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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얼레벌레 축제 준비 (2)




이… 이런…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 같으니!


나는 내 손을 붙잡은 채로 몸을 바짝 붙여오는 김정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살랑이는 봄바람이나, 따뜻한 햇빛이 들어앉은 밴드부실 풍경이 자꾸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연애 잘하는 사람들이 분위기도 잘 탄다고 했던 거구나. 옛날엔 뭐 그런 말이 다 있냐면서 콧방귀만 존나 뀌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딱 알겠다. 주변 환경마저도 작업질의 일부로 삼는 미친놈들… 그게 바로 김정우 같은 놈들이었음을. 나는 순수한 호감이 담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정우를 바라보며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니, 지금 설레서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아니, 설렌 거 맞나? 아니 근데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 허락. "

" … "

" 안 해줄 거야? "




이런 얼굴을 보고 누가 안 설레 미친놈아!


나는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작게 심호흡했다. 김정우는 내가 그러고 있든지 말든지 내 쪽으로 들이민 얼굴을 더더욱 가까이해 보일 뿐이었다. 곧 있다간 뽀뽀라도 할 기세네. 열이 오른 손끝으로 김정우의 얼굴을 밀어내며 작게 헛기침했다. 김정우는 내 철벽에도 생글생글 웃기만 했고, 나는 그런 김정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 지금 학생 신분이어서 다행이라고. 어른이었으면 온갖 여자들 다 꼬시고 다녔을 것 같다고. 막장 오피스 사건같이… 연애의 참견에 나오는 훼방꾼 1의 역할 어쩌구 어쩌구…


그렇게 김정우의 한 쪽 볼을 밀어낸 채 이도 저도 아닌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 악! 너네 뭐 하냐 지금?! "

" 타이밍 무슨 일이냐 진짜? "

" 야! 김정우랑 김여주 동아리실에서 키스한다! "

" 뭔 개소리야 미친 새끼야! "




아니 뭐 이딴 세상의 이런 일이 같은 상황이. 나는 괴성을 지르며 밴드부실 안으로 쳐들어오는 아이들을 향해 어이 털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정우는 아이들이 지랄 발광 부르스를 추든 말든 나와 딱 붙어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야, 나와. 안 나와 미친놈아? 나는 김정우의 머리를 밀어내며 낑낑댔다. 여태까지 꼼짝도 안 하던 김정우는 곤란해 보이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자기가 져 준다는 듯한 표정으로 슬슬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꼭 붙잡고 있는 한 쪽 손은 놓지 않은 채로. 깍지까지 껴서 잡은 한 쪽 손이 쓸데없는 열감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 무슨 일이냐? 진짜 댐 개방된 것 같아. 나는 땀이 찬 손을 꼼지락거리며 김정우를 쳐다봤다. 김정우는 내 손바닥에서 댐이 개방되든 말든 >너의 다한증까지 사랑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닐까?




" 한창 좋았는데. 왜 눈치 없이 들어오고 그래. "

" 동아리실을 하트 시그널 장소로 만들어 놓고 그런 소리가 나오냐? "

" 말 나온 김에 우리끼리 하트 시그널 찍을 사람? 나는 남자 1호. 약간 김현우 스타일? "

" 역시 천하의 김정우. 타격감 제로죠? "




김정우는 호들갑 떨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도 태연스러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너네는 떠들어라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테니< 하는 얼굴로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아무리 놀려도 굴하지 않는 김정우가 재미없었는지, 슬슬 내 쪽으로 타깃을 돌리기 시작했다.




" 김정우랑 입 맞춘 소감으로 한 말씀해 주시죠. "

" 또라이들이냐? 진짜 입 맞췄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

" 그러면 덜 억울하게 해드릴 테니까 저희가 보는 앞에서 뽀뽀 갈겨 주세요. "

" 야 여기 연장 없냐? 얘 대가리 한 대만 패게. "




얼탱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애를 바라보니, 남자애는 밴드부실에 조폭 마누라가 탄생했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내 한 쪽 손을 쥐어잡은 채로 끅끅대며 웃던 김정우는 내게 옆에 있던 드럼 스틱을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주야. 드럼 스틱은 때려도 별로 안 아파. 그냥 힘줘서 살짝만 때리자. 나는 김정우의 말을 듣자마자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드럼 스틱을 쥐었다.


그리곤, 꽝.




