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맨 밑에 있는 결제창은 소장용 입니다.



네오한 빌런 사무소





 "진짜 다들 제정신이야??"




 나를 뒤에 세운 김도영이 불같이 화를 냈다. 쟤 지금 꼴 안 보여?! 난 입사하고 나서 김도영이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봤다. 김정우가 김도영이 제일 좋아하는 베이커리의 빵을 몰래 빼먹고 들켰던 그때를 빼고는. 무튼, 일생일대 고비에 선 나는 다행히도 김도영에게 업혀 밖으로 나왔다. 천만다행이었다. 왜냐면 우리가 나가기 무섭게 빵빵- 빵빠레가 다시 울렸거든. 김도영이 조금만 늦었어도, 지하 주차장이 부서진 것처럼 내 몸이 부서질 뻔했다. 이 시버러어어얼. 나는 김도영의 목덜미를 더욱 강하게 감으며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웬일인지 그는 흔한 불평도 하지 않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으로 모든 위로를 대신했다. 그래, 괜찮아- 하는 것만 같아서 더 눈물이 났다.




"설마 지금 이거 제가 뒤지고 나서 하는 상상이라던가."

"아니."

"아님 지금 제가 혼수상태에 있다던가."

"절대 아니."

"아니 나 진짜 뒤지는 줄 알고오오오."




 내 말에 맞장구만 치던 김도영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뚜벅뚜벅 잘도 기관의 입구 앞에 도착하더니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멀쩡한 자기 차 안으로 들여놓고 나서야 내 손바닥과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온기가 너무도 절실했기에, 김도영이 입고 있는 후드티의 끈을 끌어내려 그를 껴안고 한참이나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냥 주님을 그렇게 찾았다. 아유 주님, 진짜 감사합니다. 저를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론 교회도 다녀볼게요. 김도영이 어정쩡하게 몸을 숙인 채로 나를 위로하고 있을 때 흰 티에 난방 하나 걸친 김정우가 달려왔다. 한참이나 달린 건지 머리는 촉촉이 젖어있는 상태였다. 걔는 우리 둘의 모습을 보자마자 한숨을 푹- 하고 쉬더니 머리를 휘휘 넘기고 자연스레 운전석으로 향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김정우가 주의를 끈다고 고생 좀 했다고 들었다. 그 겁쟁이가 혼자서 이런 일을…. 나름 김정우한테 감동도 받았다.




"아니, 그래 진정을 좀 하고."

"진정이 되겠어? 형 같으면??"

"아니… 그건 또 그런데…."




 우리 셋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문대표가 의사를 불러준다고 한 모양이었다. 김정우는 익숙하게 차를 몰며 수시로 뒷자리에 앉은 나와 김도영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김도영에게 착 달라붙어 꼼짝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그러니까, 김도영은 거의 나를 매단 채로 사무실까지 돌아왔다는 얘기였다. 제정신을 차리니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김도영의 회색 후드 위에 가지런히 세워진 나의 울음자국들이… 제일 부끄러웠다. 눈, 코, 입. 어쩜 그렇게 데칼코마니처럼 제대로 찍힐 수가.




"아니, 얘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현장에 불러, 부르긴."

"맞지, 그건 좀 오바였어."




 무튼, 팔자좋게 침대 위에 포도당 가득한 링거를 맞고 있는 내 앞을 막아선 김도영과 김정우는 현장을 나갔던 Lee1과 Lee2를 강하게 추궁했다. 술잔 대신 모자를 나눠쓰며 오늘로써 의형제를 맺은 동혁이는 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니… 진짜 그렇게 될 줄 모르고…."



"그치그치. 그래도 별 일 없었자너~"




 그 옆에 캐나다에서 왔다던 마크는 동혁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곧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며 김도영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김도영의 목소리는 꼭 냉동고에 얼려진 것처럼 차가웠다. 그럼, 별일 났으면 어쩌려고 그래?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마크가 입을 헙- 하고 다물며 머리를 긁적였다. 툭- 동혁이가 마크의 옆구리를 친다. 닥치고 눈치나 챙기라는 뜻 같았다. 부디 그 뜻이 마크에게도 무사히 잘 전해지기를. 나는 링거가 달리지 않은 손을 움켜쥐며 함께 응원했다.




