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입을 다문 수혁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제윤의 표정이 어두웠다. 제시의 사건에 대해 먼저 물어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지금 제윤이 가장 궁금한 것은 윤서하가 왜 수혁의 집에 있었냐는 것이었다. 두 개의 파일이 놓여있는 탁자 위, 왼쪽은 제시의 사건파일이었고 오른쪽은 서하의 사건파일이었다. 제시의 사건파일 위에 손을 올려놓았던 제윤은 결국 제시의 사건파일을 집어 든다. 그와 동시에 수혁과 눈이 마주친다.

“강민경 당신이 죽인거야?”

강민경이라는 말에 수혁이 제윤을 응시했다.

“아니.”

“이석만이 당신이 죽였다고 하던데 아니야?”

“내가 죽인 거 아니야.”

“당신이 죽인게 아니면 이석만이 죽였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고수혁!”

결국 탁자를 내리친 제윤, 그러나 수혁은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고 제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윤서하는?”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던 수혁이 서하의 이름을 말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살며시 미간을 구기는 수혁,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제윤은 자세를 가다듬고 의자에 앉아 수혁을 쳐다보았다.

“1년 전 서하를 납치한 사람이 당신이야?”

“납치라……. 그걸 납치라고 하는 건가?”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야?”

“당신하고 말장난 같은거 할 여유 없어.”

“당신이 한 짓은 납치감금이야, 어떻게 1년동안 들키지 않고 사람을 숨겨둘 수가 있지? 이유가 뭐야?”

“사랑하니까.”

“뭐?”

결국 제윤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혁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버렸다. 그 힘에 의자에서 넘어져 버린 수혁, 흥분한 제윤이 수혁의 멱살을 올려 잡았고 그의 주먹질이 지속되었다.

“사랑이라고? 개 같은 소리하지마, 이 씨발새끼야! 너 때문에 내 친구는 죽을 뻔했어! 그런데 사랑이라고? 개새끼가 너 같은 새끼 때문에 난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뻔했다고! 알아? 이 씨발놈아!”

두 사람밖에 없던 취조실에 결국 정운과 다른 동료가 들어와 제윤을 말릴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주먹질을 해댔다. 아무리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산산조각 내버린 수혁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 정말 그를 차라리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리 여겼다. 자신의 두 손으로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결국 정운에게 붙들려 취조실 밖으로 나온 제윤은 자신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정운의 팔을 뿌리치고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버렸다.

“악!!!!!!”

입술을 깨물어내며 간신히 참고 있는 제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정운, 벽에 기대어 분을 삭이고 있는 그의 곁에 다가가 말없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찢어져 피가 나는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굳게 다문 얼굴로 정운은 고개를 가로 젓곤 제윤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는다. 마치 하지 말라는 듯,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정운의 품에 자신을 내맡긴 채 제윤은 잠시 머물기를 바란다. 스스로 분이 삭힐 때까지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 자신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가 고수혁이 아닌 윤서하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타인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수혁을 보내며 미친 듯 울고 있던 서하, 그저 납치되어 감금당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절대 내보이지 않았을 행동, 사랑하니까 라는 수혁의 말에 윤서하 역시 수혁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거라면 혹시라도 그런 거라면 윤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선배, 일단 살인사건부터 해결해요.”

“그래.”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배를 안아주는 건 한번뿐입니다.”

“그래.”

정운의 품이 따뜻했다. 잠시 그는 정운이 곁에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품에서 나가면 다시 시작될 현실, 받아들이고 싶진 않지만 그가 해결해야할 현실이었다.


 

홀로 커다란 집에 남아 유안은 들어오지 않는 윤우를 기다린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거실, 한켠에 놓인 소파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는 열리지 않는 문을 쳐다보았다. 의도하지 않게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하얀 피부를 적셔가고 있었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윤우의 얼굴이 잊혀지질 않았다. 침대위에 누워 잠이 든 서하를 바라보고 있던 굳은 표정의 윤우, 그러나 서하를 바라보는 윤우의 눈빛은 연민과 아픔, 그리고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유안, 함께한 시간동안 그를 사랑하게 된 그 순간부터 윤우의 모든 것을 바라봐온 유안이기에 그의 눈빛만 보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어쩌면 윤우는 저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안은 문득 두려워졌다.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눈물로 인해 충열된 눈가를 손등으로 비벼 닦아낸 유안은 그대로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머리에 닿은 쿠션은 푹신했고 집안 공기는 따뜻했지만 어째서인지 춥고 쓸쓸하기만 했다. 이대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고 나면 윤우가 웃으며 자신을 안아줄 것만 같아 차라리 잠들어버렸으면 한다.

