있다고 생각한다.

입추는 지났지만(입추는 팔월 칠 일이었다). 나는 늘 그렇게 셈해왔어. 유월 칠월 팔월은 여름, 십일월 십이월 일월 이월은 겨울이라고. 

여름의 마지막 날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에 관해서는 몇 번 생각한 적 있다.


멸망은 대부분 내일 한다. 미루기 대장인 내가 미룬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오늘 뭘 할래?" 

멸망 앞에 꼭 남겨두는 하루가, 나는 좋았다. 하루가 남아 있어서 나는 불안이나 절망보다 그런 것들에 눈감겨주는 것들을 찾았다. 맛있는 거 먹을 거야. 재밌는 거 할 거야. 친구와 상의 끝에 세상의 마지막 날 은행을 털어서 빕스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빕스에서 돈 받을까? 내일이 멸망인데? 요리는 해? 내일 멸망인데? 모르겠다. 멸망 어렵다. 벌렁 누워서 그랬다.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응. 재밌는 일 생겼음 좋겠다. 응


지금의 나는 그냥 누워 있을 것 같다. 가능하면 가족 옆에 눕고 싶다. 어릴 때, 더위를 피해 거실에 대자리를 펴두고 다 같이 다닥다닥 누워 잤던 것처럼. 조금의 초조함도 느끼지 않았던 그 여름밤을. 다시 한번. 


친구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한다고 했다. 그러고 한참 있다가 역시 살아서 고백한다고 한다. 멸망이 버튼을 눌러줘야 작동할 정도의 사랑은 어떤 무게인지. 마음이 애달프면서도 귀엽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하나도 나쁜 게 없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시에 죽을 수도 있고 이 꼴 저 꼴 이제 관심도 없는 것들 안 보고 살아도 되고. 어쩌다 남은 관심 발견해서 나에게 화날 일도 없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겠지. 더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비관인지 낙관인지 헷갈린다. 


멸망은 대부분 내일 한다. 그러나 내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내일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분리수거를 하고 다회용 장바구니를 다시 네모나게 접었다. 약 꼬박꼬박 먹고 베개도 제대로 목을 받쳐 베고 깊게 자려고 눌러뒀다. 


팔월의 마지막일 뿐이다. 모든 마지막을 멸망처럼 여기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과대한, 망상에, 시달리지 않으려 하면서 구월의 다짐을 이걸로 정했다. 구월은 구원과 닮았다. 구원과 구월. 구월과 구원. 구원을 자꾸 밖에서 구하는 일도 그만둬야 할까? 가을을 여름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여기는 일도? 아무튼 여름이 끝났다. 


문 밖 생활을 그다지 하지 않는 나에게도 이번 여름은 역병에 빼앗긴 모양이 되었다. 어쩌지도 못하고 팔월이 끝난다. 여름에 시달리질 않아서 구월이 왔다는 말에도 엉거주춤 있었다. 유난히 팔월의 삼십일 일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이렇게 내내 엉거주춤 보냈기 때문에. 

남은 하루, 마지막은 제대로 보내주고 싶어. 

고백처럼. 

살아서. 



서른두 번째 사랑에 빠질 것 같은 8월 31일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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