"But Everything go well."

"하아…."




 마크가 한 마디를 내뱉자 동혁이가 한숨을 푹 쉬고 오른손 위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지금 김도영의 뒷모습만 보고 있지만 꼭 그의 머리 위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느껴야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쯔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행동이 마크의 눈길을 끈 건지 그는 뒤에 반쯤 누워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광대를 뽀싯뽀싯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딱하면 손이라도 흔들 모양이었다. 나는 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미처 김도영의 시선까지 옮길 수 없었는지 김도영이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크 넌 웃음이 나와?"




 어디서 질소 가지고 급속 냉동이라도 한 걸까. 그제서야 눈치를 챈 마크가 급히 시선을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오웅, I don't understand- 쟤를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거 저거, 지금 약 파네….





"그래, 너네는… 됐다."




 김도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마크와 동혁이의 말대로 내가 다친 것도 아니었고, 일은 무사히 잘 끝났으니 좋게좋게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불편했던 몸을 다시 뒤로 편히 기대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오늘은 내게 너무도 과분했고, 너무도 피곤했기에…. 또 지금 누워있는 이곳이 잠을 자기에 최적의 환경이나 다름없었다. 나나와 제노가 새벽에 피곤할 때마다 짬 나듯 잠을 잔다는 이 침대는 우리 집의 매트리스보다 지나치게 푹신했고, 두터웠으며, 심지어는 움직이기까지 했고. 그 위에 올려진 푹신한 전기장판은 마치 한 폭의 예술을 완성하듯 화룡점정을 찍었다. 혈관에 직빵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뜨끈한 곳에 누워있으니. 사실상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게 기적이었다. 동혁이랑 마크가 혼날 땐 죄책감 때문에 자지도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기절한 척을 할 걸 그랬다.




"그리고 너."

"…?"

"너는 거기가 어디라고 가?"




 느리게 모든 상황을 관망하다 나를 가리키는 김도영의 손가락에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갑자기 불통이 나에게로 튀는 이유는 뭘까. 나는 당당히 이곳에 취업한 일개 회사원으로 나에게 맡겨진 직무를 다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당황스레 두 눈을 굴리며 상황파악을 하려고 애썼다. 이건 뭐…? 왠지 나도 마크와 동혁이 저 사이에 서서 얼차려를 서야 할 것 같은 기분.




"아니, 따지고 보면 네 상사는 난데. 먼저 컨펌 받을 생각은 왜 안 하지?"

"아…."

"아?"

"…아!"




 진짜 가만히 있다가는 이 꼴을 하고서 저 사이에 서서 무릎 꿇고 손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급히 배를 집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 놈의 몸뚱아리 왜 쓸데없이 건강하지…. 방금까지 죽다 살아났는데 이렇게까지 건강할 필요있나. 어색한 신음에도 김도영이 금세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를 바라본다. 이게 먹히는 건가. 눈치를 보며 아야, 아야 소리만 내뱉고 있으면 순식간에 내 옆으로 걸어온 김정우가 내 양어깨를 조심히 그러쥐며 김도영을 향해 입술을 삐죽였다.




"아- 형은 아픈 애 한테 왜 화를 내고 그래."

"누나, 괜찮다고 그랬는데."




 동혁아. 눈치 챙겨.




"에구, 머리야."




 나는 링거바늘이 꽂힌 손으로 머리를 집었다. 그 소리에 동혁이가 눈을 번쩍 들고 나를 바라본다. 뭐, 뭐. 시발. 내가 아프다는데. 다행히 김도영은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내가 진짜 아프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니면 노력하는 모양새가 가상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타박의 순간을 면한 것으로도 충분했다.




"앞으로 현장에 변수가 생길 경우에는 무조건 철수야."

"예?"




 동혁이가 김도영의 말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누가 봐도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한 소리도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일을 정말로 반성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해찬이는 착한뎅…. 내가 쓸데없이 담 넘는다고 사이렌 울린건뎅…. 나 하나 살아보겠다고 모른 척 하자니 양심에 너무 찔려서 슬쩍 손을 들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저기….




