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카게야마에게 그 날의 겨울은 생일인 동시에 히나타를 만난 날이었다. 히나타를 만났을 때 심장이 뛰는 그 느낌을, 카게야마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 내리네."

카게야마의 생일이기에 만났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날 보통 생일 케이크라도 준비한다지만 카게야마는 단 것을 싫어했고 히나타는 낯간지럽게 케이크에 초를 붙여주고 노래를 불러주는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적어도 카게야마에겐 아니었다.

그러니 둘은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소리 없이 내리를 눈을 감상하는 것이 다였다.

히나타는 눈앞의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창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기를 커피로 녹였다.

"그러게. 눈 내리면 미끄러워서 싫은데."

어릴 적 눈 오는 날 크게 미끄러지는 바람에 히나타는 그 후로 눈 오는 날이 싫다고 했다.

아직 눈이 쌓이기 전이라 먼저 가버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카게야마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행히 히나타는 진득하게 카페에 앉아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는 것뿐이 하지 않았다.

대화는 없었다. 9년 넘게 안 사이 지만 서로에게 삭막했고 그것이 서로에게 익숙했다.

"오늘…."

"알아. 생일 축하해."

그것을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기에 카게야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생일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선물이니 축하니 무언가를 받느라 바빴지만 생일을 딱히 챙기지 않은 집에서 자라온 카게야마가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으로 바뀔 리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오늘에서야 히나타에게 쌓아온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한테 생일선물 하나만 주면 안 돼?”

눈썹을 꿈틀거리며 히나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9년 동안 서로 무언가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기에 카게야마의 요구는 뜬금없었다.

“9년 전에… 1월에 말이야. 새해 지나고 다음 날.”

1월 2일을 저렇게 에둘러 말하는 사람은 카게야마뿐이 없을 것이다.

히나타가 9년 전 1월 2일에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난 뒤, 카게야마는 그 날짜에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듯 숫자의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왜 그랬던 거야?”

남들이 꺼내기 어려운 주제를 잘도 꺼낸다고, 히나타는 생각했다. 후유증은 없었으니 그때의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어딘가가 아프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그 날의, 위가 쥐어 짜내는 느낌만은 생경했다. 씁쓸해진 속을 커피로 진정을 시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그맣게 벌어진 히나타의 입술 사이에선 냄새 좋은 커피향이 살그머니 터져 나왔다.

“네가 그 날 나한테 고백해서.”

“…?”

“그거야. 네가 나한테 고백해서.”

카게야마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그렇게도 싫었단 말인가. 싫었으면 9년인 지금까지 왜 만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저히 히나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히나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너니까. 너니까 만난거야.”

히나타는 가끔씩 이렇게 영문 모를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많았다. 예상치도 못한 히나타의 대답에 당황스러웠지만 카게야마는 기분나빠하는 기색 없이 또한 자신 앞의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숨을 내쉬자 히나타와 똑같은 커피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히나타와 똑같은 향, 같은 맛. 카게야마는 붉은 색 혀로 입술 위를 쓸었다.

카게야마는 오늘도 9년 전 그 날 히나타가 수면제 한 주먹을 입에 털어 넣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너조차 모르는 너를 나는 기억한다.

태어날 적부터, 제대로 된 언어를 가지기도 못 할 그 때에 히나타는 본능으로 알았다.

어린 히나타는 엄마의 품에서 울었다. 애초에 사람들은 왜 태어나는 걸까. 울음 속에서 물었지만 나오는 답은 없었다. 언어를 가지게 되었을 때 누군가를 잡고 물어보지 않았다. 부모님도, 다른 그데시네스도, 싱코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히나타는 아무런 해답을 찾지 못한 채 5살이 되었다.

“쇼요, 유치원 첫 날인데 긴장되지 않아?”

히나타의 엄마는 히나타는 통통히 오른 볼 살에 입을 맞춰주며 물었다. 히나타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24시간 한 시도 눈을 떼고 있지 않다가 첫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유치원을 보내는 것은 엄마로써 쉽지 않았지만 둘을 뒤에서 지켜보던 히나타의 아빠는 그런 엄마를 다독였다.

“쇼짱은 그데시네스잖아. 별 일 없을 거야.”

