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적 인간들







5

라일락   



모든 게 평소 같아서 참 다행이었다. 며칠 전 회장님과의 일이 어느 정도 잊혀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택에서 돌아온 당일은 끔찍했다. 

그날 밤. 

잔뜩 예민해진 우린 몇 번의 날 선 말을 내뱉었고, 조금 감정이 상했으나, 따로 잠들진 않았다. 항상 그렇다. 신물 날 정도로 싸울지언정 잠은 무조건 함께 잤다. 그래서 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을까 봐 늘 무섭다.


'우리 정말 못 놓으면 어쩌지?'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내가 태형에게 안긴 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답하길.


"난 너 안 놓을 거야."

"말은 뭔들……."

"진짜 안 놓을 거야. 예전에 말한 적 있잖아."


우리 관계가 형제든, 부모든, 불륜이든, 타인이든.


"절대 안 놓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도 도망칠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너 아직도 고딩이니?"


조금 웃었다. 너 정말 아직도 어린 것 같아서. 그래서 그 뒤로는 아무 말 없이 잠을 청했다. 그리고 혼자 생각한다. 그래. 뭐든 좋아. 그런데 말이야…….


'불륜은 진짜 싫다.'


우리가 형제인 것보다 더 싫어. 그건 말이야. 나를 정말 비참하게 만들거든.


'그건 정말이지.'


너무 비참해. 어디 비참만 하겠니? 내 자존감이 땅을 칠 거야. 그래서 그건 너무 싫어.


"……."


그런 생각 따위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 머릿속이 가끔 혼잡해. 아무 일 없이 일상을 보내다가도 불쑥 너와의 관계를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


난 인문대를 나와 걷다가, 저 멀리 경영대에서 태형이 나오는 걸 봤다. 우연이었다. 태형은 오늘 공강이었지만, 세미나가 있다고 했다. 그게 꽤 지루했는지, 너는 기지개를 켜며 네 친구들과 걷는다. 나만 너를 봤다. 너는…….


'회장님께 결혼하지 않을 거라 말했댔지.'


문한윤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했다더라. 하지만 있잖아. 네가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야. 난 저 멀리 걷는 태형에게 시선을 거두며 가던 길을 걸었다. 

회장님이 외아들을 가만둘 리 없다. 베타 집안에서 태어난 알파를 그저 썩힐 리가 없다. 그리고 네가 회장님을 못 꺾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태형이 가진 모든 것은 회장님으로부터 나오니까. 네가 날 만나려면, 네 말대로 불륜 관계라도 되던가, 그도 아니면 네가 가진 모든 걸 버려야 하는 거다.


'내가 그러라고 하면 넌 그렇게 하겠지만…….'


그런 건 내가 싫어. 응. 절대로 싫어. 나로 인해 모든 걸 잃은 널 보는 건, 분명 유쾌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너에게 죄책감을 갖고 살지도 몰라. 


'그런 건 정말 별로.'


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걸었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요즘 나는 두통을 달고 산다. 가끔은 세상이 핑 도는 것처럼 어지러운 것이, 피로가 쌓인 게 분명하다. 계속 아프면 병원에 가자던 태형의 말이 떠오른 건 무시하자.


"……."


하지만 계속해서 지끈지끈. 지속되는 두통에 안색이 안 좋았던 걸까. 함께 걷던 호석이 말을 걸었다.


"너 아직도 머리 아프냐?"

"어, 그러게."

"약을 먹지."

"먹었는데도 그래."

"그거 알아? 두통은 대부분 근육통이래."

"진짜?"


난 호석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호석이 계속 말한다.


"목이랑 어깨 근육이 뭉쳐서 머리까지 아픈 거라던데. 너도 스트레칭 좀 하고 그래라."

"진짜 그래야 하나."

"야, 이리 와 봐. 임시방편으로 좀 풀어줄게."


호석은 날 벤치에 앉힌 뒤 손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날 향해 씨익 웃으며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이래 봬도 안마는 끝내주지. 우리 어머니 자주 주물러 드리거든."

"뭐어? 아픈 거 아냐?!"

"아픈 게 시원한 거지. 고통이 곧 개운함이잖아. 그게 그거란 소리지."

"아니, 그게 무슨……."


무슨 개소리야! 난 호석의 손이 목과 어깨에 닿는 걸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닌 게 아니라, 호석은 악력이 엄청난 편이니까. 그래서 도망치려 했으나, 어깨가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와, 살려줘! 이대로 공포의 안마를 받긴 싫어!  하고 소리치려는데, 웬걸.


