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벽을 넘어서 범람한 물에서 모란의 향기가 났다. 그 향은 코를 마비시킬 만큼 지독하고, 고혹적이었다. 파란 타일, 뻥 뚫린 회색 하수구, 초록 비누가 놓인 개수대, 금박 수도꼭지가 달린 상아색 벽, 그리고 빈 꽃병이 놓인 검은 욕조. 나갈 곳이 없는 방 안에서 꽃이 피운 연기는 사방을 어루만지며 차츰차츰 퍼졌다. 형태를 기억하기 위함인지 세세한 부분까지 모란이 스며들었다. 


말간 수면에도 자그마한 파동이 일었다. 풍성한 송이를 이루던 이파리 하나가 떨어진 까닭이다. 그것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재차 범람하는 물을 타고 메마른 땅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리고 매끄러운 도자기의 외곽을 따라 흘러내려 타일 틈새를 누비다가 뻥 뚫린 하수구로 들어갔다. 저 구멍은 최근 열린 것이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긴 하나, 길을 찾아 떠난 자 중에 다시 돌아와 이야기해준 이 없기에 지금까지 육 면의 벽을 가진 곳에서 나고 자란 모란은 모른다. 모른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향기와 연기만 남은 그 길을 바라보며 또 다른 모란이 향을 피웠다. 범람한 물이 흘러내리고 후각을 잠재우는 연기가 다시 짙어졌다.

삶은 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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