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https://posty.pe/2d6i5n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뎠다. 넓은 공간으로 나오자 창 밖에 뉴욕 전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빽빽하고 빛이 많았으며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찬양은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유리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떤 겨울, 챤양은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그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랐다. 단순한 변덕은 아니었고 미국 여행은 이 년 전부터 계획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찬양은 한 번의 권태기와 이별을 겪으며 미국에 가야 할 이유를 상실했다. 차곡차곡 돈이 쌓여가던 통장을 보다가 눈물이 주륵 흐르기도 했다. 이제는 전혀 아프지 않은데 왜 그럴까. 찬양은 표정 변화 없이 눈물을 쓱 닦으며 그냥 돈은 모으는 대로 계속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아주 짧게라도 미국에 가고 싶었다. 결국 일 년 반 후 찬양은 원래 모아두었던 돈과 가족의 지원을 조금 보태 비자와 비행기 티켓을 손에 넣었다.

 뉴욕 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찬양은 지친 몸을 이끌고 낯선 도시에서 숙소를 찾아 헤멨다. 연말 겨울이라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찬양은 혹시나 검은 곱슬머리가 있나 없나를 살폈다. 우연히라도 마주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잊은 지는 오래였지만 최종수가 몇 년간 몸담았던 나라에 온다고 생각하니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끄러운 뉴욕 한복판에서 그 첫날 밤이 지나갔다.

 찬양은 카페 테라스에 앉아 한국과 별 다른 것이 없는 듯한 뉴욕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머릿속에서는 아까부터 가야 할 곳을 정리하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는 그 공원, 월 스트리트, 세계의 돈이 모이는 곳, 쉑쉑버거는 아무리 비싸도 꼭 먹어야지. 그리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찬양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찬양은 지금 그 빌딩 아주 가까이에 있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올려다봐도 꼭대기가 안 보이는 빌딩은 처음이었다. 일정을 되짚으며 찬양은 그 옛날에 왔던 편지의 내용을 생각했다.

언젠가 네가 미국에 오면 뉴욕에 묵자. 같이 빌딩 올라가자. 나도 빌딩 안 가봤고, 센트럴 파크도 안 가봤고 월 스트리트도 안 가봤어. 너 오면 같이 가게 아껴 두고 있을게. 돈 많이 벌어서 미국행 티켓 사라. 아니면 내가 돈 열심히 벌어서 백 장 사줄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찬양은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다. 결국 형은 아껴 두지 못하고 먼저 빌딩에 올라가버렸다. 알지는 못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쯤이면 아마 뉴욕에 또 왔었을 것이고 짐작컨대 센트럴 파크도 월 스트리트도 갔을 것이다. 그게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찬양은 종수가 그곳에 갔을 때 자신을 떠올렸었는지는 좀 궁금했다. 지금 찬양이 종수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형, 저 돈 많이 벌어서 미국행 티켓 샀는데..’

 찬양은 컵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한국과 맛이 같다는 말은 취소다. 미국의 커피가 더 쓴 것 같다.

‘정작 형이 여기 없네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마지막 날로 미루기로 했다. 아무래도 가장 기대하고 있는 코스니까 마지막 날에 올라가기로 했다. 종수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애초에 지금 뉴욕에 살고 있지 않을 터이지만 찬양은 묘하게 날을 곤두세우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연을 믿고 싶은 자신이 조금 한심스럽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이 넓디넓은 미국에서 그를. 찬양은 그가 갔을 터인 뉴욕의 명소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뉴욕은 예상보다 더 혼잡했다. 추운 날씨와 연말이라는 시기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여행이 어색했던 찬양의 탓도 컸다. 의사소통이 안 통하고 결국 바가지를 썼을 때 찬양은 종수가 안내해주기로 약속했던 그 기억을 떠올렸다. 함께 왔으면 덜 헤맸을까? 종수 형도 은근히 어리바리한 구석이 있는데. 찬양은 잠시 고민하다가 서로 좋아하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함께였었더라면 헤매도 좋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오르기 전날 찬양은 센트럴 파크를 찾았다. 을씨년쓰러운 날씨 탓에 인터넷에 보는 것만큼은 못했지만 이 날씨에도 헐벗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해외로 나왔구나, 싶었다. 코코아를 입에 댔다.

