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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인간 또 시작이네.”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린 휘인의 한쪽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시선이 닿은 끝에 푹 엎어져 있는 형체가 불규칙적으로 들썩거렸다. 

‘언니, 언니 보고 싶어….’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알콜성 고백에 휘인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미친놈, 으휴. 절로 나온 험한 말을 구태여 밀어 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휘인이 엉덩이를 팡팡 털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별이는 김용선과 헤어졌다. 꽤 오래 전에.

이런 경우엔 이별 사유를 성격 차이로 봐야 되냐? 처음 문별이의 고민 상대가 되어준 휘인이는 한동안 혼란스러움에 볼을 긁적거렸다. 딱히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었지만 다 지난 후에 듣게 된 두 사람의 연애는 그랬다. 이별 사유가 성격 차이라고 하기엔 누가 봐도 헌신적으로 맞춰줬던 문별이라 딱히 차이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김용선이 이기적이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수긍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직장인과 취준생의 사이에서, 김용선은 제법 균형 있는 연애를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한 축에 속했다. 오로지 문별이의 입을 통해 들은 연애사였지만 충분히 느껴졌을 만큼.


“언니? 언니야?”

“그래, 언니다.”

“아니네….”



허리춤에 양손을 턱 얹은 휘인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억울해할 정도로 촉촉한 눈을 한 문별이가 벌떡 고개를 들이밀더니 이내 세상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인나, 집 가게.”

“싫어.”

“여기서 살래?”

“언니 보고 싶다 휘인아.”



와장창 소음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온 얼굴을 구겨뜨린 휘인이 양손으로 제 귀를 막으려다 어어, 하고 팔을 뻗었다. 기우뚱하던 문별이가 기어코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온갖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젓가락이며 소주잔, 앞접시 같은 것들이 쏟아졌다. 아오, 못 살아 진짜! 신경질을 부리며 발을 구른 휘인이 엉겁결에 붙잡은 문별이 팔을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문별이가 쓰러지듯 몸을 기울였다. 보고 싶다, 언니.



***



“잘-한다 천금 같은 주말에.”

“나 넘어질 때 머리도 박았나? 계속 띵한데.”

“보통 그걸 숙취라고 불러.”



식탁 위에 둥그런 냄비를 내려놓은 휘인이 쯧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낸다. 자리에서 미적거리며 일어난 문별이가 멋쩍은 얼굴로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비비적거렸다.


‘너는 밖에서 술 마실 거면 입에 재갈을 물어.’

‘재갈 물고 술을 어떻게 마시는데.’

‘엉, 마시지 말라고 멍충아.’


후릅. 맑은 콩나물국을 한 입 떠 마신 휘인이 날카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모르는 척 등허리를 긁으며 욕실로 들어간 문별이는 칫솔에 치약을 주욱 짠다. 어렴풋하게 떠오른 전날 밤의 기억이 잔인했다. 언니 보고 싶어. 목놓아 외친 언니는 애석하게도 답이 없었다. 씩씩거리며 악 소리를 내지른 정휘인은 그래도 의리를 지킨답시고, 그 늦은 새벽에 저를 이고 지고 낑낑대며 응급실까지 데려갔다. 덕분에 새끼손가락에는 붕대가 칭칭 감겼다.


“혹시 내 폰 못 봤냐?”

“아, 그거 옷장 안에.”

“옷장?”

“백퍼 그 언니한테 전화 갈길 것 같아서 미리 손 좀 썼어. 잘했지?”



의기양양한 표정에 잠시 벙찐 표정을 한 문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개운함이 감도는 입안을 혀로 쓸어내리다 식탁 의자에 앉자 뜨끈한 콩나물국이 김을 모락모락 내뿜는 중이었다.


“출근하기 싫다….”

“아직 일요일 남았거든? 우울한 얘기 하지 말자.”



내려앉은 고요함에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 가득하다.

그래도 둘의 연애는 제법 길게 이어졌었다. 뭐든 빨리 빨리를 외치며 유행의 주기마저 짧아진 현대 사회에서, 1년 가까이 사귀었다는 건 그래도 제법 진득한 연애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숨이 푹 죽은 콩나물을 씹어 삼킨 문별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휘인 너 휴가 언제냐?”

