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든 설리반은 눈앞에 펼쳐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기 힘들었다. 눈앞에 브랜든이 부랴부랴 편의점에서 사온 티백으로 내린 찻잔은 쥔, 휠체어에 앉은 다리를 담요로 덮은 단정한 차림의 남자는 익숙하고 또 낯설었다. 그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잔뜩 모으고 뜨거운 차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그런 표정과 모습답게, 남자는 영국식 영어와 말투를 사용했다. 그토록 정통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는 뉴욕에서도 보기 드문 종류의 것이다.


“당신이… 과거에서 왔다고요?”

“음, 정확히 말하면 ‘다른 세계’의 과거죠. 제가 살게 될 21세기는 아마 이렇지 않을 거니까요, 미스터 설리반.”


남자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 푸른 눈이 가볍게 접히는 모양은 분명히 익숙했고, 그것은 브랜든에게 본능적으로 공포와 얕은 혐오를 일게 했다. 그것을 읽은 모양인지 남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두려워 말아요. 남자의 입술은 작게 속삭이듯 그런 말을 끄집어낸다.


“저는 브루스 로버트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와 행색만 다를 뿐, 완전히 똑같-”


다리와 단정한 니트를 훑던 브랜든이 문득 말을 멈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브랜든의 홍채에 겨울 햇살이 느리게 비춰서, 그의 생각에 섬광이 일거나 혹은 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자신을 찰스 자비에라 소개한 남자는 느긋한 자세로 그런 브랜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뉴욕의 회색을 닮은 이 남자는 에릭보다도 말랐고, 에릭과 외양상으로 다른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브루스 로버트슨에 대해선 어떻게 압니까.”

“그건 제가 이미 설명을 했을 텐데요.”


찰스는 검지와 중지로 제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에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것은 브랜든이었다.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만이 울렸다. 겨울의 뉴욕은 생각보다 보기 좋군. 찰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브랜든의 아파트는 층이 높은 편이었고 빠르고 소란한 도시의 아침 풍경이 모조리 들어왔다. 밤이 되면 더욱 근사할 것이다. 찰스는 자신이 여기서 그것을 보게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에릭을 찾아 돌아가야겠지. 혹은 꿈이라 여기며 조금 더 늑장을 부릴지도. 적어도 눈앞에 선 창백한 남자가 허락을 해야겠지만.


“그럼 당신은 정말로… 그,”

“텔레패스죠. 실질적인 직업은 교수지만, 그걸로 돈을 벌어도 벌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답니다. 난 부자거든요. 그래서 학교도 세웠죠.”


브랜든은 겨우 숨을 쉬는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바싹 말려 올라가 삐죽하게 위를 향해 선 것도 모조리 보였다. 암울한 녹색과 회색이 섞인 눈동자. 브랜든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능력을 쓰지 않아도 찰스는 그쯤은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렇겠지. 더욱이, 그는 자신의 비밀을 들키는 데 면역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수치가 강한 사람이니. 이 긴 시간 동안.


“당신은 방금 내 마음을 읽은 겁니까?”

“오, 나도 상황이 상황이라 지금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짧게 읽은 거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떠날 때에는 모두 지우고 떠날 거라.”

“그런 문제가 아닌 건, 나를 읽었다면 알 텐데.”

“그래서 안심시키려고 이런 말을 했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브랜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 아래 뺨과 광대에 붉은 기가 어렸다. 무엇을 보았는지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운 남자의 표정을, 에릭과 꼭 같은 얼굴에서 보는 것은 찰스에게 흥미로운 일이었다. 에릭 렌셔는 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지을 줄 모른다는 말이 맞을지도. 아니면 그저 찰스 자비에에게만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브랜든이 작게 어깨를 떨었다. 그는 당황했고, 화가 났고, 동시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브루, 아니 미스터 자비에.”

“편한 이름으로 불러요 X는 미지의 알파벳이니, 임의의 이름이기도 하죠.”

“사양합니다.”