다만 그데시네스라고 하기에 히나타는 너무나 평범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데시네스는 어른스러움이 특징이기도 한데 히나타가 정말 그데시네스가 맞기는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나이 또래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복잡한 단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전생의 기억에 대해 그리움을 찾지도 않는다. 어떤 그데시네스들은 전생의 연인이나 친구들이 그리워 어린 나이에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히나타는 전생의 기억에 대해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부모님의 걱정과는 다르게 히나타는 노란색 유치원 버스에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유치원 버스 근처에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다며 보채는 아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저런 것을 보면 어른스러운 걸지도. 히나타의 부모님은 괜한 걱정을 집어 삼켰다.

 

첫 유치원 수업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두 개 밖에 없는 반 중에 히나타는 해바라기 반이 되었고 해바라기 모양의 명찰을 받아 가슴에 다는 것으로 벌써 두 시간이 지나갔다.

알록달록한 급식 판으로 밥을 먹고 낮잠시간까지 즐긴 뒤 간식으로 나눠주는 푸딩을 받아들고 히나타는 조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겉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나 어찌나 단단히 붙어있는지 이로 뜯어보고 손으로도 뜯어보는데도 포장지가 단단히 붙어져있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히나타는 더 힘을 주어 겉 포장지를 잡아당겼고 드디어 포장지는 뜯어졌지만 힘의 반동으로 놓쳐버리는 바람에 푸딩은 바닥으로 쏟아져 버렸다.

“우우….”

히나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데시네스라 하여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 정신연령과 몸이 이렇게 따라주지 못할 때가 있다. 전생을 기억해 어른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히나타는 눈앞의 푸딩을 먹지 못해 눈물을 글썽였다.

“먹어.”

바로 옆에서 손이 불쑥 솟아났다. 다른 이의 푸딩을 얼떨결에 받아든 히나타는 자신에게 푸딩을 건네준 이의 얼굴을 보았다.

“고… 고마워, 츠키시마."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넌…."

츠키시마는 히나타의 가슴팍에 달려 있는 해바라기 이름표를 보았다. 이름표엔 히라가나로 히나타 쇼요라고 써져 있었다.

"해바라기 반이잖아."

그에 비해 츠키시마는 아직 이름표를 붙이지 않았다. 선생님의 실수로 이름표 종이가 부족했다.

"난 츠키시마에 대해 다 알고 있어."

히나타가 푸딩을 숟가락으로 듬뿍 떠 입에 넣었다. 달달한 부드러워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 뒤로 넘어갔다. 맛을 오래 느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맛있어 우울했던 기분이 금방 하늘로 날라 갔다. 히나타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이 활짝 웃었다.

"언제나 친절해, 츳키는."

"그데시네스."

히나타는 츠키시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본 그데시네스에 츠키시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데시네스는 반에 겨우 두 명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우리 정말 전생에 만났던 거야?”

히나타는 다시 푸딩을 입에 듬뿍 넣는 바람에 입을 열수가 없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전생에 난 어땠어?”

“지금하고 똑같아.”

푸딩 조차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츠키시마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데시네스가 아닌데도 이렇게 어른스러운 꼬마는 세상천지에 츠키시마뿐이 없을 것이다.

“공룡이 어떻게 멸종됐는지 혹시 알아?”

어린 츠키시마다운 질문이었다. 히나타는 다시 푸딩을 크게 한 입 떠먹으며 답했다.

“그렇게 오래 전의 일까진 기억 안나.”

최초의 ‘히나타 쇼요’는 1800년 대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다른 그데시네스에 비하면 히나타는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츠키시마는 에항?”

“응, 에항.”

히나타의 예상과도 같은 답변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이 기억나지 않으니 당연히 그데시네스가 아니었다. 그의 비범한 두뇌는 싱코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나 12월생이 아니니 그것 또한 아니었다. 단 하나 남은, 평범하기 짝이 없어 아무런 특징도 가지지 않은 에항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츠키시마는 항상 에항으로 태어났다.

“푸딩 고마워, 츳키.”

“난 푸딩 싫어해.”

“내일 딸기 가져올게. 같이 먹지 않을래?”

