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에 지현이 예지에게 가서 말을 꺼냈다. 말투는 이미 들뜬 사람의 것이다.


“우리 영화 보러 가는 거 어때?”


예지는 하루이틀 일이 아닌 듯 여상하게 받아쳤다.


“영화는 무슨 영화야.”


지현은 그에 굴하지 않고 예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니, 요즘 재밌는 거 있다는데. 엄청 재밌대.”


지현과 예지가 대화하는 걸 들은 나현은 호기심에 슬쩍 둘 사이에 껴들었다.


“영화 보려고?”


“응. 너희들 안보면 나 혼자서라도 보려고..”


그런 말을 하며 풀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지현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표정을 한다. 예지는 그런 지현을 보며 마음 한 편이 찔리는지 말을 고른다. 결국 꺼낸 말은 이런 것이다.


“..언제 보게.”


“오늘 아니면 내일? 어때?”


예지는 한참 고민을 하는 표정이다.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나 바빠서 안될거 같은데.”


“뭐야? 그날 알바도 안하잖아.. 일부러 그 시간대 골랐는데..”


급속도로 침울해져 가는 지현을 보며 나현은 속으로만 땀을 뻘뻘 흘렸다. 나현은 재빨리 쳐져가는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니, 날짜야 다시 잡으면 되고, 아니면 우리 둘이 보러갈게.”


나현은 그렇게 말하고 지현을 끌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지현은 그의 행동이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나현은 한숨을 푹 쉬더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네 생일이었잖아. 그치.”


지현은 그 날을 떠올렸다. 행복한 생일이었다. 예지와 나현이 각각 생일선물도 준비해주고 집에서 가족들과 작은 파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예지가 그날 돈을 조금 많이 쓴 거 같단 말이야?”


지현은 예지가 준 생일선물을 떠올렸다. 갖고 싶어 했던 신발을 선물로 받아서 고맙다고 안아주었던 기억이 났다. 예지는 당황해서 밀쳐내서 금방 떨어지긴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지현은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예지 지금 영화 볼 돈이 없.. 는..?”


“아마 그런 것 같아.”


나현은 심정이 복잡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현은 자신이 눈치 없이 영화나 보러가자고 조른 걸 후회했다. 왠지 요즘 같이 놀자고 해도 안 놀고 그냥 집 가더니.. 말하기는 민망했나 보네. 지현은 난처해져서 얼굴을 긁적였다.


“아.. 너무 미안하네.. 사과하고 싶은데 사과하면 예지는 더 짜증내겠지?”


나현은 동의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알겠다고 하고는 다시 교실로 들어섰다. 그러곤 예지에게로 척척 걸어가서 어색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현은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는지 살짝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러고보니 그 영화 평 찾아보니까 기대 이하라는 얘기도 있더라고. 그치, 나현아. 막 너무 신파적이라는 사람도 있고 하여간 그렇다네.. 요즘 볼만한 것도 없고 나중에 볼 거 생기면 보자.”


지현이 나현을 끌어들이며 말을 해서 나현은 가만히 듣다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는 지현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그러던가’라고 대답했다. 지현은 그 대답을 듣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영화 사건은 지나간 듯 했다.


“내일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엉?”


예지가 지나가다 툭 던진 한 마디에 지현은 바보같은 소리를 냈다. 나현은 잘 못 들었는지 의심하는 눈을 하고 있다. 지현은 예지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네가 저번에 보고 싶다던 거 보자고. 평 좋던데.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거긴 한데.. 한 번쯤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어? 어.. 그래. 그럼 언제? 오늘 볼까?”


예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날짜를 보고는 속으로 작게 탄성을 질렀다. 오늘은 예지의 월급일이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조금 감동이야. 이런 말하면 예지는 싫어할 테니까 생각만 해야지..’


“우리 그럼 재밌게 보고 저녁.. 은 좀 그런가? 그냥 각자 집으로?”


지현은 신나는 말투를 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하다가 예지의 눈치를 보면서 끝을 흐렸다. 역시 저녁까지 먹는 거는 부담되려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예지는 말을 했다.