" 응? 꽝? "

" 악! "

" 이런 개미친! "




드럼 스틱으로 머리를 가격 당한 남자애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존나 아프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닥을 구르던 남자애는 자기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며 오바를 싸기 시작했다. 나는 딱 봐도 붉게 물들어 있는 남자애의 이마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김정우를 바라봤다. 야 이 미친놈아. 때려도 별로 안 아플 거라며. 김정우는 원망스러운 내 눈빛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모르겠는데용 하는 표정을 지으며 제 어깨를 으쓱였다.




" 미안. 진짜 때릴 줄은 몰라서. "

"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

" 응, 또라이 맞아. 여주밖에 모르는 또라이. "




애교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에 기댄 김정우가 광합성 받는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고롱고롱거렸다. 이, 이런 씨발… 이 자식은 얼굴이 무기다… 존나 패고 싶은 짓을 했어도 얼굴 한 방에 용서되는 이 극악무도한 얼굴을 봐라!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킨 채로 자리에 앉았다. 김정우는 혼란스러운 밴드부실 상황에도 나와 붙잡고 있는 손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아, 이거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아무리 내가 지금 이마크를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좀… 곤란…




" 연습 계속할까? "

" … 그래. 계속하자. "




은 개뿔… 그냥 존나 좋다…


세상에 어떤 미친년이 존잘남이랑 손잡고 있는 걸 싫어해. 나는 생글생글 웃는 있는 김정우를 바라보며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 보였다. 김정우는 해탈한 듯한 내 표정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노래를 이어갔다. 뒤늦게 동아리실에 들어온 아이들은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애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고, 이따금씩 나와 김정우의 노래 실력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김정우 말만 들었을 땐 긴가민가 했었는데, 직접 들어 보니까 알겠다고. 노래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한다고. 몇몇 아이들은 댄스부 대표 트롤이었던 나를 기억하는지, 밴드부에 악감정을 품은 댄스부가 우리 밴드부로 폭탄 돌리기를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물론 내 노래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은 모조리 사라졌다며 황급히 포장을 시도했지만.




" 폭탄 돌리기라니, 너무하다. 너넨 이렇게 예쁜 폭탄 본 적 있어? "

" 너 같은 미남 폭탄도 봤는데, 뭐. 겉모습이 아무리 멀쩡해도 속은 폭탄인 경우가 많아. "

" 이젠 내 면전에다가 대고 욕을 하네… "

" 어 수고. "




김정우의 말을 가볍게 씹은 여자아이는 밴드부실 구석에서 서럽다며 엉엉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내가 우리 동아리에 얼마나 헌신했는데, 나를 이렇게 짐짝 취급하고 어쩌구 어쩌구 웅앵웅… 나는 장난 식으로 질질 짜고 있는 남자아이를 웃기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평화롭기 그지없는 밴드부실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편안하고 재밌는 동아리 생활. 편견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아이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두려워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는 내 신념에 따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들을 하나 둘 고쳐나가니 내 옆에 붙어 오는 사람도 많아졌고, 김정우처럼 호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생겼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던 첫 순간을 떠올리며 작게 심호흡했다.


예상치도 못한 인물들과 너무 깊게 엮여 버리긴 했으나, 그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나는 엉망진창이었던 학창 시절을 바꾸기 위해서 돌아왔고, 마음속에 걸려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은 이미 모두 좋게 해결되었으니. 한겨울이 너무나도 이른 시기에 이마크를 발견했다고 해서, 이마크의 미래를 가져갔던 한겨울이 두렵다고 해서. 내가 위축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두 눈을 부릅 떴다.


그래. 쫄지 말자, 김여주.





*





" 나 동아리 하나 개설할까 봐. "

" 너는 무슨 주기적으로 헛소리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냐? "

" 이름은 미남 사랑 동아리. 어때? "

" 동아리 회장은 너겠네. "




심드렁한 얼굴로 내 말에 대꾸한 정이나가 귀를 후비작거렸다.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 나는 정이나를 밉지 않은 눈빛으로 흘기며 고개를 돌렸다. 점심시간 내내 쉬지 않고 김정우와 합을 맞춘 탓인지, 아까부터 까슬까슬했던 목구멍이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래서 오랜만에 노래할 땐 무리하면 안 되는 건데. 너무 신나서 그런가 뒷감당도 안 하고 막 불러 버렸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따끔거리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집 가면 재현 오빠한테 생강차나 끓여 달라고 해야겠다… 지금 이 상태로는 내일 연습 못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정이나와 시답지 않은 말을 주고받으며 목 부근에 손을 얹어 놓고 있었을까.