푸딩에 아무런 반응이 없던 츠키시마는 딸기라는 과일에 볼을 붉혔다. 단 것을 싫어하다 못해 과일마저 싫어하는 츠키시마는 유독 딸기 관련된 음식에만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히나타는 그런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츠키시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은 항상 같은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츠키시마만은 매 생마다 만나 소꿉친구의 관계가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데시네스란 말에 다른 아이들처럼 귀찮게 굴지도 않는다.

츠키시마는 또한 히나타와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근거 없이 솟아올랐다.

“우린 반이 다른데.”

“내일 반을 합쳐서 진행한다고 선생님이 그랬어. 그 때 먹자.”

푸딩을 모두 먹은 히나타가 빙그레 웃으며 츠키시마에게 말했다.

가슴 한 구석이 한 주먹에 잡혀 뭉클거리는 감각이 히나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올랐지만 이유는 모른다.

하여튼 츠키시마와 히나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같은 유치원이니 같은 초등학교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고, 둘이 사는 곳의 학교가 크게 나뉘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니게 되지 않을까, 초등학생이 된 츠키시마는 막연히 생각했다.

히나타 만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 보면 부모님보다도 더 자신을 꿰뚫어 볼 때가 많았다. 좋다는 표현은 하지 않아도 츠키시마는 히나타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눈이 나빠져 안경을 맞출 때였다. 키가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두 개를 합친 것 보다 커지는 바람에 안경잡이라고 놀리는 아이마저 없을 때 히나타는 츠키시마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전학?”

츠키시마의 반문에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여기서 멀어?”

“멀어.”

“얼마나? 기차타고 가야하는 정도야?”

“비행기 타야해. 여기서 미국까진 7시간 정도니까.”

“미국…?”

이야기인 즉슨, 히나타는 나이에 맞지 않게 특출한 영특함을 뽐내어 미국의 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

“미안.”

그데시네스는 전생을 기억하는 만큼 똑똑하다. 그리고 또한 어른스럽다. 마지막으론, 인연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한 번 인연이 닿으면 다음 생에도 닿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리 알려줄 수도 있잖아.”

“이런저런 준비하느라고.”

“너에겐 아니어도 나에겐 마지막인데.”

히나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옷자락을 잡고 손가락을 가만두지 않는 츠키시마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10년 뒤에 만나.”

10년은 츠키시마에겐 너무나 아득한 시간이었다. 자그마치 초등학교 저학년이 성인이 뒤는 시간이었다. 츠키시마는 여전히 마뜩치 않다는 표정으로 히나타의 인사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반대로 히나타는 모두 이해한다는 듯 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완전히 연락 끊기는 것도 아니잖아? 메일로 실컷 대화할 수 있어.”

“너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1년 뒤에 나보다 더 좋은 친구 만날 수 있어.”

“자꾸 예언하지 마.”

간만에 듣는 츠키시마의 농담에 히나타는 킥킥 웃으며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뒤돌아가는 히나타의 작은 모습을 보며 츠키시마는 이질감을 느꼈다. 남들보다 훨씬 빨리 대학에 간다는 히나타는 그답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언뜻 이 지겨운 학생생활을 빨리 끝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지만 츠키시마는 물어보지 못했다.

 

 

 

* * *

저번 생에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놔서 다행이었다. 죽기 전까지 공부한 영어이지만 역시 일본에서만 공부해서인지 원어민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전생부터 공부한 덕에 짧은 시간 안에 수월히 할 수 있어 한시름 놓으며 히나타는 천천히 학교생활에 적응했다.

히나타의 집은 그리 잘 사는 편이 아니지만 다행히 히나타의 성적이 좋아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우선 제일 걱정거리였던 등록금만 1년에 수 천 만원이 드는 것을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나니 히나타의 미국 생활을 그럭저럭 잘 흘러갔다.

어린 나이에 대학에 온 히나타이지만 그 누구도 히나타를 천재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데시네스라면 당연했다. 오히려 히나타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 의미로, 히나타는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천재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똑같은 것도 수 백 번을 봐야 겨우 머리에 들어올 정도의 수준이었다. 대학에 온 것은 순전히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에 두둑이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히나타는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번 생엔 부디 그 질긴 인연을 끝내고 싶다 생각하며 뚫어져라 책을 보았다.

그리고 히나타가 16살이 되었을 때, 히나타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만난다.