“저녁까지 먹고 가자.”


갑자기 누군가 예지의 등을 팍 쳐서 지현은 눈이 튀어나올 뻔 할 정도로 놀랐다. 정작 예지는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상대가 나현이었기 때문이다.


“야. 너는 좋으면 좋은 티 좀 내. 맨날 이상하게 가오 잡고 있어. 좀 웃긴 거 알지?”


“뭐래.”


지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예지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발견했다. 예지 지금 기분 좋구나. 나현이랑 같이 영화 볼 수 있어서?..


지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쳤다. 질투는 안 돼.. 지금은 그냥 같이 영화를 보러가는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자.


지현은 애써 웃으며 그 사이에 껴들었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


영화가 시작하고 지현은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초반에 나오는 내용은 슬프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이 잘 극복하고 이겨내는 성장 스토리였다. 지현은 몰입해서 보다가 옆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예지가 일어나서 출구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현은 다시 영화를 보다가 결국 예지가 신경 쓰여서 몰입도 안 돼서 예지를 찾을 겸 밖으로 나왔다. 전화 하러갔겠거니 싶어 매표소 주변을 서성거려도 예지는 보이지 않았다. 지현은 예지를 찾는 걸 포기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화장실의 한 칸만 잠겨있고 그 곳에서 예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목소리라기 보단 흐느끼는 소리에 가까웠다. 예지는 왜 저기서 몰래 울고 있는 거지? 지현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애가 가끔씩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아서 자세히 들어보니 간헐적으로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현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음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아팠다. 가서 달래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지는 그랬다간 다음날부터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예지는 그런 애였다. 자존심이 뭐라고. 그냥 한 번 힘들다는 말만 해도 될 텐데. 그러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웃게 해줄텐데.. 영화의 주인공은 형과 아버지가 죽고 엄마와 여동생만 남아서 방황하다가 결국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 예지는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낀걸까? 어떤 감정으로 엄마를 찾고 있는 걸까.


‘예지가 아버지만 있는 건 알았는데..’


궁금증이 솟아오르는 때에 어김없이 P가 말한다.


-더 알려고 하지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지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어렵사리 옮겼다. 나현은 예지의 사정을 다 알고 있으나 부러 조금이라도 가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만 빼고 둘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이 못내 서운했다. 서운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아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서운해진다.


“아.. 짜증나..”


지현은 시린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기껏 들떠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었는데 이렇게 또 기분이 바닥을 쳤다. 지현은 한참동안 밖에서 눈물을 말렸다.



“영화 재밌었다. 보러 오길 잘했네.”


나현은 웃으면서 둘에게 말했다. 예지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지현은 적당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재밌었어. 하면서.


“다음에도 또 보러오자, 예지야.”


지현의 말에 예지는 조용히 ‘응’이라고 말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겠지. 지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존심만 세서.. 


과한 자존심 부리기는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된다. 예지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지현은 생각에 잠겼다. 직접 말해줄 용기는 없다.


***


“언니이.. 아직이야?”


다연이 재촉하는 소리를 하자 우연은 혼자 느긋한 목소리로 답한다.


“잠시만, 다 됐어.”


그 말에 속이 터지는 지 다연은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정말..!! 낮잠 자고 늦장 부리더니 이게 뭐야아아! 늦었잖아!”


다연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진 게 없는지 확인까지 하는 우연이었다. 다연이 발을 동동 구르던 말던 우연은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 됐대도. 조금만 기다려 봐.”


“하...다 됐다는 말만 지금 몇 번 째인지 알아?”


현관문에서 우연을 기다리다 지친 다연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전날 영화 보러 가자고 해서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뛰어왔더니만 우연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영화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뛰어가도 모자랄 판인데, 우연은 밍기적 밍기적대고 있었다. 다연은 이젠 재촉하기를 포기하고 핸드폰을 만졌다. 영화 지금쯤이면 벌써 시작했겠다. 일단 팝콘은 못 사겠고.. 아 팝콘 먹으면서 보려고 했는데.. 다연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쯤 우연이 방에서 나왔다.


