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이름으로


16. 영원의 이름 (中)


written by. 은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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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개를 든 히나타를 두 쌍의 눈동자가 예민하게 살폈다. 그를 번민케 하던 고민이 전부 사라진 듯한 눈동자는 명료하게 빛났다. 드러난 피부 위로 와 닿던 서늘한 겨울의 빛이 온기를 되찾아갔다. 이제는 익숙한 겨울바람이 살랑이며 히나타의 손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은백의 세상은 히나타의 것이고, 츠키시마 케이는 히나타의 하나뿐인 반려다. 

부드러운 미소가 히나타의 입가에 가득 떠올랐다. 연모하는 이에게서 발견한 온유함은 츠키시마를 더더욱 맹목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알아 봤어?” 

스가와라가 먼저 답했다. 

“…방금 전까지 그 얘기를 했는데, 아직 답을 듣지 않았어.” 

조금 전까지 츠키시마를 향한 못마땅한 기색을 전부 지운 채로. 스가와라의 속마음을 전부 알고 있는 히나타가 으음. 하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깍지 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츠키시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리 쪽도 알아봤지만 그 것뿐이야. 나도, 스가와라도 이 숲에 얽힌 게 뭔지 아직은 잘 몰라. 스가와라가 짐작이 가는 게 있다고 했지만 그건 짐작일뿐. 그래서 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짐작이 가는 게 있다면 왜 그걸 제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북부의 관리인이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나도 아는데, 우리라고 숨기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래, 분명히 하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대는 찾을 수 있다 말했다. 그렇게 자신하더니 왜 아직까지도 못 찾은 건가?” 

냉랭히 쏘아붙인 스가와라가 제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쥐었다. 

“이게 쇼요가 말한 대로, 우리가 알아본 ‘전부’다. 하지만 그대가 말을 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고, 의무도 아니다. 그건 그대도 인정할테지.” 

푸른 유리알 너머의 금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스가와라의 말대로, 츠키시마는 제가 알아보았던 것들을 아직 공개하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에 그 ‘영원의 이름’을 밝힐 반려가 정확히 누구인지 말을 해주지 않았고, 답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나 스가와라의 방해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게 전부라… 확언하십니까.” 

고요히 물어오는 목소리는 기묘했다. 

“먼저 숨긴 것이 누군지, 정녕 말씀해 줄 생각은 없으신지요.” 

“……!” 

잠시간 스가와라가 제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일별하다가 조용히 웃었다. 흐릿한 미소 위로 떠오른 감정을 지워낸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히나타의 당혹과 마주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 북부의 관리인이니. 

“전부 다 알고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그 누구도 알려준 적은 없지만 모든 행동이 전부 제게 집중되어 있더군요. 거기다가 그 날 말씀하셨던 마지막 문장. 솔직히 누군지도 모를 반려에게 이토록 화가 난 건 처음이었으나 계속 고심해 본 결과 한 가지 추론에 도달했습니다.” 

“…….” 

“은백의 주인이 말하던 반려가, 츠키시마 케이다.” 

제 추론이 틀렸다면 죄송합니다. 하고 덧붙인 츠키시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스가와라가 히나타를 한 번 보고,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숨을 뱉는다. 말과 말 사이에 떠도는 낮은 공기가 츠키시마의 어깨를 압박하고, 겨우 내비쳤던 확신이 크기를 달리하며 쪼그라든다. 은백의 숲,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인간 그리고 영원의 이름을 찾는데 필요한 자신의 이능인 지식의 바다. 

그 모든 정황이 츠키시마,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반려께선 무엇을 알아내셨습니까?” 

마침내 단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히나타는 자신의 신수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분노와 냉랭함이 서렸던 얼굴에는 처음으로 온건한 표정이 떠올랐다. 은은한 미소를 띤 스가와라를 보며 히나타는 그가 인정했음을 눈치챘다.  

오랜 시간을 끌어온 신경전도 끝났다. 솔직히 그런 것도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운명이 정해준, 그리고 히나타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 반려이니까. 단지 스가와라가 츠키시마에게 일부러 그랬던 이유는 히나타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보인 작은 심술이었다. 

“잠시만.” 

히나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은 건 당연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평정을 앞세운 히나타가 잠시 제 턱을 긁었다. 

“있지, 딱 하나… 말해주지 않은 게 있어. 스가와라도 처음 듣는 거야.” 

뭐? 숲이 있는 방향에 소음이 들려와 잠깐 숲의 방향에 눈길을 두던 스가와라의 고개가 홱하니 돌아갔다. 왜 제게 말해주지 않았냔 추궁이 엿보이는 눈동자가 히나타의 옆 얼굴에 쏟아졌다. 그 따가운 시선을 모른 척 외면하면서 제 품에 무엇인가를 꺼내들어 펼쳤다. 스가와라도, 츠키시마에게도 익숙한 그것은 히나타가 늘 들고 다녔던 고서였다. 

