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혁은 무심코 받아든 신재의 명함을 눈여겨 살폈다. 고급 명함의 두껍고 올록볼록한 표면에는 낯익은 회사명과 낯선 이름이 선명한 잉크로 적혀 있었다. 쿨러-사이클이라는 회사를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곳 신한국 내에는 없다.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클 억제제를 판매하는 회사. 약물 부작용이 가장 적어 독보적으로 많은 판매 기록을 보유한 곳이 바로 쿨러-사이클이다.

 

손에 든 명함을 한참 보던 도혁은 고개를 들고서 신재를 보았다. 그리고 아차 하는 생각에 입을 벌렸다. 이틀 전 자신을 헌팅하려 했던 저질 자식이, 실은 쿨러-사이클의 귀하신 이사님이었던 것이다.

 

“저번에는 몰라 뵙고……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도혁은 지난날 이사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범하여 송구하단 의견부터 표했다.

 

“명함 주기 전에는 바쁘다고 휭 가버리고, 주니까 설설 기고.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해. 그렇지?”

 

은규의 방석 위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신재가, 책상 위에 놓인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물었다.

 

“제가 속물이 아니라는 변명은 안 하겠습니다. 모쪼록 언짢게 해드렸으면 죄송합니다.”

 

도혁은 소신껏 발언을 마치고 신재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눈을 굴렸다. 이 남자는 왜 자신을 호출했을까? 접때 뿌리치고 가 버렸다는 이유로 다그치려는 속셈일까? 의문이 가중되어가는 사이, 신재는 도혁을 보며 느긋이 웃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말씀하시죠.”

“이걸…… 뭐라고 하지?”

 

신재가 도혁에게 할 질문을 생각하는 동안, 도혁은 본능과 싸우며 무릎을 손에 틀어쥐었다. 작정하고 페로몬을 뿜어 대는 오메가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는 건, 알파로서 몹시 힘든 일이었다.

 

“……안 먹고 싶어?”

 

각이 잘 잡힌 양복바지를 입은 다리를 슬쩍 벌리며, 신재가 물었다. 나긋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친친 감고서 조여 대자, 도혁은 시선을 방바닥에 매다 꽂았다. 그리고 신재에게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제게 익숙한 공간을 이다지 낯설어지도록 만든, 월하 향 페로몬을 조금이나마 가시게 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신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성병, 걸렸습니다.”

 

는실난실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띠운 채 슬그머니 다가오는 신재를 만류하며, 도혁은 지질한 기지를 발휘했다.

 

“괜찮아요, 상관없어. 난 오늘 살고 오늘 죽거든.”

 

신재는 기어이 도혁 옆으로 바싹 와 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혁을 흔드는 페로몬의 밀도가 한층 강렬해졌다.

 

“으, 응, 싫어, 흑, 안 돼…….”

 

아찔한 향기에 반쯤 넋이 나간 도혁이 급기야는 울먹거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쪽팔리게 눈물을 보일 만큼, 그는 한낱 페로몬이 인도하는 하룻밤 성관계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뭐?”

 

싫다는 말에 대폭 자존심 상한 신재가 전보다 날카로워진 목소리를 냈다.

 

“아, 아니, 성병 옮는 거 말입니다. 이사님은 몰라도 저는 신경 쓰여서요.”

“말장난으로 얄팍한 수 쓰지 마. 방금 뭐라고 했어?”

 

금방 이성을 찾은 도혁은 신재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성병을 옮기는 게 싫다고 해명했으나, 신재는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사실 제가 임포텐츠…… 조루, 그래. 조루에 엄청 못합니다!”

 

아직 회생의 기회는 남았다. 도혁은 은규의 책상에 남겨진, 그의 사진을 하염없이 보며 다른 거짓을 지어냈다. 아, 그렇다고 은규가 조루에 엄청 못한다는 건 아니고.

 

“됐어. 내가 싫다는 말까지 듣고 강요할 정도로 구제불능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신재가 어느새 도혁의 허리에 친친 감았던 손을 떼며 말했다. 그는 여유를 지키려 애썼지만 태어나 처음, 그것도 같은 상대에게 두 번이나 거절당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 없었다. 신재의 마음을 눈치로 알아챈 도혁은 내적 갈등에 빠져들었다.

 

‘설마 내가 이 사람이랑 안 자서, 인생에 애로 사항이라도 생기려나? 길에서 원나잇 하자고 했다 거절당해서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거 보면, 뒤끝이 보통 수준은 넘는데……?’

 

한참의 고민 끝에, 도혁은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신재를 불렀다.