"너네 뭐 해?"

"오. 태형이."


조금 전 지나쳤던 태형이 어느새 곁에 와 있다. 태형은 벤치에 앉은 나를 내려보며 내 볼을 살짝 손에 쥐었다.


"뭔데 김석진 얼굴이 이렇게 질렸냐."

"얘 근육 뭉친 것 같아서 풀어주려 그랬지. 너도 풀어줄까?"

"난 됐어. 근데 웬 근육 얘기?"

"머리 아프대."


말릴 틈도 없이 호석이 말했다. 그러자 역시나. 태형의 표정이 곧장 걱정으로 바뀐다. 그래서 난 볼에 닿은 태형의 손을 거둬내며 아무것도 아닌 척 말했다.


"약 먹었어. 괜찮아."

"두통 너무 오래가는 거 아냐? 어지럽진 않고?"

"진짜로 괜찮아. 호석이가 괜히 오버해서 그래."

"이시키가 친구의 정성을 오버로 바꿔 버리네."


호석이 내게 말했고, 난 조금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 겨울에 여기 앉는 건 정말 너무 춥다. 그래서 몸을 일으켰는데, 순간 핑글. 세상이 조금 회전한다. 


"앗……."


지금 휘청였나? 어지러워서 내가 휘청인 건지, 세상이 휘청인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태형이 날 붙은 것으로 보아, 내가 휘청인 게 틀림없다. 내 몸을 단단히 붙든 태형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요 며칠 잠을 못 잤잖아."

"아무리 그래도."

"신경 쓸 일도 많았구."

"……."


내 말에 태형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잠을 설친 이유와 신경 쓰는 일이 무언지 알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고집 하나는 정말 세다.


"안 되겠다. 지금 같이 병원 가."

"야, 나 강의 안 끝났어."

"한 번 빠진다고 큰일나?"

"미안한데, 나 지금 A와 A+ 사이의 어딘가란 말이야. 빠지면 큰일나."


난 그리 말하며 내 몸 붙든 태형의 손을 모두 떼어냈다. 하지만 떼어내는 족족 다시 들러붙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그래서 피식 웃음이 터지려는데, 조금 멀리서 태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아."

"……왜."

"세미나. 다시 시작했어."

"……."


아.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


'한윤이다.'


결국 태형이랑 같은 과로 진학한 한윤이. 아니, 뭐. 그 패거리 대부분이 이곳 경영학과로 온 건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놈들이 그대로 올라온 것과 다름없다. 덕분에 태형과 함께 다니는 애들도, 그 애들이 그 애들. 아니,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한윤이가 널 부르니."


키득키득. 내가 귓속말하며 웃자 태형이 곤란한 듯 답한다.


"그러게."

"아무튼 가 봐. 너도 안 끝났네, 뭐."

"안 가도 돼."

"싫어. 가. 나 이제 멀쩡해. 호석이가 밥 사주면 괜찮아질걸?"


난 몸을 일으키며 웃었고, 호석은 웬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말한다.


"김석진 양심 승천했냐. 돈 많은 네가 사."

"아픈 사람한테 사라고 난리. 아무튼 김태형 너 이제 가."

"그래도……."

"아, 왜 이렇게 질척거려. 전남친이니? 얼른 가."

"그래. 석진이가 어련히 다 하겠냐. 네 애인도 아니고 가라, 가."


결국 호석이 태형의 등을 떠밀었다. 태형의 등을 떠미는 건 언제나 호석의 일이다. 그야 나는 태형이 고집을 못 이기니까. 그래서 호석의 등 뒤로 숨어서 작게 손만 흔들며, 그가 저 멀리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래서 끝에는 한윤이와 함께 돌아가는 것까지.


"……."


그러고 보면 한윤이도 참 순정파야. 난 점점 멀어지는 둘을 보며, 어쩌면 꽤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웃기다. 시간이 지나 회장님 말을 곱씹을수록, 그녀 말이 옳다는 걸 느낀다. 한윤이는 오메가고, 집안도 괜찮고, 날 싫어하는 걸 빼면 사람도 괜찮다. 게다가 회장님 말대로 둘이 결혼해서 얻을 이득은, 내 상상을 초월하겠지.


"……."


