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시작은 이게 아니었는데 나온건 뭔지 모르겠어요¿?¿ 

*이전 글들(감독생 드림이 붙은 게시글들)에 이어서 보시면 더 좋습니다.... 시점은 타지 않으니 즐겨주세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미소 짓는 얼굴이 이라면. 그 속에서 저도 함께 웃을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이상은 이상인 거고. 누군가 즐거워지면 또 다른 누군가는 불행해진다. 결국 그런 장소는 있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전부를 이루고 싶어도 절대로, 그럴 수 없는거야. 꿈은 이루어 질 수 없기에 꿈이라 여기는 것.

 이런 마음을 품게 만들어졌다면, 이 마음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아니면 이런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편했을텐데. 아니면 차라리 온실속 화초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속이라도 편했을텐데. 왜 이렇게 애매하게 되어버린걸까. 내가 바라서 다른 사람들도 그러길 바라게 된걸까. 그런 모두의 모습을 바라다 나마저 감화되어 버린걸까. 어느게 먼저인지, 어느 것을 더 바라는지 깨닫지 못한채 오늘도 또 하루가 지나간다. 남사스럽고 간질간질한 이 소망을 차마 뱉지 못하고 또 하루를 보낸다.


" 감독생, 이거... 분명 일주일 전에 맡긴 맨드레이크 맞지? "

" ...네. "

" 강아지, 대체 뭘 어떡하면 일주일 만에 맨드레이크가 다 말라 비틀어진 기아상태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해 봐라. "

" 저도... 전혀 모르겠어요...!! "


 곧이어 크루웰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내리쳤다. 바닥에 나뒹구는 말라비틀어진 만드레이크를 다른 사이언스부의 모두가 신기하다는 듯 살펴보고 있었다.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연구 대상인가보다. 어쩔 수 없는걸 나는, 식물키우기는 쥐약이란 말이야...!!! 어렸을적에 방학동안 식물키우기 숙제라도 내주면 3~4일만에 다 죽여버리는 엄청난 놈이었는데, 잘 챙길 수 있을리가 없잖아...!!! 혼자 살때 키우던 예쁜 화분과 행운목도 한달이 되자 빠짝 말라 죽은 송장이 되어있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나는 진짜로 잘 키우고 싶었다. 다만 나와 생명 키우기가 괴멸적으로 안 맞을 뿐이지.


" 그러니까 저는 빼달라고 그랬잖아요...!!! 뭘 키워본건 다른사람 손을 빌렸을 때 뿐인데...!!! "

" 그럼 그렇게 해서라도 맨드레이크 숨통을 붙여놨어야 할 것 아니냐 이 똥개가! "


 크루월 선생님의 말에 무어라 덧붙이려다 말았다. 이거 말하면 100퍼센트 혼난다. 결국 합즉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크루웰 선생님의 잔소리에는 익숙해졌다. 버터 레이즌 쿠키를 가져갈 때마다 충고일지 잔소릴지 모를 말들을 계속 들었으니 이젠 호통만 안치면 반박이나 별거 아닌듯 떠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이 사람을 보며 떠오르는 게 있어서 더 그런것 같기도.

 그렇게 아무말 없이 물끄러미, 크루웰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자 반성하기는 하는거냐며 더 혼나버렸다. 그닥 집중도 안되고 먼저 싫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가버린 맨드레이크들은 불쌍했다. 쟤들은 무슨 잘못이 있겠어.


" 죄송합니다아... "


 에휴. 불쌍한 맨드레이크들. 내가 미안하다 얘들아. 너희는 심지어 의사표현도 할 수있는 식물친구인데. 안쓰러운 마음에 시들한 잎사귀를 조심히,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이렇게 엉망이라 미안해. 나라고 너희가 이 모습이 되길 바란건 아니었어. 난 역시 무언가를 키우거나 돌보는건 포기하는게 좋을거 같아.