 

히나타는 평소처럼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집주인의 전화였는데 지인의 일본인 친척이 미국으로 오게 되었단다. 그러나 입주예정 된 집에 문제가 생겨 이틀정도 머물 곳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더니 너와 같이 일본에서 온 사람이니 일본인의 정으로 소파에서라도 재워주면 안되겠냐며 부탁했다.

“저랑 상관없는 일인데요.”

“그러지 말고. 이번 달 집세 10퍼센트 내릴게. 어때? 카우치 서핑한다고 생각해.”

“…딱 일주일만이에요. 그 이상은 절대 안 돼요.”

“고마워, 내가 나중에 치즈케이크도 구워줄게. 쇼요가 좋아 하는 펌킨파이도. 정말 고마워.”

전화를 끊은 히나타는 도서관 옆에 위치한 작은 독일식 케밥집에서 되너 하나를 사고 도서관 앞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추운 겨울 날이었지만 도서관은 엄격하게 음식물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빨리 먹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 집의 되너는 크고 싼데다 곧바로 먹을 수 있어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하기 좋았다. 고소한 고기냄새를 맡으면 히나타는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오물거리다 옆에 앉아있는 한 남자의 커다란 한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히나타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역시나, 라는 생각도 있었고 드디어, 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오케이… 예스… 예스… 오케이… 언더스탠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전화기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던 그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쏘리… 아이 돈 언더스탠드… 예스, 아임 재팬… 네? 재팬 프렌드? 아이 해브 노 프렌드….”

저렇게 처절하고 불쌍한 말이 있던가.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는지 남자는 미치겠네, 라고 중얼거리며 죄 없는 앞머리를 콱 쥐고 잡아당겼다. 저러고 있다간 뜯어버릴게 분명해서 히나타는 되너를 다시 베어 물기 전 넌지시 물었다.

“해들리 전화였지?”

“…일본어?”

남자의 반문이 들리자 히나타는 다시 되너를 한 입 먹고 우물거렸다. 많이 베어 물어서 씹고 삼키는 시간까지 깨 걸렸는데 그는 히나타가 답해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주었다.

“아이린 해들리 전화였냐고.”

“어떻게 알았… 누구?”

아마 같은 일본인의 집에서 재워준다는 말을 했을 집주인의 말을 추측하며 히나타는 입 안에 남아있는 음식물을 얼른 삼키고 입을 열었다.

“원랜 엄마랑 같이 있는데 엄마는 잠시 일본으로 귀국해서 지금 혼자야. 엄마 방 써.”

“넌 누구?”

싱코 정도면 영어정돈 순식간에 쉽게 해내던데 카게야마는 싱코로 태어난 주제에,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이린 씨가 너 이틀만 재워주래.”

“…잠깐, 잠깐…뭐?”

닿고 싶지 않은 인연이 닿아버려 기분은 저조했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히나타는 뚱한 표정을 풀지 않고 반쯤 먹은 되너에 집중했다.

“저기 사거리에서 대각선으로 건너면 바로 왼쪽에 골목길 있어. 거기서 직진하면 초록색 멘션나와. 거기 205호. 뭘 해도 상관없는데 더운 물은 다 쓰지 말고 내 방엔 들어가지 마. 넌 엄마 방에서 지내.”

히나타는 가방 속에 있는 열쇠를 꺼내 카게야마에게 휙 던져 주었다. 두 손으로 열쇠를 받은 카게야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열쇠와 히나타를 번갈아 보았다.

“……? …????”

애초에 카게야마에게 눈치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을 알았다. 히나타는 장대한 설명대신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말을 줄이고 아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다 터져 나오는 귀찮음과 한숨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아… 아이린 아줌마가 널 재워달라고 했거든? 싫으면 열쇠 다시 내놔.”

“…! 아, 아냐! 고마워!”

“난 카게야마 토비오.”

“…히나타 쇼요.”

가볍게 답하면서 히나타는 되너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다. 평소보다 빨리 먹어 버렸다. 카게야마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기에 더 속도를 냈다.

“……결국 또 만나버렸구나.”

카게야마에겐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가방을 한 쪽 어깨에 짊어지고 뒤를 돌았다. 부디 카게야마와 마지막이고 싶었다. 히나타는 되너를 감쌌던 호일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은 뒤 예정된 일정 그대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고마워! 카게야마의 외침을 무시했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87,348 공백 제외
15,0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