“가자 가자~”


우연은 가자는 말과 함께 혼자 쌩 달려 나가버려서 다연은 ‘언니!’를 외치면서 우연을 뒤따라 나갔다.


“헉...헉..”


간신히 시작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영화관에 도착한 우연과 다연은 초반 부분부터 볼 수 있었다. 다연은 팝콘이 없음에 못내 아쉬워하며 우연을 째려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다연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다연은 누군가 좌석에서 일어나서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실루엣이 낯이 익다.


‘쟤는.. 우리반 애 아닌가..? 아니겠지? 그런데 여기 학교에서 가까워서 학교 애들 많이 오긴 하던데..’


“다연아, 집중 안하고 어딜 그렇게 봐?”


우연이 다연에게 그렇게 말해서 다연은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우연도 다연이 본 곳을 빤히 보더니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는 재밌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해서 다연은 중간부터 손에 땀을 쥐고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다연은 자신의 감상을 읊었다.


"있잖아 언니, 그런 말이 있잖아. 저승사자는 생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낯을 하고 온대. 그래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고.. 내 생각에는 주인공이 죽을 뻔 했을 때 죽은 형의 낯을 한 저승사자가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주인공은 그 유혹을 참아내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어.. 그래도 아무리 죽은 형이 그리워도 아직 살아있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살아갈 거라고 다짐한 걸 거야. 그래도 살아갈 사람은 살아야지 어쩌겠어.."


"너다운 엄청 감수성 풍부한 감상이네."


우연의 간단한 한 마디에 다연은 살짝 발끈했다.


"뭐? 언니는 어땠는데?"


다연이 우연에게 감상을 물으니 우연은 심플하게 ‘좋았어’라고 답했다. 다연이 더 말해보라고 우연을 조르자 우연은 말을 이어갔다.


“그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더라. 주인공 형이 죽던거. 너는 만약 내가 그렇게 평소처럼 나가서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할래?”


다연은 우연의 말대로 된다면 어떨까를 떠올렸다. 이건 그저 가정일 뿐이니까.. 다연은 우연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모습을 상상했다. 혹여나 살아라도 있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모습. 다연은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했다.


“잘 상상이 안 가. 언니는 이렇게 매일 같이 있어서 그런가.. 아마 없어진다면 매일 매일 수소문해서 어떻게든 찾지 않을까?”


우연은 다연의 답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찾은 게 시체라면?”


다연은 우연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시체라면.. 그건 좀 충격인데..”


“그래서 어떻게 할거냐니까.”


답을 재촉하는 우연때문에 다연은 생각나는 것을 쥐어짜서 대답했다.


“장례식을 치뤄줘야겠지.. 그리고.. 아 진짜 상상이 잘 안 된다니까. 이런거 묻지 마..”


우연은 다연이 곤란해하며 심통 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며 만족했는 지 큭큭대며 웃었다. 그런 우연을 보다가 다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툭 내뱉었다.


"언니 죽으면 나도 그냥 죽어버릴까."


우연의 입매가 부자연스럽게 굳어진다. 그는 의문을 던졌다.


"... 왜?"


다연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이유를 떠올려야 하나 싶어서 억지로 답을 했다.


"딱히 살 이유도 없고..?"


"그런 말 막 하는 거 아니다. 언니 없어도 살아야지."


깔깔 거리며 놀리다가 낯을 싹 바꿔서 정색하는 우연이 못내 얄미워서 다연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다연의 볼을 잡아당기는 우연에게 몇번 성질을 냈다. 그런 하루였다.


다연이 뒤늦게 이 날을 떠올리곤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곰곰히 떠올려 보았다. 이유는 명확하게 있었다. 자신이 죽어 없어졌다 하면, 우연도 더 이상 살아있기를 선택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에..


***


“나 잠깐 손 좀 닦게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기다려..”


다연은 우연에게 가방을 넘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연은 들어가는 순간 익숙한 낯을 한 이를 마주했다. 다연은 당황해서 지나가지도 못하고 앞에서 우물쭈물거렸다.


