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달라붙어 있는 흙이 바람에 날려 먼지가 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와 땅이 되는 과정은 순환한다. 마치 물이 구름이 되어 다시 비로 내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물이 비가 되는 과정에는 많은 해석과 설명이 뒤따르는 반면 흙이 땅이 되는 과정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보인다. 물과 흙 모두 인간의 필수조건인 점에서 같은데 이처럼 차이가 있다. 일단 흙은 물과 달리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물은 음용하기 위해, 사용하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 시야 안에 넣어둔다. 즉, 물은 일상에 있는, 일상적인 것이다. 반면에 흙의 경우는 다르다. 발을 보며 걷지 않고 정면을 보고 걷기 때문에 발밑에 존재하는 흙을 잘 의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흙은 일상에 없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자면, 흙도 일상적인 것이다. 살고 있는 집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밟으며 걷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흙과 물의 차이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투명한 물의 순환은 보이지만, 투명하지 않은 흙먼지의 순환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내려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볼 수도 있고 보이기도 하지만, 자동차 바퀴에 날리는 흙먼지가 공중을 부유하다 땅으로 가라앉는 과정은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흙먼지의 순환에서는 직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이다. 즉, 물과 달리 재활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은 정수해서 마실 수도, 씻을 수도 있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물의 흐름에 주목하는 것이다. 반면에 흙은 어떤 목적을 부여하면, 그것으로 고정되어 변화의 잠재성이 없어져 버리고 만다. 한 번 콘크리트로 변한 흙을 진흙으로도 모래로도 바꿀 수 없듯이 말이다. 흙의 이러한 재활용 불가능성은 곧 인간의 통제하에 있다는, 통제가능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물은 마시는 물, 씻는 물처럼 웬만해서 '물'을 벗어나지 않지만, 흙은 목적에 따라 변모할 때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다. 흙과 물 모두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물은 의미만 바뀔 뿐 존재가 바뀌지 않는 것과 달리 흙은 의미도 존재도 모두 변하며 존재한다.


 흙이 다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린다는 것은 순환고리로부터 이탈되었음을 뜻한다. 그렇게 변화된 존재는 더이상 순환고리에 포함되지 않고 떨어져 나와 버린다. 인간의 목적 부여로 순환고리로부터의 이탈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흙을 순환고리로부터 이탈 시켜 고정된 존재로 만들며 삶의 이익을 좇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문명은 흙의 순환을 철저히 방해하며 변화의 잠재성을 제거하며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염없이 부유하며 세상을 떠돌며 웅장한 산이 될 수도, 광활한 사막이 될 수도 있던 흙을 단단히 묶어 콘크리트로 만들어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외부의 충격이 가해져 부서지지 않는 한 흙은 그 통제를 따른다. 스스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순응하며 유지한다. 결과적으로 순응적 태도에 무관심을 갖게 되는 것처럼 흙 역시도 사정이 같다. 인간은 감사함을 느끼지 않고 무관심과 당연함만을 갖게 된다. 그럼으로써 흙을 우리의 일상 밖의 존재로 치부한다. 그렇게 자유가 박탈된 흙은 묵묵히 부여된 소임을 다 하고 있지만, 우리의 발밑으로, 의식의 범위 밖으로 한 번 더 이탈되어 버리고 만다.  


 유년 시절 흙을 만지며 모래성을 만들며 논다. 흙을 뭉쳐서 친구에게 던지기도 하고 뿌리기도 한다. 흙먼지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야단을 맞는다. 놀이터의 흙이 세탁기로 빨려 들어가 물과 함께 세상을 떠돈다. 어른이 돼서도 바다에 놀러 가 모래로 다양한 것을 만들고 놀면서 바다에 있던 모래가 샤워를 하며 물과 함께 세상을 떠돈다. 그때의 흙은 순환고리로부터 이탈되지 않고 흙의 순환을 따르고 있다. 여러 형태가 되었다가 다시 흙이 되고 어딘가로 흘러간다.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은 채 인간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흙은 여전히 의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상 밖의 것으로 이탈되어 있다. 그것은 흙이 끊임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빠르지 않게 움직이는 흙을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통제 아래 있다고 오판하며 저항하지 않는 존재라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처지의 흙이 사실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흙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에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져야 흙의 존재를 다시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부터 목적이 부여되어 고정된 흙이 비가 되어 흙비가 내리는 상상을 흙의 발밑에서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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