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생이지? 장례식 때 도와준.”

 

놀라서 얼굴이 벌개진 아버지의 말에 대휘도 새엄마도 얼어붙고 말았다. 아직 새엄마한테 제대로 변명도 못 했는데 아버지까지 알게 됐다. 만난 지 반년도 안 된 새엄마보다 더 소원한 저를 낳아준 아버지였다. 심지어는 은숙의 계약관련해서가 아니라면 대휘와 이야기도 몇 번 나눌 일 없는 아버지였다.

 

“그 선생이...대휘를...손 댄 거야?”

“여보...”

“말해 봐! 그 선생이 너한테 어떻게 한 거냐고!!”

 

늘 자신에게 무심한 아버지였고 사업 외엔 별다른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던지라 당황한 대휘는 고개를 젓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억울했다. 민현은 저에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어쩐지...널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 그랬어. 변태새끼...가만 두지 않겠어.”

 

대휘는 억울했다. 눈앞에 민현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할 듯 격양된 아버지를 보며 대휘는 무슨 말이라도 민현을 변호해주고 싶었다.

 

“쌤은 저한테...”

“지금 그 놈 편을 드는 거야? 감히 아버지인 내 앞에서?”

 

아버지는 마치 자신의 권위와 자존심이 무시당하고 폄하됐다는 듯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성큼 걸어와 대휘의 멱살을 쥐었다. 마르고 가는 대휘에 비해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인데다 아버지의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어서 갑작스럽게 멱살을 잡힌 대휘는 발끝으로 간당간당 위태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악력은 세서 움켜쥔 두 손이 목을 세게 조여와 대휘는 숨을 쉬는 게 힘들어 얼굴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그렇게 보면 뭐? 한쪽만 쌍꺼풀이 진 그 눈...니 엄마랑 꼭 닮은 눈으로 날 그렇게 보지 마. 널 볼 때마다 날 원망하던 니 엄마가 떠오른다고! 니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임사장네 계약건도 니가 다 망쳐버리고!”

 

대휘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원한 적도 없었고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거라 생각하며 이 집에 온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눈을 볼 때마다 죽은 엄마와의 아름다웠던 시간보다 가장 슬펐을 때, 서로를 미워할 때를 떠올린다는 아버지에 대휘는 다시금 아버지와의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확인했다. 대휘는 그저 같이 있는 시간이라도 조용히 잘 지내다 대학을 가고 독립을 하면 아버지의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저 자신이 그렇게 오만하고 못나 보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그 선생이란 작자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구!!”

 

대휘의 목을 힘주어 쥔 채 흔드는 아버지에 대휘의 몸이 종이인형처럼 팔랑이자 새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제발 그만해요!! 그러다 애 죽겠어요!!”

“놔요! 대휘는 아무 잘못 없어요!”

 

이제 막 집안으로 들어서던 우진이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대휘를 떼어내더니 그대로 쓰러져 밭은 숨을 내쉬며 콜록이는 대휘의 앞을 막아섰다.

 

“소문을 낸 건 나예요.”

“우진아...”

 

우진의 폭탄 발언에 숨을 몰아쉬던 대휘도 아버지도 새엄마도 눈이 동그래졌다. 우진 역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아버지에게 붙들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대휘를 보는 순간 자신이라도 나서지 않으면 대휘가 그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가 대휘한테 무슨 자격으로 소리치는 건데요? 한번이라도 대휘한테 관심가진 적 있어요? 걱정하기를 했어요? 대휘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비행기 핑계대고 안 갔잖아요. 그때 대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럼 그때부터 그 황민현이란 사람이랑 대휘가 만났다는 거야?”

“아버지는 그것만 중요하세요? 왜 대휘가 민현쌤한테 의지했는지는 생각 안 했봤죠? 대휘는! 민현쌤을 보면서...”

 

우진은 비로소 알았다. 왜 자신이 민현을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지. 왜 우진 자신도 민현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건...

 

“대휘도 나도 누군가 괜찮은 어른 남자가 그리웠던 거예요. 비겁하지 않고.”

