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 Bang






w. 완두콩



지루하다. 석진은 폰만 들여다보며 1분이 1시간같이 지나가는 시계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양심적으로 날 이렇게 곤경에 빠지게 할 것 같으면 불쌍해서라도 시간 빨리 가야하는 거 아니냐.



"그래 석진아 여자친구는 있니?"

"아뇨."


"석진아 나이가 몇이니?"

"24살이요."

"아이고 결혼할 나이네."

"예?"


"졸업하면 어디로 취직하니?"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경찰이지?"

"..."


"오랜만에 보는데 살 좀 쪘구나."

"느에..."


"근데 왜 여자친구가 없니?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대화가 시골 할머니댁에 도착하자마자 10분만에 일어난 대화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어. 지금 내가 그 희생양이니까 시발! 마음 같아서는 제가 결혼을 하든 말든 신경끄세요-라고 하고 싶긴 한데 그랬다간 옆에 있던 아버지가 졸도하실까 참았다. 예전에는 같이 으르렁 싸웠는데 24살이나 처먹으니까 알겠더라. 아, 말로 해서 안 되는 족속도 있구나.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김태희 같은 누님 소개시켜줄 거 아니면 다들 좀 조용해주세요."


"저런, 남자가 여자 얼굴 보는 거 아니야. 여자는 자고로 멀끔하고 착하기만 하면 돼."


"아 그럼 저도..."


"남자는 당연히 다이어트도 하고 외모 관리도 해야지."


"..."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석진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아버지의 묵주를 조용히 꺼내들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지. 이번에 할머니 수술까지 하셨으니까 너무 충격받게만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택한 게 묵주다. 할머니가 열 받게 할 때마다 묵주만 세차게 돌려대니까 외숙모가 언제부터 그렇게 독실한 천주교였냐 묻더라. 네, 방금 전까지 묵주와 염주도 구분 못 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래서 석진이는 언제 결혼할 건데."


"결혼은 저 혼자 합니까."


"여자친구는 언제 사귈거야?"



어째 아까부터 대화가 도돌이표다. 이젠 묵주로도 안 된다. 거칠게 묵주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버지의 등을 세차게 두드리자 아버지는 애써 허허 웃으시며 열심히 날 대신해 항변하셨지만 시골에서만 살고 자란 할머니의 귀에는 조또 들어가지 않나 보다.



"나는 말이다... 우리 석진이가 좋은 집에 장가가서 조신하게 살기만 하면 바랄 게 없어요."


"아..."


"이 할미가 죽기 전에 우리 석진이 결혼하는 건 봐야할텐데..."



내가 저 대사를 언제 들었냐면 초등학교 입학 했을 때, 우리 석진이가 초등학교 다 다닐 때까지 이 할미가 살아있어야 할텐데... 고등학교 입학 했을 때, 벌써 우리 석진이가 고등학생이라니 대학가는 건 보고 죽어야할텐데... 대학교 입학했을 때, 석진이도 이제 어른이구나-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 할미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 내 나이 24. 곧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지. 내가 봤을 땐 이 할머니 내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서 독립할 때까지 멀쩡히 살아계실 분이다.



"그래도 우리 석진이가 결혼하는 건 보고 죽어야지..."


"아 그럼 평생 사시겠어요. 전 결혼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서 아주 평생 사시겠어요."


"뭐라는 거니 석진아. 결혼은 꼭 해야하는 거야. 어디서 그런 경박스러운 사상을 배운 거니!"



우리 과에서 동기들에게 개망나니로 통하는 나는 인생을 개차반같이 살아서 개망나니가 된 게 아니다. 선 후배 동기 상관없이 할말 안 할말 다 쏟아내서 그런 거다. 여자는 자고로 어리고 조신한 게 최고지, 남자는 나이 먹을 수록 와인이야- 이지랄하는 남자 선배한테 나도 모르게 와 저 새끼 미친 새끼아냐? 했다가 학회장한테 불려갈 뻔했다. 내면 깊이 남아선호사상이 깔려있는 교양교수한테 와 인성쓰레기다-했다가 학점 날아갈 뻔했다. 그래도 외할머니라 참는 건데 석진은 점점 끓어오르는 스팀을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석진아 참아야 하느니라.



"석진이는 생긴 건 멀쩡한데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저는 아직 사귈 마음이,"


"눈을 좀 낮춰. 니가 그렇게 외모만 보니까 여자친구를 못 사귀는 거 아니니."