김태형이랑 붙어먹으면 안 되는 건 나야. 아주 원래부터 그랬어. 잘못된 건 나야.


"……."


지끈. 지끈. 아파. 머리가 터질 듯 욱신거려 온다. 하지만 별수 없다. 약은 이미 먹었고, 아까 말한 대로 난 아직 강의가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지끈. 지끈. 그런데 이상하다. 왜 점점 심해지지?


'진짜 병원이라도 가야 하나…….'


그래도 오늘은 너무 피곤해. 그냥 바로 집에 가서 잠을 자자. 이게 다 피곤한 탓이니까. 병원은 내일 가지 뭐. 내일은 한가하니까.


'그래.'


다 내일로 미루자. 오늘은 너무 피곤해. 몸도 으슬으슬한 게, 어쩌면 몸살이나 독감에 걸린 지도 모르겠다. 아, 진짜 그런 거면 어쩌지. 독감이라도 걸린 거면.


'잠은, 태형이랑 따로 자야 하나…….'




****




정신없다. 세미나 중간도 그렇고, 끝나고 나서도 그렇고. 나는 아주 정신이 없어 미치겠다. 세미나 도중 연락을 받은 탓이다. 김석진. 결국 먼저 집에 갔구나.


'아까 같이 병원 가자니까……!'


말 진짜 더럽게 안 듣지. 대체 얼마나 아픈 거야. 설마 다른 데 아픈 건 아니겠지? 마음 같아선 연락받자마자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눈앞의 교수들을 두고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어머니 연줄 돈줄 닿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나중에 다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


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7시가 다 되어간다. 병원 문 다 닫았네. 아니, 어차피 부를 거니까 상관없지마는. 이놈의 세미나는 5시에 끝난다 했으면서 아직까지 질질질. 곤란하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김석진…….


'저녁은 먹었나?'


가정부 아주머니가 오늘 오기로 했던가? 집에 밥이 있던가? 아, 있더라도 안 먹었을 것 같아. 


"……."


괜히 초조하다. 석진의 두통이 시작된 게 벌써 이 주나 지났다. 정확히는 저택에 다녀온 그 날부터 말이다. 확신해. 석진은 나보다 더욱 힘들었을 거야.


'빌어먹을 아저씨까지.'


그날 현관에 섰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저씨는 석진의 뺨을 갈기려 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있나. 튀어 나갈 뻔했던 걸 간신히 참았더랬다. 


"……."


몇 년 전인가. 석진이 어릴 적 이야기를 해준 적 있다. 그래도 자기한텐 폭력 휘두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젠 그도 아닌 모양.


'안 되겠다.'


돌아가자. 더는 여기 못 있겠어. 이래서야 주인 잃은 똥개 같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몇 년 전, 석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등학생 시절. 넓은 마당이 생크림 케이크 되도록 첫눈이 내렸던 날. 넌 다른 건 몰라도 눈은 좋아한다며 마당에 발자국을 꾹꾹 찍었다. 그때 우리 뭐랬지? 아. 기억났다.


"김석진 똥개냐."

"기왕이면 똥강아지라고 해줄래?"

"그럼 뭐 달라?"

"더 귀엽잖아."


그리 말하는 넌 웃었는데, 순간 너무 예뻐서 걸음도 멈춘 채 널 바라봤다. 어쨌든. 그래, 기왕이면 똥강아지라고 하자. 그러니 말인 즉, 난 지금 주인 잃은 똥강아지 같다. 그래서 주인 찾으러 돌아가야겠다. 이 정도면 오래 참았어. 그래서 줄곧 어머니 얘길 하는 교수님을 향해 말했다.


"교수님. 죄송한데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혹시 다른 약속 있나?"

"네,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난 코트를 집어 걸치며 인사했다. 진짜 안 되겠다니까. 나 아주 미치겠다니까. 그래서 서둘러 세미나실을 나오는데, 돌연 내 옆으로 누군가 걸어오며 말을 건다.


"태형아, 나도 같이 가."


문한윤이네. 진짜 싫다. 지난번 집에 다녀온 이후 이 자식이 더욱 싫어졌는데, 이놈은 그 뒤로 더욱 들러붙더라. 어쩌다 보니 다니는 무리가 같아 함께 다니지마는, 난 이 새끼가 싫다. 안 그래도 너 때문에 심란하거든. 나도. 김석진도. 그래서 온몸으로 싫은 티를 내며 말했다.