‘아까 그 애네.. 갑자기 영화관 나가던 애.. 같은 반이긴 한데, 인사할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가만 보니까 눈이 좀 부은 것 같은데.. 울었나? 아, 지금 아는 척하면 완전 오바겠지..’


다연은 그렇게 생각해서 세면대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예지를 조심스레 지나쳐서 손을 닦았다. 손을 닦고는 바람에 건조시키고 있는데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연은 쿵 울리는 소리에 사색이 되어 핸드폰을 주우려고 숙였다. 그때 누군가 핸드폰을 주워서 건네는 손길에 다연은 잠시 멈춰서 그 손을 바라보다가 고갤 들어서 얼굴을 확인했다.


“...”


안 가져가고 뭐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예지가 손을 내밀고 있다. 다연은 예지가 주워줄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해서 허겁지겁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저.. 고마워.”


다연은 가까이서 본 예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삶에 지친 사람의 낯이었다. 눈도 꽤나 붉어져 있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다연은 주저하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힘내..”


“...”


다연은 말해놓고도 괜히 오지랖 부렸다고 자책하며 속으로 자신을 매우 때리고 있었다. 그리곤 뒤늦게, 영화를 보고 감동 받아서 울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매우 부끄러워졌다. 다연이 의기소침해져서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는 때에 예지의 말이 들렸다.


“응.”


“...”


다연은 예지에게 대답의 의미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밖으로 나섰다. 아직 반 애들을 다는 모르지만, 왜인지 예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낯이 익은 느낌이란 말이야. 같은 반이어서가 아니라..'


다연은 나와서 우연에게로 신나게 걸어갔다. 다연의 걸음걸이를 본 우연이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캐물었고 다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얼버무렸다.


'나랑 저 애만의 비밀로 남겨야지.'


다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가서 아는 척을 하면 싫어하진 않으려나, 그런 상상도 했었다.


***


“갔다 왔어?”


지현이 반갑게 예지를 맞아주었다. 나현과 지현은 예지가 나오자마자 다같이 걸어간다. 예지는 영화는 역시 자신이랑 안 맞는 다고 생각했다. 가끔 안 좋은 기억을 건드려서 이렇게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이 터져 나오니까. 예지는 주인공이 서먹했던 엄마와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한테는 영광의 시대 같은 거 있지도 않았는데.. 앞으로도 없을 거고. 평생 이렇게 버러지 같이 살 인생인데.’


예지는 역시 영화 같은 건 배부른 자들이 향유하는 문화라고 생각했다. 당장 내일이 닥치는 게 무섭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사치라고. 예지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현과 나현을 힐끔 보았다. 어쩌면 자신은 나현 자체보다 나현의 걱정 없이 맑은 분위기를 선망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은 평생 가질 일 없는 것들을 가지고 누리지 못할 것들을 누리는 나현이 부러워서, 그래서 더 그 애를 원하게 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가진 것 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천지차이였다. 자기주장이 강해서 호불호가 갈릴 지라도 한번 나현과 대화하게 되면 모두 그 애를 좋아하게 된다. 배려심 많고 친절하기까지 한 사람을 누가 싫어할까. 그에 반해 자신은 첫인상부터 최악인데다가 입을 열 수록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까지..


자신이 나현을 좋아하는 건지, 나현이 가지고 누리는 것들을 좋아하는 건지, 어떤 게 진짜인지는 예지 본인도 잘 몰랐다.


****


다연은 지현과 시시덕거리고 있는 예지를 빤히 보았다. 다연은 그 날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예지가 자신의 핸드폰을 주워주었고, 그 애에게 나름의 위로를 건네 주었다고,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조금은 많이 지난 그 때를..


'아마 예지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 하는 거겠지. 기억하고 있다면.. 그 것도 그 것 나름대로 슬프지만.'


다연은 그 때 보았던 예지의 누그러진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 눈빛은 자신의 착각이었을까? 당시에 둘 뿐이었던 곳에서 주고 받았던 무언의 배려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걸까?


'내 착각이었구나.. 이제 와선 아무 의미도 없는 걸. 그만 생각하자..'


그래도 미래의 가정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만약 나현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조차 아니었더라면, 친구는 아니더라도 좋은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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