"뭐 또 철수까지…."

"나나야, 너가 지하주차장 폭발이 일어난 걸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뻔했지?"




 김도영이 내게 답하는 대신 책상 위에 앉아있는 나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눈망울은 여전히 나를 향해있었다. 그의 부름에 기꺼이 응한 나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를 휙- 돌려 우리에게 보여줬다.





"이거 썼겠죠."




 푸핰, 나나의 모니터를 확인한 김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에바…."

"진짜예용."




 모니터 위로는 이력서에 함께 제출한 나의 증명사진이 띄워져 있었는데, 중요한 건 그 위로 검은 선 두 개가 대충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저 새끼 저거. 나름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는 울퉁불퉁한 선 두 개. 그림판으로 그린 게 틀림없다. 음, 그렇군. 하필이면 장례식도 허접할 뻔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침대 위로 몸을 기댔다. 그런 나를 보며 환히 미소를 지은 나나가 돌려둔 모니터를 바로 했다.




"그래도 누나 걱정 말아용~ 나나랑 제노는 언제든 누나를 구해줄 거에요~"




 고맙다. 힘 나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그 사진은 미리 찍어두는 게 나을 거 같아용."




 새끼가. 턱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다음에 카톡 계폭하고 나면. 포털 아이디 다 지우고 나면. 인터넷 기록까지 말끔히 싹 다 지우고 나면 그때 꼭 다 갚아줘야지.

 나재민이 검지로 턱을 쓸며 휴대폰을 들었다. 여전히 웃고 있었고, 여전히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꽂은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찰칵찰칵 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저거 지금 내 사진 찍고 있는 거?




"누나 근데 사진 너무 귀엽다아~"




 꼭 갚아줘야지. 내가 꼭 짱이 되어야지.





"진짜요. 누나 실물만큼 귀여워요."




 진짜 다 갚아줘야지.








NEO한 빌런 사무소




문태일 대표는 아침 해가 밝아 중천에 뜨고 나서야 두꺼운 철문을 열고 도착해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듯 얼굴을 쓸어냈다. 언제나처럼 머리는 휘황찬란 했으며, 의상은 진부하기 짝이없었다. 그 와중에 피부를 어찌나 관리했는지 얼굴에선 반질반질 윤이났다. 아무튼, 그는 짧은 보폭으로 사무실 한 가운데를 빙글빙글 돌며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지? 내가 언젠가 정보를 흘린 적이 있었던가? 설마 그럴 리가. 똑똑한 내가 그럴 리가 없지. 혼자서 묻고 답할 거면 우리는 왜 불러 모은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몇 번씩 문대표가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릴 때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척 했다.




"설마 우리 사이에 정부군 스파이가 있다던가."




 문대표가 이야기를 던진다.




"저희 사이에요?"




 제노가 그 이야기를 가뿐하게 받아들이며 주위를 살핀다. 사무실 가운데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마크와 동혁이. 그리고 자기 옆에 자리한 나나. 그러고는 천천히 두 눈을 움직이며 대각선의 김도영을 한 번, 그리고 그 옆에 앉은 김정우를 한 번 살피더니 마침내 나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래, 그것까지는 이해한다.





"여주 누나…?"




 근데 나를 향한 찐득한 시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10초 가량 더 오랫동안 이어진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급히 제노가 시선을 돌리고 허허실실 웃으며 그럴 리 없겠죠ㅎㅎ -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이미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충분히 주고 난 이후 그 이야기가 들릴 리가 없었다. 




"저요…?"




 이어 동혁이, 나나, 마크, 그리고 문대표의 시선이 순서대로 내게 닿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10개의 검은 눈동자가 주는 압박감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꿀꺽 침이 삼켜지고 삐질삐질 목덜미에서 땀까지 나는 것 같았으며 심지어는 어어, 그러니까… 하고 말까지 더듬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웠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여주 의심하는 거에요?"




