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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로운 시작인데... 이제 모자람을 곁들인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잠시 벙찐 듯 어버버거리다가도, 이내 붉으락 푸르락하며 내 쪽을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놈이 못 배워 먹어선 노인 공경도 못 한다며, 지금 그게 자기한테 할 말이냐며. 내 뒤에 선 박지성은 온갖 욕을 내뱉으며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 할아버지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한테까지 이렇게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나 보지. 하지만 나는 내 앞에서 방방 뛰며 난리 부르스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면서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 옛날부터 헛소리로 유명한 할아버지기도 했고, 남녀 불문하고 지랄하는 이 동네의 미친개로도 유명했으니까. 나는 존나 지루하다는 듯한 얼굴로 귓구녕이나 후비작거리며 할아버지를 내려다봤다.




" 공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노인 공경을 해 주죠. 아무 잘못도 없는 애 가져다가 그렇게 난리를 피우시는데, 세상 어느 누가 노인 공경을 해 줘요? "

" 뭐?! 나 같은 놈은 공경 받을 자격도 없다 이거냐?! "

" 네. 노인 공경은 무슨. 노인 공격은 해 드릴 수 있다만. "

" 뭐, 뭐 이런… "




할아버지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듯한 내 발언에 남아 있던 할 말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하긴, 여태까지는 그냥 자기 말에 어버버거리며 도망치기 바쁜 아이들만 만나왔을 테니까. 자기한테 이렇게까지 대드는 애는 본 적 없겠지. 하지만 그게 뭐 내 알 바인가. 솔직히 나는 지금 내가 내뱉은 말들이 전부 심한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맞는 말이면 맞는 말이었지. 나이 많다고 해서 나이 어린애들만 골라다가 시비 거는 게 정상인가? 나는 삐딱한 자세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 이쯤하고 그냥 가시죠. 어차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시잖아요? "

" 너 지금 말 다 했냐! "

" 아직 덜 하긴 했는데… 여기서 더 말했다간 존댓말도 못 써드릴 것 같아서요. 저랑 반말로 대화할 생각 있으시면 계속 싸우고요. "


" 누나… "




박지성은 자기가 더 안절부절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내 팔을 잡아왔다. 이제 그만하고 가자는 건가. 나는 아직까지도 씩씩대고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서 계속 얘기 나눠 봤자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여기까지만 하고 갈까. 편의점은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박지성에게 한 쪽 팔을 붙잡힌 채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갑자기 끓어오른 분노를 참지 못한 할아버지가 급발진을 하며 내게 한 쪽 손을 올려 보였다. 폼새를 보아하니 한 대 때릴 작정인 것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대 맞아 주고 끝내려 했지만, 박지성은 할아버지가 한 쪽 손을 올린 걸 보자마자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내 한 쪽 팔을 쥐어 잡은 채 날 뒤쪽으로 피신 시킨 박지성이 날아오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채며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 저런 싸가지 없는 계집애는 한 대 맞아도…! "

" 아무리 화가 나셔도 손은 올리시면 안 되죠. 제발 그만 좀 하세요. "

" … "

" 이 이상으로 난동 부리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 근처에 파출소 있는 거 아시죠? "




박지성의 입에서 나온 파출소 발언에, 할아버지는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꼴에 파출소 끌려가는 건 무서웠나 보지. 하찮다는 듯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봤다. 할아버지는 박지성의 뒤에 서 있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분하다는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작게 욕을 읊조리며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여기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진작에 주제 파악하고 도망가면 좀 좋아. 차라리 나 한 대만 때리지. 경찰에 신고해서 돈이나 좀 뜯어내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바닥에 놓아두었던 장바구니를 주워들었다. 어차피 일도 해결됐고, 더 이상 내가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




" 누나. 어디 다치신데는 없죠? "

" 다칠 뻔했는데 네가 막아 줬잖아. 보다시피 멀쩡해. "

" 다행이다… "




