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lty



PM 5:30

 

사람이 가득 찬 퇴근길.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게 그러나 너무 중심과는 떨어져 있지 않게 적절히 선을 유지한 남자가 담배 연기처럼 뿌옇게 흩뿌리는 입김을 바라본다.

한때는 이 작은 존재마저도 손안에 넣기 위해 아등바등할 때가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한 형과는 달리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어 악착같았던 자신. 이제는 더 큰 걸 얻기 위해 작은 걸 놓는 법을 배웠고 지금은 조용히 저울질 중이다. 눈을 가리고 엄중한 입매로 무거운 저울을 들고 있는 디케처럼.

 

 

“아저씨!”

 

 

저 멀리 밝게 웃으며 자신을 부르는 아이는 한쪽 저울에 올라가 무게를 가볍게 또 한없이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이상하지. 왜 너는 가벼울 때조차도 늘 더 가라앉는 쪽에 있는 걸까.

 

 

“나 많이 기다렸어?”

 

“…한치원.”

 

“응?”

 

 

어느새 제 팔에 착 달라붙은 채 영롱이 빛나는 눈을 바라보던 도현이 팔을 뻗어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작은 손짓임에도 몸을 바싹 굳히는 행동에 짧게 웃음을 터뜨린 도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앞을 본다.

 

 

“춥다. 가자.”

 

 

다정히 팔짱 낀 손을 잡아주는 대신 팔을 더 작게 옹송그려 맞닿은 부분을 몸쪽으로 숙인 도현이 걸음을 재촉한다. 준호는 익숙하지 않은 냉대에 작게 주먹을 쥐어보다가도 이내 불타오르는 사명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디 가는데 이렇게 서둘러 아저씨? 시간은 길잖아.”

 

 

살살 웃음 짓는 눈꼬리와 묘한 말꼬리에 걸음을 늦춘 도현이 준호를 빤히 바라본다. 마치 눈빛으로 옷자락을 벗겨낼 법한 분위기에 삐끗, 그만 깨물고 있던 입술이 엇나가버린다.

 

 

“꽤 많이 부리네, 끼를.”

 

“…그래서 싫어?”

 

“밥이나 먹자.”

 

 

답을 회피한 도현이 걸음을 내딛으려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마치 금방이라도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물은 것만 같아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그러나 구마를 하러 다니며 그동안 늘었던 담력만큼이나 연기도 나름의 자신이 있었기에 준호는 자연스레 시선을 빗겨내어 앞을 봤다.

 

 

“좋아. 밥 먹지 뭐. 원래 데이트 정석은 식사잖아?”

 

“…파스타. 먹나?”

 

“응?”

 

“….”

 

“파, 파스타? 아저씨 그런 음식도 좋아해? 나는 다 좋지. 우리 아저씨랑 함께하는 저녁은.”

 

 

치원이 자신에게 말해 준 음식점 중에는 파스타를 파는 곳이 없었다. 분명 자기 아저씨는 좋은 곳 데리고 가도 한정식일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행선지에 파르르 떨렸던 눈꺼풀을 부디 그가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슬핏 시선을 올리자 어느새 도현은 앞을 보고 있다.

 

 

“우아해져야 할 때는 우아해져야지.”

 

 

저울은 멈추지 않았다.

 


PM 6:00

 

“얌마, 최준호.”

 

“예?”

 

 

금방이라도 습관적으로 응? 이라고 답할 뻔한 입을 바로잡은 치원이 최대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앞사람을 본다.

 

 

“이걸로 되겠어? 선택지 줄 때 좋은 걸로 골라.”

 

“괜찮습니다. 익숙한 게 좋은 거죠.”

 

“….”

 

 

호박빛 눈동자가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는 게 느껴지지만, 일부러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리자 마치 습관처럼 고개를 숙여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 범신이 골목 한편에 멈춰 선다.