"내가 왜 너랑 같이 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

"꺼져. 너 혼자 먹어."

"그건 곤란해. 너희 어머니가 오늘은 너랑 같이 식사하라 하셨거든."

"……뭐?"


당치도 않은 말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긴 아직도 시끌벅적한 세미나실. 한 걸음만 더 뻗으면 나갈 수 있는데 멈춰버렸다. 문한윤이 하는 얘기가 꼭 미친 것 같아서. 그래서 되물었다.


"다시 말해 봐."

"저녁 같이 먹자고. 너희 어머니가 부탁하셨다고."

"……하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이젠 별 게 다 사람 열받게 하네. 난 문한윤을 미친 사람 보듯 하며 저리 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헛소리 말고 꺼져. 나 지금 급해."

"석진이 보러 가?"

"그래. 김석진 보러 가."

"너네 언제까지 붙어먹을 건데?"


문한윤은 정말 궁금하다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게 같잖았다. 네가 뭔데 내 선을 넘나 싶었다. 그래서 잔뜩 노려봐주며 말했다.


"네가 알 거 없잖아."

"왜 없어."

"없지, 그럼. 네가 뭔데……."

"우리 곧 결혼할 건데."


한윤은 개 같은 말을 내뱉으며, 저도 주변 눈치는 있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으리라.


"너희 회장님이 그러셨어. 우리 바이오랑 합치신다고."

"어머니의 일방적인 생각이야."

"우리 회사 급해. 내부 문제로 곧 와해 될 것 같기도 하고. 주가도 지금 위험해서."

"야. 내 말은 안 듣냐?"

"너희 그룹 자본이 필요해, 라는 건 우리 아버지 의견."

"결론 났네. 부모님끼리 지랄인 걸로."

"내 의견은 아버지랑 다른데, 안 궁금해?"

"어. 안 궁금해."


난 피식 웃으며 이번에야말로 세미나실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겨울 바람이 아주 아리다. 그러고 보니 호석이 말이야. 이렇게 추운데 석진이를 바깥 벤치에 앉혔다. 안마해 줄 거면 실내에서 해주던가. 하지만 석진의 하얗게 질린 표정을 보아, 아예 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혹시 감기라도 걸린 것 아닐까. 돌아가는 길에 죽이라도…….


"김태형."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네. 끈덕지다, 정말. 난 주머니 속, 차 키를 쥐며 잔뜩 인상 썼다.


"문한윤. 적당히 해."

"너야말로 적당히 해. 밥 먹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

"알았으니까, 다음에. 다음에 먹어."


귀찮다. 그리고 질척대. 그래서 난 기약 없는 다음을 먹이로 주기로 한다. 하지만 이놈은 아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회장님이 오늘……."

"야."

"……."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가 뭔지 몰라? 난 검지로 문한윤 가슴께를 꾸욱 밀었다. 기분 나쁘라고. 일부러.


"우리 어머니가 언제부터 네 뒷배가 됐지?"

"……."

"어? 말해 봐."

"……오늘만 먹어. 나도 정말 곤란해."


넌 모르겠지만, 나한테 압박 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 지났어. 그동안은 너, 나랑 말도 섞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다가가지도 못했고.


"태형이 너. 평소보다 날 더 싫어했잖아."

"알긴 아네. 우리 어머니가 너랑 결혼하라더라. 그래서 싫었어."

"왜. 석진이가 맘에 걸려서? 너네 사이 대충 알아. 그러니까 얘기 좀 해."

"……."

"앞으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 나도 너희 회장님이랑 우리 아버지한테 할 말은 있어야 할 거 아냐."

"……."


시발. 일 더럽게 안 풀리네. 난 치미는 화에 머리를 거칠게 털은 뒤, 한윤을 노려봤다. 확신한다. 얘는, 내가 저랑 앉아서 밥 먹기 전까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아. 빨리 가야 하는데. 난 결국 이놈 먼저 후딱 처리하기로 했다. 그래서 물었다.


"문한윤. 차 가져왔어?"

"오늘은 안 가져왔어."

"아주 작정했네."


됐고. 일단 빨리 가자. 밥이든 뭐든 대충 입에 쑤셔 넣고 헤어지자는 소리야. 난 주머니 속 차 키를 꽈악 쥐며 그를 조소했다. 그리고는 차 키를 꺼내 한윤에게 던졌다.


"네가 운전 해. 너 이렇게 나오는 거 보면 예약한 식당 있을 거 아냐."

