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반년도 넘게 모이지 않던 네 명이었으나 오랜만에 유민의 생일을 핑계로  모여 잔을 부딪쳤다. 소정의 선물증정식을 마치고 유민은 선물꾸러미를 꼭 끌어안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어쩌면 자신으로 인해 네 명의 만남이 멀어졌던 게 아닐까 싶어, 희수는 약간 마음이 짠했다. 정작 정말 넷이 만날 수 없게 했던 원흉인 지수와, 만나지 말자고 한 장본인인 영인은 태연했다. 


"생일은 내일인데 벌써 이럴 일이야?"

"만 29세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만 28세들아."

"되게 그러네. 나이 많은 게 자랑이세요."

"그러게. 선물은 마음에 들어?! 내 거가 제일 맘에 들지?!"

"아 뭐래. 고릴라야. 다 맘에 들어."

"유민이 오늘 몇 시 차랬지? 너무 아쉽다."


다행히 오늘은 희수가 저녁 수업을 뺄 수 있는 토요일이라 오랜만에 5시부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와 생일 당일인 일요일을 보내야 했기에 유민은 오늘 내려가야만 했다. 


"10시. 그러니까 말이야. 나 가도 너넨 재밌게 놀아!"

"생일상에 생일 주인공도 없이 뭘 재밌게 놀아."

"완전 재밌게 놀거다? 후회하지 마? 막 엉엉 운다. 너~!"

"뭐? 집에 도착하면 엄청 늦는 거 아니야? 괜찮겠어? 내일 일찍 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영인, 지수, 희수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붙잡자 유민은 빵터지며 푸하하 웃고선 와인을 마셨다. 


"안 돼. 우리 엄마가 미역 한 바가지 불려 놨어."

"어우. 효녀 났어~ 증말. 치."

"철없긴. 언제 어른 될래. 채지수."

"뭐. 같이 어른의 계단 밟자고?"

"징그러운 소리."


핀잔을 주는 자신에게 팔짱을 끼고선 끼를 부리면서 능글맞은 소리를 해 대는 지수에 영인은 오만상을 쓰며 팔을 떨어냈다. 유민은 뭐가 즐거운지 계속 웃기만 했고 지수 앞자리에 앉은 희수는 조용히 와인을 첨잔했다. 그걸 본 영인은 화들짝 놀라서 와인 병을 가로챘다.


"야. 야. 야. 너 또 과음하려고 그러지."

"응? 아, 아니야아!!"

"희수 과음했어?!"

"아니야아."

"아니긴. 완전 술고래야. 어휴."

"아닌데. 아, 그날 내가 잘못했다구…."

"…흐응? 왜애? 희수 뭐 술 마시고 재밌는 실수 했어?"


지수는 반대편에 앉은 희수에게 몸을 들이밀며 물었다. '다 알면서 이러지. 이거.' 영인은 질린다는 듯 그런 지수를 보며 닥치라는 뜻으로 어깨를 붙들고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복화술로도 '좀 닥치라니까 진짜' 하며 엄포를 놓았다. 지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대다가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게 맘에 들었는지 영인의 어깨에 고개를 올리고선 교태를 지었다. 


"나도 모르겠어!! 영인이가 말을 안 해 줘."

"그냥 뻗었어."

"동아리서 보니까 희수 술 취하면 울던데. 울었나??"

"………좀 울긴 했지."

"그만 해.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가지고."

"치. 술이나 따라 봐. 공영인~"

"너도 너무 마시지 마."

"내 맴이다?"


오늘따라 엉겨붙는 지수에 희수는 미간을 구겼다. 전일 영인을 두고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인 걸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듯 과시하는 지수가 유치했다. 그러나 더 유치한 건 그것 때문에 실시간으로 킹받고 있는 자신이었다. 희수는 애써 웃음을 띠곤 대화를 이어갔다. 


"유민아, 밥 먹고 뭐 할까?"

"오~ 그러게. 커피냐, 술이냐, 노래방이냐."

