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하나 나지 않게 문을 여는 것도, 발소리 없이 다가가는 것도 문제 없이 성공했다. 기척을 지우는 것에는 익숙한 몸이었다. 매일같이 엄한 훈련을 받던 생활에서 벗어난지 이제 제법 되었으니 능력이나 기술도 녹슬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숨쉬듯이 익혔던 것이 어디로 금방 가버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웅크리듯 구부리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커다란 남자의 등이 보였다. 이 시간에 쉬지도 못하고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에게 구원받아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났을 무렵, 그렇게나 잘해주는데도 그렇게나 경계하고 반항했던 것이 꿈만 같았다.  세상에 다신 없을 정도로 늘 소중하게 대해주는 그는 어느덧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어야지. 스스로도 조금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짙어졌다.

“금방 끝나니까 거기 앉아서 먼저 먹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라 그만 소중하게 들고 있던 쟁반을 엎을 뻔했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느릿느릿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거기 과일도 있으니까 좋아하는 걸로 골라서 먹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놀랐던 마음이 서서히 가시면서, 금세 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볼멘소리가 나와버렸다. 그가 여전히 책상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그렇게 달콤한 냄새를 한가득 풍기면서 들어오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아.”

능력이나 기술은 녹슬지 않았지만, 감은 확실히 죽은 모양이었다. 그런 당연한 것조차 간과하다니. 여전히 암살 일을 하고 있었으면 벌써 붙잡혀 생이 끝났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 쉬는 겁니까?”

과자 쟁반을 들고 다가가자 그가 그제야 올려다보았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순간 두근, 하고 긴장해버렸다. 보석 같은 푸른 눈이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는지 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웃었다. 그것이 너무나 좋지만 한편으로는 어쩐지 분해서, 입술을 뾰죽하게 내밀자 그가 왼팔을 뻗어 허리를 단번에 감고 자신의 무릎 위로 몸을 앉혀버렸다.

“금방 끝난다니까. 뭘 토라지고 있어.”

“왜 웃으세요.”

늘 듣기 좋다고 생각되는 저음이었지만 거기에 장난기가 담뿍 담겨 나오니 저절로 뾰루퉁한 대답이 나오게 되었다. 얄밉게도 그것에 그가 한층 더 웃었다.

“무엇이 또 불만일까, 나의 비는.”

“불만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과자나 드세요.”라며 억지로 먹이듯이 입술에 대고 꾹 눌러주자 그가 몸을 잘게 떨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만 웃으라고 어깨를 가볍게 찰싹 때려준 후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뭐야? 맛있는데.”

“직접 구웠습니다.”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뿌듯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것이 귀엽다고 그가 허리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더니 뺨에 입을 살짝 맞췄다. 늘상 받고 있는 가벼운 애정표현인데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소중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어서일까. 사람과의 접촉은, 매를 때리는 손이나 죽이기 직전 표적물의 목뿐이었는데.

“오늘도 늦게 자요? 매일 이러면 어떻게 버팁니까.”

“아니야, 금방 끝날 거야.”

“어제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이거 어차피 계속 붙들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요. 자고 내일 일어나서 해도 됩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보고.”

“여보!”

해가 떠 있는 시간,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황제였고 이쪽의 주인이었고 따라서 공손하게 고개도 조아렸고 호칭은 ‘폐하’였다.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후의 둘만의 공간에서, 그는 이쪽의 짝일 뿐이었다. 그것을 알려준 것은 그였다. 


대관식을 치른 후 첫날밤, 며칠에 걸쳐 엄격하게 교육받은 대로 침실에서 그를 맞아들였던 것이 떠올랐다. 침소에 들어서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침상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가, 그의 발이 보이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바닥에 끌리다시피 하고 있는 긴 옷자락 끝에 입을 맞췄다. 사실 말이 첫날밤이지 앳저녁에 벌써 할 것 다 한 사이인데도 어쩐지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 침상에 눕히기를 기다리며 얌전하게 옴츠리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던가?」

어쩐지 가라앉아있는 음성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가 뭔가에 깊이 상처입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라 말하고 싶었는데 무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뻐끔거리고만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 정식으로 나의 비가 되었는데, 어째서 이런 침노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는가? 그대는 나의 짝이 아닌가.」