 그때 자리에서 박차듯 일어난 김정우가 내옆에 다가서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그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곧 김정우의 양손이 꽃받침을 하듯 얼굴 옆으로 올라온다. 뭐랄까, 꼭 내가 판매 물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잠자코 그가 하는 것을 두고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지금 나서서 스스로를 변호할 멘탈 같은 거, 없다. 단 1도. 




"그럴 리가 없죠!!"




 김정우는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에게 외쳤다. 




 "내가 뭐 그런 거 조사도 안 했을까봐?!"




 그뿐이랴. 당당함이 묻어나는 투로 으쓱이며 다른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당당히 손가락 2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여주는 2년 동안 아무 데도 취업 못 했어!"

"…."




 저기 넘넘넘 고마운데. 안 한 거라고 말해줄 수 있어?

 



"정말 단 1도! 어느 곳에서도 붙지 않았어!!"

"에구…."

"심지어 떡볶이 집 아르바이트도 떨어졌어!!"

"저런…."




 문대표의 말까지 안타까움 섞인 호응이 이어지니 진심으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었다. 난 동생들한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 이동혁이 입술을 막으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거 나 비웃는 거다. 나나는 안쓰러움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에구구, 그런 일이. 이 모든 사단의 주범인 제노는 눈을 번뜩이며 진짜요? 하고 물었는데, 걔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 심장을 찔렀다. 그래, 나 이 시대의 캥거루다. 내가 불효년 되는데 도움 주신 거라도.





"근데 누나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긴 했으니까."




 나의 불타는 시선이 제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니, 나름 팀원을 보호해야겠다는 마음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는 것인지 동혁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제노의 의심이 합당한 이유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아니, 그 뭐. 아니 그렇잖아. 그치? 한 마디를 더할 때마다 옆에 있는 마크의 옆구리를 툭툭 쳐서 원하는 대답을 받아냈다. 오웅~ 그치그치~




"…."




 마크 쟤는 이해 못했다에 손가락 걸 수 있다.




"뭐 조사를 하는 건 하는 건데, 그래도 뭐 테스트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

"뭐 그런."




 다들 이동혁의 말에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우랑 김도영을 빼놓고. 진짜 동혁아, 너 누나 가지고 시험 같은 거 하려고 그러니. 누나가 너 냅두고 아픈 척 했다고 그러는 거니. 우리 모자를 나눠쓰며 좋았잖아. 왠지 모르게 기가 죽는 그 상황에 푹- 고개를 숙이니, 탁탁- 키보드를 누르고 있던 김도영이 손을 내려놓고 모두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정부군이 뭐 하고 싶다고 되는거야?"




 언제나처럼 까칠한 모양새로 오늘 오전 내가 포장해온 루이보스티를 쪼옥- 빨대로 빨아 먹고는 무덤덤하게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는 단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그에 황당한 건 오히려 나였다. 내가 뭐가 어떻고 저째서. 이게 이렇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아니죠. 쓸 수 있죠. 전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긴…."

"아니에요. 저 컴활도 있고, 토익도 800 넘어요."

"그래, 미안."




 문대표가 이 일을 조금 더 알아보자고 말한 뒤 가볍게 공기 중에 손을 그었다. 알았어, 해산. 아니요 대표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저 그 테스트라는 거 누구에게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냐, 누나. 됐어."

"아니 되긴 뭐가 돼. 내가 안되지."

"아냐, 내가 잘못했어."




 테스트 얘기를 맨 처음 입에 담았던 동혁이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사과를 건넨 뒤 대표가 나갔던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마크도 내게 손을 들어 올리고 I trust you! 하고는 하이파이브를 강요했다. 얼떨결에 하이파이브를 하긴 했는데, 이 찜찜함은 지울 수 없다. 아니, 잠깐 다들 어디 가는데!!




"나!! 나 왜!!"

"누나 저도 죄송해요."




 그 뒤를 이어 나나와 제노가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가볍게 묵례를 하며 철문 뒤로 사라졌다. 허, 허. 기가 차서 그 빈자리들만 바라보며 헛웃음을 치고 있는데 김정우가 의자 바퀴를 밀어 내 옆에 다가서서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허."




