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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한 이은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온 일행은 그나마 멀쩡한 내부의 건물을 찾아 그곳을 정리하고 임시 숙소로 짐을 풀었다. 위험한 이은을 옆에 두고 감시하려던 초기의 계획과는 다르게 부적을 붙여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농기구가 가득한 창고에 이은을 던져넣은 화연은 깨어나려면 한참 걸릴 테니 조금이라도 쉬라고 말하며 우물가에서 물을 퍼오라 시켰다. 



이번에 큰 공을 세운 건 유은도 해리도 아닌 화연이었기에 모두가 군말 없이 화연의 말을 들었다. 시키는데로 물을 퍼오고, 어깨가 뭉쳐 아프다는 화연의 어깨를 주무르고 자리도 푹신한 침대에 뽀송한 이불까지 준비해 주니 흡족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드는 화연을 뒤로한 채 모두가 지친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힘드네.”

“내 말이-뒷바라지가 더 힘들어.”



오랜 시간 안마하느라 뻐근해진 손목을 돌리며 몸을 풀던 애쉬가 여전히 분에 차 있는 해리를 보며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기껏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은은 생각보다 강했고, 화연에겐 밤톨만 한 존재였으니, 비등하게 싸우지도 못했던 해리는 딱밤을 먹이는 화연의 모습이 너무 손쉬워 보여 더 욱한 것 같았다.


해리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어떻게 신을 이길 수 있을까. 심지어 신의 자식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으니, 그것만으로도 장하고 대견하다. 물론 신과 싸운 건 이은이지만 그건 싸웠다고도 할 수 없다. 소꿉놀이 수준에 불과한 놀이에 무참히 밟혔으니까. 



“우리도 이제 자야지.”



우물가에서 떠 온 물로 세안을 마친 이들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조용히 시간만 보내니, 머쓱해진 유은이 내뱉은 말이다. 이렇게 앉아만 있어봤자 이야기할 것도 없고, 각자 생각에 빠져 있으니, 시간만 축내는 거다. 이럴 바에 조금이라도 더 자고 쉬는 게 나을 테다. 



“그래, 그러자.”



바닥에 깔린 요 위로 각자 흩어져 자리를 찾아 눕는 모습이 다들 힘이 없다. 분명 목표인 범인을 잡았는데, 허무하게 끝난 것에 찝찝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유은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이은은 무척 강한 존재였기에, 영생인 몸으로 돌아가 이은과 직접 붙었다면 결말이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내가 이겼을 수도..? 대부분의 힘을 영생의 약을 만드는 데 썼기에 이은과 싸울 당시에는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애초에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었지만, 원래의 힘을 가지고 이은과 붙는다면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테지.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서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던 유은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이런 생각 해봤자 뭐해. 지금이 현실인데. 약한 인간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짜증도 나고, 한심하다. 



물론, 해리도 잠들지 못한 듯 연신 뒤척이기를 반복하는 걸 보아하니, 해리 또한 자신의 약함에 화가 나고 속이 상한듯 싶다. 그래도 차마 달래줄 자신이 없기에 조용히 그 감정이 풀리기를 기다리며, 얼른 아침이 오기를, 얼른 잠들기를 바랄 뿐이다. 


모두가 잠을 이루지 못한 밤. 각자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다들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뒤척이다 결국 선잠이 들 즈음에 ‘쾅’하는 커다란 소음에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지?”

“..이은이 깨어났나 보구나.”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한 애쉬에게 대양이 답했다. 죽은 마을에 살아있는 자는 우리뿐이니, 심지어 바깥에 있는 이은이 아닌 이상 이런 소란은 있을 수 없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몸을 일으키려 목발을 짚는 유은의 모습에 한과 윤이 몸을 일으켰다. 여행 내내 조용히 단이의 품에 안겨 있던 현이 단이의 품에서 빠져나와 문 쪽을 향해 빼꼼 고개를 디민다. 



“저희가 다녀올게요.”

“주무세요.”



답할 새도 없이 문을 열고 살아지는 둘로 인해 다시금 정적만 가득한 내부. 몰려오던 잠기운도 사라진 마당에 다시 눕는다 해도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다들 몸을 일으키고 앉아 소란스러운 바깥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우당탕, 쿵’ 



창고 안에 있던 농기구가 부딪쳐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가만히 있던 대양마저 몸을 일으켜 사라지고, 남아있는 이들도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결국 유은 또한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 



“나가봐야겠어.”

“도망 못 간다니까.”



그런 유은을 제지한 것은 화연이었다. 소란스러운 틈에도 곤히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눈을 감고서는 괜찮다고 손을 휘적인다. 이쪽 세계의 신인 화연이 하는 말이니 믿음은 가지만, 이은이 도망칠까 조바심이 나 이러는 건 아니었다. 