“왜 같이 놀게?”

“아니 그냥.”

“다음 달 생각 중.”

“아-.”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개미 눈곱만큼 밥을 떠 깨작이고 있자니 아니꼬운 시선이 냅다 박혀온다. 으휴. 잔소리 할 마음도 들지 않는 건지 휘인이는 묵직한 긴 숨을 내뱉는 게 전부였다.

용선과의 연애는 달콤했다. 너무 달아서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반어법이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 문자 그대로 정말 달고 행복했다. 바람이 살랑였던 날 아파트 복도에서 살짝 맞닿았던 건 첫 뽀뽀였다고 치고, 진정한 첫키스를 나눴던 폭우가 쏟아졌던 날이 우리 연애의 첫날이었다.

‘근데 용선 언니, 제 이름은 알아요?’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로 한참을 붙어있다 떨어졌다.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주워입은 문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등 뒤에 누운 용선이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단정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노트북을 발견한 문별이의 뜬금없는 물음에 용선이 아,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면 둘은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처럼 꼭 붙어있었던 게 민망해질 수준이었다. 용선은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보며 눈만 깜빡였고 문별이는 들려오지 않는 답에 웃음을 눌러 참으며 뒤돌았다.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과 노트북에 붙어있는 앙증맞은 이름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용선과 똑같은 상황일 게 분명했다. 순서는 조금 꼬였지만 어차피 맞는 방향으로 가는 거라면 그깟 순서야 뭐, 대수롭지 않았다.


“가냐?”

“어 졸려서 쓰러질 것 같아, 나 잠자리 가리잖아.”

“너 어제 코 골았거든?”



휘인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술에 쩔어서 울다 웃다 코 골다 가지가지 했던 게 누구시더라. 내 집이라는 듯이 편안하게 쭉 뻗어서 누워있던 게 누구시더라. 얄미운 핀잔을 웃어넘긴 문별이가 제 볼캡을 푹 눌러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만 속에서 뭉글뭉글한 게 올라오는 느낌이라 피하는 게 상책이지 싶었다. 

‘너 한 번만 더 그 언니 타령하면 죽인다 진짜.’ 

며칠 전 휘인이의 단호한 얼굴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넣은 문별이가 가만히 눈치만 살피고 있자 휘인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가서 고백을 하든가 사죄를 하든가.’ 딱히 타령이라고 할 만큼 많은 언급을 한 것 같지도 않아 억울한 마음이 들 때쯤, 귀신같이 눈치챈 휘인이가 말을 덧붙였다.

‘술만 쳐 마시면 언니 언니 거리는 거 아주 그냥 지겨와죽겠어.’ 

그제야 수긍한 문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인아 나 술 냄새 많이 나?”

“그렇게 많이 나진 않는데 전날 과음했네 정도?”

“난다는 거네.”

“너 지금 십 리 밖에서 봐도 술 냄새 나.”



하여튼 정휘인은 거짓말이라곤 못하는 성격이다. 팔을 들어 킁킁거리던 문별이가 이내 체념한 얼굴로 신발장에 섰다. 곧장 집으로 향할 예정이지만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집 가는 길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좀 민망할 수 있으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아직 정 남은 옆집 언니랑 마주칠까 봐 그랬다.

슬그머니 휘인이 눈치를 본 문별이는 신발장에 놓여있던 페브리즈를 집어 들었다. 냄새가 뒤섞이면 되레 역하게 느껴질까 봐 개미 눈곱만큼 뿌린 뒤 다시금 소매에 코를 박는다. 이 정도면 무난한 것 같은데. 칙칙 몸에 뿌리고 나자 TV에 정신 팔고 있던 휘인이 냅다 고개 돌려 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가지가지…. 어디 선 보러 가게?’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속마음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간다, 문단속해.”

“자동이야.”



내리쬐는 햇살이 유독 따갑게 다가왔다.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괜히 습관 같은 한숨이 폭폭 새어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따분했지만 썩 먼 거리는 아니었다. 타박타박 길 위를 걸어내는 제 발끝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둔 채 멍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문별이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터진다. 다른 때와 변한 것 없는 아파트 단지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한탄이었다. 투명하게 떨어지는 햇살과 늘어진 그림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주저하게 되는 발걸음.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르겠단 가정은 행운인지 불운인지 아직도 모호한 채 마음에 남아있다.