자신의 바람대로 천천히 잠에 빠져 들어가는 유안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무도 닦아주지 못해 처량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애처로워 보인다.


 

주황색가로등 불빛이 낮게 깔린 좁은 골목 안, 여기저기 깨져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보도블록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자신의 몸을 사뿐히 내려 골목을 뒤덮기 시작한다. 얕게 깔린 눈송이들이 모여 마치 하얀 가루를 뿌려놓은 듯 불빛에 반짝거렸고 그 위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유안은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가 걸어온 자리 위로 찍힌 발자욱들,

익숙한 인영은 유안의 존재를 모르는 듯 힘겨운 발걸음을 옮겨 점점 유안에게서 멀어져 갔다.

“윤우야.”

떨리는 목소리로 익숙한 인영을 불러보는 유안,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그는 계속해서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윤우야.”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를 부르는 유안, 이내 멈춰서는 윤우,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멈추어 있던 유안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다리를 움직여 조금씩 조심스럽게 윤우에게로 다가갔다.

윤우에게 거의 다다랐을 쯤, 천천히 뒤돌아보는 윤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안은 숨이 멎을것만 같은 고통에 휘청거렸다.

“잘못했어…….”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자신도 모르게 윤우에게 용서를 구한다. 원망 섞인 눈빛에 왜 그랬냐는 눈빛에 유안은 저도 모르게 윤우에게 용서를 구한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줘. 제발…….”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널 용서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는 듯 보였고 유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우의 모습에 스스로를 추락시켜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내며 윤우에게 잘못을 구하는 유안을 외면한 채 하얀 눈이 소복히 내리는 좁은 골목 사이로 윤우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그 안에 눈물이 그치지 않는 정유안이 있었다.

 

 

결국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유안은 눈을 떴다. 잠에서 깨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랬던 순간이 산산이 조각나 사라지고 결국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추위가 아닌 슬픔에 온몸을 떨었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울고 또 울었다. 한참을 울어야 했던 그는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고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현관까지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을 그 어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으리라, 집을 나왔을 때 주변은 어두웠고 가을바람이 쌀쌀했다.

옷깃을 여민 채 택시를 잡아 탄 유안은 택시가 출발한 뒤에도 백미러로 멀어져가는 윤우의 집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마치 다시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집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라 말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두운 방안,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제윤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방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거울에 비춰 보이는 제윤의 얼굴이 그 동안 그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보였다.

푸석해진 얼굴과 퉁퉁 부은 눈, 담배연기에 미간을 구기며 턱을 매만지던 그는 절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털어내곤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일어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는 정운의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던 그는 이대로 먼저 일어나서 나갈지 아니면 다시 잠깐이라도 누울지 고민했다.

잠이 많이 부족했던 건 사실, 정운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신 역시 조금만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비벼 끄곤 욕실로 향한다.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물이 떨어져 내려 고스란히 맨살에 닿는다. 나른함에 뻐근한 목을 풀어내며 습기로 뿌옇게 변해버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내자 물에 젖은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춰 보인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두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옥 같았던 시간들, 보름 만에 잠에서 깬 서하는 윤우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오열하며 수혁을 찾아댔고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윤우는 점점 야위어가고 있었다. 오열하며 울다 지쳐버린 서하는 마치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또다시 긴 잠에 빠져들었고 그런 서하를 지켜보는 윤우는 자신의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아갔다.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째서 서하는 윤우를 잊은 것일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수혁, 입을 닫아버린 수혁은 스스로 했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강민경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석만을 가리키고 있는 증거들로 인해 용의선상에선 벗어났지만 서하를 납치했다는 사실에서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해가 밝아오면 고수혁의 마지막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윤우도 잠에서 깨지 않는 서하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수혁을 찾아왔던 유안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고수혁과 장유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두 사람만의 대화였으니까 하지만 유리 너머로 보인 두 사람은 그리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애써 알려하지 않았다. 수혁과의 대화를 마친 유안을 복도에서 기다리던 제윤은 유안이 나오자 가벼이 목례를 했다.

‘윤우와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윤우란 이름에 유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음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두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지레짐작하고 있는바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둘중 한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것이 제윤의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지금도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이제 아닐테니까.’

‘왜 그럴거라 생각하는 거죠?’

‘그 사람이 정말 사랑하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윤서하이었으니까.’

그 말을 하는 유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제윤은 그가 윤우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유안은 수혁과는 정반대인 윤우로 인해 좀 더 나은 삶을 꿈꿔왔을지도 몰랐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 여기며 점점 멀어져 가는 유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던 그는 운명이란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습기 가득한 샤워실을 나와 젖은 머리칼을 털어 내버리곤 제윤은 정운이 잠든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아직 새벽 세시반, 이대로라면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재판을 보러가야 할지도 몰랐다.