시발. 사람이 분노게이지가 끝까지 차오르면 오히려 차분해진다던데 딱 지금의 나였다.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폰을 꺼내 페이스북을 켠 나는 재빨리 친구추천 창에서 제법 멀끔하게 생긴 남자애를 하나 찾았다. 어디보자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고... 학교는 다른 도시라 멀어서 마주칠 일 없겠고... 그래 너로 정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름 모를 남자아이야, 널 게이로 만들어서 미안하다.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걱정을 빙자한 고나리를 하는 할머니에게 석진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페이스북에서 찾은 한 남자 사진을 보여주었다.












김태형 (A대 심리학과 전공)








"할머니 얘 잘 생겼죠?"


"우리 석진이 보다야 못 생겼지만 그래도 말끔하게 생겼네."


"사실 얘가 제 남친이에요."


"뭐?"


"제 애인이라구요. 아주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사귄 지는 한 1년 됐네요."


"아니 얘..얘는 남자인데.."


"저희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어요. 할머니가 아까부터 결혼결혼 하시길래 끝까지 숨길까 하다 지금 밝히네요. 전 이 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 안 되면 캐나다에서 식을 올릴 거예요."



아버지는 먹고 있던 보리차를 거실로 뿜으셨고 내 옆에서 과일을 드시던 외삼촌과 외숙모는 경악을 하며 나와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쳐다봤다. 시발 내가 게이라고 구라를 쳐야 다음부터는 저 개 같은 잔소리를 안 듣던가 하지. 이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차피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



"석..석진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귀여운 손주는 못 보시겠지만 그래도 듬직한 남편이에요. 조만간 상견례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다들 와주셔서 저와 이 남자의 결혼을 축복해주세요."


"우리 아들이.. 우리 아들이 게이였다니.."



아빠 죄송. 집에 가면 들킬 거짓말이지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매는 나중에 달게 맞겠습니다. 할머니를 포함한 어른들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이해가 안 가는지 어버버거리는데 사촌들은 이 상황이 웃긴지 아까부터 웃고 난리났다. 그래 우리 어디 한번 개판 만들어보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시발 다 엎어버리자.



"석진이 오빠 게이였구나... 어쩐지 남자는 잘생기면 여친 있거나 게이라더니..."


"이제야 밝혀서 미안하다 수정아. 나 게이야."


"사귄다는 남자가 누구야?"



이름도 안 봤다. 석진은 티나지 않게 페이스북을 흘끗 보고는 졸지에 게이가 된 웬 정체모를 남자의 이름이 김태형인 걸 알아챘다. 대구에 사는 김태형 씨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을 한순간에 게이로 만들었어요.



"김태형이라고 있어. 근데 말하면 니가 알아?"


"김태형? 설마 A대 심리학과 김태형?"



어? 석진은 설마 싶어 황급히 다시 아까 그 김태형이란 남자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봤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고... A대 심리학과 재학중... 헐 시발? 정수정이 어머어머하며 입을 막는데 순식간에 등골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설마 알 수도 있는 친구로 뜬 이유가... 헐 이 남자 정수정이랑 페친이었다. 내가 정수정이랑 페친이라 이 남자가 친구추천 창에 뜬 거였고. 대충 아무나 보여준다고 얘 밑에 아는 친구가 정수정인 걸 확인 못 했다. 와 시발 조때따.



"헐 이 인간 여친 없다더니 게이였어?"


"아, 아니 수정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수정아 너랑 아는 남자니?"


"네 할머니. 김태형이랑 저번 학기에 같이 팀플했어요. 어쩐지 이 인간 옆에 여자가 없더라! 와 진짜 내 이상형이었는데 게이였다니!"



적당히 자기가 게이라고 구라치면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아무나 갖다댄 건데 일이 이렇게 커질지 몰랐다. 자리에 벌떡 일어난 석진이 다시 정수정에게 들린 폰을 가져오려고 해도 정수정은 이건 꿈이라며 헤드벵잉한다고 차마 내 폰을 뺏을 수도 없었다.



"나 방금 차였어. 와 진짜 다음 학기에는 꼭 공략하려고 했던 남자인데!"