" 여주야. "

" … 어엉? 아, 마크구나. 왜? "

" 그게 아니라. 아까부터 계속 목 만지고 있길래… "

" 아… "

" 어디 아파? "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넨 이마크가 내 목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표정.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마크가 이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말을 건넬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 옛날의 김여주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모습이었으니까. 분명 과거의 나라면 이마크가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아프다며 찡찡댔겠지. 나는 목 부근에 올려 두었던 손을 내리며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 아니? 그냥, 목이 좀 건조한 것 같아서. "

" 아… 지금은 괜찮고? "

" 응. 점심시간 내내 노래 불러서 그런가… 잠깐 이러다 말겠지 뭐. "

" 다행이다. 많이 아프면 꼭 보건실 가. "




쑥스러운 얼굴로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 이마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이나는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도,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물론 나지막하게 내뱉어지는 내 말에 슬며시 손을 거뒀지만 말이다. 옆구리 성감대니까 만지지 말지? 교실 한가운데에서 신음 소리 듣기 싫으면. 섬뜩한 내 말에 퍼드득 손을 거둔 정이나가 좆같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진짜냐? 의구심 가득한 말투로 조심스레 질문을 건넨 정이나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개뻥 구라지, 등신아. 정이나의 표정이 개썩창으로 변했다.




" 그런 역겨운 농담은 좀 가려가면서 할래? "

" 저한테 모욕적인 언사 내뱉지 마시죠. "

" 고소라도 할 거냐? "

" PPT 땄고 날아오기 효과로 고소하겠습니다. 발표는 내일입니다. "




미친 새끼. 어이가 없다는 듯 낮게 웃은 정이나는 별다른 말없이 내 어깨를 툭 치고 말았다. 나는 5교시 시작 종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가는 정이나를 바라보다, 이내 교실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항상 느끼는 건데, 뭔가 회귀하고 나서부터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단 말이야.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학교가 끝나가고 있으니. 나는 방과 후에 남아서 연습해야 한다는 김정우의 말을 떠올리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박지성:

누나 누나

저 누나 옷 가져왔어요

학교 끝나고 방과 후에 드릴게요

댄스부실로 잠깐 와 주세요!




존나 깜찍한 자식 같으니.


나는 흐뭇한 얼굴로 지성이가 보낸 카톡을 훑어봤다. 꼬박꼬박 누나라고 부르는 것부터,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까지. 말 끝에 붙인 느낌표가 오늘따라 발랄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이동혁, 김정우, 이마크, 박지성 중에서 제일 귀엽고 순수하게 구는 건 박지성 아닌가? 나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는 박지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나 누나 거리면서 졸졸 쫓아오는 거나, 복도에서 만나면 복권이라도 맞은 얼굴로 해맑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거.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 이동혁 좀 봐라. 걔는 뭐… 나 만날 때마다…




" 오늘도 밥 안 먹었어요? 맨날 매점만 가는 것 같은데.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



만날 때마다…



" 다리 계속 아프면 병원 한 번 가 봐요. 무리해서 걸어 다니지 말고. "




음…


생각해 보면 이동혁도 그렇게 썩 싸가지 없게 굴진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잘해주는 편에 속했고. 뭔가 박지성과 이동혁의 호감 표현 방식은 결이 달랐다. 박지성은 뭔가 애기처럼 챙겨 주고 싶은 모습으로 호감을 표현한다면, 이동혁은 후배인 주제에 자기가 더 선배인 것처럼 듬직하게 굴었다. 물론 둘 다 나쁘진 않지만. 나는 멍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며 최근 엮이게 된 네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엔 이마크랑만 안 엮여야지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마크를 포함한 네 명이랑 동시에 엮이게 됐네. 넷 다 잘생겨서 후회는 없지만.


그렇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설렁설렁 수업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나는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박지성이 가지고 있는 내 겉옷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미적미적거리며 천천히 갔겠지만, 오늘은 방과 후에 밴드부 축제 연습도 해야 했으니. 나는 내가 보낸 카톡에 아직 1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며 댄스부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어… 아무도 없나? "




불은 켜져 있는데.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댄스부실 문을 열어젖혔다. 다른 애들 짐도 다 있고, 바닥에 핸드폰도 몇 개 널브러져 있는데. 다들 어디 갔나?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댄스부실 안쪽으로 몸을 들였다. 그렇게 텅 빈 댄스부실을 둘러보며 박지성의 행방을 찾고 있었을까. 나는 불이 꺼져 있는 댄스부실 구석 쪽을 확인하자마자 놀란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 … "

" … "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듯 보이는 박지성이 구석에 몸을 기댄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쟤는 잘 거면 편하게 누워서 자지… 키도 큰 애가 무슨 구석에 쪼그려서 자고 있냐. 나는 박지성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애들은 없는 걸 보니, 다들 연습하면서 먹을 간식거리들을 사러 간 모양이었다. 아구, 피곤했나 보네.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박지성 앞에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박지성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부슬부슬. 귀여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툰 손길로 박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은 탓인지, 곤히 자고 있던 박지성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으응 거리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 … 누나…? "