미색의 손가락이 천천히 책장을 하나, 하나 넘긴다. 스가와라와 츠키시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글자들이 히나타의 앞에서만큼 무장해제가 된 듯 선명한 색채를 띄며 유려하게 그려 나간다. 말간 눈동자가 작은 글자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였다. 

세 사람이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바람이, 손가락 끝에서 일어나는 얕은 마찰음이 화음을 이루며 주변에 퍼져 나갔다. 

아. 약한 신음과 함께 멈춘 책장의 끝에, 둘에겐 여전히 보이지 않을 활자가 히나타의 눈 앞에서 어지러이 흩날리다 단어를 완성했다.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숲에는, 깊은 숲 속에 존재하는 기록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주인에게 내려질 마지막 비밀. 영원의 이름을 부르면 잠들어 있던 가장 오래된 기록이 깨어나 주인을 완성할 것이다. 태초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현존하는 숲의 심장에 가까운 존재가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히나타가 츠키시마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오는 마지막 문장. 확언할 수 없기에 스스로 만들어 낸 상자에 꼭꼭 눌러 담았을 비밀. 히나타와 츠키시마 사이의 거리는 여전했으나 둘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실제적인 거리는 전부 허상이고, 진짜 마음은 늘 서로에게 닿고 있음을. 

“그게 다야.” 

히나타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햇살 아래서 보이는 귓바퀴 끝이 붉었다. 작은 체구의 사내에게서 전해지는, 고백을 닮은 언어가. 그리고 그가 찾아내야 할 마지막 이름이. 한데 섞여들어 사내의 반려에게 내려졌다. 

별빛과 달빛이 부서져 내린 듯 금빛의 긴 속눈썹이 천천히 깜박였다. 여전히 민망한 듯 눈길을 피하며 약한 휘바람을 부는 히나타의 모습을 보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스가와라의 따가운 눈길을 외면한 그는 제가 해야 할 일을 간신히 떠올렸다. 제게 속삭였던 느린 숨소리를 한껏 음미하면서, 한 자 한자 되짚어갔다. 

“…숲의 심장?” 

“가만, 숲의 심장이라고? 이 은백의 숲에 현존하는 심장은, 유일한 주인인 ‘쇼요’를 상징할텐데. 거기서 명칭하던 ‘존재’라면 더더욱.” 

“그런가?” 

히나타가 잘 모르겠다는 듯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책 모서리를 연신 매만졌다. 스가와라와 츠키시마 둘이서 추측하고, 해답을 내어 놓으려 하지만 자신은 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고심해야 답이 나왔다. 그 옛날 히나타 가의 장자로서 자랐을 때도 그랬듯이. 

결국은, 저 둘에게 달려있을 해답이었다.  

특히나 히나타의 반려인 츠키시마에게 말이다. 멍하니 바라보는 히나타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이런 부담을 지워주지 않으려 했건만……. 

씁쓸하게 감도는 맛을 삼키며 책을 덮었다. 아직도 열기를 띄우며 토론하는 둘에게선 히나타가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들에게서 눈을 돌린 사내는 제 손을 내려다본다. 엄지와 검지를 매만지니 거칠한 느낌도 없는 손가락. 온갖 고생의 흔적이 사라진 손은 보드라웠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속으로 자조한 그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오가 지난 듯 태양은 하늘 높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 넓게 펼쳐진 은백의 세계. 오롯이 히나타 만의 힘으로 가꿔낸 작은 세상은 광활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사내의 금홍색 눈동자 속에 푸른 빛이 일렁인다. 숲. 나무. 근간 같은 것들이……. 

‘과연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은백의 주인으로서, 혹은 최상위의 존재로서 할 법한 본질적인 의문을 떠올린 그가 눈을 감았다. 갇힌 시야 안에 반짝이는 빛들이, 청량하고 투명한 기운들이 푸르게 명멸한다.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히나타는 어둠 속에서 흐리게 산재하는 언어들을 고르고 골라 삼켰다. 

“…무슨 얘기지?” 

스가와라가 중얼거렸다. 저 할 말만을 내뱉고 도망가듯 눈을 감은 사내에게선 더 이상의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말한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지만 그 내용은 심상치 않다. 츠키시마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그의 수려한 아미가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숲, 나무, 근간?” 

“분명 은백의 숲을 말하는 거지? 숲을 이루는 나무, 그리고…….” 

“근간은, 은백의 주인을 뜻하겠지요.” 

