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혁은 국문과 과방을 나와 문학관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서 있던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승혁은 문제의 남학생을 찾았다. 혹여 복도 한구석에 있는 건 아닌지, 휴게실이나 강의실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살펴보면서.

지수. 이름이 지수라고 했다. 지수는 승혁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어쩐지 눈에 띄는 아이. 다른 학생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성격 좋고 귀여운 남학생.

승혁은 지수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지수, 지수.

승혁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넓고 높은 중앙 도서관 로비에 서서, 승혁은 도서관 안쪽을 둘러보았다. 빽빽이 늘어선 책장에는 온갖 전문 서적이 꽂혀 있었고, 사람들은 기다란 책상에 빼곡하게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승혁은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조용히 걸었다.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지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승혁은 도서관을 나와 잔디밭이 깔린 광장을 걷기 시작했다. 승혁의 옆구리에는 두꺼운 원고가 끼워져 있었다. 값싸고 누런 종이에 인쇄된 원고 한 뭉텅이.

하늘은 높고, 아주아주 맑고 푸르렀다. 바람은 시원했고, 초록 나뭇잎들은 바람에 사르락거리며 흩날렸다.


“날씨가 참 좋구나.”


승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중얼거리며,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꽤 지난 터라, 학생 식당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몇천 원어치 백반을 주문하는 학생도 있었고, 식당 테이블에 앉아 떡볶이를 먹거나 비빔밥을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한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는 갈색 머리 남학생이 있었다. 얼굴이 작고, 눈이 동글동글한, 귀여운 학생이.


저 학생이다. 저 애가 지수다.


승혁은 뚜벅뚜벅 걸어 지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지수의 앞자리 의자를 빼서 털썩 앉았다.

지수는 북엇국을 숟가락으로 떠먹다가 고개를 들어 승혁을 쳐다보았다.

지수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승혁이 냉큼 말했다.


“수야.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게 어떠냐.”


승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승혁의 눈은 지수의 눈처럼 맑고 초롱초롱했다. 하지만 지수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국만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지수는 국그릇을 식판에 내려 놓았다.


“한승혁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생글생글 웃으면서.

승혁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여유로워 보이는 지수와는 달리, 승혁은 안달이 났다.

어서 이 소설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많은 이에게 지수의 글을 보여 주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승혁은 마음을 가다듬고서,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진지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네가 보여 준 원고 말이다. 이거.”

“<오후 4시>요?”


승혁은 기다란 식탁 위에 원고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지수 쪽으로 밀어 보여주었다. 지수는 덤덤한 얼굴로 원고를 쳐다보았다.

승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다 읽었어.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교수님.”


지수는 새삼스럽지만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 승혁은 말을 이었다.


“나, 오늘 수업도 없는데 학교 온 거다. 국문과 과방에도 들르고, 도서관에도 가고, 널 찾으러 캠퍼스를 다 뒤졌다.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여기까지 온 거야.”


지수는 여전히 동글동글한 눈으로 승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혁이 말을 덧붙였다.


“네 <오후 4시>는 정말이지, 놀라워. 생전 이런 작품을 본 적이 없다.”

“…”

“수야. 내가 편집 경력만 20년이 넘는다.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원고를 봐 왔다고 장담해. 그런데, 네 글은 정말 신선하고 대단해. 이건 빈말이 아니야.”


지수는 대답이 없었다. 멀뚱멀뚱 승혁을 쳐다보다가, 지수는 젓가락으로 밥을 한 조각 잘라내어 입에 넣었다.

승혁은 네모난 안경을 추어올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선인세든 뭐든 두둑하게 줄 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 원하는 만큼 고료를 줄 거라 약속하마.”

“…”

“응? 내 말 듣고 있니, 수야?”


승혁이 물었다. 지수는 입안에서 밥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간단하게 대답하고서, 지수는 이번에는 잘 구워진 생선을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꼭꼭 씹어 넘기고는 환하게 웃으며,


“하아. 맛있다.”


하고, 말하면서.

승혁은 지수의 승낙이 기분 좋은지 소리를 내어 껄껄 웃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원고 첫장에 적힌 <오후 4시>라는 활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승혁이 웃었다.


“점심 맛있게 먹으렴. 다음에 또 연락하마.”

“네, 감사해요, 교수님.”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수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지수의 원고를 품에 안고서, 승혁은 부랴부랴 식당을 달려 나갔다.

지수는 무덤덤한 얼굴로 승혁이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텅 빈 의자 하나.

지수는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국을 홀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



따뜻하고도 애틋한 소설.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는 이야기.


데뷔작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소설이다. 나는 평생 이런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다.


혜성의 탄생. 

소설가 지수, 

한국 문학계 전설의 반열에 오르다.


지수의 책은 출간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문학 평론가와 소설가들은 너도나도 지수의 책을 극찬하느라 바빴다. 