“마트 갔다 오나 봐?”



아무래도 아직은 행운에 가까운 게 확실했다. 땡볕 더위 아래보단 한결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복도 끝에서 우연히 마주친 용선에 망설일 기세도 없이 말을 붙인 문별이는 그제야 아차 하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저를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던 용선이 뒤돌아 동그란 눈을 하다 금세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하게 입꼬리만 슬쩍 올라간 미소가 낯설게 다가왔다. 더 할 말 없냐는 듯 몇 초간 저를 쳐다보던 용선은 얼마 못 가 시선을 돌렸다. 철컥이며 닫히는 문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외부업체 미팅이요?”

“겁 먹을 건 없고 그냥 따라만 가면 돼요 실습인 셈 치고.”

“아, 네.”



바쁘게 굴러가는 회사 일정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간신히 자리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머금던 문별이는 제 책상에 똑똑 노크하는 주먹을 보고 급하게 물을 삼켜냈다. 하마터면 켁켁거리며 사레까지 들릴 뻔했지만 다행히 크게 숨을 한 번 고르자 그럭저럭 내색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인데다 인격적으로 모난 것 없는 사수 선배는 업계에서도 베테랑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첫 사수 중요한 거 알지? 별이 씨 복 받았네.’ 서글서글한 인상이 친숙한 부서장의 넉살에도 쉽게 긴장을 풀지 못했던 첫 발령일도 벌써 대략 3개월 전 일이었다. 시간 참 빠르네, 근데 퇴근 시간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미팅 갔다가 거기서 바로 퇴근하게 가방 챙겨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덕에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 오신 분인가 봐요?”



우연이든 필연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얼굴 탓에 머릿속은 이미 엉망이 된 직후였다. 제법 규모가 큰 거래처에 들어섬과 동시에 낯선 기류 때문인지 온 신경이 쭈뼛거림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안내받은 회의실로 걸어가던 문별이는 파티션 너머로 힐긋 보인 얼굴에 저도 몰래 입을 벌렸다. 예기치 못한 만남인 게 분명했다. 뻐근한 목을 왼쪽으로 까딱이며 고개 들었던 용선도 그대로 행동을 멈춘 채 저를 빤히 바라봤다. 예의 그 동그란 눈으로.

‘그때 말씀하셨던 포트폴리오예요.’

단정한 말씨의 사수 목소리가 인지됨과 동시에 간신히 정신 차린 문별이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뜻하지 않게 마주친 탓에 잠시 공황상태가 되긴 했지만 현실로 돌아오는 것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이 앉아있긴 했지만 오는 동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부담 가질 것 없다며 용기를 북돋아 준 사수 덕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깨작거리며 오가는 목소리에 집중하다가도 금세 신경이 회의실 문밖을 향했다.


“아 그리고 사실 이 아이디어는 문별이 씨가 낸 거라.”



물 흐르듯 진행된 회의 끝에 불현듯 튀어나온 호명이었다. 척추를 바로 세우며 숨을 들이켠 문별이가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순간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된다’던 사수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지만 숨을 길게 내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딱히 어려울 것 없는 부연설명을 끝마침과 동시에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회의실 문 너머로 비친 눈과 시선이 맞아떨어진다. 어떤 모습을 바랐을진 모르겠지만 저를 바라보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올라앉았다. 소리 없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시원한 입매와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눈이 다정했다. 짧은 순간 엄지까지 척 치켜들어주고 사라지는 모습에 간신히 웃음을 삼켜낸 문별이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별이 씨, 오늘 고생했어 푹 쉬고 내일 봐.”

“팀장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집까지 태워주겠다던 사수에게 손사래 친 별이가 차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매끄럽게 사라지는 차를 멍하니 쳐다보다 시선을 올리자 어둑어둑해진 저녁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빠름에도 다른 때보다 더 어두운 하늘색이 심상찮았다. 비라도 오려나. 높다란 건물을 찬찬히 눈으로 훑은 뒤 1층 편의점으로 들어선 문별이는 캔콜라를 집어 들었다. 퇴근 이후의 시간은 암만 아껴도 쏜살같이 지나간다며 툴툴거렸던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조바심 들지 않았다.

