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월요일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싫은 소릴 듣게 해드려서...”

 

“희선씨, 다음부턴 주의하도록 하세요. 클라이언트에게 괜한 꼬투리 잡혀서 좋을 거 없잖아요? 그리고 중간에서 말을 전달할 땐, 간결하되 정확히 핵심만 말하는 방법을 연습해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가서 마저 일 봐요.”

 

 

입사한 지 갓 한 달 된 막내 팀원의 실수를 대신 처리하느라 곤욕을 겪은 민은 방금 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팀장이 여자라더니, 왜 일개 남직원이 대신 사과 전화를 하는 거냐며 당장 윗사람을 바꾸라고 화를 내던 클라이언트와의 불쾌한 통화를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두꺼웠던 목소리 때문에 남자라고 놀림을 받는 것엔 이골이 난 민이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인신공격을 해대며 갑질하는 고객들을 상대할 때면 타고난 목소리를 바꿀 수도 없고, 그저 난감할 뿐이다. 게다가 본인의 실수임을 파악하곤 적반하장으로 ‘민’이란 이름까지 들먹이며 남자라고 오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팀원들 앞에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처음부터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지 말 것을...’

 

난리 이후 머쓱해진 민은 두꺼운 목소리 때문에 그 동안 자신이 받아온 숱한 차별들을 되짚어보다가 체리와의 인연도 이 목소리 때문에 시작됐음을 떠올리곤 짧은 한숨을 뱉어낸다.

 

 

 

“희선씨, 우리 팀장님이니까 이 정도로 끝난 줄 알아. ‘아직 입사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으니 괜찮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라면 틀렸어! 입사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난 거야. 주의해요.”

 

“네, 선배님. 신경 써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진상 고객 상대하는 건 차차 배우면 되니까. 그건 그렇고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난 우리 팀장님 진짜 멋지더라.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하겠어. 나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팀장님보고 잘생긴 남자인 줄 알았잖아. 깔끔하지, 샤프하지, 게다가 댄디하고, 젠틀하지. 사실 목소리까지 굵은 편이셔서 처음엔 나처럼 오해들을 많이 해.”

 

“맞아요. 저 팀장님 처음 봤을 때, 약간 아이돌 느낌? 그런 게 있어서 놀랐어요.”

 

“아~ 그러고 보니 희선씨 말처럼 그런 느낌 있다. 하긴 요새 남자 아이돌들은 가벼운 화장을 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저 얼굴이 서른여섯이라는 게 믿어져? 난 우리 팀장님 묘하게 섹시하더라~”

 

“어머? 섹시까지? 아하하- 은미씨야말로 방금 표정, 엄청 묘했다~! 우리 팀장님 동안이시지. 미인이고. 저 얼굴에 왜 아직 결혼을 안 하셨는지 그게 의문이지만, 난 자기들이 하는 말 약간 이해는 가. 아이돌 같다느니, 매력 있다느니 하는 말. 선우 민 팀장님 워낙 스타일도 좋고, 약간 풋풋한 소년 같은 느낌도 있잖아. 아직 서른 초반인데도 자기 관리 못해서 벌써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우리 팀 남직원들이랑 집에서 쉰내 풀풀 풍기는 남편만 상대하다가 가끔 팀장님 보면,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인기 많은 미소년 닮은 친구가 생각나서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고 할까?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야. 후훗- 그나저나 인제 그만 자리로 돌아가자. 저번처럼 1팀장 떠서, 우리 팀 여직원들이 휴게실에 우르르 몰려 커피나 마시며 수다 떨고 있다고 한마디씩 쏘고 갈라.”

 

“영주씨, 말 잘했다. 그때 어찌나 아니꼽던지. 우리 팀장님이 팀원들을 풀어줘서 그 분위기가 회사 전반의 위계질서를 망치고 있다나, 어쨌다나. 어휴~ 하여간 1팀장 성질 더러운 건 유명하다니까!”

 

“1팀에 들어간 제 동기 말이 거긴 우리 팀이랑 달리 분위기가 장난 없대요. 제가 2팀에서 일하고 있는 걸 보며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정말 감사히 여기고, 팀장님 말씀 더 잘 따라야겠어요.”

 

“알면 정신 바짝 차려~ 하하~! 커피 다 마셨으면 그만 가자-”

 

 

 

 

-

 

아침부터 회사에서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지만, 오늘이 세라의 방송이 있는 월요일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 민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빠른 속도로 운동과 샤워를 마치고, 간단한 요깃거리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며 실시간 라이브 방송을 듣고 있다.

 

 

-우리 모여라들, 새로운 한 주 오늘도 힘차게 잘 출발했나요?

아~ 힘들었어용? 그치! 설 연휴에, 이어진 주말까지.. 푹 쉬다가 일하려니 다들 너무 힘들었죠? 그럴 줄 알고 세라가 오늘은 더 신나게 방송하려고 준비했지잉-! 우리 다 같이 스트레스 날릴 준비 됐어요?