"……알았어."


한윤은 눈을 반쯤 내리며 답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문한윤 쟤도. 얌전해 보이지만 보통 독종 아니라는 걸. 




****




"하아, 으……."


너무 아파. 진짜 아파 죽겠다. 이러다 머리 깨지는 거 아냐? 게다가 온몸에 열이 올라 정신도 하나 없다.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힘도 없어. 이거. 보통 몸살이 아닌 건가?


"김태형은, 왜 이렇게 안 와……."


난 간신히 팔만 뻗어 폰을 쥐었다. 암막 커튼을 드리워 어둑한 방. 환한 액정에 뜬 숫자는 저녁 여덟 시였다. 세미나. 다섯 시에 끝난다고 하지 않았나?


"하으……."


온몸이 뜨거워. 미치겠어. 꼭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아. 게다가 왜 이렇게 어지러운지. 차라리 정신 잃고 기절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화장실까지 가서 토할 기운도 없으니까.


"짜증 나……."


태형이 말 들을걸. 아까 병원 가자고 할 때 갈 걸. 괜한 고집부려서는…….


"……."


한윤이랑 함께 돌아가는 걸 보면서까지 고집부렸다. 김석진. 지금 생각하니까 완전 병신이네. 심지어는 둘 모습 보며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신, 진짜……." 


그래서 아파 죽는 와중에도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근데 말이야.


'진짜 왜 이렇게 안 와?'


세미나 끝난 지 한참 됐을 텐데. 하기야. 그쪽 교수들이 다 회장님 연줄이니 신경 쓰긴 해야겠지. 그래도, 이 나쁜 새끼야. 나 아픈 거 알면서. 나 오늘 일찍 돌아온 거 알면서.


"흐으……."


개새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널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이 아주 꼬였다니까. 근데 넌 말이야. 내가 이렇게 아파 뒤지겠는데도 안 와?! 대체 뭘 하길래……!


"……."


하는 순간 아주 기분 나쁜 상상이 들었다. 김태형. 


'한윤이랑 같이 있는 거 아냐?!'


아니, 그야 그렇잖아. 회장님이 한윤이 이야기를 꺼낸 지 보름 정도 지났으니까……. 


"……."


한윤이도 이젠 알겠지. 둘이 결혼할 거란 거 말이야. 에이씨……. 안 그래도 김태형 좋아하는 문한윤이 결혼을 거절할 리 없다.


"분해."


분하다. 김태형은 날 좋아하는데. 나한테 미쳤는데. 다시 생각하니 문한윤도 순정파 아니고 그냥 등신이다. 태형이는 내가 다 갉아먹었어. 나한테 벌써 잠식 당했다구.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아……."


아파. 도와줘. 열이,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난 주체하지 못하고 이불 뒤집어쓰고 앓았다. 아주 그냥 끙끙 앓았다. 그렇게 얼마나 앓았을까. 노크 소리가 들렸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녀는 아주 걱정이 가득한 모양이다. 실제로 땀 뻘뻘 흘리는 날 보고, 놀라서 달려왔으니까.


"세상에, 도련님! 아니, 이렇게 아프시면 절 부르시지!"

"아주머니……. 태형이, 왔어요……?"

"아직 안 오셨어요. 연락 드릴까요? 아주 펄펄 끓어서 큰일이네!"

"그럼 전화 좀 해 주실래요? 나, 힘 없어서 연락도 못하겠어요……."

"내가 정말 못 살아요! 아프면 말을 해야지, 앓고만 있으면 어떡해! 잠깐만 기다려요."


가정부 아주머니는 잠시 기다리라 말하더니, 금세 얼음팩을 가져와 내게 쥐여준다. 그녀는 몸에 열이 오르면 큰일 난다며 잔소리를 열세 번쯤 했다. 그리고는 내 핸드폰을 쥐고 묻는다.


"태형 도련님 전화번호가……."

"그냥, 단축 번호 1번이요."

"응. 알았어요. 도련님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머니는 숫자 1을 꾸욱 누르고는 전화가 연결되기만을 기다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그렇게 몇 번의 신호음이 울렸을까.


"여보세요? 도련님?!"


아. 받았나 보다. 그럼 이제 빨리 돌아와 줬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바꿔 달라고 할까? 


'목소리라도 먼저…….'