‘야 휘인아, 오늘 오후에 비 올 듯.’

‘인간 기상청이냐?’

옛날부터 그랬다. 딱히 뉴스를 챙겨본다거나 일기예보를 챙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기 중에 묘하게 뒤섞인 꿉꿉함을 잘 캐치한 덕이었다. 누구는 그게 예민함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그걸 영민함이라고 했다.

편의점 밖에 마련된 파라솔 아래에 앉아있자니 그제야 편안한 숨이 내쉬어졌다. 비로소 일과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 비슷한. 느릿하게 콜라 한 캔을 비워내자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퇴근 시간인지 건물에서 쏟아져나온 한 무리가 뿔뿔이 흩어진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거나 버스에 올라타거나 편의점으로 뛰어들거나. 털레털레 빈손으로 나온 남자가 작게 욕지거리를 읊조리다 이내 체념한 듯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제 옆에 놓인 비닐우산을 힐긋 쳐다본 문별이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지막 남은 우산을 집어 든 건 순전히 재수가 좋아서였나.


“차 안 가져왔어?”

“아, 응. 아직 안 갔어? 아까 끝나고 나가더니.”



한차례 우수수 빠져나간 사람들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난처한 얼굴로 건물 입구에 선 용선에게 한달음에 달려가자 놀란 눈이 저를 향했다. 펼쳐 든 우산 끝에서 튕겨 나간 빗방울 덕에 잠시 몸을 뒤로 빼던 용선이 얼마 못 가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를 슬쩍 비틀며 눈짓한 문별이의 메시지를 읽은 게 분명했다.

우산 안으로 시원한 향이 흩뿌려진다. 괜히 마른 목으로 큼, 헛기침한 문별이가 숨을 들이켜며 손을 기울였다. 제 쪽으로 기울어진 우산 끝을 눈치 좋게 확인한 용선이 문별이의 옆으로 제 몸을 바짝 붙인다. 우산을 든 팔 사이로 다정하게 걸쳐진 손을 힐긋 쳐다본 문별이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뗐다.


“택시 탈 거지?”

“버스 왔네.”



힘없이 걸치고 있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용선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빠르게 하자 금세 버스 안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을 툭툭 털어낸 별이가 어느새 떡하니 자리 잡고 앉은 용선의 옆자리에 허리를 내렸다. 덜컹이는 버스 소음이 전혀 방해스럽지 않았다. 눅눅한 공기가 어수선하게 가득한 공간이 괜스레 설레게 느껴졌다.


“언니네 회사인 줄 몰랐어.”

“난 내가 헛것 보는 줄. 그래서 미팅은 잘 끝났어? 대충 보니까 잘한 것 같던데.”

“난 그냥 앉아있기만 했어, 팀장님이 다 하셨고.”

“다 그렇게 시작해.”



불편하지 않은 정적이 짤막하게 지나갔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눈 마주치기가 두려운 탓에 어정쩡한 정면을 응시하던 별이가 버스 바닥을 적시며 궤적을 그리는 물방울에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좋아 보인다 별아.’

가까운 오른쪽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자 편안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용선의 입매가 눈에 들어온다. 스스로도 뭐라 말하고 싶은지 모를 말 때문에 입안이 간질거렸다. 있잖아 언니, 로 시작되는 무슨 말인 것 같은데. 간지러운 입술이 벌어지려 할 때쯤 경고음이 울렸다. 빨간빛의 정차버튼을 확인한 별이가 다시금 입을 다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잖아 언니”



기어코 참을성 없는 말머리가 튀어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축축하게 젖은 땅을 밟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잘 참아냈던 말이 불쑥 흘러나와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딱 열 걸음만 참았으면 별일 없이 용선은 집으로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게 싫어서 튀어나온 말이지 싶었다. 별일 없는 것도, 용선이 말없이 모습을 감추는 것도.


“뭐 대단한 이별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너무 유난이었던 것 같다, 그치.”

“……”

“가끔 밥도 같이 먹고 그러자. 연락도 필요하면 하고…. 너무 내외하면서 지내진 말자, 서로 어색하잖아.”