"아니 애초에 사귄 적도 없잖,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정아 잠시 나랑 얘기 좀,"



내 소중한 아이폰을 공중에 흩날린 정수정은 재빨리 자기 폰을 꺼내 카톡을 켰다. 에이 설마 지금 쟤 내가 생각하는 그거 하는 거 아니지? 설마설마하는데 정수정이 자기 친구들 단톡방에 '야 대박 사건' 치는 걸 보고 난 누구보다 빠르게 정수정 폰을 뺏으려 했지만 내 앞을 가로막고 꼬치꼬치 캐묻는 할머니 때문에 차마 정수정이 '김태형이랑 우리 사촌오빠 사귐ㅠㅠ' 이라고 치는 걸 막지 못 했다. 왜 하필이면 아무나 고른 놈이 정수정이랑 아는 놈이냐고!



"솔직하게 말할게요! 사실 그 남자랑 저는,"


"야야 대박. 우리 사촌오빠 걔랑 사귄 지 1년 됐대!"


"야 정수정 그 전화 안 꺼?"


"어쩐지 날 본 척도 안 하더라! 나처럼 예쁘고 총명한 애한테 눈길 한 번 안 준다는 게 말이 돼?"


"석진아 우리 집에 가서 할 얘기가 있을 것 같구나."


"아니 아버지 잠시만 제 얘기 좀,"


"그래 집에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구나."



아니 나 게이 아니라고! 석진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현관문으로 쫓겨나면서 억울하다 소리쳤지만 정수정이 '방금 우리 오빠 뭐라한지 알아? 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김태형을 좋아한대!'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차에 실려와야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정수정한테 전화를 걸어도 지 친구들이랑 전화한다 바쁜지 한참동안 상대방이 통화중이라 음성사서함으로 넘긴다는 기계적인 음성밖에 안 들려왔다. 아 그냥 가만히 입 닥치고 있을걸 내가 미쳤다고 게이라고 했을까. 아아아아아악!



"아버지, 구라입니다. 저 게이 아니에요!"


"괜찮다. 좀 충격이 크긴 했지만 니가 남자를 좋아한다해도 넌 여전히 내 아들이야."


"아니 아버지 저 게이 아니라구요!"


"그래, 너는 게이가 아니라 단지 김태형이라는 남자 아이를 좋아할 뿐이겠지."


"그게 무슨 개소리, 아니 아버지!"



이미 충격은 받을 대로 받으신 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질 않으셨다. 이러다 온 동네방네 내가 게이라고 소문나게 생겼다 시발. 머리를 감싸쥔 김석진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끙끙 앓는데 드디어 전화 통화가 끝났는지 정수정한테 문자가 왔다. 너 이 새끼 나랑 오늘 아주 굿판을 벌여보자.




『누가 뭐래도 난 오빠 편이야. 알지?                 


-정수정』



내가 화를 피하려다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구나. 착잡해진 석진이 연신 마른세수만 하는데 정수정이 보낸 건지 폰이 연달아 울렸다. 얘는 타자 치는 속도가 아주 LTE급이야 진짜.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석진이 천천히 이 상황을 설명하려 폰을 집어들었는데 방금 도착한 문자들은 정수정이 보낸 문자가 아니었다. 뭐지? 난 모르는 번호인데. 의아한 석진은 누군가 싶어 문자메시함에 들어갔다.




『야 시발 너 누구야. 내가 언제부터 게이였지?             


-010XXXX』




...난 못 본 거다. 누가 봐도 이건 아까 그 김태형이라는 남자가 보낸 문자였다. 얘 내 번호 어떻게 알았지? 아씨 정수정 이 미친 놈아! 석진이 애써 현실을 무시하며 폰을 주머니에 구겨넣는데 이제는 아예 미친 듯이 진동이 오고 있었다. 오 주여 제발 살려주세요. 다행히 상대방은 내가 전화를 계속 받지 않자 포기했는지 더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괜찮아, 어차피 방학 동안만 난 본가인 대구에 있는 거니까 얘랑 마주칠 일 없을 거야. 한참 잠잠하던 폰을 조심히 꺼내든 석진은 폰을 켜자마자 도착한 문자메시지에 침을 꿀걱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문자창을 열었다.




『잡히면 뒤진다 시발. 너 지금 대구라며? 니네집 주소 방금 정수정한테 받았거든? 내가 찾아가기 전에 전화 받아라 개새끼야.            


-010XXXXX 』






아, 참 좋은 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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