 

 

“그래 알았다. 들어가기 전에 이거 한 대만 피우고 가자.”

 

“예.”

 

“아이고, 새파랗게 어린 꼰대가 많이 컸네.”

 

“에이, 언제 이야기를….”

 

 

피식 웃으며 눈 한쪽을 가볍게 찡그리는 모습. 제가 관찰한 동생의 모습과 거의 똑같게 흉내를 낸다.

자신은 이 정도로 똑같이 행동하고 김 신부님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데 준호는 잘하고 있을까. 그래도 나름 꼰대 같은 구석이 많아서 한 번 하겠다고 하면 잘하는 동생이니 일단 마음을 놓는다.

 

 

“오늘 각오는 단단히 하고 왔냐?”

 

“…무슨 각오를…?”

 

 

그냥 고깃집 가서 고기 먹고 술 먹고, 조금 더 가면 평범하게 거리나 걸을 거라고 했는데?

예상에 없던 질문에 잠시 눈을 돌려 생각하는 척하다 이제야 생각난 듯 크게 아 소리를 낸다.

 

 

“이 정도 일로 각오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저를 뭐로 보시고.”

 

“…그래. 그러지?”

 

 

거의 끝이 보이는 담배를 밟아 끈 범신이 가볍게 웃으며 치원의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언제나 본론만 있었던 저희와는 다르게 마치 서론부터 시작하는 게 당연한 절차이듯 구는 모습이 낯설다.

그러나 구태여 낯선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묵묵히 손길을 받아내자 퍽 다정한 시선을 보인 범신이 툭 등을 친다.

 

 

“가자. 춥다.”

 

 

손짓 하나에도 숨이 막혔다.

 

 

PM 7:45

 

“이제 어디 갈까요, 신부님?”

 

“갈 곳 한군데 있지.”

 

“오. 저랑 데이트하시려고 준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실없이 웃는 치원을 보고 따라서 웃어버린 범신이 담배를 꺼내려다 이내 넣어버린다.

 

 

“그래. 많이 준비했지. 너도 각오했다 했고.”

 

“…?”

 

“저-기 간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눈짓이 가리키는 방향을 쭉 따라가자 최종 도착지는 커다랗고 영롱한 글자로 적힌 ‘HOTEL’.

 

 

“…어, 어디를 말씀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자신이 해석을 잘못했나 보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불안감을 꾹 잠재우며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범신은 친히 손을 꺼내 건물을 지목했다. ‘HOTEL’이라고 써진.

 

 

“어, 그, 신, 신부님. 저희 일단 다른 곳도 천천히 들리고 가는 건.”

 

“다른 곳 어디?”

 

“…술! 그래도 데이트인데 더 분위기 좋은 곳으로 2차는,”

 

“2차는 무슨. 하-, 이 새끼 이거 이제 술 이야기도 막 하네. 참나. 처음에는 자기 술 안 마신다고 잡아떼더니.”

 

 

신부님은 지금 더한 걸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차마 이렇게 외쳤다가는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며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순순히 따라간다면….

 

 

“데이트지 않습니까. 그것도 사복까지 입었는데.”

 

“그래. 그럴 줄 알고 내가 룸서비스로 전부 예약했다. 들어가서 분위기 있게 편하게 마시자.”

 

“아니, 신부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꼼꼼하셨다고…!!”

 

 

헙. 자신이 소리쳐 놓고서도 놀라서 입을 틀어막는다.

언제나 다정한 범신이지만 준호는 가끔 그가 보이는 무신경함이 퍽 섭섭하다고 말했었다. 속을 읽을 수 없을 때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물어도 답하지 않는다.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제 동생이라면 분명 눈치 빠른 김 신부님은 섭섭함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언제나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그런 범신이 그럴 줄 알고 예약이라니. 차라리 자기 아저씨에게나 더 어울릴법한 대사와 행동에 치원은 슬금슬금 입을 가린 손을 내렸다.