“왜 안자고 일어나 있어요?”

언제 잠에서 깼는지 정운이 제윤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은 채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었다. 금방 샤워를 한 제윤에게선 달큰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졸음이 가득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미소 짓는 정운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선배한테서 좋은 향기 나요. 담배향기가 아니라 정말 좋은 향기.”

“변태같이 왜이래?”

“저같이 잘생긴 변태면 얼씨구나 좋다 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뻔뻔함이 도를 지나치면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선배가 내 품에 있으니까.”

뜨거워진 정운의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그리고 살며시 키스해 대는 그의 행동에 제윤은 눈을 감았다. 등 뒤로 전해지는 타인의 체온이 이리도 따뜻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쩌면 좀 더 일찍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운을 받아들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정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운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받아들이고 나니 모든 것이 편했다. 부정할 필요도 애써 외면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자유롭게 한건 윤서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었다. 따뜻한 체온에 그대로 정운에게 자신을 내맡긴 제윤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

 

커다란 창문 밖으로 새하얀 눈이 푸른빛에 녹아내려 온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벌써 겨울,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만 있는데 잠들어버린 서하의 시간은 멈춰버린 듯 그가 꿈꾸고 있는 세상은 어디인 것일까?

새벽 다섯시, 뻐근해진 눈을 감은 채 윤우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다 눈을 떠 눈 내리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벙어리장갑을 끼고 첫눈이라며 신나서 밖으로 나가 눈을 맞던 서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웃을 때마다 들어가던 보조개가 어찌나 귀여웠던지 저도 모르게 그런 서하를 품에 안았던 윤우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난 일, 다시는 눈을 맞으며 행복해하는 서하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그는 또다시 슬퍼져 왔다.

차라리 서하가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잠에서 깬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찾을 거라는 사실을, 그 모습을 봐야하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 질거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차라리 서하가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랬다. 그가 잠에서 깨지 않는 이유가 현실을 부정하려 하는 것이라면 그는 윤우를 떠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윤우를 괴롭히고 있었다.

잠시 서하가 잠에서 깨었을 때 윤우는 차라리 그때의 기억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식을 몽롱하게 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무거운 쇳덩이처럼 윤우를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시선을 돌려 누워있는 서하를 응시하던 윤우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두달, 그리고 서하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은 고수혁의 재판이 열리는 날, 오늘만 지나고 나면 수혁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고 윤우는 서하가 깨어날 그 순간만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윤우를 편안하게 해줄 순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서하아, 차라리 이대로 우리 그냥 살자, 넌 평생 잠을 자는 거고 난 평생 잠든 네 옆을 지키면서 그렇게 그냥 살아가자.”

눈시울이 붉어진 윤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벗어난다. 그의 뒷모습이 허전하고 쓸쓸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의 처지 때문인 듯 보인다. 새벽빛이 감도는 병실, 혼자 남겨진 서하, 어째서일까? 잠이 든 서하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 하얀 시트를 적셔간다. 마치 윤우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눈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 때문에 옷깃을 여민 윤우는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향하며 한 개비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유안, 너는 어디 있는거니?

 

 

*

 

야윈 얼굴이 그간 수혁이 고통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밤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잠들 수 없었다. 이제 이 하루가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끝, 다시는 서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그를 괴롭혀댔다. 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수혁은 차라리 자신 역시 잠에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겼다. 그렇다면 다 잊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을 애처로이 쳐다보던 까만 눈동자가 늘 수혁을 괴롭혀댔다.

가슴속 한켠에 자리 잡은 윤서하라는 존재는 조금만 움직여도 수혁의 목숨을 앗아가버릴 것처럼 날카로이 박힌 채 나가지 않았다. 매일 매시간 매분, 그가 그리웠다. 단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한 적이 없었다.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고 눈을 감았다 뜨면 앞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치 신기루처럼 손을 뻗어 만지려하면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서하아.”

희미한 인영이 또다시 수혁을 괴롭힌다. 입술을 깨물어 내는 수혁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야위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희미한 인영을 잡아내려 하지만 결국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수혁에게서 멀어진다. 원망 섞인 눈빛을 흘리는 희미한 인영은 마치 수혁에게 제발 자신을 찾아와 달라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수혁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미안해.”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다. 뒤엉킨 고리를 풀어내 줄 사람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운명, 이제 서로의 곁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이제 끝인 것이다.

“고수혁 나와.”


 

이제 정말로 끝이다.

