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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时节

호시절





    내 마음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너는 직접 나를 찾아와주었다. 나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답답한 내 마음을 피하고만 싶어 덮어놓고 모른 체 했는데, 오늘 만난 네가 감춰두었던 마음의 덮개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열어보니 알게 된 사실은, 내 마음은 사실을 가릴 수도 없이 커다래졌는데 난 그저 눈만 질끈 감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인준이 열어버렸으나 이 마음의 책임은 내 몫이었다. 나는 이제 눈을 크게 뜨고 내 마음을 지켜볼 것이다. 그래서 점점 커져가는 마음과 함께 내게 더욱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는 황인준을 계속해서 좋아하리라 다짐했다. 갈 땐 가더라도 마음껏 좋아할래. 그리고 쿨하게 중국으로 보내주는 거야.


   비가 내려 구름이 가득했던 하늘도 점점 개어가더니 곧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될 것처럼 굴었다. 철이 많이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온 건 가 싶은 아침이었다.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잦아들었으니 이제 따듯한 햇살이 비춰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시작이다.







   일주일 전까지는 더웠는데 벌써 트렌치를 입을 수 있을 만큼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이 유독 높아 보이는 때가 돌아 온 거다. 학교까지 올라가는 오르막에 즐비한 가로수는 점점 색을 입어갔고, 카페에는 따뜻한 라떼를 시키는 손님이 늘어났다. 



   “아 너무 춥다.”

   


   이렇게 한 뼘 가까이 다가온 가을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외투를 안 챙긴 내가 삼류였다. 살갗에 스며드는 가을바람을 얇은 나그랑 티셔츠 한 겹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다. 의자에 그대로 걸어두고 나온 가디건을 떠올리니 더 괴로웠다. 왜 그걸 안챙겨서는. 하 이여주 바보.


   강의실 구석에 앉아 잠이 덜 깨 부은 얼굴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피곤을 덜어내려 애썼다. 고등학교 땐 어떻게 일 교시 수업을 들었던 건지 기억도 안 난다. 이십대 청춘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대학에선 필히 9시 수업을 없애야 한다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구시렁거리며 강의안을 다운받는다. 황인준은 잠깐 책을 가지러 사물함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동안 나는 덜덜 떨며 휴대폰이나 만지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은 저마다 찍어 올린 가을 사진으로 줄을 짓고 있었다. 그 중 단풍이 가득 물든 나무 아래서 연인들끼리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위아래 갈색 톤으로 맞춰 입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부럽다...”



   나도 모르게 부럽다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황인준한테 단풍구경이나 가자고 할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다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도 옷 맞춰 입고 단풍 앞에서 사진 잘 찍을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데.


   곧 강의실 앞문이 열리고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황인준은 얘는 대체 책을 찍어내러 간 것도 아니고, 뭘 하는데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건가 싶어 연락을 해보려는데 타이밍 좋게 뒷문 열고 들어와 태연하게 내 옆자리에 착석한다.



   “나이스 타이밍.”



   씩 웃으며 앞머리를 털곤 제 손에 쥔 음료를 내게로 건넨다.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어깨를 한 번 으쓱한다. 미리 열기 좋게 살짝만 닿아놓은 뚜껑을 올리자마자 달큰한 유자냄새가 퍼진다. 아까 지나가는 말로 유자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서 방금 막 사온 거였다. 난 얘가 가끔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짓 할 때마다 뭘 어떻게 고마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뭐야... 나 유자차 마시고 싶다고 진짜 작게 말했는데. 감동...”



   모락모락 김이 나는 유자차를 한 번 홀짝이며 엄지를 세웠다. 잘해주고도 민망한지 황인준이 멋쩍게 웃으며 부러 장난어린 말투로 대답해왔다.



   “작게 말했지. 근데 내 귀에다 대고 말했잖아.”

   “아 무슨. 내가 또 언제 귀에다 대고 말했다 그래.”

   “장난. 너 추워하는 거 걱정되는데, 보다시피 벗어줄 수 있는 옷은 없어서.”