" 감독생씨는 좀 더 타인을 믿을 필요가 있어보이는군요. "


 토막난 나무조각들을 들고 나타난 것은 제이드 선배였다. 이 선배와 식물원에서 마주치는 이벤트에 익숙해진지도 오래다. 식물원을 사이언스부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누군가와 이렇게 마주치는건 으례 있는 일이다. 그래도 혼나는 걸 실시간으로 보인건 좀 그렇네.


"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는 알겠는데... 제이드 선배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요? 옥타비넬과 신뢰라니. 그냥 차라리 거래하자고 솔직하게 말하자구요. "

" 이런이런, 그렇게 들렸나요? 전 나름 진심 어린 충고였습니다만... "

" 가슴에 손을 얹고 평소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 아니 제 가슴 말고요! 변태아냐?! "


 가슴 위에 얹어진 제이드 선배의 손을 쳐내자 속상하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그저 연약한 후배가 걱정되었을 뿐인데 하며 훌쩍훌쩍 소리를 내는 게 기가 찼다. 이 학원에서 저 표정에 속아줄 사람은 한 명도 없을텐데. 아니 있을 수도 있나...?


" 하여튼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


 두 팔로 영양제를 듬뿍 넣은 물뿌리개를 들었다. 제법 무거웠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다. 천천히, 맨드레이크들이 심어진 밭을 적셨다. 시들어버린 이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돌아와줬으면 해서,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든 주워담고 싶어서, 옥죄는 죄책감이라도 덜어내고 싶어서.


"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


 그렇게 말하는 그도, 딱히 도와주거나 다가오진 않았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지 않는다. 어차피 당신도 넘어올 생각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땅이 흠뻑 젖을 때까지, 두 팔을 내리지 않았다. 그 편이 익숙했으니까. 생각하고 고민하고 몸을 움직여, 최선을 다한 마음은 최고의 결과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그렇게 남은 쓴맛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그냥 전부 쏟아버리자. 그리고 기대하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라나 내 안에 스며드는 달콤함은 거부한다. 찰랑이는 물결과 함께 똑, 떨어져버린 것이다. 흘러내리는 것도 차오르는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다만 이 커다란 짐을 들고 있는 팔이 버거워 떨릴 뿐이지. 작은 물뿌리개를 선택했으면 됐을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작은 것으로는 너희 모두 적실 수 없다. 한 번의 메마름에 한 번의 정을. 커다란 그릇은 한없이 바닥을 향해 수그리다 반짝이는 별에 취해 이따금씩 주춤거렸다.

 텅 비어버린 물뿌리개. 가벼워진 양손 너머에는 여전히 시든 아해들이 보였다. 기대하지 못했지만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주고 싶었다. 고갤 들어보면 여전히 제이드 선배가 뭔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와 무표정함의 어딘가. 그러면서 소중하게 든 나무토막이 보였다. 또 버섯을 키우려나 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면...


" 아직 안 가셨네요. "

" 혹시나 도움을 필요로 하실까 남아있었습니다만... 정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까? "

" 그냥, 뭐. 그러면 안 돼요? "


 아무 말 없으면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금방 가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가 이 한 통을 다 비우기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가늠하는 듯한 오드아이의 눈동자는 눈꺼풀에 덮혀버리곤, 안 될건 없죠. 라는 간단한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바라는 것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을 표현하기 좋은 말이지 않을까. 흥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재미있거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라면 관심조차 없을거 같았는데. 저 사람은 무얼 바라고 내 곁에 있었던 걸까?

 하여튼 텅 비어버린 물뿌리개를 들고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시들한 맨드레이크는 한 가득이다. 영양제는 몇병 만들어두었으니 괜찮지만 물을 채우고, 그들을 섞고, 뿌려서 비워내는 것이 일련의 과정은 좀 힘들었다. 육체 노동에 많이 허약한편이니까.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가을걷이 할 적의 낙엽들마냥, 팔랑거리는 이 잎사귀를 못본 채 할 수가 없어서다. 그래서 벌써 세번째. 커다란 물뿌리개에 한가득 물을 담는다. 사이언스부에서 만든 식물들을 위한 영양제를 잘 풀어 섞고, 그 다음 밭으로 향한다.