“이은과 이야기하고 싶어.”

“무슨 이야기를?”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그저 욕심일 뿐이야. 탐욕스러움과 질투는 본디 산자의 본성에 있는 거란다.”

“이유라도 알고 싶은 거야.”

“이유가 있겠니?”



유은의 말이 황당하다는 듯 두 눈을 번쩍 뜨고선 몸을 일으킨 화연이 가보라는 듯 목을 까딱인다. 



“별 소득은 없겠지만, 다녀오렴. 부디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단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어투로 쿡쿡 웃음 지으면서도 ‘네가 나간다면 난 말리지 않아.‘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화연이 참 어렵다.



“너는 가만히 있으렴.”



이에 밖으러 나가는 유은을 따라나서려는 애쉬를 향해 화연이 말했다. 



“인간은 이럴 땐 조용히 있는 게 제일 안전한 선택이야.”

“내가 다녀올게. 여기 있어.”



머뭇거리는 애쉬의 모습에 반룡과 함께 유은을 따라가는 해리의 몸짓이 바쁘다. 



“왜 제게만 그러는 거예요?”

“뭐가?”

“무슨 기억도 안 나는 말을 했다고 하고, 기억이 안 나냐고 하고, 인간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제게 무슨 일이 생기나요?”

“흐음-글쎄?”

“그래도 신의 말이니 거역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거겠지요.”

“맞아, 다 뜻이 있어서 하는 말 일게다.”



따지듯 묻는 애쉬를 달래는 령과 단이는 화연이라는 존재가 떠받고 위대한 존재라 믿어왔기에 더군다나 아직은 어려운 감이 있었기에 혹 애쉬에게 화풀이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진정하라고 말하며 애쉬를 달랜다. 



“그냥 명확하게 답을 알려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럴 수 없으니까. 신들도 규칙을 따른단다.”



이제껏 규칙은커녕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다닌 신이 화연이면서도 새삼 정의로운 신인 척 애쉬에게 고깝게 군다. 하지만 신들은 인간 세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유은과 만나게 된 뒤로 많은 법을 아슬하게 비껴가는 수준으로 지키고 있기에,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은 무척 위험한 짓이었다.


대신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작게 쪼갠 답을 보여주는 건 괜찮았다. 그것도 해석하기 나름이었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틀을 준다고 해도, 인간의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신이 힘을 쓰지 않는 이상 말이다. 


화연은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다만, 유은이 아끼는 아이니, 조금의 답만 주는 수준이니, 이 정도만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똑똑한 아이니, 찜찜함을 느껴 행동을 자제할 거다. 하지만, 당돌한 아이니, 오히려 더 나설 수도..



뭐..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다. 잠잠해진 바깥에 다시 눈을 감은 화연은 이만 자라고 말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고 령과 단이 그리고 애쉬는 바깥에 나가지도 못한 채 저들끼리 모여 화연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 했으니, 그 말을 조금은 따르는 게 어떻겠냐는 령의 말에 애쉬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의 말이니 주의 깊이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새벽녘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오늘 잠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애쉬는 령과 화연을 따라 못 이기는 척 자리에 누웠지만 역시나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야 미적미적 일어나 아직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찾으러 나서는 단이와 령을 따라 나온 애쉬는 어디 가지 말고 잘 붙어있으라는 단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좁아터진 창고로 따라 들어갔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척해진 유은이 피곤한 듯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다 단이와 애쉬, 그리고 령을 끌고 나간다. 



“무슨 일이야?”

“말을 안 해.”

“응?”

“내 말에 대답을 안 한다고..”

“입을 다물기로 한 건가?”

“그런 것 같아요. 괜히 오기로 저러는 것 같은데, 그게 더 속 타는 거 알죠?”



답답한 듯 연신 가슴을 두드리던 유은이 지친 듯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간다. 



“한숨 자고 올게. 너무 피곤해.”

“다녀와.”



퀭한 몰골이 아무리 봐도 잠도 부족해 보이고, 밤새 신경을 썼던지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해 보였다. 좀 자고 오면 예민하고 답답해 터질 것 같은 머리가 좀 나아지지 않으려나.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단이 애쉬에게 물었다. 



“우리도 기분전환 겸 좀 걷다 오는 게 어떠할지?”

“좋아요.”

“령이 자네는?”

“저도 따라가야지요.”