말을 끝맺은 츠키시마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은백의 숲, 나무, 은백의 주인……. 금빛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인다. 삼각형을 이루는 것. 그 중심에 있을 영원의 이름. 생각에 잠긴 채 백색 숲을 보던 사내의 입가에 호선이 가득 떠오른다. 뭇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 그들에게서 찬미를 자아내게 할만한 미소가. 

“신목(神木).” 

“신목?” 

되물어오는 스가와라의 음성을 들었는지 살며시 눈을 뜬 히나타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떡인 츠키시마가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 여기에, 오래된 나무가 있습니까? 가장 오래된 나무가 신목일겁니다.” 

아. 스가와라가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이리저리 뒤엉킨, 온갖 기억의 끝에서 마침내 사내가 원하는 답을 찾았다. 지금 이 곳에 있는 이들이 간절히 찾고자 한 마지막 실마리. 스가와라는 고개를 돌려 히나타를 본다. 얇은 막이 만들어 낸 그늘 아래 가려진 얼굴은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완성되지 못한 몸을 가지고 있는 주인을 알기에. 

“어딘지 압니다, 설령 아니더라도 확인은 해볼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세 인영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의자가 덜컹이고, 굳게 닫혀 있었을 문짝은 뜯어지기 직전처럼 너덜너덜했다. 분명 그 전의 온전한 모습을 상실했음에도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세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는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달렸다. 작다고 생각했던 숲은 생각 외로 넓었다. 숨이 차고, 종아리며 허벅지가 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몇 그루, 아니— 셀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나무들이 만화경처럼 스쳐 지나간다. 금목서가 내뿜는 만리향이 인위적인 바람에 진해지고, 주인을 닮은 향을 흠뻑 맞은 채 그토록 간절히 찾던 목적지에 간신히 도달했다. 

아름다운 노란 꽃들 사이로, 홀로 은백색 나뭇잎을 흔들며 고고하게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히나타는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는 것도 잊고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신목.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지지 않고 고아한 빛을 내뿜는 이 은백의 나무가, 고서에서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던 신목일거라고. 

“어때, 좀 알겠어?” 

스가와라가 땀에 젖은 회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물었다. 제법 멀리 왔다. 정화의 힘으로 숲을, 세계를 다스리는 건 히나타의 몫이고 신수인 자신은 히나타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세상과 그 주인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문지기였다. 그러니 이 넓은 곳을 돌아보는 건 스가와라가 할 일이었다. 무엇이 있는 지 기억해야 하는 것 또한. 

재색의 눈동자가 어느 새 신목의 바로 앞에 서서 팔을 뻗어 손을 맞대고 있는 히나타를 보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 위로 가득 떠오른 표정이 계속 변화한다. 혼란과 의심과 확신을 담고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그 행동에서, 신수와 관리인은 답을 얻었다. 이 커다란 것이, 그들이 찾던 신목이 맞다는 것을. 

“맞는 것 같아……,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찾지? 라고 말을 끝맺으려던 순간이었다. 

본신으로 변한 스가와라가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주인의 위험을 눈치챈 탓이다. 츠키시마의 말대로 ‘가장 오래된’ 커다란 나무에 데려다 놨더니, 손길이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 가지를 넓게 뻗어오는 것이 마치 히나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쇼요!” 

누군지도 모를 사내의 고함을 먹은 신목은 주인을 감쌌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저 신목이 히나타를 감싸는 것처럼 보이지? 보호하려는 것처럼 말이야. 나무덩굴 사이로 보이는 히나타와 눈을 맞추면서 생각했다. 으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각을 끊어낸 건 어디선가 들리는 신음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정체 모를 신음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신목이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 팔을 붙잡고 서 있는 사내에게서 나는 소리. 분명 스가와라의 곁에 있었을 츠키시마는 그 난리 속에서 히나타를 붙잡으려 했었는지 신목 가까이에 서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츠키시마!” 

“괜찮습니다, …많이 흘린 것도 아닙니다.”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안색이 창백했다. 바닥에 점점이 쏟아진 핏자국의 양이 적지 않았다.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빠른 지혈이 필요했다. 어떡하지. 히나타는 너머의 츠키시마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혈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덩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흔들고, 당겨보아도 풀어지기는커녕 줄기가 점점 더 내려와 그 주변을 감쌌다. 

이게 뭐야. 더 없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손을 놓아버린 히나타가 머뭇거렸다. 여기서 나갈 방법은 요원했다. 

“안 돼.” 

사내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다친 것도 전부 잊은 듯, 완벽히 고립되어 있는 히나타를 보며. 

“물러 서, 츠키시마 케이!” 

“쇼요!” 

한 달음에 다가가 피에 젖은 손으로 백색의 덩굴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통제를 잃은 시선이 마주친다. 동요가 가득 담긴 노을빛 눈동자가 츠키시마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츠키시마 케이가 부르는, 히나타의 이름. 선계에서 들었을 때와는 다른, 친애와 격정이 깃든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온도가 높았다. 