준비성 없이 나온 용기가 공기 중에 녹아내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별이를 확인한 용선이 웃음을 남긴 채 문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힌 단단한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이 힘없이 바닥을 향했다. 뭐 대단한 이별한 것도 아닌데 난 아직도 유난인 걸까. 물기 젖은 머리카락이 끈적하게 목에 감겨왔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이 힘들더라도 진짜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흘러가고 어떻게든 끝나게 되어있다고. 처음엔 그 말이 어찌나 뜬구름 같았는지, 어디 절에서 도라도 닦다 온 사람인 줄 알았던 문별이는 저도 모르는 새 그 말에 꽤 의지하는 중이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매 순간도 결국엔 흘러버린 과거라 그래도 버틸 만했다. 물론 돌이켜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왜 그랬나 후회되긴 하지만 당장 눈앞이 캄캄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그 당시를 생각하면 비교적 여유로운 감정이라 생각했다.

헤어짐의 순간보다 잔인한 건 불시에 용선을 마주치는 일이었고 그때마다 그런 저를 닮아 바짝 긴장해버리는 공기의 흐름이 잔인했다. 맞은 편에서 저를 보고도 못본 척 시선을 돌려버리는 용선이 저의 얼어붙은 상태를 알아차릴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한결 둘 사이를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들어준 그때의 비 오는 날 이후 괜찮은 척 웃어 보일 수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척에 불과하다는 건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엄청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맞은 편에 앉아 피식 웃는 얼굴에 입꼬리가 덩달아 올라갔다. 반면에 끝없이 추락하는 마음속 무언가가 거슬렸다.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는 용선의 손을 힐끔 쳐다보다 작은 한숨을 내뱉은 문별이가 허리를 바로 세우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너무 내외하며 지내진 말자던 용선은 그 말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오가며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건 당연했고 가끔은 택배인가, 하고 문을 열면 뜬금없이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거 좀 나눠 먹자 너무 많아서.’ 접시 위에 한가득 올라와 있는 부침개라든지 불쑥 내민 떡이라든지. 엉겁결에 흘려보낸 시간이 벌써 촘촘히 쌓였다.

‘별아 오늘 술 한잔할래?’

사귀던 중에도 들어본 적 없는 말에 잠시 어버버하긴 했지만 집 근처 맥줏집에 들어선 문별이는 중간중간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같은 황망함을 느꼈다. 잔을 짠 부딪치는 순간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좋긴 한데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찝찝하긴 한데 그러기엔 눈앞의 얼굴이 잔인하게 반짝거리고.


“근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갑자기?”

“언니가 술 마시자고 한 게 처음이라. 술 못 마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의문으로 가득했던 용선의 표정이 그제야 풀어졌다. ‘별일 없어, 그냥 좀.’ 장난스럽지 않은 목소리가 적당하게 가라앉는다. 앞에 놓인 시원한 맥주잔을 집어 든 문별이가 타는 속을 진압하듯 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하게 식도를 훑으며 삼켜내고 나자 심장의 둥둥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까부터 애매하게 긴장되는 마음의 정확한 원인이 드러났다. 애매한 거리에서 애매한 감정으로 용선을 마주함으로써 나온 애매한 희망. 보통 대개의 재회한 연인들은 이런 식으로 두 번째 만남을 준비하지 않을까 하는 애매한 기대.


“무슨 일은 네가 있는 것 같다 별아.”

“뭐가?”

“왜 그렇게 쳐다봐, 당황스럽게.”



어느새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어두컴컴한 조명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허리에 힘을 빼자 구부정하게 기운 문별이가 테이블 위로 팔을 세우며 턱을 괸다. 상체를 뒤로 빼며 장난스럽게 웃는 용선의 손이 맥주잔 손잡이를 더듬었다.


“있잖아 언니,”

“너 주량 세다더니 순 개뻥이었네.”

“나 안 취했거든?”

“꼬부라진 소리 나거든요?”

“우기지 마, 아직 한 잔도 다 안 마셨는데 무슨.”

“그럼 내가 취했나? 나 얼굴 빨갛지?”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언니 합쳐봐야 세 모금도 안 마셨거든. 어이없음에 피식거리며 답하자 볼을 만지작거리던 용선도 키득대며 웃는다. ‘이제 가자, 나 내일 일찍 일어나야 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용선을 멍하니 보던 별이가 서둘러 따라붙었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시끌벅적한 가게에서 나왔을 때에야 제 팔뚝을 툭 치고 떨어지는 작은 주먹으로 시선이 갔다. 내가 먹자고 했는데 왜 네가 사.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기분이 한결 낫다 아깐 좀 꿀꿀했는데.”