 종수와도 가끔 코코아를 마시고는 했다. 찬양의 기억으로는 종수가 미국으로 가기 전일 때였다.몸의 거리가 가까웠던 날들은 김이 나는 코코아 향으로 기억되고 있다. 양쪽 다 커피를 더 선호하기는 했지만 유독 잠 못 드는 새벽에는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가고는 했다. 찬양의 집에서 자는 날이면 가끔 종수는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3분도 걷지 않아 붕어빵을 파는 슈퍼와 청과 마트를 지나쳐 오래된 자판기가 나온다. 캔 음료 하나 없는, 커피와 율무차, 코코아만 파는 작동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자판기였다. 하지만 자판기는 작동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건 왜 고장이 안 날까요. 쓰는 사람도 우리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절대 종이컵도 안 떨어지고 음료도 잘 나오네요.”

“이게 내 사랑이야.”

 종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코코아가 담긴 종이컵을 건넸다.

“전 설탕커피 마실 건데요.”

“잠 못 자. 이거 마셔.”

“코코아에도 카페인 있지 않아요?”

“그냥 마시라니까.”

 그렇게 또 눈이 쌓인 길을 걸었다. 시간은 새벽이었고 가로등도 몇 개 없는 오래된 동네였지만 두껍게 쌓인 눈이 반짝반짝 빛나서 어둡지 않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을 내며 걸었다. 장갑을 낀 손 안에는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고 찬양은 그 반지가 눈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있었다. 그 동네에 비해 이 센트럴 파크는 너무 넓은 것 같다.

 코코아를 다 마셔서 찬양은 쓰레기통을 찾았다. 테이크아웃 잔과 영수증을 버리려 주머니를 뒤적이자 무언가 툭 떨어졌다. 금속으로 된 그것은 쓰레기통에 팅 소리를 내며 한 번 부딪히고 눈 사이로 푹 떨어졌다. 찬양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삼 초쯤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안 입은 지 오래됐다가 미국에 간다고 오랜만에 꺼낸 자켓 주머니에 있던 반지였다. 종수가 직접 안쪽에다 문구를 새겼다던. 찬양은 멍하니 반지를 주워 들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서 나오지. 반지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안쪽의 문구를 읽었다. 그제야 종수와 싸운 이유 중 하나가 더 이상 그 문구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주의 깊게 그 글을 읽었다. 이전에 종수의 손이 닿았을 터인 그것을. 머뭇거리다가 찬양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밀어넣어 보았다. 그새 손이 굵어졌는지 두 번째 마디에 걸려서 반지가 들어가지가 않았다.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찬양은 힘으로 반지를 쑤셔 넣었다. 그러다 정말로 눈물이 나와 뚝뚝 떨어져버렸다. 반지는 결국 들어갔다. 다시 빼려고 하니 빠지지 않았다. 찬양은 다시 반지를 빼려고 용을 쓰다가 진이 빠져서 포기하고 벤치에 앉았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빠지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센트럴 파크의 추운 벤치에서 다 떨어진 코코아와 함께 찬양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언제쯤이면 자유로워질까.


마지막 날은 예보에 없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찬양은 택시를 탔다가 결국 교통 체증에 지쳐 내려버렸다. 길을 잃는다고 해도 걸어가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계획한 저녁노을이 지는 때보다 훨씬 늦은 이미 해가 져버린 시간에 찬양은 홀로 빌딩 입구에 다다랐다. 예정대로 쉑쉑버거를 먹고 엄청난 버거의 가격과 엄청난 빌딩 입장료에 감탄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의외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검은 벽과 빌딩과 뉴욕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 꼭 사진전이나 박물관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 무미건조한 공기가 나름 마음에 들었다. 소지품 검사를 하고 들어가니 그곳 벽에는 사진뿐만이 아니라 빌딩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의 포스터가 잔뜩 걸려 있었다. 킹콩, 러브 어페어..보지 않은 무수히 많은 영화들을 지나쳐 비로소 하나 찾아낸 것이 ‘시애틀의 별이 빛나는 밤에’ 였다.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녀의 모습에 미소가 나왔다. 형이 왔을 때도 이 포스터가 있었을까. 보면서 내 생각을 했을까. 찬양은 미련 없이 사진을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뎠다. 넓은 공간으로 나오자 창 밖에 뉴욕 전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빽빽하고 빛이 많았으며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찬양은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유리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공기뿐만이 아니라 뭔가 물리적인 것도. 함박눈이었다고 생각한다. 창 하나를 지나쳐 맨눈으로 보게 된 것뿐인데 유리창 하나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솔직히 말해, 그 풍경에 압도당했다. 이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이 최종수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찬양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망원경이 있기에 잠시 건드리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한밤의 뉴욕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 한 커플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노란 조명 아래서 나름 근사해 보였다. 여자는 ‘시애틀의 별이 빛나는 밤’의 여자 주인공과 닮아 있었고, 남자는 ‘라붐’의 남자 주인공과 닮아 있었다. 찬양은 그 모습이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배경 음악이 없었다. 찬양은 들고 온 백팩에서 헤드폰을 꺼냈다. 헤드폰을 방어막처럼 눌러쓰고 아무 노래나 재생했다.