한참을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울어버렸었던 것 같다. 항상 채찍으로 매를 맞으며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받고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형틀에 묶여 고문을 당한 기억뿐이었다. 언제나 인간 이하였다. 그 때문일까. 이 사람과 기구한 운명으로 엮여 눈까지 맞아, 어느덧 몸까지 섞다가 드디어 정식으로 배우자의 자리까지 받게 되었건만 마음으로는 아직 실감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 받아보는 인간 대접도 가끔씩은 황송하게 느껴져 어쩔 줄을 몰랐는데,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몸이라는 사람이 이쪽을 이토록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그의 끈질긴 교육으로, 호칭은 다소 간지러워 밝은 곳에서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뱉을 수 없을 것 같은 ‘여보’로 굳었다.

“여보 그 펜 놓으세요. 오늘은 이제 그만해요.”

“조금만 더.”

“안 됩니다!”

마디가 굵은 커다란 손에 쥐여진 하얀 깃펜을 날카롭게 빼앗고 그를 억지로 휴식용 의자로 이끌었다. 사실 당장 재워도 모자랐지만 기껏 과자를 구워왔으니 그 핑계로라도 최근에 나누지 못했던 담소를 좀 나누다가 함께 양치를 하고 침상에 들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얌전히 따라오는 듯 했던 그가 갑자기 잡혀있던 손을 슬쩍 빼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손목을 붙들었다.

“왜, 왜 그러세요. 과자 안 드세요?”

“과자보다 급한 게 있어서 말이지.”

번쩍 들려 침대에 사뿐히 내동댕이쳐지고서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여보!”하고 음성을 높이는 것은 그대로 묵살당했다. 커다란 사내가 온몸을 덮고서 뺨에 입술을 내리나 싶더니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그대를 안지 못한 것이 며칠째인데, 한가로이 과자나 먹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정말이지, 점잖지 못하게!”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기쁜 것은 사실이었는데, 그런 마음이 한층 더 부끄럽게 느껴져 일부러 눈을 흘기며 음성을 높였다. 물론 그 자리에서 간파당해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감춰야 했다.

“점잖지 못하다니, 그럼 아름다운 나의 비를 앞에 두고 점잖게 감상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누가 들으면 웃습니다.”

“무엇에?”

“아……아름답다니.”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이상하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말인데, 매번.

“사실이 무에 우습지?”

눈을 팔로 가려버린 것을 그가 강제로 풀더니, 얼굴에 입맞춤의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쑥스러워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새 허벅지를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던 그의 손이 옷 속으로 쑤욱 들어왔다. 뜨거운 그의 손바닥이 몸 안 깊은 곳에 불을 지폈다. 입이 제멋대로 신음을 흘렸다.

“아…… 아앗.”

그가 키득키득 웃는 것 같았다.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을.”

왜 쓸데없이 꼭 튕기냐는 소리였다. 원망스럽고 창피하여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가 입술을 뜨겁게 덮어버리며 손을 음란하게 움직였다. 헐떡거리며 그의 입 안에 신음을 흘려보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보이셨던 분이. 뭐가 이래요.”

숨이 모자라, 거의 발버둥을 치듯이 해서 억지로 죽어라 밀어내어 겨우 얼굴을 조금 떨어뜨리고 가쁜 호흡을 다잡으며 불평을 해보았다. 말만 예쁘게 했지 사실상 당신 사기꾼 아니냐는 의미였으나 사내는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뭐가 어쨌다는 말씀이신가.”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 기운이 솟아나시냐구요- 아잇, 정말, 여보!”

사내는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속도도 기가 막혔다. 하늘하늘한 잠옷은 커다랗고 굵은 손에 의해 순식간에 쓸모없는 천조각으로 변해 멀리 던져졌다. 말릴 새도 없었다. 그리고 항의는 덮쳐오는 입술에 막혔고 누군가는 밤새도록 울었고, 화려한 침대는 닳도록 삐걱거리며 한층 수명이 깎였고, 동은 텄고 새벽 새는 지저귀었다.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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