 

 

“어쭈.”

 

“저는, 그게…, 신부님 돈이 어디 있으시다고 저렇게까지 무리를 하시나 걱정이 돼서 말하는 겁니다.”

 

“박도현한테 뜯어 먹었다. 됐냐?”

 

“예??”

 

“아 몰라 몰라. 핏덩이는 그런 거 몰라도 된다.”

 

 

뭐 하나 시원하게 말해주는 일이 없는 범신에 치원은 이제 답답함을 넘어 준호가 말하는 서운함을 느낄 지경이다.

아저씨는 적어도 작은 힌트라도 주고 답을 찾다 헤매기라도 하면 조용히 제 눈을 가린 채 가야 할 곳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김 신부님은 힌트도 주지 않는다. 애초에 길을 잃을 기회도 주지 않고 자기 등 뒤만 바라보고 따라오게 한다.

 

 

“도대체 핏덩이가 알아도 되는 건 뭡니까.”

 

“….”

 

“아직도 제게 숨길 게 그렇게 많습니까?”

 

 

날카롭게 치켜뜬 눈이 제법 준호와 닮았다.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공통된 버릇 아닌 버릇에 범신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선 하얀 입김을 내뿜는다.

 

 

“최준호 아가토.”

 

“…예, 여기 있습니다.”

 

“들어가서 전부 말해주마. 가자.”

 

 

먼저 성큼 내딛는 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치원은 괜히 제 동생을 향한 안타까움에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연애 사업 문제는 여기도 있었네.

 

 

PM 8:10

 

“아, 아저씨, 너무 급한 거 아니야?”

 

“오늘만큼 느렸던 적이 있었나?”

 

“아니-, 그래도 데이트인데.”

 

“분위기 있는 곳에서 식사. 값나가는 호텔에서 야경 보면서 와인 마시기. 이보다 더 완벽한 데이트가 또 있나 봐?”

 

 

도대체 빈틈이 없다. 신부님은 앙탈 아닌 앙탈이라도 부리면 져주는 척 뜻을 굽힐 때도 있지만, 도현씨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한다. 물론 그런 점이 플러스가 되는 경우도 많지만, 지금은 아니다.

 

 

“원래 급할수록 돌아가는 법. 아저씨가 가르쳐준 거잖아.”

 

“….”

 

“한치원을 무시하면 안 되지. 박도현 말이라면 껌뻑 죽잖아, 내가 또?”

 

 

야살스럽게 웃으며 말하지만 준호는 말 속에 뼈를 숨겼다. 제 형은 당신 말이라면 정말로 죽는시늉도 마다치 않을 사람인데 당신은 그런 형을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베갯머리송사는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새 방문 앞에 서 있는 자신에 당황하기도 잠시. 받아온 키로 문을 연 도현이 부드럽게 등을 떠미는 바람에 엉겁결에 방까지 들어가고 만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에 이제라도 입을 떼기 위해 뒤를 돌지만, 언제 이동한 건지 도현은 와인이 준비된 테이블 가까이 서 있다.

 

 

“아저씨.”

 

“오늘 까다로움이 심하네. 처음 줄타기 가르쳐 달라고 한 날처럼.”

 

 

줄타기…?

제 형에게 듣지 못한 새로운 정보에 금방이라도 한소리를 할 것 같던 준호의 입이 굳게 닫힌다. 여기서 섣불리 반응했다가는 지금까지 노력한 모든 시간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준호는 일단 치원이 삐쳤을 때 자주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했다.

반쯤 튀어나온 아랫입술, 흘기듯 보는 시선, 나 불만 있소 보여주는 걸음걸이.

 

 

“그래서,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싶어서 그러니?”

 

“글쎄, 취중 진담이라도 내가 하려고 하나?”

 

“옛날 술법이네.”

 

“왜 이래. 아저씨 옛날 사람이잖아. 딱 맞지 않아?”