 얼룩 덜룩한 잎사귀를 쓰다듬어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니?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아직 잘, 살아있지? 괜히 허리를 숙여 귀를 가까이 기울여봤다. 살아있는 식물들이니 숨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모르겠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다들 땅속에 묻혀있어서, 확실히 하려면 샅샅히 파헤치는 방법 없다. 하지만 파내어 그걸 확인해볼 용기는 없다.

 결국 또 아슬아슬하게 물뿌리개를 든다. 천천히 끝에서부터 맨드레이크들을 적신다. 너희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 그게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일일거야.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다 하여도 너희들은 잘못한게 없어. 너희는 그저 이 곳에 뿌리를 내렸을 뿐이잖니. 그러니까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많은 것을 받고 또 들으며 다시 생기를 되찾아주렴. 나는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분명 너희를 잘 보살펴줄 사람이 찾아올테니까.


" 읏차, 감독생. 이 물뿌리개를 쓰기에는 좀 힘이 부칠 것처럼 보이는데? "


 서서히 땅을 적시던 짐이 덜컥, 들려 올려지더니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눈치채보면 은은한 단내와 함께 하얀 의복이 서있었다. 꽤나 여러해를 거친 실험복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실험복. 그 옷의 주인은 뿌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득찬 것과 다름없는 물뿌리개를 가볍게 들었다. 마치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 저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다들 아닌거 같다고 그러네요. "

" 그야 양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을 주고 있는 후배를 보면, 보통 도와주고 싶어지지 않을까? "


 나 그렇게 심하게 떨고 있었냐고. 그렇게까지 꼴사나운 모습이었나? 그랬다면 제이드 선배가 굳이 남아 구경하다 간 것도 납득이 갔다. 갓 태어난 아기 밤비의 힘겨운 물따르기 원맨쇼를 보는 기분이었을지도. 내가 괜찮다 느끼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나보다. 어찌보면 내 실수니 당연한 것인데. 내가 그리 하고자 마음 먹었으니 그리 하고 있을 뿐인데.


" 제가 저지른게 있으니 뭐라도 해봐야죠. 그냥 내버려다 그냥 그렇게... 시들어 죽거나 버려지면 불쌍하잖아요. "

" 하지만 감독생, 아까 크루웰 선생님 앞에서도 얘기했잖아? '뭘 키워본건 다른 사람 손을 빌렸을때 뿐' 이라고. 분명 스스로 해결하려는 점은 좋지만... "


 트레이 선배는 말끝을 흐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도 좋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해보려는 시도도 좋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뒤에 이어질 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말로 표하지 않은건 이 사람 나름대로의 배려일 것이라고, 그렇게 좋을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네요. 처음부터 불안불안 하기는 했는데, 설마 맨드레이크가 그렇게 바짝마른 미라처럼 될줄 누가 알았겠어요? "

" 하하, 확실히 그건 대단하긴 했지. 몇명은 평소의 맨드레이크랑 비교하겠다며 챙겨가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결과를 바래서 만든건 아니었잖아? "


 그건 그랬다. 내가 아무리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결과가 어떻게 되던 상관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결과는 좋기를 바라는 편이다. 내가 아닌 그 결과를 받아들일 이에게 좋은 끝맺음이면 되는 거다. 네가, 당신이, 너희들이, 마지막을 장식할 주인공들이 만족하고 행복하다 느끼면 그걸로 된거 아닐까. 그런 뜻에서 이 상황은 전~혀, 내가 의도하고 바란게 아니었다. 미이라처럼 삐쩍마른 맨드레이크가 행복해요 감독생... 하고 말해줄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것 나름대로 귀엽겠지만 동시에 더 비참한 느낌이다.

