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게른 전력 90분 참여했습니다. 주제는 '장마' 입니다.

(첫 전력부터 엄청난 대지각을 저질러버려 죄송합니다.)

- 카게야마 부상 소재

-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아아. 중력이 나를 가라앉히고 있구나.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문용어를 풀어 설명하는 의사를 앞에 두고 카게야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력이라는 단어는 중학교, 아니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다. 지구, 만유인력, 그리고 또 뭐였더라. 교과서 속에서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나열된 단어를 하나씩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쉽게는 되지 않는다.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건 중력 덕분에 자신의 몸이 우주에서처럼 둥둥 떠다니지 않고 땅 위에 설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중력에 의해 가라앉고 있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렇게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리가 없다.

 

“사실 상 선수 생활은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여기서 더 움직이면 재활을 해도 일상생활에 영향이 갈 거예요.”

 

전문용어 설명을 끝낸 의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의 시선은 카게야마에게 한참을 머물렀다가 곧 카게야마 뒤에 선 코치에게로 옮겨갔다. 코치는 카게야마를 대신해 재활 치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카게야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의사의 설명은 모두 끝이 나 있었다. 코치는 입원 수속을 하러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인식하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한숨을 참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절대 아니었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한숨이 한계에 다다라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을 뿐이었다.

중력이 자신의 몸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는 거라면 방금 뱉은 한숨도 아래로 꺼져버리는 걸까.

이번에도 카게야마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닻

w. 비에

 

 

 


카게야마가 재활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는 이미 신록이 온 거리를 뒤덮은 이후였다. 에이전시에서 말을 잘 해준 덕분인지 그는 자신을 향한 카메라 플래시 하나 받지 않고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귀국하기 전 그의 누나가 살 집을 알아봐 주었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호텔을 지나쳐 바로 센다이시로 향했다. 전철역과 가깝지만 비교적 조용한 곳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미와의 목소리 끝에 물이 맺힌 것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누나를 걱정시키는 게 싫어 억지로 웃는 것도, 카게야마는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을 만큼의 요령은 몇 년이 지나도 갖추지 못한 탓이었다.

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바로 커터 칼로 박스부터 열었다. 상자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지만 그는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고 상자에서 물건을 꺼냈다. 옷은 캐리어에 있는 게 전부였으므로 상자 속에 든 물건은 대체로 식기나 욕실용품 같은 것들이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난다.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옷장을 연 히나타는 그렇게 감상을 뱉었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도와주러 왔더니 도와줄 게 하나도 없네. 아니, 그냥 뭐가 없어. 아무것도 없어.”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히나타는 허, 하고 짧은 한숨을 뱉어냈다.

그럼 뭐가 있어야 하는데, 멍청아.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가슴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히나타의 입에서 ‘배구공 말이야. 배구공.’ 같은 말이 나올까봐 겁이 나서였다.

만약 그가 정말로 그렇게 묻는다면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었다. 전부 버리고 왔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짐을 꾸리면서 배구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은 전부 버렸지만, 하지만 ‘전부 버리고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버렸지만 아직은 그 무엇도 버리지 못했으므로.

계속 히나타에게 시선을 주고 있으면 더 곤란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카게야마는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츠키시마가 멍하니 서 있었다. 히나타처럼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지도, 무어라 말을 보태지도 않고 그저 같은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히나타를 거들어 비아냥거렸을 츠키시마였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교과서를 나란히 펼쳐두고 사전을 더듬어가며 모르는 한자를 찾아야 했을 때도 츠키시마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곤 했다. 이렇게 쉬운 한자도 읽지 못하느냐, 설명이 되어 있는데 왜 이해를 못하느냐, 배구할 때 쓰는 머리를 공부에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

 

‘아─ 이제 됐어. 그만. 그냥 이렇게 이해해. 지금 네가 하늘에 둥둥 떠다니지 않고 땅 위에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건 중력 덕분이야.’

‘중력이 없으면 날 수 있어?’

‘… 아니, 난다기 보다는…, 그건 내 의지로……. 됐어. 질문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는 말을 외워. 알았어?’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리고 졸업 후 4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카게야마와 츠키시마는 그런 식으로 다퉜다. 카게야마가 상식에서 벗어난 말이나 행동을 하면 츠키시마가 비웃으면서 그것을 지적하는 패턴이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츠키시마가, 같은 자리에 서서 자신 쪽으로는 시선 한 줌 보내주지 않는 츠키시마가.