어차피 곧 떠날 것처럼 구는 찰스의 편안한 태도에 브랜든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긴 손가락은 분필처럼 하얗고 마디가 얇았다. 똑똑 끊어질 것 같네. 가늘게 떨리는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보며 찰스는 무의식적으로 가학적인 생각을 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브루스 로버트슨이 할 법한 생각. 찰스는 싱긋 웃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훑은 것은 맞지만 그것의 깊이와 상세함에 대해서 브랜든 설리반이 알게 된다면 아연할 것이다. 찰스는 브랜든과 함께 그의 모든 생을 함께할 정도로 모든 것을 동시에 읽어내릴 수 있는 남자였다.


“신기하네요.”

“뭐가요.”


찰스는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그새 진한 벽돌색으로 변해버린 차에서는 쓴 맛이 났다. 인상을 쓰는 찰스 자비에의 얼굴.


“브루스 로버트슨과 저. 그리고 당신과 제가… 아끼는 사람은 무척 닮았거든요. 다른 세계와 다른 시간에서 이렇게까지 닮다니.”


찰스는 답지 않게 로맨틱한 말을 했다.


“운명일지도 모르겠네요.”


브랜든이 날이 서린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아닙니다. 그쪽이 저와 닮은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어떤 관계인지 아니까 이런 말을 하겠죠, 미스터 설리반.”

“착각한 겁니다.”


서늘한 얼굴의 브랜든은 겁에 질린 표정과 비슷했다. 찰스는 그 이유를 알았지만, 잠깐 입을 다물었다. 브랜든은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 가만히 찰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신기루처럼 떠나갈 남자에게 못할 말은 없었다. 더욱이 ‘그’를 닮은 남자에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비이성적인 기분이 들게 했다.


“저와 브루스 로버트슨의 관계는 엉망진창입니다.”


브랜든은 자신의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주는 상상을 했다. 목도리로 가린 목덜미도. 잇자국과 멍으로 가득한 희게 질린 피부를 보면, 남자는 무슨 말을 할까. 찰스 자비에는 그마저 모두 읽은 표정으로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그도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와 에릭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브루스와 브랜든의 관계와 달리, 찰스와 에릭의 것은 모조리 내상이었다. 에릭의 피부를 덮은 수많은 상처 중 찰스가 낸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상처는 찰스가 주인이었다.


“그러니 닮았다는 말을 한 거지요, 미스터 설리반.”

“하지만 당신은 그를 아낀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브랜든은 말을 더 할 수 없다. 브랜든은 한참의 침묵 끝에, 찰스에게 매달리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읽을 수 있다고 했죠.”


찰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무릎을 꿇고 자신의 다리에 뺨을 묻고 우는 에릭의 환상이 겹쳤다가 사라진다. 자신을 읽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찰스의 상상이다. 그러므로 브랜든 설리반은 절대 에릭 렌셔가 될 수 없다.


“당신이 겪는 것을 나도 겪은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죠.”


브랜든이 숨을 삼킨다. 순간적으로, 녹회색의 뉴욕을 머금은 눈동자색으로 바뀐 찰스의 눈동자는 놀랍도록 자신의 것과 같았다. 이런 얼굴이 있을 수 있나 싶었던 표정이 서리는 것과 동시에 찰스는 그 표정을 지워냈다. 브랜든은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브루스 로버트슨의 아래에서 울고 흥분하고 죽고 싶었던 날, 그가 목을 매 흔들거리는 다리와 나동그라진 의자 앞에서 어쩔 줄 몰랐던 날, 손목을 또다시 그어버린 씨시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브루스, 제발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죽어버린다면 그전에 내가 기필코 죽겠다 오열하던 날…다양하고 모두 시든 색채로 지나간 뉴욕의 갖은 계절. 그 속에서 쌓여 가던 감정을 브랜든은 알 수 없었다. 그게 감정인지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날 브랜든은 브루스가 저를 찾을 수 없는 어딘가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 감정에 이름 붙이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미스터 자비에.”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식의 상담은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필요 없어요.”