 

민현은 단 한순간도 비겁했던 적이 없었다. 대휘의 말을 빌리면 아니 민현의 눈빛과 행동을 보면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대휘만을 바라보며 대휘 이외의 사람에겐 한순간도 한눈 판 적이 없었다.

 

“...용감하고...”

 

대휘에게 모든 걸 건 민현이었다. 우진이 협박했을 때도 민현은 대휘가 가장 힘든 순간에 제일 먼저 대휘에게 달려가 대휘의 곁을 지켰다. 우진에게 변명하지도 않았고 대휘를 위해 우진으로 받은 협박도 기꺼이 감내했고 우진의 협박을 대휘가 알고 혹시라도 대휘가 우진을 미워할까 마지막까지도 우진을 보호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민현은 어쩌면 지금 이 루머의 한 가운데 놓인 대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다정했어요.”

 

미련하리만큼 제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대휘에게 함부로 하지도 않고 꼼수를 사용하지도 않는 민현은 교사이자 성인으로써 대휘를 함부로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휘는 민현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우진도 민현을 따랐고 대휘가 좋아한다는 걸 알고도 끝까지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왜 니가 그런 소문을 내?”

 

아버지도 우진의 엄마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우진을 바라봤다. 민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대휘와 민현의 루머가 단순간 루머가 아니라는 것도 알겠는데 왜 우진이 그런 소문의 최초유포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새엄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이 커졌다.

 

“서...설마...우진이 너...”

“그래. 나 대휘 좋아해.”

“우진아...”

“박우진, 그만 해!!”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된 대휘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새엄마만큼이나 겁에 질린 눈빛으로 우진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우진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우진이 쓸쓸하게 웃으며 대휘의 손을 꼭 잡았다. 우진을 말리는 대휘와 대휘의 말에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르는 우진의 모습에 놀람과 두려움으로 커진 새엄마의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 거 겨우겨우 동생이라 생각하면서 마음 정리하는 중이야.”

 

우진은 다시 아버지를 응시했다.

 

“한번만 더 대휘한테 손대면 진짜 나, 대휘 좋아할 거예요. 그럼 아버지가 우리 엄마랑 헤어져야 할 거예요. 아버지는 가정도 아내도 아들도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우진아...”

“엄마도. 나 엄마가 세 번 결혼 할 때까지 엄마가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원망한 적 없어. 엄마가 행복해지길 바래서였어. 하지만 대휘한테 함부로 하면 그땐 엄마 말 안 듣고 엄마 원망할거야. 그러니까 나 계속 보고 싶으면 대휘한테 더 잘해 줘.”

 

우진은 대휘의 손을 쥐고 바닥에 뒹구는 대휘의 가방까지 챙겨 2층으로 올라갔다.

 

“우진아! 대휘야!”

 

쫓아 올라가려는 아버지의 손을 새엄마가 잡았다.

 

“그냥 놔둬요. 대휘만 잘 되면 우진이도 마음 접는 대잖아. 알아서 할테니 나만 믿어요.”

 

 

폭탄 하나를 던져놓고 우진의 손에 끌려 2층으로 우진의 방 침대에 걸터 앉은 대휘가 창가에 서서 창밖을 응시하는 우진에게 조용히 말했다. 창문에 비춰진 우진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가서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해. 아깐 급해서 거짓말 한 거라고. 엄마가 너 얼마나 아끼는 지 알잖아.”

“거짓말 아냐.”

“거짓말 아니니까 말하라고. 이젠 아니라고.”

“지금도 그래.”

“말했잖아. 난 형이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네가 형으로서 날 좋아하면 나까지 널 동생으로 좋아해야 돼?”

“......”

“애써 참을 뿐이야. 너라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민현쌤이라서.”