박지성은 멀쩡한 내 상태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착해 빠진 애 아니랄까 봐. 내가 이마크 빠순이로서 존나 지랄하고 다닐 때도 욕 한마디 안 한 애 다웠다. 이동혁은 대놓고 나 싫어하기 바쁘던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박지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박지성은 아직까지도 진정이 안 되는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챘던 한 쪽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하긴. 박지성이었으면 이 모든 상황이 무서웠을 법도 했다. 모르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자기한테 폭언 쏟아부으면서 지랄하는 걸로도 모자라 아는 누나 얼굴까지 후려갈기려고 했으니까. 나는 새파랗게 질려 있는 박지성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덜덜 떨리는 박지성의 한 쪽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들었다. 박지성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 … 누나? "

" 깡도 좋네. 아직까지도 이렇게 손 떨고 있는 주제에 할아버지 막아설 줄도 알고. "

" … "

" 진정해. 할아버지도 갔고, 너가 막아준 덕에 맞지도 않았으니까. "

" … "

" 지금 걱정 받을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다. 오늘 댄스부 연습 있는 것 같던데... 가서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해. 피곤하면 곧바로 집 가서 쉬고. "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 온갖 과자들과 음료수들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박지성은 내가 줄줄이 말을 내뱉을 때까지도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저번 주까지만 해도 민폐 끼치기 바쁘던 애가 갑자기 이렇게 잘 해주니, 적응이 안 될 법도 하지. 계산이 다 된 과자들과 음료수들을 봉투에 하나 둘 넣으며 박지성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박지성은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휴, 이 순진한 팔척 햄스터를 어쩌면 좋니. 나는 봉투 안에 든 음료수들 중 박지성이 제일 좋아했던 음료수 하나를 꺼내어 박지성 손에 쥐여주었다. 냉장고 안에 있던 음료수라 그런지 손에 닿는 온도가 차가웠다.




" 가서 먹어. 내가 줬다고는 하지 말고. "

" … 누나는 동아리 안 가요? 저랑 같은 동아리시잖아요. "

" 이동혁이 말 안 했어? 나 동아리 나온 거. 나 오늘부로 댄스부 탈퇴했어. "

" … 네? 갑자기요? "

" 갑자기는 아니지. 원래부터 춤 쪽엔 흥미 없었으니까. 동아리 들어간 건 순전히 마크 때문이었는데, 이젠 마크한테도 별 관심이 없어져서. 동아리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거든. "




박지성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손에 든 음료수를 꽉 쥐었다. 이동혁은 내가 동아리 나간다고 하자마자 좀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박지성은 그래도 아쉬운 티는 좀 내 주네. 옅은 웃음을 걸친 채 박지성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우리 팔척 햄스터, 동아리 활동 힘내라. 이 누나는 오늘부터 갓생을 살기로 결심했으니까.




" 음료수 맛있게 먹고. "

" … "

" 그거,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거잖아. "




맨날 마크한테 음료수 조공하느라 이동혁과 박지성의 취향마저 전부 다 꿰뚫고 있었던 나였다. 박지성이 좋아하는 음료수야 안 봐도 뻔하지. 박지성은 멍한 얼굴로 나와 음료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다급하게 내 한 쪽 팔을 잡아채며 말을 꺼냈다.




" … 그, 동아리는 나가셨어도… "

" … "

" 복도에서 아는 척은 해도 되죠? "




깜찍하기 그지없는 박지성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도와준 보람이 있게 만드네.