 나는 애꿎은 키보드를 쿵쾅쿵쾅 두드리며 언짢음을 표현했다. 내가 뭐 어디가 어떻고 어째서. 진짜 마음 같아서는 뭔지도 모르는 스파이 그거 하고 싶었다. 나를 무시한 이들에게 강렬한 뒤통수 한 방을 날리고 싶다. 나를 의심하지 않은 걸 평생 후회하게 하고 싶다.




"저 여주야. 이거 기물훼손 되면 곤란하걸랑."




 근데 진짜 찐으로 아무 것도 아니라서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NEO한 빌런 사무소







밤낮을 바꿔 일을 했더니 너무 피곤했다. 이미 아작나버린 생활패턴이 끝을 모르고 악화되고 있다는 게 세포 하나하나에서부터 느껴졌다. 원래 땅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다고. 지금 기분이 딱 지하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요즘 사무실은 낮에는 모든 시스템을 꺼둔다. 아직 찾지 못한 기밀누설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거 내가 직원들 다 하나하나 검증해야한다고 말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섯 잔이요."




 오후 10시. 이미 마감 준비를 시작한 카페 알바생에게 미안했지만, 커피 5잔을 주문했다. 나랑 김정우랑 김도영이랑. 제노랑 나나 것까지.




"요기 밑에서 일하세요?"

"저요? 왜요…?"

"아니, 혹시 밑에서 일하시는 거면 재민씨 커피는 조금 더 진하게 타드릴까 하구요."




 대답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여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빌런인데. 나의 존재를 드러내면 안될 거 같단 말이지. 



 "…!"




 잠깐만. 머리에서 누출된 정보와 정확히 우리 사무실의 위치를 가리키던 알바생의 손가락이 오버랩되며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올랐다. 우리 사무실 어떻게 알지. 심지어 밑에 있는 것도 어떻게 알았지. 재민씨는 누구지. 우리 회사에 재민이라는 사람은 없는데.




"손님! 아메리카노 다섯 잔이요!"

"아, 감사합니다."

"커피 홀더랑 설탕은 앞쪽에 비치되어 있어요."




 탁탁- 다 추출된 커피 가루를 털어내는 알바생을 곁눈질하며 사무실에도 넘쳐나는 설탕을 두 개 챙겼다. 뭘까. 뭐지? 설마 잠복근무? 이 사람 여기 원래부터 있었던가? 거짓말이라기엔 너무도 익숙해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라떼 종류를 시켜볼 걸 그랬다. 카페를 나설 때까지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살피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어딘가는 찜찜해 보이는, 혹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기! 저기! 저기!!"




 헐레벌떡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삐- 소리가 울리며 단단히 철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사무실 올 때 혹시나 카페 알바생이 나를 보고 있을까 봐 빙빙 돌아서 오느라 트레이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는 얼음이 녹아 생긴 물방울이 가득했다. 꽤나 다급해 보이는 나의 물음에 사무실에 앉아있던 제노와 나나가 차례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김, 아니 그 둘은?"

"지각- 인가보네요."

"에이, 설마."

"맞아용. 잠시 사장님 보러 갔어용."




 나나가 말을 끝마치고는 제노와 눈을 마주하며 허허실실 웃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서도 나에게 중요한 일은 그게 아니었기에 무작정 내 자리를 지나쳐 제노와 나나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나 커피에 도청장치라도 달렸을 까봐 그들을 향해 쉿- 검지로 입을 막고 최선을 다해 손짓과 몸짓으로 카페 알바가 수상하다는 말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응?"

"아니아니. 쉬잇."




 제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분명 아니겠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왠지 모르게 비웃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재빨리 고개를 젓고 사무실 한 가운데에 있는 탕비실로 들어가 커피 다섯 잔을 부었다. 도청장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도청장치라거나. 아니면 설마 커피에 약을 탔을 수도. 종이 트레이더마저 꾹꾹 발로 밟고 난 이후에야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노와 나나는 나의 행동이 무척이나 이상했던 건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상태였다.




"카페 알바생이 이상해."

"어디요?"

"요 앞에 있는 카페."

"왜요?"




 제노의 물음에 차근차근 설명해주려 애썼다. 내가 들어가서 커피 다섯 잔을 주문하니 무턱대고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냐 물어보지 않느냐.