 

우진은 대휘의 마음을 알고도 접혀지지 않는 제 마음 때문에 저도 힘들었다.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애가 헤어지자 했을 때도 우진은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안좋아했던 건 아닌데 사귀는 동안 좋았는데 그만 만나자고 했을 때 우진은 쉽게 그러자고 했다. 헤어지고 힘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대휘한테는 그게 안 될까. 왜 아직도 비겁하게 호시탐탐 대휘와 민현의 빈틈을 노리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대휘의 마음이야 어떻든 오래오래 대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럴 수 없는 건, 그게 안 되는 건, 4월의 그 밤 한눈에 반했는데, 바로 제 방 옆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고 뽀둥한 얼굴로 일어나면 제 가슴은 정신없이 뛰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이 예쁜 소년이 어이없게도 제 동생이었기 때문이고, 시작도 못 해봤는데 대휘에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남이라면 적어도 일말의 기대라도 해 볼 텐데 처음부터 이 게임은 우진이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그럼에도 그 게임의 한복판에 우진이 서 있는 것이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니 적도 없는 게임 한복판에.

 

“민현쌤만 좋아하는 네 마음은 아는데도 아직 정리되지 않는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하나는 알아. 난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어. 니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걸 다 줄 수도 있어. 아마 너한테 주고 싶은 만큼 다 주고 내 안에 남은 게 없어야 널 보낼 수 있나 봐. 그러니까. 이대휘. 지금은 나 하자는 대로 해. 안 그러면 너도 똑같아. 자꾸 마음 접으라고 다그치면 나 진짜 너하고 남남 할 거야.”

 

우진이 말하는 남남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 대휘는 한숨이 나왔다. 이럴 때 대휘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였다.

 

“혀엉...”

 

대휘의 말에 우진이 픽 웃었다. 형이란 말 진짜 하나도 안 좋다. 대휘의 입에서 나오는 그 형이란 말 정말 싫다. 화가 나. 그래서...

 

“그거 알아? 불리하면 형이라고 하는 거?”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담임쌤이 난감한 얼굴로 대휘를 데리고 교장실로 들어갔을 때 큰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교장선생님 옆에 운영위원장부터 시작해서 다른 운영위원들과 그 사이에 앉은 새엄마까지 회의실로 들어서는 대휘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대휘는 새엄마를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학교 어느 누구도 대휘와 우진이 이복형제라는 걸 몰랐으니까. 담임쌤이 문에서 가까운, 빈자리를 가리켰을 때서야 대휘는 그 옆자리에 먼저 와 앉아있는 사람이 민현이라는 걸 알아봤다. 반가움과 함께 비로소 이 회의의 안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민현의 루머. 루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외부 모르게 상황을 종결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대휘가 조심스럽게 민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자 민현이 돌아보며 심상스럽게 말했다. 그래. 안녕? 잠깐 아주 잠깐 민현과 눈이 마주쳤다. 대휘는 성곽공원에서 민현이 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그냥...아무 말도 하지 마. 아침에 새엄마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그냥...아무 말도 하지 마. 마치 성경 속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며 제자 베드로에게 새벽 닭이 울기 전까지 넌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던 예언이 떠올랐다. 마치 민현도 새엄마도 대휘에게 베드로처럼 거짓말을 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대휘는 새엄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대휘는 소리나지 않게 민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기독교 정신을 이어받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사립학교에서 이런 불미스런 루머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며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 하는 게 의제였다. 운영위원들의 요구는 결국 똑같았다. 마치 여기 모인 목적이 이것이었다는 듯 교육청이나 언론에 나오기 전에 학교차원에서 징계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징계라는 말이 나오자 대휘의 눈은 동그래졌다. 징계. 수시접수도 끝나고 생기부와 내신기록도 다 끝났지만 자신은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민현은 교사였다. 징계라면 자신과 민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루머가 아니라면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걸까. 지금 이 자리에서 루머가 아니라고 조건만남이 아니고 진짜 사귀는 거라고 말하면 다 끝날까.