 부들거리며 물을 주던 나와는 다르게 트레이 선배는 익숙하게, 모든 땅을 고르게 적시고 있었다. 하긴 딸기 케이크에 쓰는 딸기조차 기르는 사람이니까. 하츠라뷸에서 먹었던 케이크와 타르트에 올라간 딸기들은 언제나 늘 맛있었다. 과한 달콤함에 모든 것을 씻어내려줄 새콤한 맛이라던가. 물론 최근까지 먹은 것은 다 크레이프 케이크였지만, 아무것도 아닌 날에 초대 받으면 꼭 딸기를 올린 디저트가 있었기 때문에 트레이 선배만의 그 맛을 떠올리기는 쉬웠다.

 그 안의 내용물은 텅 비었더라도 그 맛은 여느 가게의 것들과 비할바가 안됐다. 애정을 담지 않았더라도 애정이 담긴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묘하게 하찮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걸 내어준다 해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는데, 역시 제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하다 못해 자신의 마음과 생각 까지도.


" 바란적 없었죠. 정성스레 가꾼 아이가 엉망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하다 못해 엉망이더라도 무언가를 바라고 마음과 시간을 쏟았다는 뜻이니까요. "

" 그럼 류우가 원했던 결말은 어떤 거였어? "


 선배는 평소와 같은 온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품을 주던 물병은 이미 텅 비어있었고, 시들한 잎사귀에 한 모금의 양분이 퍼졌다. 내가 원하는 결과. 무난하고 무탈한 하루에서 종종 꽃피는 만족정도. 평범한 어제의 연속을 꿈꿨다. 변화없는 오늘을 바란다. 그런대로 익숙한 내일을 원한다.


" 적어도 현상 유지라도 하길 바랬죠. 더 좋게는 될 수 없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게요. "


 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밭을 내려다보던 고갤 들어보면 트레이 선배는 밭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고글 너머로 보이는 머스타드빛 눈동자가 무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푸슬푸슬 웃어보았다. 사람 좋게, 넉살 좋게.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고.

 선배가 든 물뿌리개에서 뚝, 뚝 물방울이 매달리다 저 아래에 쳐박혔다. 그저 나는 내 분수를 알 뿐이다. 내 주제에 더 많은 것을 희망하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커다란 케이크가 있더라도 나는 내 몫의, 딱 한 조각만을 떼어갈 뿐이다. 그 조각의 달콤함에 취하지 않게 한번씩 저를 다잡고, 비어버린 공병에 호의를 넣어 간직한다. 반짝이는 별과 추억을 그렇게 가슴에 수놓는다. 그럼 이 별들은 뜯겨나가도, 유성우가 되어 흘러내려도 내 안의 흔적으로 남을테니까. 나만이 소중히 품은 것이어도 되니까. 그런 마음 따위를 타인이 알 필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멋대로 부리는 정일 뿐이니.


"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해도 괜찮지 않아? 감독생의 부탁이라면 다들 받은게 있으니 어느정도는 해줄 법 하니까. 그리고 너라면 누군가를 무리하게 하는 방식이라던가, 곤경에 처하게 할 부탁은 하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


 이 사람은 나의 어디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무리한 부탁이나 곤경에 처할 부탁은 할생각 없다. 그런 마음에서 부터 자라난 것이 기대지 않는 것, 기대하지 않는 것이니까. 겹겹이 쌓인 이상의 속에 남겨진 틈사이로 이 사람이 보인 것 같았다.

 눈을 돌리면 그 너머에 보이는 이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껍데기를 버리지 못한다. 애초에 다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두르고 원하는 것을 덧대어 타인의 앞에 서니까. 제일 안쪽의 말랑말랑한 진심은 잘 간직해두는 것이다. 무심함에 패여 상심하지 않도록, 애정에 문드러져 취하지 않도록. 으스러지지 않게 눌려똑똑하다 사라지지 않게. 이 연약하고 약한 것을 부서지지 않게 소중하게 감싸둔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사이에 보이는 자그마한틈을 눈치채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어룬다. 모난 것이라면 모난대로, 할수 있다면 배려하는 방향으로. 본인이 모나고 숨기려한 틈도 이 사람은 괜찮다며 미소지어준다. 수틀려 곯아 떨어져도 괜찮다 하는 저 미소는 너무나도 잔인한 상냥함이었다. 이 문드러진 마음이 그대로 풀려나도 괜찮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게 하니까.