“다행이네.”

“다음엔 내가 살게, 기분 안 좋은 날 꼭 말해. 아 좋은 날에 말해도 되고.”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잘자, 나 들어간다.

다시 한번 문이 닫혔다.











“거기서 끝나면 추억이요, 더 가면 추태이니라.”

“네가 생각해도 별로지?”

“아니 뭐 다시 잘 될 수도 있으니까 별로라고 단정 짓긴 뭣한데 보통은 추하게 끝나니까.”



원래 한 번 깨지고 다시 만난 커플들이 그래, 99% 또 헤어진다잖아 똑같은 이유로.

덧붙은 휘인의 목소리가 유독 정 없게 느껴졌다. 바나나우유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문 문별이가 말없이 숨을 내쉰다. 의자에 앉아 마사지볼을 만지작거리던 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언니도 마음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닐까? 헤어진 마당에 예전처럼 잘 지낸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맞는데.


“이대로 계속 지내도 되는 건가.”

“다시 만나자고 해보든가.”

“근데 언니는 그럴 마음 없어 보여, 나만 이러지.”

“그래?”



고개를 갸웃한 휘인이 마사지볼로 제 어깨를 퉁퉁 두드린다. 남은 바나나우유를 쪼옵 삼켜낸 별이가 뒤로 벌렁 누워 눈을 감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고 쯧쯧 혀를 찬 휘인이 괜히 다리를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하듯 몸을 움직인다.

‘만약 그 언니는 진짜 마음 정리 다 끝났다 쳐, 너 계속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붙어있다가 언니 연애라도 하면 어쩔 건데? 그땐 뭐 어쩌게.’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숨만 고르게 내쉬던 문별이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땐 뭐…. 내가 할 수 있는 거 하겠지.”

“난 아직 언니 좋아한다, 뒤늦게 고백이라도 하시게?”

“미쳤냐 내가.”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너랑 술 마시고 질질 짜는 거.”

“아 극혐.”



힘없이 저를 향한 시선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휘인이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킬킬 웃는 웃음소리가 조금은 가여워 보여서 더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멈추면 추억, 더 가면 추태라곤 했지만 사실 내가 응원하는 쪽은 후자라는 말도.

시간은 제법 무던하게 흘러갔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겉으로 봐서는 쿨하다고 할 만큼. 살면서 내가 이런 관계를 가질 일이 있을까 싶었던 일이었다. 감히 헤어진 전 연인이랑 친구처럼 지낸다? 적어도 문별이 신념에는 정확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절친한 정휘인마저 삡, 소리를 내며 팔로 엑스자를 그어 보였으니 더할 말도 없었다. 

우려했던 것과 같이 아슬아슬한 상황은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색한 기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게 희망이 돼서 호시탐탐 기회라도 엿봤을 텐데, 문별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김용선은 조금도 그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늦었네.”

“일이 좀 많아서. 왜 나와 있어?”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



달빛은 구름에 가려 탁했고 가로등 불빛은 고장 탓인지 흐렸다. 그게 꼭 불길함의 징표인 것 같아 마음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희미하게 떠오른 과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불쾌했다. 손톱만큼 남아있던 어색함이 사라져갈수록, 그러니까 용선과의 모호한 관계가 하루하루 지속될 수록 많아진 생각 탓에 쉽게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차라리 찬 바람이라도 쐬면 마음이라도 홀가분해질까 싶어 산책삼아 걷던 길에 마주한 차 한 대가 괜히 눈길을 잡아끌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용선이 그날처럼 허리를 굽혀 창문 너머의 누군가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사실 우리는 헤어졌고, 어쩌면 나의 일방적인 질척임이겠지만 그 속엔 여전히 녹지 못한 감정의 알갱이들이 까끌하게 굴러다녔다. 예컨대 차마 언니에게 대놓고 묻지 못했던, ‘저 남자는 뭐야?’ 같은 아주 사소한 질투심 같은 것들.