 

“저기 이사님. 무례한 질문 같기는 한데, 제가 그…… 나중에 개그맨이 되고 싶은데요. 혹 지금 일이 제 추후 행보에 문제가 되겠…… 습니까?”

“……이딴 일로 내가 보복이라도 할까 봐? 아니, 사람을 대체 뭐로 보는 건데?”

 

도혁의 말에 정말 기분 상한 신재가 눈을 사납게 치뜨고 물었다. 도혁은 날 세운 신재를 앞에 두고서 흐려져만 가는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서 분위기를 더 초쳐서는 안 된다. 보다 신중하게, 또 현명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짐승 같은 하룻밤을 배척하고 보다 고상한 삶을 좇는 따위의 낭만도 소중하지만, 그게 개그맨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일까? 둘 이상의 가치가 상충할 땐, 개중 가장 소중한 걸 지켜야 옳은 법이다.

 

“그, 저랑 주무시고 싶으세요?”

“그런데 이도혁 씨가 싫다고 했잖아.”

 

이제 됐다며, 신재는 먹다 남은 커피를 도혁에게 내밀었다. 도혁이 머뭇거리며 잔을 받자, 신재는 쿨러-사이클 상표가 붙은 억제제를 자신의 팔에 주사했다. 그저께도 주사를 놨건만 약발이 영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사 놓는 신재의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며, 도혁은 모든 게 망해버렸다고 생각했다.

 

“뭐 이런 알파가 다 있담.”

 

같은 타깃을 두 번이나 놓치고 그 때문에 두 번이나 주사를 놓았다. 신재로서는 작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도혁은 변종이기 전에 알파다. 온갖 고귀한 척은 다 하면서 오메가 페로몬에 개처럼 달려드는 족속. 그런 주제에 자신을 거부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사님 들으시기에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전, 제가 알파인 걸 못 견디겠습니다.”

 

신재가 먹다 남은 커피가 잘랑이던 컵을 뚫어지라 보던 도혁은, 엉뚱하게도 그 안의 내용물을 모조리 들이켠 뒤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신재는 술주정 같은 도혁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를 대하는 도혁의 태도는 실로 구차하고 방어적이다. 하지만 그런대로 신선한 맛은 있었다. 도혁이 뭐라고 지껄이나 계속 들어볼 심산으로, 신재는 손바닥에 턱을 괸 채 눈을 빛냈다.

 

“이게 사람 사는 게 맞나 싶습니다. 매달 브리드 억제제 사는 데 알바비 반 넘게 들어가고, 가끔 계산 안 맞아서 약 못 사면 정신 잃고……. 자기 히트 기간에 친구 새끼랑 각인해온 애인새끼 하며, 사는 게 지겹습니다.”

 

누구에게든 각자의 신파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정은 딱하다만 신재가 보기에 도혁이 현재 고민하는 문제는 너무 단순했다. 도혁 본인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신재가 조금만 도와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약값만 있으면 끝날 문제로 고민하고 있네. 여기다 집 주소 적어. 브리드 약 정도는 다달이 보내줄 테니까.”

 

도혁이 신선한 충격-구질구질하기는 하나-을 준 것에 대한, 신재 나름의 보답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제약 회사 쿨러-사이클의 일원이니, 도혁이 평생 먹을 만큼의 억제제는 보내줄 여력이 있다.

 

“……우리는 왜 약을 먹어야 합니까?”

 

도혁이 짐짓 음울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그 약 때문에 벌어먹고 사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죄송합니다. 그래도 약으로부터 자유를 평생 느껴보지도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서요.”

“자유?”

 

자유라니. 도혁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다. 신재는 그가 우습다 못해 기가 찰 지경이었다.

 

“개그맨 지망한다는 사람이 영 재미가 없어서 안 되겠네. 신세타령에 이어서 이제는 궤상공론을 늘어놓을 셈인가?”

“아아, 제 얘기가 불편하셨습니까?”

 

도혁이 살짝 처진 눈을 내리깐 채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남자가 앳된 얼굴로 웃는 모습이, 올해 불혹을 맞이한 신재의 눈엔 정말이지 산뜻하고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길거리에서도 저 잘난 얼굴에 꽂혀 따라붙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얼굴값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다.

 

신재는 도혁에게 커피 한 잔을 더 부탁했다. 상황이 그가 원하던 대로 굴러가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서 더 신선했다.

 

이도혁. 이 변종에게 더 말을 시켜보면, 또 뜻밖의 무언가가 신재를 반기며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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