숨이 여러 번에 걸쳐 짧게 터져 나왔다. 카게야마는 한쪽 손을 올려 목 부근을 다소 거칠게 문질렀다. 츠키시마. 너 설마 날 동정해? 그런 말이 튀어나올까봐 카게야마는 더, 더 세게 목을 조르듯이 문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카게야마의 부상에 말을 얹었다. 대개는 안타깝다는 내용이라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두 손으로 입술을 덮고 짓눌렀는데도 눈물 한 방울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카게야마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울먹거렸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자신이 울 수 없는 이유를 거기에 두었다.

당신들이 대신 울어주니까 나는 울 수가 없는 거야.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지, 카게야마는 잘 몰라서 그대로 입을 틀어막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틀어막았던 입에 숨통을 틔어주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에게 묻고 싶어서. 설마 너도 나를 동정하느냐 묻고 싶어서.

뇌가 그런 욕구를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목을 스스로 목을 조르듯 문질러 어떤 말도 나오지 않게 해야 했다.

 

“카게야마.”

 

히나타가 점점 숙여지는 카게야마의 고개를 보고 조금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어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츠키시마가 그제야 자신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카게야마, 너 말이야….”

 

히나타는 예리하고, 날카롭고, 생각보다 섬세하며, 또 솔직하다. 그게 그의 무서운 점이라고 카게야마는 줄곧 생각해왔다. 그래서 히나타의 눈이 짐승처럼 번뜩일 때면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면서도 그런 모습을 들키기 싫어 더 등을 펴고 꼿꼿하게 가슴을 내밀어야 했다.

이번에도 카게야마는 최대한 자신의 움츠러든 몸을 숨기면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칠 생각을 안 하네.”

“네?”

 

쿠로오가 뿌연 창문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따라 뿌옇던 창문에 선명한 길이 그려진다. 그의 시선이 창밖에 꽂힌 걸 본 츠키시마는 그제야 ‘그칠 생각을 안 한다’는 감상의 대상이 비인 걸 알고는 그러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아침의 카페는 손님이 몇 명 없어 조용하다 못해 약간 가라앉은 공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아니, 아마도 가라앉은 공기는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께부터 지치지도 않고 내리는 비 때문이리라.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입술에 갖다 대었다.

 

“오늘 쉬는 날이야? 정장이 아니네.”

“아뇨. 오늘은 오후 출근이라서요. 그러는 쿠로오 선배는 무슨 일로 절 부르셨어요? 할 말 있으신 거 아닌가요.”

 

역시 예리하다. 쿠로오가 창문에 갖다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인 태도를 원한 탓에 쿠로오가 준비한 ‘시간이 애매하게 붕 떠버렸는데 마침 네가 사는 곳 근처라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불러봤어.’ 라는 변명은 나설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냥…. 너희 세터 잘 지내나 싶어서.”

 

쿠로오가 목청을 가다듬고 물어왔다. 츠키시마는 커피 잔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지만 염려를 담은 얼굴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져 곧 다시 시선을 연갈색 커피 위로 내렸다.

 

“네. 잘 지내요. 선수 시절 밴 습관이 있어서 밥도 잘 먹는 것 같더라고요.”

 

츠키시마는 평소와 사뭇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 속도도 빨랐다. 평소였다면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혹은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같은 대답이 나왔을 터였다. 그것도 아주 퉁명스러운 목소리까지 더하면서.

하지만 츠키시마는 쿠로오가 지칭하는 ‘너희 세터’가 카게야마임을 되묻지도, 부러 심술궂게 대답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매일 같이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 카게야마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어제 보쿠토를 만났거든. 그런데 카게야마 군 얘기를 하더라고. 꼬맹이가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건 처음 봤대.”

 

히나타는 카게야마 집에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고 츠키시마는 기억을 되돌렸다. 그는 집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황당함을 꾹꾹 쌓더니 결국 옷장 문을 열었을 때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한 마디를 하고야 말았다.