아무래도 화연의 말을 내내 신경 쓰고 있는 애쉬를 위한 령과 단이의 배려 같았다. 마을을 벗어나 숲길을 걸으며 일부러 화연. 그리고 이은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셋의 주 관심사는 유은이었으니, 단이는 유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준다고 말하며, 전생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애쉬의 입장에서는 이제껏 관련도 없는 동양의 이야기가 나오니 퍽 신기하고 재밌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숲속을 걸으며 약초와 과일을 따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들었다. 



어린 시절 생선과 단것을 좋아해 장에만 내려가면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떼를 쓰던 모습이 귀여웠다고 말하며, 약과라는 단 과자를 사주면 손이 찐득해지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맛나게 먹었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오동통한 두 볼살이 비단처럼 부드러워 만지다 보면 하루가 가는 줄도 몰랐다. 소금 가득 뿌린 삼치를 구워주면 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도 더 달라고 어리광을 피웠다. 등



애쉬가 들었던 유은의 유년 시절과는 퍽 다른 이야기에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삶의 궁핍했던 유은은 항상 앤의 약을 사느라 영양이 부족한 식사를 대충 때우기가 일쑤였고, 그것도 힘들 때는 퍽퍽한 빵 한 덩어리를 사, 물도 없이 먹기 바빴다. 굶는 날도 꽤 있었으니, 전생의 유은은 사랑받고 컸구나. 안심하면서도 엇나가지 않고 잘 큰 지금이 대견했다.


더군다나 단이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으니, 요괴라고 인간과 척지기보다는, 유은을 지키기 위해 인간과 잘 지내려 노력한 것 같았다. 물론 요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령은 이야기하는 단이를 연신 치켜세우면서도 예전의 그때가 그리운 것 같았다. 눈동자에 그리움이 물들어 있었으니, 사과를 넉넉하게 따 품에 안은 애쉬는 그런 령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다들 그립고,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으니, 그런 령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자신은 현재가 좋으니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애쉬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교육방침이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엇나가려 모난 마음이 들 때가 많았고,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가기 전까지 시키는 대로만 하는 몸만 큰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이 어떻고, 가문이 어떻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아버지는 늘 듣기 싫은 말만 했으니까. 집을 벗어나 처음으로 혼자 살기 시작했을때는 직장 일도 힘들었고, 세상을 너무 몰라 속는 일도 많아 힘들었다. 


유은을 만나고 조금씩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이렇게 친구와 함께 먼 길을 떠난 것도 처음이었고, 길에서 자본 것도 처음이었다. 비록 화연의 말이 찝찝하지만, 처음인 일을 즐길 수 있어 현재인 지금이 좋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적은 딱히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말 다 한 거 아닌가. 



“인제 그만 돌아가세.”



유은이 먹을 약초를 넉넉하게 챙긴 단이 손톱 사이에 끼인 흙을 빼낸 뒤 돌아가자고 말한다. 어제부터 종일 먹은 게 없어 속이 허해 얼른 돌아가 같이 사과를 먹으며 요기를 때우고 싶다. 


애쉬는 주린 배를 웅크리며 다시금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이야기하느라 이렇게 멀리 나간지  몰랐는데, 꽤 멀어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사과가 떨어질까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딘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건가요?”

“아마 그러겠죠. 유은이도 이제 없을 텐데, 돌아가면 뭘 해야 좋을지.”

“그러면 저희랑 같이 떠나는 건 어떠신지요.”



일이 끝난다면 유은은 이 세계를 떠날 예정이었으니, 그저 아버지의 말을 들을 예정이었던 애쉬는 함께 떠나자는 령의 말에 ’흠‘ 고민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떠난다라. 예상에도 없었던 일이다. 떠난다면 동양으로 가자는 말일까? 화연 덕분에 언어가 달라도 이렇게 대화할 수 있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화연이 떠나면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의사소통만큼 중요한 것 또한 없다. 그래도..같이 가면 즐거운 일이 가득할 것만 같은데..화연에게 소통이 되도록 부탁해 볼까? 



모두가 떠나면 재미없고 지긋지긋한 엘던 마을은 더 이상 있을 곳이 아니긴 했다. 그저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며 가족의 가업을 잇고 능력 있는 남성과 결혼하여 뒷바라지하면서 조신한 딸로 남아있고 싶지는 않다. 



“그럴까요?”

“좋은 생각이네.”

“무척 즐거울 거예요.”