"아. 노래방은 무슨."

"공영인 노래방 왜? 싫어?"

"영인이 얼마 전에 팀장님이랑 노래방 다녀와서 골병 났어."

"푸하하. 맨날 회식 안 가고 튀더니. 붙잡혔구만?"

"개짜증나 진짜."


네 사람은 얼마 전에 영인이 끌려갔다 온 회식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차 갖고 온 사람도 없으니 간만에 이자카야를 가자는 말이 나왔다. 



19.2.


희수는 생일턱 계산을 하는 유민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거에 관심 없는 영인은 밖에서 초여름밤의 공기를 쐬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만지는 감각에 영인은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이 오른 발그레한 얼굴로 지수가 머리를 살피고 있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

"자를 거야."

"난 긴 머리가 좋은데♡"

"안물? 안궁? 물어본 사람? 궁금한 사람?

"얼탱없네. 어디서 이상한 말 배워온 거야?"

"팀장님."

"노인네 애쓰네."

"내 말이. 딸이 알려 줬대."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다고 미니스커트에 비싼 티셔츠(유민은 넌 그 티셔츠밖에 없냐고 비난했다)를 꺼내 입은 영인에겐 어깨를 덮을락말락한 머리길이가 꽤 잘 어울렸다. 


"암튼 나 좋으라고 길렀구나? 귀엽긴."

"자를 거야~~~ 귀찮아서 안 간 거야~"

"오늘 쫌 착하게 군다?"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희수 건들까 봐 그러나 보지?"

"글쎄다."

"진짜 영악하긴. 뭐 그게 맘에 드는 거지만."


지수는 유민과 가게에서 나오는 희수를 발견하고선 잽싸게 영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곤 돌아보지 못하게 고개를 붙들고선 키스할 것처럼 바투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뭐든 이 언니가 잘 이용해 줄게~."

"맘대로 하세요. 맘대로. 왜 이렇게들 안 나와."

"기다렸지?! 미안. 가즈아~"

"가자. 영인아. …지수야."


지수는 영인의 팔짱을 꽉 낀 채 둘을 보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기다렸잖아~" 하며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풀었고, 희수는 애써 웃으며 영인을 째려봤다. 

이자카야에서는 그래도 웬일인지 지수는 희수와 나란히 옆 자리에 앉았다.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해서 영인은 턱을 괴고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메뉴판을 펴 놓고 입씨름을 하던 네 사람은 결국 지수와 유민이 좋아하는 모듬회 한 접시와 나가사키 짬뽕을 시키기로 했다. 

2차 자리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외향형 중의 외향형에다가 입담도 좋은 유민이 있었고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지수 역시 이야깃거리가 넘쳐났다. 자기 앞의 나가사키 짬뽕을 아낌없이 덜어 주는 걸 보면 또 지수가 완전히 밉상인 건 아니라서 희수는 복잡한 기분으로 맥주를 마셨다. 


"희수야. 잠만~ 나 회 좀 가져 가께."

"아, 지수야. 소매! 소매!"

"으이구. 지지야."

"아이씨. 닦아 조."

"정말……."


치렁치렁한 소매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은 지수가 자꾸 회를 집어먹다가 짬뽕에 폴리맛을 더해서 그런지 영인은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물티슈를 지수에게 팽개치고는 희수와 유민 사이에 있던 모듬회를 들어 지수와 자신 사이에 있던 짬뽕과 위치를 바꿨다. 물티슈로 지수의 소매를 닦아 주던 희수는 살짝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고 유민은 생일 주인공 앞에서 메인을 빼간다며 핀잔을 줬다. 


"뭐야. 공영인 스윗하네~?"

"계속 내 짬뽕에서 합성섬유맛 나게 하지 마라."

"너 진짜 언니 좋아하는구나? 우쮸쮸."

"생일도 늦으면서 언니는."

"네가 좋아하는 짬뽕을~ 멀리하면서까지 나를 위해 모듬회를~~"

"아 시끄러워. 얘 좀 조용히 못 시키냐."