옷장에는 디자인이 비슷한 트레이닝복 세 벌과 티셔츠와 바지 몇 벌, 그리고 겨울용 외투 한 벌이 전부였다. 게다가 장식품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갖춘 집이었다. 히나타가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난다.’고 말한 덴 츠키시마도 속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너 말이야….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츠키시마는 히나타의 거침없음에 새삼 놀라면서도 카게야마에게로 던진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가 히나타에게 중심을 찔린 뒤 보이는 반응을 단 1초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면서도 츠키시마는 어쩌면 이런 점이 자신과 히나타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은 히나타처럼 솔직하게 카게야마를 찌를 수 없다. 찌르지 못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츠키시마는 어쭙잖은 위로를 움켜쥐지도, 아픔을 동반한 염려를 흩뿌리지도 못한다.

 

‘안 해.’

 

카게야마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츠키시마는 그것이 카게야마 나름대로의 허세임을 모르지 않았다.

히나타가 말한 이상한 생각이 뭔지는 알아? 너, 알고 대답했어? 그렇게 묻지도 않았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형편없이 갈라져 있다는 걸 그제야 발견해서였다.

 

“꼬맹이는 혹시라도 카게야마 군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아. 너도 그래?”

 

걸어서 집까지 갈 수 있는 츠키시마와 달리 전철로 몇 정거장이나 가야 하는 히나타는 역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카게야마가 사라져버리면 어떡하지.

이상한 생각 안 한다고 했잖아. 츠키시마는 그 말로 다독이듯 히나타를 역 안으로 밀어 보냈다. 히나타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 츠키시마와 눈을 맞췄다. 마치 ‘네가 잘 좀 지켜봐.’ 하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

히나타는 화를 참고 있던 게 아니라 불안을 감추고 있던 거였다.

 

“아뇨.”

 

카게야마는 이상한 생각 따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츠키시마는 그의 대답이 허세라는 걸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히나타에게 중심을 찔린 꼴사나운 모습을 감추기 위한 허세에 지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러므로 그 대답 자체에 거짓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츠키시마의 안심이 되지는 못했다. 죽을 힘조차,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힘조차 없다는 식으로 들려서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요.”

 

츠키시마가 카페의 가라앉은 공기를 조금 들이마신 뒤 단단하게 덧붙인다. 공기가 가라앉은 건 카페에 자신을 포함해 손님이 몇 없어서도, 장맛비 때문도 아니었다. 츠키시마 자신이 공기를 아래로, 더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는 탓이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장마가 일찍 찾아왔다. 그렇게 말한 기상 캐스터는 하지만 장마가 며칠 일찍 찾아온 것쯤 별 거 아니라는 듯 바로 일주일의 날씨를 소개했다. 7일 중 하루를 빼놓고 전부 흐림 아니면 비 내리는 날씨였다.

츠키시마는 이미 몇 번이나 둘러 본 카게야마의 침실을 눈에 새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고 또 본다. 텔레비전도 달력도, 하다못해 시계조차 없는 방에는 침대가 하나, 옷장이 하나, 그리고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스킨과 로션이 담긴 병 두 개가 전부였다.

 

[어디야]

 

쿠로오와 헤어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카게야마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츠키시마의 소재를 묻는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는 그것이 단순히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았다.

알아서,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한 겹 한 겹 쌓이는 불안을 참을 수가 없어서 츠키시마는 그대로 곧장 카게야마에게로 달려갔다. 달리는 동안 볼 안쪽을 지나치게 세게 씹은 모양인지 혀 위로 비린 맛이 퍼졌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다리를, 그리고 발을 멈추지 않았다.

집은 쥐죽은 듯 조용해서 이미 한계까지 쌓인 불안이 적막을 기폭제 삼아 터질 것 같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츠키시마는 어디에서도 카게야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가 분명히 집에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로도 가지 않겠다고, 그럴 힘조차 없다고 대답했으므로. 그 때는 사무치게 쓰렸던 감각이 모습을 바꾸어 안도로 다가온다.

츠키시마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그 위에서 잠들어 있는 카게야마가 눈동자 안으로 침투했다. 그는 그대로 카게야마에게 다가갔다. 깨지 않도록, 문고리를 돌릴 때보다도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그러고 나서는 볼을 한 번 쓸었다.

 

“카게야마.”