벌써 미래를 그리고 상상하며 행복한 듯 보이는 령의 모습에 애쉬도 따라 웃었다. 그래, 나도 따라가자. 비록 요괴인 이 존재들보다 일찍 늙고 일찍 죽겠지만, 여한 없이 즐기다 가는 거다. 미련 없이 즐기고, 먹고, 보고, 느끼고, 신나게 살다가 후련한 마음으로 가야지.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길. 애쉬는 령과 단이와 함께 훗날의 미래를 그렸다. 가까우면서도 아직 일이 해결되지 않아 먼 미래를 말이다. 단이의 말에 따르면 동양은 엘던에 비해 발전하지 못한 곳이라 애쉬가 적응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물도 에든 마을처럼 우물가에서 퍼 오거나 강가에 가서 떠 와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불도 들어오지 않아 초롱에 불을 지피고 오순도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잠든다 했다. 애쉬의 직업인 기자도 없어 신문은커녕 무슨 일이 생기면 소문 따라 말 따라 흐르고 흘려듣는 곳이란다. 



그곳에서 무얼 하고 싶냐 물어오는 단이의 말에 애쉬는 고민하다 말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니 직접 가서 이것저것 경험하여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에 단이는 네가 원하는대로 하라며 애쉬를 존중했고, 령 또한 사람을 많이 구하니, 무엇이든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되기도 한다. 힘쓰는 일은 자신 없고, 이제껏 공부만 하면서 살았는데, 물도 직접 퍼 와야 하고, 초롱에 의지해 밤을 버티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들을수록 커지는 걱정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넌지시 말을 흘린다. 이에 단이는 유은과 함께 지냈다면 웬만한 건 다 적응하고 잘 버틴다고 말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하긴..기억을 찾기 전의 유은은 철부지 없는 천방지축 소녀였으니, 사고도 많이 치고, 다치기도 잘 다쳐 늘 걱정스럽게 지켜봐야 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때도 있었고, 덕분에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도 많았다. 



단이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단이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면 일 년 정도는 푹 쉬다가 여행을 떠나자 했다. 보지 못한 것이 많으니 원하는 건 무엇이든 보여주겠다 약조하며 걱정 가득한 애쉬의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주려 하는 듯 보였다. 



“어디든지요?”

“물론이지.”



짧은 시간 지켜본 단이는 거짓말할 존재가 못 되었기에 애쉬는 그런 단이를 믿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맑게 웃는 애쉬의 모습에 단이도 따라 웃는다. 



먼 것만 같았던 마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으니 벌써 도착하여 일행이 묵고 있는 숙소 앞이다. 애쉬가 사라져 걱정이 되었던 걸까. 어느새 일어나 문 앞을 서성거리던 유은은 사과를 안고 다가오는 애쉬를 보며 어디를 다녀왔냐며 잔소리한다. 


이에 품에 안은 사과 절반을 들어달라고 말하며 배고프지 않냐고 유은의 잔소리를 흘려들은 애쉬가 문을 열어주는 령에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양을 제외한 인원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에 사과를 건네고, 단이는 유은에게 억지로 약초를 먹이고 유은은 또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킨다. 


그렇게 늦은 식사를 한다. 간소한 사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서는 저녁은 또 무얼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령이를 뒤로한 채 창고로 향하는 유은을 따라나서는 애쉬다. 



“그냥 화연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러기에는 대화를 좀 하고 싶어서 그래. 어떻게 이유 없이 살아있는 존재를 미워할 수 있겠어. 이은도 처음부터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으니까. 계기가 있다면 그것을 듣고 싶은 거야. 그리고 앤을 죽인 이유도 알고 싶어.”


“네가 미우니까 앤을 죽인 거 아니야?”

“..그러기에는 너무 무고한 사람이었잖아.”

“너와 관련 있으니까. 이은이라면 너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고도 남았을 거야.” 

“기분 나쁜 소리 할래?”

“뭐-그럴 수도 있다고 혹시나를 말한 거야.” 

“..하아. 그럴 수도 있겠지.”

“이은이 입을 열었으면 좋겠네.”


“제발..그랬으면 좋겠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들어갈게. 안에서 엄마가 이은과 이야기하려 노력 중인데, 쉽지 않은가 봐.”

“대양님도 답답하겠지.”

“맞아..넌 얼른 들어가서 좀 쉬어. 사과 따느라 고생했잖아. 잠도 못 잤으면서.”



잠을 못 잔 건 유은도 마찬가지면서. 고작 몇 시간 잤다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본다. 지금 당장 들어가 쉬라는 무언의 압박이 가득한 눈에 애쉬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두 손을 들었다. 



“워워 진정해. 네가 말 안 해도 어련히 알아서 들어가서 쉴 거야. 너야말로 오늘은 적당히 하고 일찍 돌아와서 쉬어.”

“걱정하지 마-”



터벅터벅 힘없이 창고로 들어가는 유은의 모습에 애쉬도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간다. 이 일이 끝나야 모든 게 마무리될 텐데, 길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사람 없는 마을도 으스스해 얼른 떠나고 싶은데, 하루라도 빨리 일이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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