아하하- 다들 정말 귀여워~!-

 

-참! 구독자님 중에 ‘선우 민’님 계세요? 채팅에선 뵌 적이 없는데, 그냥 듣기만 하시는 건가? 제 지난 영상에 일일이 ‘좋아요’ 눌러주시고, ‘구독’까지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드리려고 했더니 아직 듣방만 하시나 봐요? 하핫~ 언제든지 채팅에 합류해주세요. 세라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바일 여친이 되어드릴게요~!

자, 우리 오늘은 어떤 얘기부터 할까?-

 

 

다 먹은 샐러드 접시를 치우려던 민은 방송에서 세라가 자신을 언급하자 미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비밀 유지가 필요한 백합 방송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세라의 목소리가 싫지만은 않다.

 

 

 

-우리 모여라들은 2016년이 시작 된 게 좋아요? 난 한살 더 먹는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던데.. 히잉~ 열분, 나 벌써 스물아홉이야. 내년이면 앞자리 3으로 바뀌는 거 실화야? 아휴.. 정말.-

 

-모여라 언니들, 서른 넘어도 사는 건 스무 살 때랑 똑같아요?

헤엑- 아파? 어디가?

몸이 쑤셔? 어떡해...

난 아직 1년 남았으니까, 관리 열심히 해서 30대에도 20대처럼 몸매 유지하고, 건강도 미리미리 챙겨야겠다.

히히- 여러분이 받아주니까, 나 오늘 자꾸 징징거리게 되네~-

 

-어? 요트님, 내 나이가 몇이냐고요? 처음 오신 분이신가 보네. 반가워용~! 세라는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이 됐습니당~! 근데, 먼저 한살 먹고 시작하는 한국 나이 계산법, 나만 싫어? 우리 깔끔하게 만 나이로 따져보자. 그럼 세라 아직 아홉수 아니에요. 봐봐~ 나 아직 생일 전이니까, 정확하게 따지면 아직은 스물일곱인 거지. 5월에 세라 생일 지나고 나야 겨우 스물여덟이에요.

잠깐만, 채팅창에 ‘나이만 먹었네..’ 누구야? ‘응. 스물일곱 아니, 아홉수...’ 야! 너희 자꾸 세라 약 올릴래? 푸하하- 하여간 장난꾸러기들이라니까. 그래~ 그래 내가 잊고 있었어요. 짱구랑 오징어는 말려도 우리 모여라들은 못 말린다는 걸~! 하하~-

 

-근데.. 나 진지하게 스물의 끝자락인데 뭐 이룬 것도 없고.. 요새 생각이 많더라구요. 다들 나랑 비슷한 감정 느껴요?

진짜? 하아... 사람 사는 거, 비슷하구나.-

 

-저는 적성에 맞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서 너무 오랜 시간 방황했어요. 어릴 땐 가수가 되는 게 꿈이라 중·고등학생 땐 공부보단 오디션 보러 다니는 날이 많았지. 근데 매번 떨어지더라고요. 한번은 2차까지 합격해서 좋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글쎄 그게 데뷔 조건까지 너무 까다롭더라. 엄마가 내 뒷바라지를 해주셔야 했는데, 그 무렵엔 우리 집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결국 포기했지. 그 뒤로 대학 가려고 1년간 재수를 했어요. 근데 그렇게 힘들게 대학엘 들어가고도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했더라고.. 그러다보니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일이었고, 결국 휴학하고 이래저래 스물다섯에 겨우 졸업했징. 그리고선 직장 구하기 전까지 카페에서 알바하면서 엄마가 바라는 대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지만, 그게 참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다들 알잖아요. 세상일이 만만한 게 있나... 게다가 미치겠는 건 내가 아직도 꿈을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막막하더라구.. 그럴 때, ‘인터넷 방송’이란 걸 알게 됐고, 이렇게 우리 모여라들을 만나게 된 거야. 지금도 엄마네 카페에서 일을 도와드리며 방송을 겸하지만,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누구나 손쉽게 세라를 찾아올 수 있는 ‘모바일 방송 플랫폼’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응! 그치~! 인터넷 방송 때보다 모바일 방송 시작하면서 우리 구독자들이 배는 더 늘고, 지금처럼 ‘모여라’라는 탄탄한 세라의 팬덤이 생겼잖아.-

 

-모여라 동생들, 언니도 스무 살 초반엔 이렇게 많이 방황했었어. 그런데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길은 보이더라. 그러니 동생들도 언니 말 믿고, 열심히 살자~!-

 

-각자의 위치? 음.. 학생들은 바라는 꿈을 꾸며 공부 열심히 하고, 직장인들은 돈 많이 벌고 건강하기? 하하하- 그런 거지. 사람 사는 거 비슷해.-

 