“이건 상담이 아닙니다.”


찰스는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있었고, 브랜든이 말을 잇기 전에 그의 눈앞에는 정복을 입은 브루스 로버트슨이 서 있었다.


-


“내 몸에 다시 손댔다가는 바로 네 목이 날아갈 줄 알아.”

“워, 그럴 일은 없다고. 충분히 말했잖아.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던 거야.”


그 년이 갑자기 내빼서 내가 온 뉴욕을 뒤지느라 좀 빡이 쳤거든.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주먹을 날리긴 했는데, 당신이 아닌 건 알겠어. 브루스는 턱 아래를 위협적으로 도는 금색 훈장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에릭은 팔짱을 낀 채 양손을 든 브루스를 잠깐 바라보았다.


“잘됐군. 나도 누구를 좀 찾고 있으니 도와줘야겠어.”

“도와달라고? 이건 협박 아닌가?”

“맘대로 생각해.”


에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브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에릭은 솔직히 기가 찰 지경이었다. 갑자기 저를 발견하고는 욕지거리를 해대며 주먹으로 있는 힘껏 뺨을 치더니 키스를 하고 강간하려 든 남자가 제정신일 리는 없겠지만, 그러고선 에릭과 눈이 마주치고는 곧바로 흥미가 사라진 눈을 하더니 급기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었다.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사람처럼. 찰스 자비에의 얼굴을 하고선. (물론 훨씬 지저분하고 수염을 길러 엉망이었지만.) 그것은 흥미롭고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찰스가 아니라는 것이.


“누굴 찾는데?”

“당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

“나도 그런데. 신기하네.”


에릭은 대답하지 않고, 브루스의 훈장을 빙글빙글 돌리는 데 집중했다. 브루스 로버트슨의 정복에는 많은 훈장이 달려 있었고, 모두 오래전의 것이었다.


“왜 찾는데?”

“대답할 이유는 없어.”

“잃어버렸나?”

“그런 셈이지. 조금 다르지만.”

“다르다고?”


에릭은 잠깐 브루스를 보고는 짧게 대답했다.


“애초에 가져본 적 없었으니 잃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복잡하군. 설리반은 등에 내 이름으로 된 문신을 새겨뒀는데 말이야.”


그거 지우려면 꽤 쪽팔릴 테니 죽을 때까지 못 지우겠지. 더욱이 그 새끼는 아픈 건 미치도록 싫어하거든. 눈물을 줄줄 흘리기나 하고. 브루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에릭은 가볍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런 걸로 가질 수 있다면 진작 했어.”

“왜 안 했는데?”

“소용없으니까.”

“가지려면 뭐든지 해야지. 때려서든, 강간해서든.”

“그럴 수 없어.”


브루스는 작게 욕을 했다.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나 원. 에릭은 꿋꿋이 대답하지 않았다. 뮤턴트와 사피엔에 관련한 입장 차이는 고작 다른 세계와 차원의 남자가 이해할 만한 역사는 아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둘은 너무 많은 길을 지나 왔다. 그러나 찰스 자비에는 에릭 렌셔에게…


“난 그 새끼를 가졌어.”


브루스의 목소리에 에릭이 눈을 들어 그를 본다. 그런 말을 하는 브루스의 얼굴은 내용과 달리 몹시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 새끼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군. 매번 도망치고 내빼기나 하고. 아니면 울거나 죽으려 들고.”

“그럼 가진 게 아니지.”

“아니야. 가졌어.”


브루스는 작게 되뇌었다. 남자는 처음 봤을 때부터 술에 절어 있었고, 흰자위도 누렇게 변해 약을 하는 듯했다. 담배 냄새도 옷에 배어 빠지지 않았다. 에릭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가진다는 말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할 수준이군.”

“내가 가졌어.”


에릭은 그냥 훈장으로 그의 목줄기를 뚫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어떻게?”


훈장으로 살짝 옷깃을 벌린 순간, 에릭은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브루스가 낮게 말했다.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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