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강릉 바닷가로 한 달 살기를 왔다.

여행 첫날 숙소에 도착해서 한동안 먹고 마실 식료품을 샀다. 식료품과 짐을 정리하고 나니 사람 사는 집 같았고, 짧은 기간이지만 애인과 동거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여행 오기 전에도 일주일에 5일 이상을 만났는데, 같이 사는 건 또 다르잖아. 항상 옆에 있는 느낌. 떠나거나 떠나보낼 필요도 없이, 앞으로도 함께 있을 거라는 예견.

바깥 일정이 없는데도 매끼 식사 챙겨 먹고 멍때리고 책 읽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시간이 너무 잘 가서 놀랍다. 평소에 못 하던 독서를 하자고 책을 한 보따리 가져왔는데, 읽는 속도가 욕심을 따라잡지 못한다.

요리는 내가 하고 애인이 옆에서 보조를 해준다. 테이블 정리와 설거지도. 야채를 썰려고 칼을 잡으면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가르쳐 달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손길로 조심조심 칼질하는 모습이 걱정되면서도 고맙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 다른데 나와 살려고 뭐든 해보려는 서툰 몸짓들. 빨래 갤 때도 내가 하는 대로 개는 법을 따라 하려고 물어본다. 분명 자신도 집에서 빨래하고 정리할 텐데말이다. 내게 맞추려고 하는 손길이 따스하다.


오전에 일어나서 날이 맑으면 같이 조깅을 하러 나간다. 바닷가에서 달라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오늘은 테트라포드로 둘러싸인 등대길을 달렸는데 바다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어다. 우리를 둘러싼 삼면을 바다가 감싸고 있었다. 세상에서 둘만 떨어져나와 흐린 바다에 갇힌 상상을 했다.

함께 ‘생활계획표’를 그렸다. 어릴 적 방학 때마다 그렸던 동그란 시간표. 함께 있는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색연필로 귀엽게 꾸미고 일정이 촘촘하지 않게 시간을 배분해 계획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만난 적이 없지만 이런 시간을 함께할 때마다 그 시절의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작은 손으로 빡빡한 계획표를 그리고 전혀 지키지 않던 시절을.


연애를 시작하고 좋아하는 영화 감상을 거의 못해서 이번 여행에는 영화를 함께 보자고 했다. 하루는 애인이 영화를 고르고 다음 날엔 내가 고르고. 각자 봤던 영화도 있고 처음 보는 영화도 있다. 좋은 영화를 추천하고 재밌게 봤던 영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볼 영화들이 넘친다.

처음에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인 <썸머타임 : 아름다운 계절>을 보았고, 주인공 '캐롤'과 '델핀'이 여성주의운동을 하는 모습에 <미스비헤이비어>가 생각나 다음 날에 바로 봤다. 각각 프랑스와 영국이 배경이지만 시대상이 비슷하고 생각이 다른 여자들이 싸우면서 연대하는 모습이 비슷해보였다. 

<미스비헤이비어>를 보니 레즈비언 서사가 더 보고 싶어서 <퍼펙트 케어>를 다음 상영작으로 정했다. ‘나쁜 여자’라는 공통점으로 얼마 전에 본 <크루엘라>와 비교하면서 봤다. (물론 '크루엘라'는 나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야망 있는 여성일 뿐이다) 주인공 '말라'의 또라이 같은 성격과 확고한 가치관, 비규범적 태도에 감탄했다. 

시각적으로 채도가 높고 컬러풀한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북스마트>가 생각났다. 의식의 흐름대로 영화를 선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모두 만족했다. 이민경 작가가 진행하는 <말로만 듣던 페미니즘> 강연을 함께 신청한 이후로는 강연 커리큘럼에 있는 영화들을 먼저 볼 계획이다. 영화를 보고 비슷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다른 생각을 바로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어 행복하다.


자기 전에는 같이 일기를 쓴다. 그날 있었던 일들과 읽은 책, 영화의 감상을 적는다. 짧게 사건만 나열하자고 부담 없이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중에 정말로 그리워질 것 같아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 밀린 일기를 쓰면 벌써 어제 일이 가물가물해진다. 이리도 쉽게 잊히는 순간에도 애인과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

현실에 가장 충실하게 사는 기분이다. 앞날에 대한 막연한 걱정보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낼지 정하는 생활. 당장 하고 싶은 걸 하고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바로 공유하는 말들. 자고 일어나면 현실에 네가 가장 먼저 보여 미소짓는 삶.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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