“다시 한 번 더 말해 봐.” 

히나타가 중얼거리듯, 미약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쇼요.” 

그에 츠키시마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화답했다. 심장이 울렁인다. 이 작은 틈에서도 전해지는 이름. 현재의 상황도 전부 잊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고백의 이름이었다. 

“…어?” 

히나타를 감싸던 덩굴이 풀리며 세상 앞에 다시 내놓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된 일이었다. 온전한 모습으로 풀려난 히나타가 다급히 츠키시마의 곁으로 달려갔다. 반려의 팔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히나타의 귓가로 은은한 음률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 옛날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하고, 다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와 누이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 누가 부르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히나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집중했다. 

“어!” 

피를 흘리며 속살을 내보이던 츠키시마의 상처 위로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완벽히 아무는 상처를 보며 스가와라가 심상한 어조로 뱉었다. 이 노래에, 치유의 힘이 있는 것 같아. 그 뒤로 츠키시마가 긍정했다. 이윽고 두 쌍의 눈동자가 바로 곁에 서 있는 주인에게, 그리고 연인에게 집중한다. 

반려의 팔을 놓으며 노래를 듣고 있는 히나타의 표정이 기묘했다. 

이제 드러난 상처가 없음에도 여전히 숲은 노래한다. 잠들어 있던 글자들이 영원의 이름 아래 깨어나 숲의 주인에게 속삭였다. 히나타. 달콤하게 속삭이는 언어들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츠키시마가 흘린 핏자국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과 노란 별들이 소용돌이치며 형태를 갖추었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폭풍 속에서 청아한 노랫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가장 오래된 기록, 수만 년을 이어온 은백의 세상. 가장 고결하고 가장 순수하며 가장 매혹적인 첫번째 영혼이 제 영토를 찾아 돌아왔으니 이 어찌 기쁠 수 있을까. 이제는 희미한 기록으로 남았을 영광이 먼 옛날 ‘은백의 주인’의 예지로 재현되나니. 이로써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온 몸을 다해 기뻐하리라.]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숲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자가 돌아온 주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곁에 있는 이를 흘깃 보았다. 그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금세 일별하고는 방긋 웃었다. 기록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영원의 이름을 가진 숲의 주인이었다. 

“누구…….” 

의아한 목소리가 흐려졌다. 멀뚱하게 서 있던 히나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 앞의 존재를 살폈다. 

막 생성된 눈의 결정처럼 온갖 더러움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은 새하얀 백의와 한 데 틀어 올린 흑청색 머리카락, 불투명한 천으로 눈을 가린 낯선 이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낀 히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성큼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더욱 강렬해지는 기운은 히나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천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눈이, 히나타를 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온 몸에서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히나타가 한 발짝 더 뗀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 

“쇼요.” 

등 뒤에서 경계가 가득 깔린 낮은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히나타의 작은 몸이 낯선 이의 시야에서 가려졌다. 등을 보이고 선 사내에게서 히나타를 보호하겠단 의지가 엿보였다. 심장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두근거림에 히나타는 가볍게 웃었다. 어색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손을 뻗어 츠키시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애초에 은백의 주인과 신수로 선택 받은 그들과는 달리, 사시절 따뜻한 선계에서 나고 자란 츠키시마에게 있어 숲의 냉기는 쥐약이었으므로, 두꺼운 털옷과 모피로 중무장이 되어 있기에 지금 히나타의 손에 잡히는 옷자락은 보드랍게 감싸 들었다. 추위에 잔뜩 젖어 있었으나 히나타에게는 충분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어깨 너머를 보았다. 

‘어?’ 

히나타의 시야에 츠키시마의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그 위로 넓게 퍼진 금목서, 주변에 산재한 푸른 기운. 그리고… 츠키시마가 소리 내어 부르던 ‘히나타의 이름’. 

히나타가 몸을 옆으로 움직여 낯설고 익숙한 이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치는 마지막 문장. 

[다음에 기록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그 ‘영원의 이름’에 있음이다. 히나타 쇼요의 단 하나 뿐인 반려가 찾아낼, ‘영원의 이름’.] 

모두의 시선이 히나타를 주시한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서 핏자국을, 금목서에 아름답게 피다 낙화한 꽃을, 그리고 푸른 결계로 웅웅대는 하늘을 번갈아 보던 히나타가 마침내 낮은 탄성을 흘린다. 

‘이거였구나.’ 

그 영원의 이름이. 미처 잇지 못한 생각의 끝을 맺은 히나타가 한 발짝 물러나 관찰하는 눈으로 모든 광경을 보았다. 이제서야 보이는 마지막 조각의 열쇠이자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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