" … "

" … 꿈인가… "




비몽사몽 한 얼굴로 두 눈을 꿈뻑 뜬 박지성은 눈앞에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마 지금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잠든 후배 머리카락을 멋대로 휘저은 개변태 2학년 김여주로 찍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한참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으니, 박지성은 지금 이게 꿈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무어라 작게 웅얼대며 내 손바닥에 얼굴을 부빈 박지성은 이내 아이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아… 너무 좋다. "

" … "

" 꿈 안 깨면 좋겠다… "




씨… 씨발… 이건 또 무슨…


나는 충격적으로 귀여운 박지성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보증금 사기 삼천만 원쯤 당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김정우에 이어서 박지성 너까지 왜 이러니… 나 지금 안 그래도 이동혁 때문에 존나 곤란하단 말이야… 이동혁은 나보다 정신 연령 7살은 어린 주제에 연상처럼 듬직해 보여서 문제였는데… 박지성은 이게 고등학교 1학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귀여워서 문제네. 안 그래도 심란한 사람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다니. 이래서 잘생긴 애들은 착하면 안 돼… 귀여워서도 안 돼… 나는 박지성의 머리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뒤로 빼내며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박지성의 고개를 벽 쪽으로 기대주는 건 잊지 않은 채로.


음…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나는 반팔 하나만 딸랑 입은 채로 잠들어 있는 박지성을 내려다보다, 이내 가방에 챙겨 두었던 작은 담요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이렇게 있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박지성의 몸 위로 작은 담요를 덮어준 나는 박지성의 가방 옆에 있는 내 겉옷을 챙겨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누나? "

" 흐억…! "




젠장. 박지성이 깨기 전에 나갔으면 완전범죄였던 건데!


나는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박지성을 확인하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작게 소리를 질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박지성은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박지성을 내려다보다 이내 실례했습니다! 라는 개념 밥 말아먹은 말을 남긴 채로 후다닥 댄스부실을 빠져나갔다. 와, 미친. 존나 놀라서 심장 멈추는 줄 알았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나는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댄스부 애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뒤를 돌아 밴드부실로 향했다. 밴드부실에서는 듣기 좋은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다, 다녀왔습니다! "

" 어~ 그래. 여주 왔니. 가방 내려놓고 와서 밥 먹어라. "

" 이게 어디서 우리 엄마인 척이야. "

" 니 말투가 집 들어온 애 말투라서 그랬다. "




태연스러운 얼굴로 내 말을 맞받아친 은지가 얼른 와서 김정우랑 합 맞춰 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아, 내가 알아서 간다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은지를 밀어낸 나는 밴드부실 의자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내팽개치며 김정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정우는 내가 왔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잔뜩 신난 얼굴로 붕방거렸다. 이건 뭐… 분리 불안 강아지도 아니고. 작게 웃음을 터뜨린 나는 김정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목이 아프긴 하지만… 일단 연습은 해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김정우와 함께 목을 풀며 연습하기로 했던 노래를 틀려고 했을까.




" 아, 맞다. 여주야. 나 너한테 줄 거 있어. "

"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고백은 좀 이르지 않나? "

" 밴드부실에서 살인 사건 나는 거 보고 싶어? "

" 미안. 나한테 줄 게 뭔데? "

" 이거. 댄스부 애 중에 하나가 너 갖다 달라고 하더라. "




시큰둥한 얼굴로 내게 무언가를 내민 은지는 목 관리 잘 하라는 말을 남긴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댄스부 애 중에 하나가 갖다 달라고 했다길래 누가 준 건가 했는데. 나는 내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내게 이걸 건네주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이거… "

" … "




새것으로 보이는 종합 감기약 한 통과, 시중에서 팔고 있는 작은 레몬차.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레몬차는 여전히 따뜻했다. 떨리는 눈으로 레몬차 뒷면에 붙어 있는 쪽지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목 많이 아파 보여서. 너무 오지랖 같았으면 미안. 연습 열심히 해.]



정갈한 글씨체. 쓸데없는 미사여구 없이 진심만을 꾹꾹 눌러 담아 쓴 문장들. 나는 메모지에 적혀 있는 짧은 문장들을 한참 동안이나 곱씹어 읽었다. 투박해 보이지만 세심하고, 무심해 보이지만 다정한. 내가 몇 년 동안을 짝사랑했던 인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게 약을 주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이마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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