"자주 가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난 거기에 딱 두 번 가봤어."

"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말이야."




 내가 말을 멈추고 꿀꺽 침을 삼키니, 제노와 나나 역시 나를 따라 침을 넘겼다. 꽤 긴장된 투로 입을 여니 두 사람이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여기에 재민씨가 있냐고 물었어."

"…음?"

"이건 나를 떠보려고 한 거지. 우리 회사에 재민씨가 어디있어?"




 분명히 우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거나. 의심하는 사람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정보 기밀을 빼간 범인일 지도 모른다.




"…."

"…."




 두 사람은 빤히 나를 쳐다보다 곧 서로를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풉- 하는 소리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그뒤로 영문 모르겠다는 나의 얼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종국에는 눈꼬리에 걸린 눈물방울을 닦아냈다. 뭔데. 뭐야. 나는 두 사람 앞에 서서 멍청이처럼 입을 벌리고 그 모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알아챈 거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었지만.





"누나 진짜 너무 귀엽다."

"그것 때문에 그랬어요??"




 나나는 내가 사 왔던 것과 똑같은 로고가 그려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어 쪼옥- 여유롭게 빨아넘기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예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 누나 어떡하지.




"내가 재민이에요."

"너 나나 아니야?"

"본명이요. 나재민."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제노쪽을 바라보니 그 애는 이미 모든 상황 파악을 마친 채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흥- 소리를 내며 눈이 휘어져라 웃어대다가 얘 이름이 나재민이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아. 이제야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치. 본명이라기엔 이름이 조금, 아니 너무나도 특이한 편이긴 했다. 시선을 돌려 제노를 쳐다봤다.




"그럼 너는?"

"저요?"

"네 본명은 뭔데?"


"제노예요."

"뭐?"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제 노예라고. 아니면 제노라고. 제노라고요. 너는 본명이야? 네, 저는 본명이요. 교포야? 아니요 한국인이요. 한글 이름이야? 아니요 한자 이름이요. 임금제에 힘쓸 노.




"누나. 우리는 너무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구나."




 제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도중 별안간 나나가 끼어들며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는 서랍 맨 구석에서 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내게 건넨다. 이거 진짜 내 사생활 휴대폰인데. 뭐 이거 어쩌라고.




"번호."

"내 번호?"

"응."

"왜?"

"우린 서로에 대해 더 가까워졌잖아."




 사무실에서 전화번호 아는 사람이 고작 문대표, 김정우, 김도영 뿐이었다는 사실에 그에게서 전화기를 받아들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설마 내 번호로 내 신상을 모조리 털어버리려는 건.




"누나 진짜 영화 많이 보는 구나."

"진짜 상상력 풍부하신 거 같아요ㅎㅎ"




 얘네 지금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컴활 1급 자격자인 내가 얘네보다 엑셀만은 잘할 텐데. 실용적인 측면이 약하니 참는다.




"어서용."




 결국 번호 11자리를 다 눌러주고 난 뒤에야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죄 없는 김정우와 김도영에게 빨리 사무실로 돌아오라 타박했다. 김정우는 오는 중이라 답했고, 김도영은 답이 없었다. 그가 운전을 하는 중이라 내게 답이 없을 거라 행복회로를 돌리며 인스타를 둘러보고 있었을 때. 띵동하는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떴다.




[귀여운 나나🐰]




 슬쩍 고개를 들어 째려보니 눈썹을 으쓱하더니 팔자 좋게 웃어넘긴다. 옆에 있는 제노가 조용한 사무실 사이로 말을 던진다. 누나 저도 번호 주세요ㅎㅎ 대충 나나에게 손짓하며 넘겼다. 나나 네가 줘.





"누나가 주세요ㅎㅎ"




 날 놀리려는 게 분명하다.




"얼른요ㅎㅎ"




 진짜 다 갚아줘야지.