-전 이제라도 여러분과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런 의미로 우리 모여라들 내가 엄~청 많이 사랑해! 그리고 항상 세라를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여러분 앞에선 내가 꿈꿔왔던 가수가 될 수 있고, 이렇게 마음 편히 방송을 할 수도 있잖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지지난 방송에서 세라의 채널도 1년을 맞은 거 알죠? 앞으로도 오래오래 꾸준하게 이 채널과 방송 지켜갈게요. 그러니 우리 모여라들도 항상 내 곁에서 함께해줘요. 알겠지? 히히- 벌써 방종 시간 다가오네?! 여러분들이랑 있으면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앙- 힝~

아~! 깜빡 잊을 뻔했네! 우리, 다음 방송은 모여라들의 첫사랑에 관한 사연을 읽을 거예요. 그러니 세라의 오픈 톡으로 사연들 많이 보내줘요~! 사연은 일요일 12시까지 보내주세요. 그래야 정리 마치고 월요일 방송에서 세라가 읽지. 다들 몇 번 해봤으니 어떻게 하는지 알죠? 많이많이 참여해주세요~! 자격은 따로 없어. 내 방송을 듣는 분들이면 누구나 참여가능! 참, 그리고 방송에선 무조건 익명으로 읽을 거지만, 세라한테 사연 보낼 때는 자기 계정 아이디로 보내줘요. 꼭~!-

 

-오늘 방종 전 부를 노래는 세라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곡으로 정했어요! 가수 황인정 씨의 ‘너를 보낼 수 없는 이유’ 듣고, 우리 오늘 방송도 기분 좋게 마무리하도록 해요~! 월요일 다들 수고했쪄!!! 자아, 간닷!-

 

 

어느덧 자정이 넘은 시각.

민은 두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갔구나 싶은 마음에 시계를 바라보다가 세라가 방종 전 부를 곡을 말해주고 노래를 시작하자, 순간 너무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곤 노래를 듣는 내내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다..

 

 

 

 

『“너랑은 더 이상 사귀기 힘들 것 같아, 나 따로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 지금 막 그 사람이랑 자고 오는 길이야...”』

 

 

“아.. 아냐.. 하... 안 돼... 하악-”

 

새벽녘, 악몽에서 깨어난 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휴대폰부터 찾는다.

 

 

‘2시 38분. 선잠에 악몽까지.. 또 시작인 건가...’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비비곤 대충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생수병을 집어 물을 들이킨다. 하필이면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던 날의 기억을 꾸고 말았다고 생각한 민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숨을 길게 뱉어냈다.

 

 

‘세라의 방송을 들을 때마다 16년 전의 체리가 자꾸만 겹쳐지더니.. 결국...’

 

애써 잊고 살던 시간이 다시 떠올라 괴로운 민이다.

 

 

 

 

*

 

1999년 11월.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수능을 마친 민은 자유로움에 들떠 두 살 아래의 후배 사윤진에게 숨겨온 마음을 고백했다. 연극반 후배였던 윤진이 먼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왔기에 수능이 끝나면 반드시 고백해서 그녀와 정식으로 사귈 수 있을 거라 들떠있던 민은 윤진의 단호한 거절 앞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내가 언니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남자가 아닌데 어떻게 우리가 사귈 수 있겠냐?’고 되물으며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자신과 친한 연극부 부원들에게까지 이 일을 떠벌리는 바람에 불편한 소문에 휩싸이게 된 민은 차마 고개를 들고 학교에 나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윤진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 그녀는 졸업 날까지 학교에 나갈 수 없었고, 사람이 가장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에 한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채팅으로만 세상과 소통했다.

 

민은 이 일을 계기로 뒤늦은 사춘기 반항이 찾아온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을 풀 곳을 찾았고, 어이없게도 그 화살은 엉뚱한 곳에 꽂혀버렸다.

그녀는 한창 유행하던 채팅 사이트에 들어가 남자 행세를 하며 여자들을 낚는 것으로 울분을 풀었는데, 차라리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삐뚤어진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을.. 당시 이반들이 모이는 사이트가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민은 일반 여자들을 상대로 괜한 곳에 분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 여자들은 다정하게 채팅을 치는 민에게 속아 그녀를 매력적인 이성이라 생각하며 다가왔고, 때론 펜팔을 하자며 민의 프로필에 적힌 주소로 손편지나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따로 연락처를 물어오며 본인의 휴대폰 번호를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민은 절대로 누구와도 개인적인 전화 연락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 그대로를 아이디로 사용했기에 어느 누구도 그녀가 여자일 거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본인 역시 여자인데다,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재빨리 간파하는 센스가 있던 민은 매력을 어필하며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서, 언제든 자신에게 깊이 다가오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여자들이 더욱 목을 매며 안달하자, 민은 냉소하며 ‘너희들이 바라는 남자라는 허상이 바로 나’라는 식으로 윤진에게서 받은 상처를 엉뚱한 희열감으로 치환해 돌려받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못난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작을 속였기에 그들과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허무함과 자괴감을 느낀 민은 1월쯤 자신이 바라던 대학에 최종 합격을 했다는 통지서를 받던 날, 이 어이없는 일을 그만 멈추고자 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상대를 찾던 그녀는 채팅방에서 체리를 만났다.



to be continued..

 -by.찬우(비..)-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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