 

손을 떼어내며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츠키시마는 고른 숨소리를, 그가 살아있다는 소리를 대답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살아있다면, 그저 잠든 것뿐이라면 언젠가는 깨어난다. 츠키시마는 그대로 주저앉아 침대에 등을 기댔다. 카게야마의 고른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는 다리를 쭉 뻗고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등에 딱딱한 침대가 거칠게 닿아 근육이 조금 아팠지만 츠키시마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한숨 한 번 쉬지 않고 아래로 미끄러지기만 했다.

 

“츠키시마.”

 

카게야마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츠키시마는 아까의 복수라도 하려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법도 한데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빗방울이 하염없이 부딪치는 창문보다 카게야마의 목이 자신의 귀에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갈라지다 못해 쉰 목소리 끝이 가리키는 말을 아직은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듣고 있으면…, 꼭 경기장에 있는 것 같아.”

 

이번에도 카게야마는 그런 츠키시마의 마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을 했고, 문장을 끝맺었다. 소리가 흩어져 말은 끝났는데 마침표는 한참 뒤에나 찍혔다.

카게야마는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꼭 경기장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던 츠키시마의 노력은 동화 속 인어공주의 물방울보다 더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빗소리도 숨소리도 어느 것 하나 들리지 않았다.

츠키시마에게는 그랬지만 카게야마에게는 오히려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입을 열고 소리를 터뜨려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 순간 카게야마에게는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릴 뿐인 아무것도 아닌 소리에는 경기장의 함성이 섞여 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착각할 것만 같았다. 자신은 경기장에 있다고.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고 자신은 더 오래 코트에 설 수 있다고.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카게야마의 현실은 회색 방 안이었지만, 가능하면 착각 속에 살고 싶었다.

 

“츠키시마. 어디 있어?”

 

아무리 비 내리는 흐린 날이라고는 해도 아직 오후 2시였다. 눈물에 막혀 시야가 일렁인다한들 사람의 형체는 충분히 보일 텐데도 카게야마는 맹인이라도 된 양 츠키시마를 찾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으므로 손을 조금만 뻗어도, 아니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부르며 그를 더듬는다.

마치 빗소리를 넘어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듯이.

 

“카게야마.”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듯이.

 

“너는 지금 네 집에 있어. 내일도 모레도 같은 곳에, 여기에 있을 거야.”

 

카게야마가 깨어난 뒤 츠키시마가 처음 한 말은 상냥하지 않았다. 그건 카게야마에게 환상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드디어 츠키시마다워졌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넘기기 싫어 억지로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츠키시마 또한 성질이 따뜻한 위로는 하지 못한다. 어쭙잖은 위로를 움켜쥐지도, 아픔을 동반한 염려를 흩뿌리지도 못하는 천성이었다.

대신 너를 현실로 가라앉히는 건 할 수 있다.

 

“그럼 너는?”

 

다 쉬어버린 목에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츠키시마는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츠키시마. 착각 속에 살고 싶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야.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전부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나는 네가 필요하다. 카게야마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속으로 외친 목소리에는 갈라짐도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빗소리에 밀려 어찌할 줄도 모르면서,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목소리 하나를 듣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짜낸다.

 

“너는, 어디에, 있, 어?”

 

츠키시마. 나를 끌어올리는 저 소리를 넘어, 나를 구해줘.

 

“네 옆에.”

 

물먹은 목소리에 흠집이 파였다. 츠키시마는 갈라진 입술을 혀로 핥는 것도 잊고 그대로 깨물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일부러 갈라지도록 놔둔 거다. 그 날 형편없이 갈라져버린 카게야마의 입술이 생각나서였다.

같은 종류의 아픔을 가지면 조금쯤은 카게야마의 속에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정말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닿은 것도 같다고, 츠키시마는 막연히 생각했다.

 

“아까부터 계속. 네 옆에 있었어.”

 

이제 됐어. 그만. 그냥 이렇게 하자.

카게야마. 네가 빗소리에서 환호를 읽는다면…, 좋아. 그렇게 해.

너는 텔레비전도 달력도 시계도 없어서 모르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장마 기간이야. 어제도 비가 내렸고 오늘도 비가 내려. 그리고 내일도 내리겠지.

그렇게 내리고 또 내려서, 네가 빠져 허우적거릴 정도까지 빗물이 차오르면 내가 너를 끌어내릴게.

아침 카페의 공기를 가라앉힌 것처럼 네가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붙들고 있을게.

그러면 언젠가 너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아. 네가 나를 가라앉히고 있구나.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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