난 태형의 목소리라도 듣고자, 몽롱한 와중에 폰을 받으려 팔을 뻗었다. 그런데 순간.


왈칵


몸 뒤쪽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


쏟아져? 아니. 흐르는 것도 같다. 살면서 처음 겪는 생소한 느낌. 그것에 난 그저 놀란 눈으로 몸을 굳혔다. 


"……."


무서워. 뭐야, 이거? 실제로 바지 뒤쪽이 젖는 느낌에, 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상해. 지금 이거, 진짜 이상…….


"헉……!"


순간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터졌다. 내 몸이 내가 아닌 듯 제어할 수 없는 기분. 뜨겁고. 간지럽고. 미칠 것 같다. 어? 나 지금. 진짜. 너무 이상…….


"……읏……!"


또 한 번 왈칵. 이번엔 눈물도 함께 터진 것 같다. 어떡해. 나 미쳤나 봐. 지금 완전……. 


'짐승 같아.'


자꾸만 터지는 신음에 입을 먼저 틀어막았다. 정신 놓고 몸을 비틀고 싶은데, 아주머니가 옆에 계셔서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고 참는다. 하지만 아주머니도 내 이상을 알아챘는지, 다시금 묻는다.


"석진 도련님? 어떡해, 많이 아파요?! 구급차라도……!"

"김, 태형. 받았어요……?"

"네, 받았……."

"그럼, 저 바꿔주고……, 퇴근하세요."


척 봐도 아픈 내가 돌아가라 하니, 아주머니는 영문을 몰라 한다. 그렇겠지. 곧 쓰러질 듯한 사람이 유일한 간호인을 돌려보내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이게 뭔지, 난 대충 알겠으니까.


"빨, 리요……!"

"아니, 하지만……!"

"태형이, 바꿔주고, 제발 가세요……!"


내가 이불을 꽉 말아쥐며 말하자, 아주머니는 결국 내게 핸드폰을 준 뒤 방을 나갔다. 그리고 연결된 핸드폰 너머에선 태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

"태, 형아……."

-……김석진? 너 왜 그래.

"이……, 개새끼……!"


일단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욕을 한다. 나쁜 놈. 너 왜 집에 안 와. 난 없는 힘을 짜내서 간신히 말했다.


"너, 빨리 와, 나 지금……, 하아."

-……너 어디야.


집이지, 어디겠니. 하지만 태형은 충분히 내 이상을 알아챈 듯하다. 그가 있는 곳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급히 의자 박차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금방 갈게. 너, 많이 아파?

"아까는, 엄청, 아팠는데……."


지금은 그냥 미칠 것 같아. 나 있잖아. 몸이 이상해. 언젠가 네가 말했던 대로, 나 지금 아주 짐승 같아. 나 있잖아, 지금 말이야…….


"그냥, 아주, 미치겠어."

-…….

"흐윽……."


처음 겪는 생소한 감각이 무서워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와중에도 드는 생각.


"지금……, 한윤이랑 같이 있어?"

-곧 가려 했어.

"너. 진짜! 당장 와. 흐읏, 알았어……?!"


괘씸한 새끼. 아파 죽겠는데, 문한윤이랑 같이 있어?! 나 정신 돌아오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러나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몸이 아주 이상해. 난 거의 핸드폰을 부술 듯 쥐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빠, 빨리 와. 도와줘, 응?"

-집에 누구 있어. 아주머니는.

"방금, 보냈어."

-잘했어. 좀만 참아. 진짜 금방…….

"으……. 너, 빨리, 와……."


나 정말. 진짜로 말이야. 


지금 너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아.




****




"알았어. 늦어서 미안해. 지금 바로……."


진짜다. 석진의 목소리는 곧 죽어 가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대충 무엇인지 알겠으나, 믿기지가 않는다. 말도 안 돼. 발현이 이 나이에도 오나? 하지만 석진의 상황을 보아, 그것 말고는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빨리…….


"석진이야?"

"누가 또 있겠어."


한적한 레스토랑. 음식이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문한윤. 문한윤은 늘 저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태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지금도 와인만 한 모금 넘기며 말하는 것이다.


"식사.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여기까지 장단 맞춰 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

"석진이. 많이 아프대?"

"알 거 없어."


난 코트에 팔을 끼우며, 얌전히 앉은 한윤을 내려봤다. 그러자 이번엔 한윤이 고개만 살짝 들고 날 올려 보는 게 아닌가.