 

루머의 진위여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운영위원장인 찬원의 엄마의 의견은 사진이라는 물증이 있는데 진위여부가 무슨 필요가 있냐며 징계의 수위를 이야기하는 다수의 목소리에 묻히고 있었고 우진 엄마가 임시운영위원회의에 참석한 학생의 가정에겐 연락이 갔는지 보호자도 없이 학생을 이런 자리에 불러내는 게 적법한지 되물으며 소문 하나만으로 학생에게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하다는 말도 학교의 전통에 누를 끼치고 교사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학생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는 가장 엄중한 징계가 요구된다는 말에 묻히고 있었다.

 

찬원엄마와 우진엄마가 학생에게 징계를 준다면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3학생에겐 데미지가 크다며 루머로 억울한 학생에게 너무 냉정하다고 반론을 폈지만 다른 운영위원들의 징계의 화살은 사진 속 선명하게 나온 민현보다 뒷모습만 나온 대휘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4월에 전학 왔음에도 단숨에 전교 2등까지 올라왔다는데 저항감과 경계심이 더 컸을 것이다. 학생의 보호자가 참석해야 한다는 우진엄마의 의견이 무시될 때였다.

 

“징계는 제가 받겠습니다.”

 

민현의 말에 설왕설래하던 운영위원들 모두가 놀라며 웅성거렸다. 교사만 비난받고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순서가 뒤바뀌어 이 사진 속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민현은 이 루머 이후로 수없이 봤던 사진을 잠깐 봤다. 그날인거 같다. 자몽에이드를 마실 때 빨대를 잘글잘근 씹는 버릇이 있어서 저 날도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날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사귄대도 같이 학교를 나올 수가 없어 대휘가 카페에서 문제집을 풀거나 책을 읽으며 민현이 보내준 기프티콘으로 음료나 디저트를 먹으며 민현을 기다렸었다.

 

“학생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지금 회의의 안건과 목적은 징계 아닌가요? 무슨 이유로든 학생과 교사가 같이 있어 누군가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그건 학생이 아니라 교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사와 학교는 학생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당돌하고 무서운데...”

 

민현이 무표정하게 한 운영위원에게 고개를 돌리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웃지 않을때의 민현의 표정이 얼마나 차가운지 대휘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운영위원 중 한명이 사진을 보여주며 대휘에게 물었다.

 

“정말 황민현선생님하고 만난 적 없어? 이 사진 속 학생이 너 맞지?”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그냥...아무 말도 하지 마. 민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새엄마의 목소리도. 그러나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은 빠져나가고 민현에게만 모든 걸 책임지라 할 수 없었다. 사진 속 학생이 자신이 맞다고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똑같이 받아야한다고.

 

“전...”

“말하지 마.”

 

갑작스런 목소리에 대휘는 고개를 돌려 민현을 바라봤지만 민현은 대휘에게 시선도 두지 않았다.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민현이 대휘에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그냥...아무 말도 하지 마. 대휘에게 대답을 종용하던 운영위원들까지 조용해졌다. 민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대휘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새엄마와 마주했다. 새엄마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내저으며 눈빛으로 대휘를 말렸다. 이 자리에서 대휘와 민현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보호자도 없이 학생에게 진술을 강요하는 건 어른들답지 않습니다. 여긴 법정도 아니고 법정이더라도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학생의 부모가 이런 상황을 알고 추후 책임을 묻는다면 교장선생님이나 운영위원장님 누가 책임질 겁니까? 루머에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이대휘학생이 겪는 수모와 멸시는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 진짜 교육자이며 운영위원들이라면 이대휘학생에게 진위여부를 묻기보다는 이 루머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부터 찾아내는 게 순서 아닐까요. 그 과정을 건너뛰고 루머만으로 운영위원회의 안건이 됐다는데, 그 자리에 피해를 당하는 학생을 불러 일방적으로 답변을 종용한다는 사실이 실망스럽고 참담합니다. 그러니 교사로서 학생을 보호해야 함에도 침묵하는 학교를 대신해 책임을 지고 제가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니 이대휘학생에겐 어떤 경우에도 진술을 강요하거나 처벌 내지 불이익도 주지 마십시오.”