 

 

*

 

“피고 이석만은 강민경 살인에 대한 정황증거와 물증이 확실함으로 다른 이변의 여지가 없어 징역 10년형에 처한다. 피고 고수혁은 강민경 살인에 대한 혐의가 없으므로 무죄를 선고하며 다만 윤서하의 납치 감금에 대한 죄가 인정되어 징역 5년형에 처한다.”

재판장 안에 선고를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석만이 끌려 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나가는 수혁의 뒷모습을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듯 수혁은 끝까지 한결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윤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인의 행복을 산산조각 내버린 장본인이 정작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화나게 하고 있었다. 서하는 일어나지 않는데 수혁은 당장에라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그저 주먹을 꽉 쥔 채 떨리는 손을 멈출 뿐이었다. 재판장에서 나와 경찰들에게 이끌려 가던 수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경찰에게 무어라 말하는 듯싶더니 윤우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두 사람, 행복을 깨트린 자와 행복이 깨어진 자.

“당신 행복을 깨트린 건 미안하지만 나는 진심이었어. 그게 잘못된 방식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난 진심이었으니까.”

“당신이 틀렸던거야. 결국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았어.”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어. 그도 나도 우리 둘 다 행복했어.”

“그딴게 행복이야? 당신한테 그게 행복이었냐고!”

수혁의 멱살을 잡아 올린 윤우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수혁의 얼굴이 윤우로 하여금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제윤의 만류로 인해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는 수혁.

“윤우야. 정신 차려.”

“이제 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제윤아 말해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제윤의 옷깃을 붙든 윤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해답을 원하는 윤우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수혁이 잡히고 서하를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려 자유로이 날아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지금 자유롭지 못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지만 헛된 희망이었을 뿐 하루하루 무의미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불과 일 년 전이었는데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 모든 것이 흐릿하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절망했던 지난 시간들과 엉망이 되어버린 현실 뿐, 사랑했던 기억도 사랑했던 사람도 모두 없었던 것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조용한 그 곳으로 윤우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적어도 사라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으니까 눈을 뜨길 바라지 않았지만 만약 눈을 떠 자신을 향해 웃으며 사랑한다 말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닐 거라는 것을 알면서 헛된 기대를 해본다.

느릿한 걸음을 움직여 도착한 병실 앞, 윤우는 심호흡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서하가 누워 있는 침대 앞으로 가기 전에 멈춰버린 걸음, 비어있는 침대, 누군가 누웠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윤서하, 그는 없었다.

마치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해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보호자분 왜 이제야 오셨어요. 윤서하환자분 깨어나셨는데, 어? 없네? 분명히 깨어나서 보호자분 찾았는데. 고수혁씨 아니세요?”

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고수혁이란 이름, 순간 정지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우는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역시나 그는 자신을 찾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자신은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윤우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온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도 서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초조해져 간다. 그 몸으로 멀리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를 찾아 헤매이는 사이 어둠이 짙게 깔리었고 내리던 눈은 그쳐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윤우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고 윤우는 결국 병원 앞에 서서 보이지 않는 서하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를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거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를 두렵게 하고 있었다.


미안해 윤우야…….

 

멀리 보이는 윤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하는 자신의 앞에 멈춰선 택시 안에 몸을 실었다. 어지러워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 보여도 그가 윤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윤우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옆에 있는다는 것은 서로를 괴롭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눈을 뜨자마자 병실을 빠져나와버렸다. 이제 갈 곳은 단 한군데 뿐, 그 곳으로 향하는 내내 서하는 눈을 감은 채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얼마나 길게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하얀 눈이 뺨에 닿은 그 순간을 떠올린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모든 것들이 바뀌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수혁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그리웠던 윤우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생각난 사람은 윤우가 아닌 수혁이었다. 수혁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마자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인정하기 싫었다. 그 시간들, 그리고 그가 없다는 사실을, 택시에서 내려 익숙한 곳으로 힘겨운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잡아당기자 그대로 열리는 문, 싸늘한 집안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불을 켠다. 그리고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간다. 천천히 그가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 올라갈 때마다 점점 그가 머물었던 곳이 가까워진다. 자신을 괴롭히는 어지러움에 난간을 꽉 움켜잡은 채 그는 이층 끝 문 앞에 다다른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는 이곳으로 왔다. 이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현실, 문 너머의 세상이 그에게는 현실이었다. 흔들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그날, 수혁과 헤어지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인 방안 풍경이 서하를 맞이했다. 느리게 안으로 들어간 서하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간다. 그리고 온기가 남아있지 않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수혁과 함께했던 방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수혁의 채취가 남아있는 침대, 그리고 방안 여기저기 그와 함께 했던 추억들, 이곳에 있으면 언젠가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꼭 돌아와 고수혁…….

 


피스틸 버스 오메가 버스 일반BL 글러 고아영

고아영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