"왜 알 거 없어. 나 이제 너랑 아주 붙어 다닐 건데."

"제발. 안 그래도 짜증 나니까 헛소리 좀 작작 해."

"우리 곧 졸업해. 난 회장님이랑 아버지 말 따를 거고."

"……너 오늘 진짜 미쳤냐?"

"기회는 잡는 거라잖아. 너도 알지?"


태형아. 어차피 석진이는 안 돼.


"안 되는 관계를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니?"

"둘 중 하나 죽기 전까지 붙들 거니까. 너야말로 꿈 깨."

"석진이도 참 불쌍해. 가진 것 없는 애가 어쩌다 너를……."


한윤은 한 번 더 와인을 넘겨 말했다. 알고는 있었는데, 진짜 기분 더럽게 말한다. 그래서 난 앉은 문한윤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그리고 비웃는다. 뭐? 김석진이 불쌍하다고?


"야. 네가 더 불쌍해."

"……뭐?"

"너야말로 나랑 결혼해서 뭐 하려 그래?"


평생 너 쳐다볼 일 없는 사람이랑 결혼이 하고 싶냐?


"돈 보고 하는 거면, 그래. 해."

"……."

"너랑 이혼하는 날까지."


너랑 말 섞는 일도, 네가 있는 집에 들어가는 일도, 널 쳐다보거나 만지는 일조차.


"단 한번 없을 거니까." 

"……."

"우리 어머니 뒷배로 뒀으니까 그래도 할만할 것 같지?"

"……."

"어림없어, 너."


내가 아주 엿 먹일 거야. 난 경멸 섞인 눈으로 그를 내려본 뒤, 쥐었던 손을 풀었다. 재수 없는 새끼.


"집에는 알아서 가."

"……알았어."


대답은 얌전한 척 잘한다. 다음에 만날 땐 더욱 경멸해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레스토랑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다시 한번 한윤의 목소리가 들린다.


"석진이. 아프지 말라고 해."


석진이 아플 때마다 너 이렇게 달려 나갈 거 아냐. 목소리는 얌전하나 풀이 죽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뒤도 돌지 않고 답해주었다.


"잘 아네."




****




어떻게 운전해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기억이 끊긴 기분. 하지만 초조함은 끊기지 않았다. 고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난 거의 미칠 듯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김석진. 진짜 발현인가?'


근데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그렇잖아. 그야 우리 벌써 이십 대 중반인걸. 발현이란 건 십 대 중반에나 온단 말이야.


"……."


그러나 조금 전 통화했던 석진의 상태를 보면 사이클이 온 게 분명했다. 아니야. 다른 데 아픈 걸 수도 있어. 일단 가서 보자. 그럼 뭐든 확실해지겠지. 난 초조한 속을 달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아.


"……."


나도 모르게 엄지를 물어뜯고 있었나. 쓰라림에 쳐다보니 손톱과 살 사이로 피가 질질 새고 있다. 


"……미치겠다, 진짜."


언제나 그렇다. 난 김석진만 관련된 일이면 늘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다. 김석진을 만난 첫날부터 지금까지 늘 초조해. 너는 꼭 언젠가 떠날 사람처럼 굴어서. 가끔은 눈 뜨고 일어났을 때 네가 없을까 봐 겁난다. 그래서 난 잠들 때면, 널 꼭 끌어안고 자.

뭘 해도 그저 시큰둥. 나랑 있으면 즐거워하며 종종 웃는데, 단지 그뿐. 넌 날 좋아하지만, 언제라도 마음 먹으면 떠날 사람. 

우리 고등학생 때. 레스토랑에서 만날 날이 아주 가관이었다. 겨우 열일곱이던 넌, 이미 세상에 질릴 대로 질린 얼굴이라 조금 재밌었다. 대기업 회장인 어머니의 자식 된다는데, 넌 그저 아무 상관 없어 보였다.


'넌.'


그냥 두면 아무렇게나 흘러갈 사람이야. 그래서 너 좋다며 들러붙은 내게 휩쓸린 거지. 넌 그냥 나한테 흘러온 것뿐이야. 그래서 언제 또 다른 데로 흘러갈까 늘 겁났다.


'만약에…….'


만약에 네가 정말 오메가가 된 거라면. 이번에는 널 붙잡을 수 있을까? 강제로라도 널, 내 옆에 둘 수 있을까?


'뭐야, 정말.'