 

민현은 수트 안쪽에서 하얀봉투를 꺼내 테이블위에 올려놓더니 황선생, 왜 그래. 너무 감정적으로 나오지 말고...어쩌고 하는 담임과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뒤도 안돌아보고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쌤. 대휘가 놀란 눈빛으로 나가는 민현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벌떡 일어나자 회장인 찬원의 엄마가 빠르게 말했다.

 

“황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이 루머의 최초유포자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진 한 장 만으로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의심하고 뒷모습만으로 특정 학생의 명예를 훼손하다니 학생의 부모들이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우리 모두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민현의 사직과 운영위원회장의 발언으로 루머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최초의 유포자부터 찾기 위해 찬원이 불려갔고 이어서 대휘에게 처음으로 적대감을 보여 우진과 싸울 뻔했던 경민이 불려갔다. 서경민 담쌤이 너 오래. 담담한 얼굴로 상담을 마친 찬원이 경민을 부르자 경민이 굳은 얼굴로 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갈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민현에게 성곽공원에서 기다리겠다고 문자를 보내놓고 기다리는 대휘를 찾아온 건 우진이었다.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대휘가 민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민현은 받지 않았고 결국 퇴근 후에 성곽길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내놓았는데 여지껏 민현은 오지 않았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우진은 대휘의 손에 들린 아이보리색 후드집업을 건네받아 대휘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 하루 아침에 민현이 떠났다는 소문은 오전이 가기도 전에 학교 전체에 퍼졌다.

 

“쌤이 안 와.”

 

자신 없다는 듯 대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무슨 말인가 싶은 우진이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전화해봤어?”

“안 받아.”

 

대휘의 목소리에서 눈물이 묻어나는 걸 보자 우진은 갑자기 빡쳤다. 남자가 그 쉬운 약속 하나를 못 지키냐. 분명히 말했는데. 애 울리지 말라고.

 

“나 있잖아. 형.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어제 쌤이 여기 이 자리에서 그랬거든.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그냥...아무 말도 하지 마. 비겁하게도 나 진짜 아무 말도 못했어.”

“알아. 엄마한테 들었어...근데...잘했어.”

 

우진도 자신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대휘는 민현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데 자신은 대휘가 아무런 피해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하고 있었다. 이런 자신의 말이 대휘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대휘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우진이었다.

 

“진짜 학교를 떠날 줄은 몰랐거든. 우리...한번도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 체육대회때 반티입고 찍은 단체사진 달랑 하나였는데 이 후드집업 똑같이 입고 같이 셀카 찍었다. 첫 커플룩이라고. 그러면서 자기 보고 싶을 때 보라고...보고 싶을 때 전화하면 쌤이 언제나처럼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소매끝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대휘는 행여 눈물이 날까 두 눈을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를 안 받아. 무서워. 또 지난 번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 떠났을까 봐. 날 안 만날까 봐.”

 

끝내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던 끝내 고개를 돌려버렸을 때 우진은 대휘가 운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손을 뻗어 어깨를 안아 다독여 줄 수 없었다. 대휘를 안아 다독이는 순간 정말 대휘를 안고 다시는 놓치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이 벌을 받나 보다. 처음 자신이 민현을 겁박해서 대휘와 헤어지게 만든 벌. 살면서 자신이 한 행동이 언젠가는 제 발목을 붙들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이 그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듯이 결국 대휘와 저의 관계에서 우진 저는 결코 이길 수가 없었다. 우진은 대휘의 어깨를 감싸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우린 형제니까. 대휘는 동생이니까. 형이 이 정도는 우는 애를 위로해줄 수 있잖아. 우진이 제 어깨에 기대어 소리없이 우는 대휘의 어깨를 안아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그냥...”

 

내 옆에서 그냥 넌 웃기만 해. 난 너 안 울릴 자신 있어. 그러니까...

 

“...넌 행복하기만 하면 돼.”

 

그래도 너한테 난 아니겠지.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래. 그러니까...

 

“민현쌤 데려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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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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