"푸하하. 채지수 공주병이랑 도끼병 오져. 진짜."

"아하하."


그러나, 웃고는 있었지만 희수는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제 앞임에도 묘하게 지수에게 잘해 주는 영인이 살짝은 원망스러웠다. 다 알면서. 채지수가 어떤 애인지. 지금도 왜 이렇게 인간이 칠칠맞냐면서 결국 손에 묻은 간장을 닦아내 주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얄궂었다. 

지수가 워낙 안하무인이니까 저러겠지. 저렇게 철없이 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둘이 친해도 어차피 같이 집에 가는 건 자신과 영인이었으니까. 오늘 하루만 그런 거지 싶었다. 정작 지수가 제게 매달려 이런 소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너네 집서 자고 갈래!"

"안 돼."

"아 왜! 좀만 더 놀자아. 오랜만에 만났잖아. 공영인 너 나 두 달만에 본 거야."

"안 돼."


영인은 고장난 로봇처럼 안 된단 말을 뱉곤 작은 목소리로 "즈은 믈 흘 뜨 즈브그스 급그 즈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기회주의자 또라이 채지수가 아니었다. 지수는 바로 침울해진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나 너네랑 같이 놀고 싶단 말이야…."

"아."

"네 명이 만난 것도 엄청 오랜만인데, 서산도 나 안 될 때로 잡아 놓곤…."

"응? 안 될 때?"

"채지수 아닥! 아 조용히 좀 해."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서운하다구."

"그렇구나…."


영인이 지수랑 싸웠단 게 무슨 일인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그리곤 울상을 짓는 지수에 희수는 좀 마음이 약해졌다. 어쨌거나 자신 때문에 놀러 갈 때도 못 온 거구나 일말의 미안함이 있었다. 


"유민이도 우리끼리 재밌게 놀쟀잖아. 희수도 내일 학원 쉬지? 일요일이니까.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싫어. 오늘로 일주일치 외출분 다 썼어."

"아. 가자아. 응? 응? 나 회사 김 대리가 영화 티켓 기프티콘 줬거든. 내가 쏠게."

"또 엄한 사람 봉잡았지. 너."

"아니다? 주길래 티켓만 챙긴 거다. 뭐."

"'만'이라는 부분에서 악질이네. 의도를 알고 그런 거 아냐."

"근데 얼굴이 빠개진이었는걸. 난 박해진이 좋은데."

"더 악질이네. 으이구."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여기서 내치자니 그 또한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았다. 또 어쨌든 집은 홈그라운드이니까, 자신 역시 더 밖에서 노느니 집이 편할 것 같았다. 희수는 두 사람이 입씨름 하는 동안 계속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놀다 가. 지수야."

"아이고야."

"아싸!!"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하는 지수와 침통해 하는 영인의 표정이 대조됐다. 신나서 앞장 서는 지수와 달리 영인은 적성에 안 맞는 남 비위 맞추기가 연장되어 괴로워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희수는 미안해져서 옆에 서서 미안하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영인은 한숨을 내쉬곤 "아이고. 조희수. 착해 빠져 갖곤……."하며 희수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19.3.


'내가 이거 이럴 줄 알았지'

혼자 달리고 얼큰하게 취해서는 외로우면 죽어버린다는 개논리로 소파에서는 죽어도 안 잔다는 지수에 영인은 소파째로 내다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희수는 아무리 그래도 사생활침해를 싫어하는 영인의 방에서 재울 순 없을 것 같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 뭔 개소리야. 여기 딱 네 사이즈네. 단신용. 안 보여?"

"160이 어때서! 니들이 큰 거야."

"네. 다음 난쟁이."

"희수네 방 침대가 크지 않나? 둘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그날 일을 암시하는 말을 하며 능글맞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에 영인은 이마에 내 천자를 그렸다. 그리곤 어쩔 줄 몰라하는 희수를 보고 한숨을 팍 쉬었다. 조희수 착해 갖고 또 고집 부리면 받아주겠지. 스트레스받을 거면서. 