 

 

의자에 앉아 와인을 한 모금 음미하니 지금쯤 한치원은 잘하고 있을지 걱정이 든다. 한 번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등골 빼먹을 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약한 사람한테는 한없이 약해지는 게 한치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김 신부님은 치원이 약해지는 사람에 들어가기에 살풋 걱정이 치밀어 오른다.

 

 

“다른 생각할 정도로 내 말이 재미없나 봐.”

 

“음, 술도 들어갔는데 조금 더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좋지 않겠어? 잠도 확 깨는.”

 

“예컨대?”

 

“예컨대…, 아저씨는 날 얼마나 사랑하나?”

 

 

가벼운 웃음과 같이 와인을 넘기던 행동이 멎는다. 한 번의 깜빡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알지만 준호는 태연한 척 미소 지으며 와인을 머금는다.

 

 

“글쎄. 사랑?”

 

“이제 조금은,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듣고 싶네? 아저씨 진실한 속마음을.”

 

“당돌하네.”

 

“그게 한치원 매력이잖아.”

 

 

서서히 좁혀지는 선택지에 섣부른 대답 대신 몇 번 더 와인으로 입안을 적신 도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게 듣고 싶다면.”

 

 

여유로운 척 웃고 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준호의 입꼬리가 긴장감을 보여준다.

 

 

“들려줘야지.”

 

 

등 뒤에 서서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린 도현이 몸을 낮춘다. 언제부터인지 새빨갛게 변한 귓불 가까이 입술을 가져가니 테이블 아래 조잘거리던 손장난이 심해진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랑 똑같은데 나는.”

 

 

감긴 태엽이 전부 풀려 부산스레 움직이던 모든 것들이 멈춘다. 긴장감을 무게로 깜빡이던 눈꺼풀도, 달콤한 와인 향을 잔잔히 불어넣던 숨소리도, 최준호만의 버릇이었던 손장난도.

 

 

“아, 저씨, 지금, 한, 말….”

 

“진심. 아니잖아. 우리 서로.”

 

 

어렵게 버티고 있던 금 간 유리가 결국 큰 파열음을 내며 산산이 부서진다.

분명히 한치원을 향한 못된 말인데. 왜 자신은 그 이상으로 분노와 좌절감, 슬픔을 느끼는가. 자기 가족을 가지고 놀았다는 분노뿐만이 아닌 알 수 없는 비참함에 어깨 위에 놓인 손을 쳐내고 뒤를 도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새삼스럽게 굴지 말고 씻고 오지. 서로 좋은 거 하게.”

 

“미친, 새끼….”

 

“…욕 안 어울리네.”

 

“나 갈래.”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고 한치원한테 전화를 하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헤어지라고. 그런 새끼 옆에 있을 바에야 자기 따라서 종교에나 입단하라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제는 굳이 감추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런 행동도 예상한 것처럼 손쉽게 손목을 붙잡은 채 가까이 있는 욕실로 밀어 넣는다. 분명 키 차이로 보면 자신이 월등하게 힘이 세야 하지만, 그동안 세계적으로 도둑질해온 도현의 신체를 신학대생 준호가 이기기에는 부족했다.

 

 

“이게 무슨!”

 

“씻고 나와. 그전까지 문 안 연다.”

 

 

이건 뭐 샤워하기 싫다는 어린아이 교육하는 모습도 아니고. 당황스러움에 헛웃음만 터뜨리며 문을 두들기지만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문은 열리지 않는다.

 

 

“….”

 

 

몇 번 더 안쪽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물소리에 그제야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뗀다.

 

 

“한치원.”

 

 

이제야 도현은 인정한다. 한치원이 타고 있는 저울에는 무거운 추들이 이미 한가득 자리 잡고 있었음을. 공평하지 않지만 이미 자신은 심판을 시작했다.

그래, 아이가 저울에 올라간 이상 더는 눈을 가린 디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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