" 윽, 트레이 선배는 또 다른 형태의 양심 공격을...  "

" 딱히 그런 의미로 말한건 아니지만 말이야. 하지만 감독생이 자신의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도우는데 꺼리김도 망설임도 없고... 그런 사람이 무리해서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못 본척하는게 더 힘드니까. "


 텅 비어버린 공간과 자리에 하나씩 별을 수놓아 주는 사람, 네 본질이 가진 단점은 별것 아니라며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 틀린 것을 엄하게 붙들어 고쳐주려는 사람, 울적한 외로움에 잠길 것 같으면 밖으로 끌어내 주는 사람, 평화로운 일상을 지낼 수 있도록 하루를 채워주는 사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는 사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면서도 그 길목에 있는 사람과 발을 맞추어주는 사람, 영양가 없는 이야기여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결국 그렇게 너를 이루는 모든 점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 겹쳐지는 얼굴이 하나씩 떠오르고 질 때마다 얼룩덜룩한 흔적들을 만들어냈다.

 이것 봐, 이제 이쪽도 놓을 수 없게 되어버렸어. 알고 있었고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예상했음에도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트레이 선배의 손에 들린 텅 빈 물뿌리개를 돌려받았다. 이미 많은 사람의 손을 타서,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줘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릇이었다. 이걸 채우는 건 오로지 나만의 감정과 생각이여야만 했을텐데. 모두가 남긴 흔적과 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 가득 채워진줄 알았던 그릇에 다들 자신의 편린을 남겨두고 가버렸다.

 온전히 나라고 생각한 것은 나 홀로 이루어 행할 수 없다. 남겨진 이 파편과 함께 살아가게 되어서...


" 그럼, 그러니까. 같이 하면 빨리 끝날 거 같으니 부탁드립니다? "

" 물론이지. 언제나와 같이 조용하게 하루를 넘기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에이스나 듀스처럼 뻔뻔해질 필요도 있는 법이잖아? 나 말고도 몇몇이 혼자 끙끙 거리는 걸 보고 몸이 근질거렸었거든.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편하게 말해줘 감독생. "


 그 말에 아까 마주쳤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잔소리를 잔뜩 퍼부은 크루웰 선생님도. 그리고 차츰차츰 더듬어가면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구나 싶어져서 물뿌리개의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이제 어쩔 수없겠네. 어느 한쪽을 선택 하라고 하면 정말로 놓을 수 없게 되어버렸어. 고르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되던 웃지는 못할 거 같다. 깊어지고 나누는 것이 많을 수록 마지막이 힘겨워질 텐데, 이곳의 사람들은 그 끝에 다가서는 것과 상관없이 서로에 묶인다.

 두렵지는 않으신가요? 그 마지막이. 모두에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을 쏟아낸다면 이별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텐데.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대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패여버리는 상처의 크기도 자그마할텐데. 얽혀있는 시간과 함께한 추억을 담아내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기억하고 향수에 잠기지 않을텐데. 그럴텐데 모두가 하나씩 던진 이 알갱이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넘쳐흐를 것만 같아서.


" 네. 고마워요. "


 꾹 차오르는 그것들을 누르다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휩쓸려 버렸다. 이걸로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마냥 웃을 수 없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헤어질때의 마지막 인사는 어떡해야 할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흘러가 떠나갈 때는 점차 다가올텐데. 차라리 이 풍경에 녹아 사라져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아.

 행복한 끝을 바랍니다.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꿈을.

 제가 슬퍼하지 않을 마지막을.

 적어도 종장에는 괜찮다 말 할 수 있게 되기를.

잡덕 그냥 ㅁ뭐 잡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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