"알았어. 또라이야. 내 방에서 자."

"뭐?!?"

"아싸~~!!"

"영인아. 진짜? 아냐. 지수야. 내 방에서 자도 돼."

"괜춘 괜춘. 공노인이랑 나랑 희수 네 생각보다 친해!"

"안 친해. 씻고 나오기나 해."


희수는 지수를 화장실에 밀어넣고 "아오. 방청소해야 하네." 투덜거리며 방을 치우러 들어갔다. 왜인지 엄청나게 불쾌한 희수만이 오도카니 거실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왜 불쾌한진 몰라도, 방에 들어갈 생각이 들지 않아 거실에 남아 책을 읽고 있자니 지수가 말끔하게 씻고선 나타났다. 그리곤 소파에 앉은 희수를 보고선 옆자리에 툭 걸터앉았다. 


"뭐 해?"

"책 읽어."

"…미안."

"응…. 응?!"

"아니. 이건, 아니 그것도긴 한데. 생각해보니 진짜 좀 미안해서?"

"뭐가? 밤에 쳐들어 온 거…?"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난 영인이랑 자러 갈게! 낼 바~~"


두 손을 방방 흔들고 영인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가는 지수의 영문 모를 사과에 희수는 힝 하고 무릎을 끌어안고 서러워했다. 자러 간다니. 친구 간에 상스럽게 뭐야 표현이. 그러고 있자니 다음으로 씻으려는지 옷가지를 바리바리 챙겨든 영인이 방에서 나와 희수를 발견했다. 


"뭐 해? 씻게?"

"으으응."

"나 샤워할 거라 오래 걸릴 건데."

"왜 오래 걸려?! 왜애?!"

"응?"

"아니야…. 미안. 시비걸어서."

"시비 건 줄도 몰랐다."


다시 머리를 쓰다듬고선 욕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희수는 약간 흘겨보다가 자기가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붕붕 흔들고선 방으로 들어갔다. 



19.4.


"뭐야. 안 자?"

"끼약!"


유민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기다렸다가 자려던 희수는, 잘 도착했다는 톡을 봤음에도 잠이 안 왔다.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나왔다가 소파에 누워서 팩을 붙이고 있던 영인이 눈을 부릅뜨자 해괴한 몰골에 깜짝 놀라서 꺅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바로 한밤중인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기는."

"왜, 왜 여기 있어?"

"채지수가 침대에서 대자로 뻗어서 잘 곳이 없어. 난 바닥에선 못 잔다고."

"그렇구나."


희수는 무언가 안도하며 소파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영인의 기다란 다리가 삐쭉 소파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불편하겠는데. 괜찮아?"

"불편해. 저 망할 것. 너는 왜 집으로 들여 갖곤."

"미안…. 나 때문에 못 만난 건가 싶어서 약간 미안했나 봐."

"애초에 지가 자초한 일인데 네가 마음을 왜 써."

"그러게."

"그래서 왜 나왔는데. 한밤중에."

"아…. 소화가 좀 안 돼서."

"그것도 다 저거 때문이야. 하여간."


영인은 팩을 떼어내고선 소파에서 내려와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곤 매실액을 차가운 물에 타서 건넸다. 본인 몫도 챙겼는지 두 잔이었다. 소파에 앉더니 거기 있지 말고 옆으로 오라는 모습이 다정해서 희수는 잘게 웃으며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 


"이 닦기 싫음 내가 두 잔 마시고."

"아냐. 마실래! 시원하다."

"맛있지?"

"응. 웬 매실액?"

"그때 갔을 때 최유민네에서 갖고 왔어."

"응? 유민이네 어머님이 만드신 거야?"

"아니야! 나랑 걔랑 만든 거야."

"와 진짜? 향긋하니 맛있다."

"매실주도 같이 담갔지."

"진짜 좋아하는구나."

"세시풍속이라고?"

"시골 할머니 같아."