" 그럼. "


" … "

" 언제든 편하게 인사해. 받아줄 테니까. "




박지성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굳어져 있던 얼굴을 풀며 옅게나마 웃어 보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는 박지성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박지성 정도는 아는 척하고 지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박지성에게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박지성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해 이마크네 무리랑 완벽하게 멀어지는 건 실패했지만, 어쩐지 싫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오늘 무슨 날이야? 웬 과자를 이렇게 많이 사 왔어? "

" 오빠랑 파티하려고 사 왔지. 오늘 학교에서 좋은 일도 좀 있었고. "

" 우리 여주한테 무슨 좋은 일이 생겼을까~? "

" 그냥~ 여태 미안했던 애한테 사과도 했고, 댄스 동아리도 탈퇴했거든. "




재현 오빠는 식탁 가득 놓인 과자를 하나 둘 분류하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여주 그랬어? 입 밖으로 나오는 말마다 애정이 뚝뚝 흘러내렸다. 역시 김여주 바보 정재현 아니랄까 봐. 식탁에 놓인 과자를 하나 둘 집어먹는 재현 오빠를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또 일부러 재현 오빠가 좋아하는 과자들로만 사 왔지. 오빠 취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재현 오빠와 마주 본 채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든가, 내가 여태까지 마크한테 해 왔던 행동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재현 오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말을 들어 주다가도, 내가 마크한테 깔끔하게 사과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빠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여주는 사과도 잘하네. 다른 애들처럼 무작정 회피하려고 들지 않고. 재현 오빠의 말을 들으며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잘못한 것에 대한 사과만 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 근데 그 마크라는 애, 좀 아쉬워할 수도 있겠다. "

" 뭐? 마크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생각을 해. 나라면 자기 귀찮게 했던 애 떨어져 나갔다고 좋아할 것 같은데. "

" 아니, 그렇잖아. 자기한테 관심 엄청 주던 여자애가, 갑자기 한순간에 관심 딱 끊겠다는데. 마크 입장에선 너가 좋든 싫든 잊을 수가 없는 애일 거 아니야. "

" 어… 그렇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긴 해. 물론 나쁜 의미로 잊지 못할 애인 것 같지만… "




손가락에 꼽아져 있던 꼬깔콘을 하나씩 빼 먹으며 재현 오빠의 말을 경청했다. 하긴, 마크 입장에선 지금 내 행동이 좀 의아하겠지. 쟤 왜 저러나 싶은 마음에 내 생각도 좀 날 거고.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딱히 마크가 날 아쉬워할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학교생활 편해졌다고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나는 속으로 내 부재를 아쉬워할 마크의 얼굴을 상상했다. 음… 만약 정말 마크가 아쉬워한다면…


꼭 이런 표정이겠지?


근데 난 마크가 나에 대해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만 하면 들러붙어서 귀찮을 정도로 쨍알대고, 원하지도 않는 선물 공세를 퍼붓질 않나,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나 시도 때도 없이 자기 불편하게 만든 애를 어느 누가 그리워하겠어. 마크 입장에선 갑자기 개과천선한 내가 고맙기 그지없을 거다. 이제부턴 내신 관리도 신경 써야 하는데, 마크라면 공부에 전념하기 바쁘겠지. 아니면 동아리 활동을 더 빡세게 하거나.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작은 교내 축제가 열릴 것이었다. 마크는 그 축제에서 댄스 동아리의 이름으로 공연에 출전하기 바쁠 테고.




" 암만 생각해도 마크가 날 아쉬워하는 건 말이 안 돼.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같아. "

" 사람 일은 함부로 장담하면 안 된다니까. "

" 어쨌든. 근데 나 동아리 어디 들어가지? 댄스 동아리 나왔으니까 다른 동아리라도 들어가야 할 텐데… "

" 아 맞다. 여주네 학교는 동아리 활동 안 하면 강제로 야자 시켰었지? "

" 응. 교내 활동으로 동아리 안 할 거면 야자라도 하라고. "




피곤하지 그지없는 학교 시스템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우리 학교엔 몇십 년 전부터 이어져오던 유구한 (좆같은) 전통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야자를 하기 싫으면 동아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내 활동에 참가하지도 않는 애가 야자도 안 하고 집에 일찍 들어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나 뭐라나. 때문에 나는 지옥의 야자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동아리에 들어야 했다. 이 거지 같은 학교. 다시 돌아와도 거지 같은 건 똑같네.