   입고 있는 후드 끈을 잡고 흔들며 눈짓한다. 벗어줄 수 있는 외투가 없어서 수업 십분 남기고 뛰어서 교내 카페까지 다녀왔단다. 불시에 온 몸이 달아오르는 듯 뜨거워지는 건 양손 가득 따뜻한 유자차를 잡고 있는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혹시 너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며 맛있냐고 물어오는데 내가 어떻게 떨지 않을 수 있을까. 



  “황.”

  “어?”

  “... 고마워. 진짜로.”









   카페는 앉았다 가는 손님들로 성황을 이뤘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알바를 와서 밤 열한시를 오 분 남긴 지금까지 한 번도 앉지 못하고 내내 일을 하느라 바빴다. 뜨거운 음료를 여러 잔 내리느라 정신이 없어 손이 데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설거지를 하고, 음료를 만들고, 케잌을 내오고, 계산을 했다. 


   어느덧 마감이었다. 먼저 홀 마감을 마친 동료 알바생이 가보겠다며 인사를 했다. 나도 곧 포스기의 전원을 끄고 카페를 걸어 잠그고 나왔다. 몇 시간 만에 확인한 휴대폰에는 미리 알림이 수두룩 빽빽했다. 다 확인하기도 피곤해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으로 향하는데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낙엽을 밟으려 땅만 보던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확인하니 역시나 황인준이다.



   “뭐야. 이 시간에 우리 동네는 왜 왔어?”

   “너 보러 왔지.”

   “나?”

   “그래 너.”



   황인준이 팔에 걸치고 있던 후드집업을 건네며 말했다.



   “집도 못 들리고 이러고 바로 일하러 갔을까봐. 챙겨주러 왔지.”



   그리고 내 가방을 가져가 제 어깨에 대신 멘다. 뭐가 이렇게 무겁냐며 너 혹시 집나왔냐고 괜히 장난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우리는 집 근처 공원을 걷다가 나란히 그네 위에 앉았다. 모래로 발장난도 쳤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공원 근처로 여러 개 줄지어 있는 가로등 중 하나는 맛이 갔는지 자꾸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내 심장 박동 수가 눈에 보인다면 꼭 저럴 것만 같았다. 쿵쾅쿵쾅. 황인준에게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천만 다행이었다.


   황인준이 다정한 말씨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오늘도 진짜 바빴어. 아 맞다 나 여기 아까 다쳤어.”

   “어디 봐봐.”

   “일할 땐 몰랐는데 퇴근하고 나오니까 아프기 시작하더라. 데였나봐.”



   왼손 새끼손가락 옆으로 길게 화상을 입은 상처를 보여준다. 황인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잠깐 앉아있어 보라며 근처 편의점에 뛰어 들어갔다. 곧 손에 검정 비닐봉투를 달랑거리며 내 앞으로 선다. 황인준이 내 손을 살풋 쥐고 상자에서 얇은 메디폼을 꺼내 상처 위에 붙였다.



   “별 상처도 아닌데 메디폼은 오바 아니야?”

   “별 상처가 아니긴. 너 이거 흉 지면 어떡하려고.”

   “흉 지면 지는 거지.”

   “말 속상하게 할래? 또 이렇게 자기 몸 생각 못하고. 나 없으면 어떡할래 너.”



   황인준이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굽혀 앉은 나와 눈을 맞춰온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 없으면 어떡할거냐는 말이 괜히 아파서 조금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앞으로 두 달 남은 학기가 끝나면 황인준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우리 같이 다니던 이 학교를, 그리고 이 서울을, 아니 이 한국을 떠나 다시 먼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황인준은 그저 고개를 숙인 나를 보고 귀엽다는 듯 작게 웃는다. 내가 피곤해서 이러는 줄 아는지 손을 뻗어 내 뒷머리를 슬며시 쓸어준다. 



“아프지 마. 다치지도 말고.”



   나 진짜 너 없으면 어떡하지. 이제 진짜 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 같은데. 정말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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