끔찍한 생각이다. 난 겨우 도착한 현관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아직은 진짜 발현한 건지, 다른 곳 아픈 건지 모르니까.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달칵. 난 지문을 대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온몸을 굳혔다.


"……."


언젠가, 이 향을 맡은 적 있다. 그땐 너무 스치듯 지나쳐서, 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어서 우리 그저 무시했는데. 그럼에도 생생히 기억한다. 착각과 같은 그 향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이렇게 기억해낸다. 

우리 어렸던 날. 네가 날 찾아온 그 별채에서. 처음 몸을 겹친 순간 났던 향기.


"너한테서 라일락 향이 났어."

"잘못 맡았겠지."

"근데 네가 겨울나무 향을 맡았다며."

"나도 잘못 맡았나 보지."


그날 이후 라일락을 맡은 적 없이 너는 완벽한 베타였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나는 집안을 꽉 채운 농밀한 향에 아찔한 정신을 붙들었다. 까딱하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벌써 잃었는지도. 난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방을 향해 직진했다.


'아…….'


이 문 열면, 큰일 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손이 먼저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러자 더욱 묵직이 다가오는 향. 숨이 뻑뻑해서 질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찰나, 침대 위에서 앓고 있는 석진이 보였다.


"……."


확실하다. 더 확인할 필요도 없다. 김석진은 이제 베타가 아닌 거다. 아마 자신도 잘 알지 않을까. 난 침대맡으로 걸어, 눈이며 얼굴이며 온몸이 다 붉어진 석진을 바라봤다. 미치겠다. 난 당장이라도 석진에게 달려들 듯한 몸을 억지로 붙든다. 이렇게 널 보며 가만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아. 난 팔을 뻗어 이불보를 꽉 말아 쥔 석진의 손을 쥐었다. 뜨거워.


"……석진아."

"읏, 너어……, 너무 늦잖아……!"


석진은 날 노려보고 있었는데, 눈시울이 아주 붉다. 울었나? 그래서 눈가의 물기를 엄지로 닦아주는데, 돌연 석진이 내 팔을 덥석 잡아 왔다. 하지만 힘이 다 빠졌는지 덜덜덜. 석진이 날 향해 말했다.


"돼, 됐어. 왔으니까 됐어……."

"……."

"뭘 가만 보고 서 있어, 이 등신아……!"


석진은 거의 울며 말한다.


"빨리, 나 좀 어떻게, 해 봐."

"……."

"너. 네가 날 도와줄 수 있잖아……!"

"……무서워."


같잖다. 내 입을 타고 나온 말이란 게 고작 저런 거였다. 네가 흘린 향에 몸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지만, 온 정신 붙잡고 망설인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난 말이야.


"김석진. 네가 도망갈까 봐, 너무 무서워."

"……."

"그런 널, 내가 억지로 붙들까 봐. 그게 무서워 죽겠어."


도중에 정신 잃고 네 목덜미라도 강하게 물면 어쩌지? 내 멋대로 각인이라도 하면 너.


"평생 나 싫어할 거잖아."

"……맞아. 평생 싫어할 거야."

"……."

"그래도. 지금은 나 살려줘, 응?"


석진은 그리 말하며 잡은 내 팔을 강하게 당겼다. 덕분에 난 코트도 벗지 못한 채 네게 쓰러졌고, 넌 급하게 입술을 겹쳐왔다. 평소에도 너와 키스하면 미치도록 좋았는데, 지금은 그저 죽겠다. 미안한데, 나도 오메가랑 몸 겹치는 건 처음이야.


"녹는 것 같다더라."


녹아가는 눈을 보던 네가 멍하니 말한 적 있다. 오메가랑 몸 겹치면 녹는 것 같대. 그런데 태형이 너는 왜 나랑 붙어먹니. 나한테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잖아.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네 눈은 어딘가 아쉽거나, 조금 슬픈 표정이었는데.


"하아."


우리 이제 확실히 알았다. 녹는 느낌이 뭔지 이제야 알았다. 덕분에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넌 내게 매달렸고, 난 정신을 아주 잃었고, 그리고 어쩐지 화가 났다.


'난 이미 네게 미쳤는데.'


다 갉아 먹혀서 더 줄 것도 없는데. 넌 계속해서 내 어딘가를 갉아 먹는다. 대체 얼마나 더 잠식당해야 해? 석진아. 덕분에 난 말이야.


앞으로 너 없으면, 곧 죽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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