" 여주 노래 잘 부르잖아. 이참에 밴드부 들어가는 건 어때? "

" 아, 그거 좋겠다. 댄스부보단 밴드부가 더 낫긴 하지. "

" 응, 응. 밴드부 들어가서 공연에도 좀 참가하고 그래. 여주 공연하는 날 나도 구경 가게. "




재현 오빠의 말에 그거 참 실용적인 의견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옛날의 김여주는 이마크만 따라다니느라 자기가 진짜로 잘하는 걸 하지 못했는데, 과거로 회귀한 지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재현 오빠 말이 맞지. 난 춤 실력 개나 줘버린 대신 노래 실력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내일 학교에 가자마자 밴드부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앞에 놓인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짜, 맛있는 거 먹으니까 좀 살 것 같네.




" 우리 학교 급식이 맛이 없어서 그런가, 요즘엔 이런 군것질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아. 옛날 같았으면 삼시 세끼 밥만 먹었을 텐데… "

" 급식이 맛없어? 성장기 애들한테 제일 중요한 게 밥인데. 여주네 학교 안 되겠네. "

" 그치. 나 진짜 우리 학교 급식 볼 때마다 한숨만 나와. "

" 음… 여주야. 내가 내일 도시락 싸서 가져다줄까? 내일은 나도 공강이니까 시간 좀 널널할 거 같아. 너만 괜찮으면 난 진짜로 싸 줄 수 있어. "

" 헐, 진짜? "




먹고 있던 과자도 후두둑 떨어뜨린 채 두 눈을 반짝였다. 재현 오빠는 취미로 요리를 즐겨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옛날에 친구들과 무슨 대회에 나갔다가 얼레벌레 금상을 타온 전적도 있었다. 우리 집안의 명예 셰프라고 불리우는 재현 오빠가 내 점심 도시락을 싸 준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재현 오빠의 손을 붙잡은 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하나도 안 불편하니까 도시락 꼭 싸줘. 재현 오빠는 특유의 복숭아 웃음을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 알겠어. 도시락 싸다가 내일 가져다줄게. 내가 카톡 하면 학교 정문으로 나와, 알겠지? "

" 응! 반찬 맛있는 걸로 해 줘야 돼! "

" 당연하지. 우리 여주가 먹을 건데. "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재현 오빠가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얌전히 재현 오빠의 손길을 받으며 주인 손 타는 고양이마냥 고로롱거렸다. 아, 정말. 다정한 (정재현 얼굴의) 사촌 오빠 최고.





*





상쾌한 아침.


나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학교에 등교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미친 사람마냥 웃는 나를 바라보며 너 어디 정신 이상하냐고 했지만, 나는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도 한결같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니, 그냥.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보고 싶은 사람(사촌 오빠)도 오고. 주어를 생략한 채 헤실헤실 웃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이나는 바람 빠진 풍선마냥 존나 웃는 나를 바라보며 창백하게 질린 낯을 했다. 난 진짜 너가 이럴 때마다 좆같고 무서워.




" 야, 너는 아침부터 뭘 그렇게 하냐. "

" 필기 노트 정리하는 중. 중간고사 끝났으니까 이제 슬슬 기말고사 대비 좀 해 놔야지. "

" 이렇게 좋은 날 공부라니. 그리고 아직 기말고사까지 한 달도 더 남았거든? "

" 한 달도 더 남은 게 아니라 한 달밖에 안 남은 거겠지 개똘추 새끼야… "




씩씩대는 나를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찬 이나가 필기 노트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공부에 미친 애처럼 구는 이나를 괴롭히기 위해 온갖 지랄을 다 했지만, 이나는 혼자서 서커스 쇼를 벌이고 있는 나를 알면서도 내 쪽으로 시선 한 번을 안 줬다. 아니 이 새끼가. 비장의 무기로 핸드폰을 꺼내들곤 이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나의 핸드폰은 진동 모드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내가 카톡을 보내자마자 요란스럽게도 울려댔다. 이 새끼 미쳤나? 싶은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든 이나가 무심한 얼굴로 내 카톡을 읽었다.