같은 상황이지만 분명하게 달라진 서로의 포지션이 기분을 잔뜩 망쳐놨다. 물론 문별이의 기분이야 그때건 지금이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때의 용선은 기분 좋은 웃음을 띠며 문별이의 팔에 팔짱을 척 끼며 몸을 잔뜩 기댔었다. 걸음 끝에도 여전히 닿을 일 없는 몸이 그제야 우리 사이의 거리구나 싶어 문별이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 그때의 용선이 들었다면 동그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다정하게 물어줄 게 분명했다.


“추운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가.”



다정한 말씨로 그은 묘한 선이 따끔거린다.


“언니 나랑 술 한잔할래?”



이 타이밍에 왜 하필 그때 버스에서 봤던 정차버튼이 떠올랐을까.


“다음에.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해서.”



좀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웃었잖아. 빌미없는 원망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마치고 치맥 ㄱ?’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휘인은 타이밍 하나는 참 예술이었다. 마우스를 달칵거리다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문별이가 서둘러 답장했다. 밤새도록 활활 탄 속은 잿더미만 가득한 채 시커먼 구멍을 만들어냈다. 그럼 고백하든가, 하던 심드렁한 정휘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늘은 혼술이라도 해야겠다 다짐하던 찰나에 다가온 연락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갑게 느껴진다.

재회의 시발점이 되었던 프로젝트도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어시스트하는 정도에서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 정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탓에 제법 긴장했던 문별이도 여유를 되찾았다. 늘 기복없는 태도의 팀장은 이번에도 보기 좋게 웃으며 문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리하고 퇴근합시다, 오늘 같은 날은 칼퇴해야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느슨한 하루였다. 가방을 집어 든 팀장이 선두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직원들이 저마다 분주해 보인다. 불금! 눈인사와 함께 발랄하게 소리친 앞자리 직원이 우다다 뛰쳐나간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별이가 어휴, 하고 실소를 터트리며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치맥 장소에 대한 토론 혹은 빨랑 마치고 뛰어오라는 독촉 정도일 줄 알았던 별이는 액정에 덩그러니 뜬 모르는 번호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비상연락망 보고 연락드렸어요. 김용선 대리님이 회사에서 쓰러지셨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 휘인아 미안, 내가 정신이 없어서….”



복도에 멈춰선 별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확인한 휴대폰을 가득 채우고 있는 휘인의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약속은 까맣게 잊은 채 지나갔을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답장한 별이가 숨을 돌리기도 전 전화가 걸려왔다. 용선 언니 쓰러져서 지금 병원이야. 짤막한 메시지를 단숨에 확인한 정휘인도 아마 꽤 놀랐을 게 분명했다.

긴말 없이 얘기하자 대답 대신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별일 없는 거지? 넌 괜찮은 거고?’ 따라 나온 걱정에 응, 하고 답하자 그럼 됐어하며 전화를 끊는다.


“…알았어, 끊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누워있던 용선이 침대에 앉아 통화 중이었다. 드르륵 열린 문소리 때문인지 저를 힐긋 쳐다보며 휴대폰을 내린 용선은 마른세수를 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좀 괜찮아?”

“미안, 쓸 일 없을 줄 알고 네 번호 올려놨던 건데.”

“그게 왜 미안해, 이 정도 사이는 되잖아.”



아픈 사람을 상대로 욱한 감정을 내보이는 게 부끄러운 일이란 걸 몰라서 내뱉은 게 아니었다. 말하고도 아차 싶었지만 미동없이 저를 쳐다보는 눈에 여전히 미안한 기색이 서려 있어서, 변명하길 포기한 문별이도 마른 볼을 문질렀다. ‘수액 다 맞으면 가도 된대.’ 덤덤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아픈 사람이 뭘 혼자 가.”

“누가 보면 큰 병 걸린 줄 알겠다.”

“지금 장난이 나와?”

“왜 화를 내, 갑자기.”



택시 안에서도 이어진 정적이었다. 집 앞에 내려서자 휑한 바람이 몸을 스쳤다. 넌지시 운을 뗀 용선은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온 버럭에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쓰러지기 전보다 더한 두통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내가 언제 화를 냈는데.”

“지금 이게 화내는 거 아니면 뭔데?”