"칭찬으로 듣겠어. 여하간 유민이 내려갈 때 줬는데. 어머니 혈당 관리하셔야 해서 잘 안 드신다고 갖고 가래서."

"아 그렇구나."


달달하고 새콤한 게 꽤 맛있었다. 탄산수에 에이드로 해서 마셔도 별미겠다는 생각을 하며 희수는 꿀꺽꿀꺽 마셨다. 불편하던 속이 매실 덕인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매실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주 뒤에 또 매실주랑 매실액을 담글 거라는 이야기부터, 그래도 6월 모의고사 문제 적중율이 꽤 괜찮았다는, 아까는 말 못한 희수의 자랑까지. 

스승의 날 이후엔 방밖을 나다니긴 했지만, 6월 모의고사 대비 특강도 있고 영인도 이래저래 회사일이 많아 좀처럼 함께 긴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두 사람이었다. 오랜만의 대화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도란도란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3시였다. 슬슬 졸린지 하품을 쩌억 하는 영인에 희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자야겠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까 퍽 불편해 보이던 모양새가 맘에 걸렸다.


"영인이 키 커서 소파에서 자면 불편할 것 같은데. 내가 소파에서 잘게!"

"너나 나나 차이 얼마나 난다고. 됐네요. 들어가."

"나 진짜 괜찮아."

"난 몸 말고 자니까 괜찮아."

"아 그건 그렇긴 하더라…. 아, 아니면."


이어지는 희수의 말에 영인은 얼어붙었다.


"같이 잘까? 침대…. 많이 좁진 않을 텐데."

"……아니. 그거는 좀. 어, 그."

"아!! 미안. 괜찮아! 부담스러웠겠다. 미안…."


희수는 좋은 의도로 말했을 텐데, 괜히 찔려서 그 호의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영인은 마른세수를 하며 고민을 하다가 순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희수에 한숨을 쉬고는 알았다며 베개를 안고 일어났다.




다음날. 빈 침대에서 나홀로 일어난 지수는 영인을 찾았지만 베개고 뭐고 흔적도 안 보였다. 결국 거실 소파로 튄 건가.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씻는 거 기다렸다가 덮치려고 했는데 무슨 샤워가 아니라 목욕이라도 하는지 한 세월을 씻어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자신의 숙명을 한탄하고선 영인을 족치기 위해 거실로 뛰쳐나왔다. 


"야. 공영인!!"

"아. 지수야. 잘 잤어?"

"아……. 응. 굿모닝. 희수야."

"응. 녹차 마실래?"

"어? 어. 공영인은?"

"영인이 지금 씻어!"

"걔는 뭐 목욕의 신이라도 돼? 왜 맨날 씻어?"

"방금 일어나서. 영인이."


수줍게 웃는 제 친구의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뭐지. 지수는 설마 이 유교걸 보수걸 샤이걸 제 친구 조희수가 그런 깜찍한 짓을 했을 리 없다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양반은 못 됐는지 거의 자지 못해 다크서클이 턱끝까지 내려온 영인이 세수를 마치고 목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뭐야. 깼냐."

"공연인…! 방에서 안 자구 말이야. 외박이나 하구!"

"외박은, 집안에서 잤거든."

"맞아."


희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인은 크게 당황했다. 거실에서 잔 척하려고 했는데, 희수와 입을 맞추는(그 입 말고) 걸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그 입밖으로 튀어나온 단어에 졸도할 뻔했다. 


"영인이 나랑 잤어."

"……뭐?"


모르는 사람은 용감하다더니, 희수 자신을 빼고는 그 문장이 아주 다양한 의미로 모두 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지수의 표정을 본 영인은 어제 자신이 배알 꼻려 가면서 비위맞춰 놓은 게 지금 한 순간에 모두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내가 꼬드겨서…."

"그만. 그만. 남들 들으면 오해할 단어 고만 써."


영인은 희수의 말을 끊고 어떻게 자신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한 지붕 아래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냐는 듯 노려보고 있는 지수에게 입모양으로 그거 아니라고 안간힘을 써가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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