NEO한 빌런 사무소





 [모두 !@:00 므 보자]




 문대표가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고 쩌억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가는데 동혁이랑 마크만 안 오고 있다. 므는 AM. !@는 12시를 뜻했다. 딱히 생각할 것도 없이 영어를 한글로. 숫자를 특수기호로 바꾼 건데, 문대표는 이 간단한 암호에 상당히 만족한 듯 회의가 잡힐 때마다 이런 식으로 연락을 취해왔다. 나보다 일한 지 오래된 얘네가 이걸 모를 리도 없고. 설마 까먹었나?




"아 죄송요."

"Sorry~"




 걱정하고 있을 무렵. 10분이 조금 넘어갔을 때 검은 모자를 쓴 동혁이와 마크가 차례로 들어왔다. 가볍게 달려온 그들은 회의실 소파에 앉으며 숨을 골랐다. 마크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뒤집어쓰다 나랑 눈이 마주치고 나서 손을 올려 하이- 가볍게 흔들었다. 답하듯 나 역시 손을 흔들었다. 왜냐면 얘네 좀 무서웠다. 동혁이가 마크 얘는 힘이 엄청 쎄다고 그랬다. 혹시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을 저지르게 될까 봐 문대표를 바라봤다.




"자 이제 다 왔으니까."




 문태일 대표가 만족한 듯이 팀원들을 바라보더니 곧 상석에 앉았다. 그가 앉기 무섭게 김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쥐고 있던 파일을 팀원 모두에게 하나씩 나누어줬다. 나나랑 제노. 김정우랑 김도영. 마크와 이동혁까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사실상 나는 이게 정식으로 참가하는 첫 회의라 떨렸다. 이전까지는 이미 어느 정도 계획이 다 짜인 회의에 참가했었는데, 이번에는 작전에 투입될 사람들과 역할, 전략방식, 이로 인해 얻고자 하는 이익 등등 하나하나 다 정해야 하는 흰 도화지나 다름없는 회의였다. 아, 나 왤케 진심이지. 심장이 뛰는데.




"동혁이랑 마크는 당일에만 참여를 하면 될 거 같아. 얼굴 알려져서 좋을 건 없고."




 하 시발 심장 뛴다. 알고 보면 나에게 숨겨둔 빌런의 피라던가 그런 거라도 흐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얼마 뒤에 정계 파티가 있어. 호텔에서 진행되는데, 거기서 타겟 DNA 확보하면 될 거 같아."

"그러면 거기에는 누가 투입돼요? 지문 복사하려면 인원이 필요하잖아요."




 동혁이의 담담한 물음에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쪽으로는 나나랑 제노 둘 중에 한 명이 가야지. 잠자코 문태일의 얘기를 듣던 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제가 할게요.




"그리고 또… 시선을 끌 사람이 필요한데."




 문대표가 말꼬리를 늘리며 우리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김정우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이럴 때 눈이 마주치면 빼도 박도 못한 채로 교수님의 눈에 든다는 걸 배운 나는 티 나지 않게 김도영이 나눠준 종이에 고개를 처박고 철저히 시선을 피했다. 진짜 작전 투입 정말 하기 싫다. 지난번의 경험 때문에 더 그랬다. 진짜 그때의 공포란. 지릴 뻔.




"정우…?"

"저 완전 젬병이죠."




 김정우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럼…."

"저 완전 나약해요."




 대표님 저번에 봤잖아요. 저 저번에 놀라가지고 혈압이 올라갔어요. 다시 대표의 시선이 돌아간다.




"그럼…."



"전 늙고 나약해요. 얘가 저보다 7개월은 어려요."




 동갑인 주제에 생일 카드까지 쓸 줄이야. 난 너를 친구라고 믿었는데. 나의 아픔에 누구보다 공감하던 너 아니었니. 얼이 빠진 눈으로 김정우를 바라봤으나, 김정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더라. 지도 나름 양심에 찔리기는 한 가보다.




"저는 얘보다는 어리지만, 지방간도 약간 있어요. 유전력."

"아니, 저는 지방간은 아닌데 안구건조증이랑…."

"받고 전 알러지 비염도 있…."

"비염 받고 저 아토피 앓았어요."




 질 수 없다는 듯 투닥대는 우리를 보다못한 동혁이가 몸을 기울이고 대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냥 둘다 보내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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