너 이렇게 좋은 날 누가 공부하래

필기 노트 내놔



정이나:

와 진짜

진심으로 미친놈 같아 여주야




정이나는 내 카톡을 읽자마자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진짜 미쳤냐며 손으로 유 헤드 빙빙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내 옆에서 공부하래? 나 놀아 주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이나와 함께 시답지 않은 장난을 치며 깔깔대고 있었을까.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노골적인 시선에 살며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징하게도 쳐다보는 거야.




" … "

" … "




어… 마크였네.


아까부터 계속 시선이 느껴지길래 누가 이렇게 보고 있나 했더니. 다른 사람도 아닌 이마크였냐.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마크에게 어색하기 그지없는 손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은 채로. 서로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곤 했지만, 솔직히 같은 반 친구이기도 하고… 이미 1년 동안 징하게도 따라다닌 이마크를 아예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대할 순 없으니까. 여기서 더 가까워지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이 정도 선에서만 이마크를 대하면 되는 거잖아. 싱숭생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로 정이나와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다.


1교시, 2교시를 지나 3교시가 끝났을 때에도 난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의자에서 엉덩이 떼고 이마크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는 3교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현 오빠가 가져다주는 점심을 먹기 전에, 우선 동아리 가입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어디 가? "

" 나 동아리 신청하러. 밴드부 들어갈 거임. "

" 오키. 얼른 갔다 와. "




이나는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보고도 설렁설렁 손을 흔들 뿐이었다. 이 언니가 새로운 동아리에 가입한다는데. 반응이 그거뿐이니. 살짝 서운한 얼굴로 반을 빠져나왔다. 물론 진짜로 서운하진 않았다. 쟤가 저렇게 구는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봄바람이 살랑이는 학교 복도를 거닐며 밴드부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옛날엔 댄스부를 제외한 모든 동아리에 관심도가 제로였어서 몰랐는데, 우리 학교는 댄스부만큼이나 밴드부 지원을 많이 해주는 학교였다. 시설 죽이고, 안에 있는 애들 실력도 죽이고. 이 좋은 데를 예전에는 왜 안 들어갔나 몰라. 댄스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밴드부실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어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밴드부실.




" 음… 아무도 없나… "




닫혀 있는 밴드부실 문을 살짝 연 채로 내부를 감상했다. 누가 학교에서 밀어주는 동아리 아니랄까 봐. 시설부터가 끝장나네. 그렇게 멍한 얼굴로 밴드부실 내부를 구경하고 있었을까. 별안간 댄스부 연습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오늘도 연습한다는 거죠? "


" 어, 그렇다더라. 회장도 참 융통성 없어. 이런 건 그냥 카톡으로 공지하면 될 텐데. "


" 직접 만나서 하는 게 더 확실하긴 하지. 카톡으로 공지하면 공지 확인 못해서 연습 못 오는 애들 한 명씩 꼭 있었잖아. "




세상에, 쟤네가 왜 여기 있어?


연습실 문을 열고 나오는 익숙한 얼굴들을 확인하며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나 어제 이동혁한테 댄스부 근처로는 발걸음도 안 옮긴다고 했단 말이야. 누가 보면 이거… 이마크 따라서 뒤 밟은 것처럼 보일 거 아니야. 나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허둥대다, 이내 밴드부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뻥 뚫린 복도에 숨을 공간은 없었으니, 내가 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은 밴드부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밴드부실 문을 슬쩍 열어 보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해맑게 웃으며 복도를 거닐고 있는 이마크가 보였다.




" 허~ 미 씨펄… 잘생기긴 진짜 뒤지게 잘생겼네… "

" 그치. 마크가 잘생기긴 했지. "

" 그니까~ 내 말… "

" … "

" … "

" … "

" 악!!!!! "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냅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뭐, 뭐,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흡사 집안에 든 강도를 본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니, 그곳엔…




" 안녕. "

" … "

" 신입? "




내가 여태 왜 모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존나 잘생긴 남자애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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