작은 서점과 대형 서점에, 그리고 전국 각지의 도서관에 지수의 책이 들어섰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스테디셀러에 올랐다. 인기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문에 실리고, 방송을 탔다. 그리고 <오후 4시>는 젊은 작가상을 탄 뒤 국내의 크고 작은 문학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지수는 문학상으로 얻은 상금을 모조리 보육원과 어린이 시설을 위해 기부했다.


“영어권 번역을 맡아 주실 번역가셔. 인사하렴.”


승혁이 말했다. 좁다란 회의실에 지수와 승혁과 처음 만난 미국인 번역가가 앉아 있었다. 번역가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베테랑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자.

번역가는 지수와 승혁의 앞에 앉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반가워요. 서울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지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번역가는 환하게 웃으면서 지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이 든 번역가와 젊은 작가의 손이 겹쳐졌다. 지수와 번역가는 악수를 했다.

번역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소설을 꼭 번역하고 싶었어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국 사람들만 알고 있다는 게 분할 정도로 멋진 소설이었어요. 읽자마자 당신의 팬이 되었어요.”

“제 책을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영어로 번역만 된다면 당신의 책은 세계적인 문학상을 탈 거예요. 벌써 기대가 되는걸요. 번역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지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번역 작업은 막힘없이 이루어졌다. 표지 작업과 출간 절차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유명 출판사와의 계약이 단숨에 이루어졌던 것처럼, 지수의 책은 눈 깜짝할 사이에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카프카 상 후보에 올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의 평일 아침. 승혁의 회사 신입 직원이 들뜬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편집부 사원들은 너도나도 신입이 보여준 기사를 읽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카프카 상을 탈 것인가, 그런 기사 제목이 눈에 띄었다.


“정말 대단해요. 카프카 상은 후보에만 올라도 대단한 거잖아요. 이러다 정말로 상을 타서 우리 회사 대박 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러게요. 안 그래도 지수 작가님 덕분에 매출이 쑥쑥 올랐잖아요.”

“이러다 진짜로 수상하는 거 아니겠죠, <오후 4시>?”


하고 말하던 직원들은 문이 열리고 승혁이 들어오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들 승혁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 가 앉았다. 승혁은 편집장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승혁도 소식을 들은 게 분명했다. 

<오후 4시>가 카프카 상 후보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음흠흠.”


승혁은 콧노래를 불렀다. 여느 때와 같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일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조그맣게 웃었다.


승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십 년이 넘는 날 동안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는 일은 없었다. 출판사에 처음으로 입사했던 날보다, 처음으로 책임 편집을 맡아 마지막 페이지에 이름이 들어갔던 날보다, 지금이 더 가슴이 뛰었다.

승혁은 승리를 예감했다. 얼마 뒤의 새벽, 승혁은 <오후 4시>가 프란츠 카프카 국제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



지수는 상을 탔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에 들었다. 후보에 올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지수는 자기가 상을 탔다는 것도 모른 채 밤중에 콜콜 잠만 잤던 것이었다.

승혁에게서 전화가 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마음 편히, 쿨쿨.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수는 승혁의 전화를 받았다.

승혁은 아침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말했다.


[수야. 파티를 해야겠다.]

“파티요?”


지수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몸이 찌뿌둥했고, 잠이 덜 깨어 눈이 침침했다. 지수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핸드폰 스피커를 타고 승혁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네 작품이 대단한 국제상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출판사 직원 분들도 다 오시는 거예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라. 이런 기쁜 날은 즐겨줘야 하는 법이지.]


지수는 승혁의 말을 들으며 쿡쿡 웃었다.


[출판사 근처에 커다란 레스토랑이 있잖니? 오늘 저녁으로 예약할 테니 학교 끝나면 와 줄래? 술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을 테니까 아주 좋을 거야.]

“와, 정말요? 신난다!”

[상 받은 것보다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신난 건 아니지?]


승혁이 묻자, 지수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맛있는 거 먹는 것도 좋지만, 함께 기쁨을 나눈다는 게 좋아요. 그리고 상 받은 것도 기쁘고요. 여전히 조금 얼떨떨하지만……. 

그리고, 제 소설은 대단한 소설이 아니라서 이런 훌륭한 상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대단한 소설이 아니라니?]


승혁이 물었다. 

지수는 조금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예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오후 4시>는 제 자전적 소설이니까요. 내 이야기를 쓴 소설, 평범하고 별것 없는 소설이니까요.”


승혁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가만히 지수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야. 너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 네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따뜻함을 느꼈잖니. 수야. 네 소설은 정말 가치 있는 작품이야.]


승혁이 말했다. 지수는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한승혁 교수님. 아니, 편집장님. 그리고 저, 수 아니에요. 수 말고, 지수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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