“놀라서 그런 거잖아,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다니까 놀라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생각 없이 올려놓은 연락처였어, 너한테 이런 일로 연락 갈 줄 몰랐다고 나도.”

“누가 지금 그것 때문에 그래?”

“그게 아니면 뭐. 굳이 이 상황에 쌀쌀맞게 구는 게 뭐 때문인 건데.”

“……”

“별 사이도 아닌데 귀찮게 만들어서 미안해, 됐지?”



용선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같지도 않은 쿨한 척이란 쿨한 척은 다 해가며 어른스러운 양 행동했던 지난 날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살면서 느껴본 감정 중 가장 구질구질한 순간을 꼽자면 아마 지금이 아닐까. 누구한테 설명하기도 애매할 수준의 이별이었다.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이별이라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던 걸까. 오가며 마주친 하얀 얼굴을 볼 때면 자꾸만 후회가 불쑥불쑥 치밀어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한 번만 더 잡고 말해볼 걸, 딱 5분만 더 대화할 걸.

생각지도 못한 밤 문 앞에 서 있었던 문별이에게 한 번 더 말해볼 걸, 따위의 후회는 시간이 갈수록 몸집을 불려 나갔다. 제법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일 때면 미운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제 나 없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용선을 괴롭혔다.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나, 한때 그래도 연인이었던 상대에게 이딴 허접한 감정을 느낄 만큼. 감정의 잔해를 제때 처치하지 못한 결과가 꼴 좋다 싶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품은 채 마주하는 문별이는 때때로 지나치게 냉정해서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가령 저를 앞에 두고도 딴 생각을 하는 것 같을 때, 제 말을 듣고도 썩 어색하게 웃어버릴 때, 그리고 지금.


“언니랑 친구 하기 싫어서 그랬어.”

“그러니까 하지 말자고. 헤어진 마당에 친구?”

“……”

“내가 미쳤지.”



앞을 가로막고 선 문별이를 가만히 쳐다보던 용선이 끝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주책맞게 이 타이밍에 웬 눈물이야. 속으로 가득 곱씹은 비속어들 따위야 알 바 아니었다. 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 지, 어떤 심정으로 마주하고 있을 지 도통 감이 서지 않는 문별이가 문제였다. 안타까운 눈으로 가엾게 바라보고 있을까. 뭐가 됐든 정 떨어진 얼굴로 지금 이 상황을 귀찮아하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때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고 아직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그러면 언니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랬어. 마음 정리도 안 해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처럼 지내는 거, 비겁하단 거 아는데 그렇게라도 안 하면 진짜 남될 것 같아서 괜찮은 척했어.”

“……”

“언니랑 밥 먹는 거, 술 마시는 거 안 괜찮았어 나는.”

“……”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괜찮은 척한 건데. 언니가 자꾸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니까 섭섭해서, 진짜 헤어진 것 같아서 속상하고 미안해서….”



여차하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신없이 흐른 시선의 끝에 깔끔한 구두 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마주한 까만색 로퍼 끝이 티끌없이 깨끗했다.

누구와 달리 이미 흐른 눈물은 애당초 포기한 용선이 손등으로 볼을 훔쳤다. 꺽꺽거리며 운 게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손톱만큼 들었다. 문별이의 한참 뒤편에 위치한 가로등 불빛이 선명하게 내리쬔다. 오락가락하더니, 고쳤나보네.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조금 웃긴 일이었다. 전에 비하면 제법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단정히 넘겨낸 용선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술 한잔하자고 했지?”

“……”

“우리 집에서 마시자, 안주는 없어.”



꽤 씩씩한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위중한 상태는 아니지만 이제 막 병원에서 나온 저에겐 술 한 방울 허락하지 않을 문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간신히 눌러삼킨 울음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옆에 붙어선 용선이 별이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숨이 탁 트인 문별이가 고개를 치켜들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근데 헤어진 거 같은 게 아니라 우리 진짜 헤어졌었거든?’ 

물기어린 목소리 사이에 피식 웃음이 섞여나왔다. 

‘몰라, 나 언니한테 물을 거 진짜 많으니까 마음이나 단단히 먹어.’ 

전혀 퉁명스럽지 않은 목소리에 용선이 고개 숙인 채 키득거렸다.




@Flofu0221 나문사 문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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