그리고 강풍이 찬양의 얼굴을 때렸다. 머리카락이 날리면서 찬양은 귀에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를 들었다. 얄궂게도 그 노래는 Vladimir Cosma의 ‘Reality’였다. 그 노래는 또 다시 어떤 기억을 끌고 오게 했다.


한 번은 어떤 멋진 날이 있었다. 혼자서 밤 산책을 나간 것이다. 종수와 걸었던 때와 비슷하게 눈이 많이 온, 잠이 오지 않던 밤이었다. 그때 뽑은 코코아는 종수와 함께 먹었던 것과는 맛이 달랐다. 너무 달고 뜨겁기만 했다. 어차피 손을 데울 요량으로 산 300원짜리였기 때문에 찬양은 그냥 그대로 정처 없이 걸었다. 비슷한 양의 눈이고 똑 같은 가로등, 똑 같은 길이었다. 그런데도 그날은 별로 멋지지 않았다. 찬양은 그냥 입으로 칙칙폭폭 입김을 내보냈다.


그때 문득 귀에 무언가가 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래된 노래가 갑작스럽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Dreams are my reality

꿈은 내 현실이에요

the only kind of real fantasy

어떤 종류의 진짜 환상이에요

Illusions are a common thing

환상은 흔한 거예요

I try to live in dreams

난 꿈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죠

It seems as if it's meant to be

이건 운명인 것 같아요

Dreams are my reality

꿈은 내 현실이에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종수가 상기된 얼굴과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서 있었다. 느닷없이 헤드폰을 씌운 게 뿌듯해 보였다.

“뭐예요?”

“아까 산책 간다고 전화했잖아. 같이 가려고 뛰어왔어.”

“이 시간에요?”

“자정도 안 넘었는데 뭘.”

 종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Reality였다는 것도, 영화 중 한 장면에 뒤에서 헤드폰을 씌워주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그때 찬양은 그런 것까지는 몰랐다. 그때 찬양이 깨달은 것이라고는 그저 비로소 눈이 빛난다는 것, 너무 뜨거웠던 코코아는 딱 적당한 온도로 알맞게 식은 것도, 또 다시 먹으니 부드러운 달콤함이 느껴졌으며 그제서야 사랑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온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물리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귀에는 그때와 같은 노래가 들려왔다. 찬양은 입속말로 따라 불렀다. Met you by surprise, I didn't realize, That my life would change forever Saw you standing there I didn't know I'd care There was something special in the air..

 찬양은 차가운 반지를 만졌다.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빼내려고 애썼다. 반지는 두꺼운 마디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추위에 떨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더 빨갛게 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흥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Dreams are my reality, the only kind of real fantasy..Illusions are a common thing, I try to live in dreams..It seems as if it's meant to be..


Dreams are my reality..


 반지가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사람들은 굴러가는 반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제야 찬양은 자신이 울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구나. 그제서야 인정했다. 처음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종수의 엽서를 받은 새해의 그날처럼 흉하게 표정을 구겼다. 찬양은 반지를 주우려 몸을 숙인다. 손에 닿은 은이 차갑다. 조금 변색된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찬양은 천천히 일어나 난간 쪽에 몸을 기댔다.

언제쯤이면 이 사람에게서 자유로워질까. 언제쯤이면 제대로 이별하고 사심 하나 없이 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대로 찬양은 기다렸다. 우습게도 종수가 오는 상상을 했다. 마치 영화처럼, 빌딩이 닫을 시간이 다 된 지금 시애틀의 그 영화처럼 종수가 찾아오기를 빌었다. 라붐처럼, 어느 멋진 겨울날처럼 자신의 머리에 다시 헤드폰을 씌워 주기를 빌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찬양은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게 한낱 현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현실이었다. 그렇게 바라도 종수는 결코 찬양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 않았고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못했다. 찬양은 눈물젖은 얼굴로 반지를 바라보았다. 뉴욕 도시 한가운데로 던질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냥 다시 한 번 반지를 바라보았다. 음각으로 새긴 레터링이 눈에 보였다.


You are my Dream and Reality.


찬양은 반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언젠가 정말로 웃으며 최종수를 볼 날이 온다면 그때 이 반지를 어딘가로 보내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뉴욕 도시의 눈보라는 하염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2차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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