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ve got to get yourself together

넌 네 자신을 가다듬어야 해
You've got stuck in a moment

넌 지금 순간에 사로잡혀 있어
And now you can't get out of it

그리고 지금, 너는 거기에서 나올 수 없지
Don't say that later will be better

나중에는 더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 마
Now you're stuck in a moment

넌 지금 그 순간에 걸려있고
And you can't get out of it

거기에서 나올 수 없어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

- U2




사랑을 확인한 순간 부터, 헤르메스는 그동안 남의 일이었어야 했던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저 어리고 여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크로커스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마른 팔다리에는 잔근육이 붙기 시작했으며, 몸의 선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부드러운 미성은 변성기가 찾아오기 시작했고, 점점 목소리가 낮아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 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크로커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원래대로라면 찰나의 인연이었어야 했다. 헤르메스는 한 인간과 몇년 이상을 보낸 적이 없었다. 계절이 두어번 바뀌고 나면 헤르메스의 흥미도 식고, 인간도 다른 무언가로 변하고, 언제나 변함없는 신 대신 슬슬 다른 인간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딱 하루만,

하루만 더 곁에 있으면 안될까?


그는 필연적으로 자꾸만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에게 약했다. 그는 정체되어있는 것을 좋아하는 신이 아니었으니까. 크로커스는 마냥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그를 따르던 소년에서, 조금 더 진지하게 사랑을 속살거리기도 하고 달밤 아래에서 헤르메스에게 먼저 입을 맞출 수 있는 성인 남성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그토록 원하던 헤르메스의 키를 반 뼘 남겨두고 있었다.


봄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다.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같이 쐬고 쉬기 위해서, 크로커스를 안고 해변가의 절벽 동굴이나 바닷가의 암초 같이 둘만 아는 장소로 날아가기도 했다.

가을에는 크로커스가 말한 '샤프란'이 흐뜨러지도록 피는 언덕을 올라갔다. 물론 동양의 어느 왕의 정원이었지만, 헤르메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헤르메스는 머나먼 나라에서 교역되어 들어온 모피로 만든 외투를 크로커스에게 둘러주었다. 인간은 조금만 추워도 죽어버리니까.


그는 자신이 사랑에 대해 헌신적이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단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다른 그 어떤 신들과 비교해도 가장 인간의 생활과 생태를 잘 아는 신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크로커스와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인간 연인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에 약하며, 어떤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헤르메스는 정말이지 아주 잘 알았다. 그저 지식만 많이 들어차고 일방적으로 구는 아폴론과는 달랐다.


그래서 자만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의 사랑은 적어도 행복한 모습으로 끝날 거라고, 나의 인간 연인은 나를 사랑하며, 나는 그를 언제나 지켜줄 수 있다고, 적어도 인간이 정해진 수명 만큼은 끝까지 살다 갈 거라고. 

그때가 되면 크로커스를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크로커...읍."


헤르메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연인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지금 들판에 버려져 참혹한 습격을 보여주는 듯 그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전부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인간이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헤르메스가, 전령의 신이, 살아있던 죽은 인간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주는 사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크로커스의 영혼은 그의 육체와 분리된다.


헤르메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다가 이내 흘러내렸다. 고작 인간 때문에,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오열했다.

아르테미스의 히폴리토스를 살린 아스클레피오스는 하늘의 별자리가 된 지 오래다. 게다가 히폴리토스는 살아나자마자 제우스의 번개에 의해 죽었다. 삶과 죽음의 법칙은 절대적이었다. 운명의 세 여신이 정한, 인과율이 정한, 가이아가 혼돈에서 세상을 만들어낼 무렵부터 오래된 고대의 계약이었다.


헤르메스는 제가 사랑하는 인간을 구할 수 없다.

봄의 소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크로커스를 안아들고 하늘로 날아올라 올림포스의 자신의 신전까지 올라갔다. 헤르메스는 깨끗한 물로 크로커스를 씻겨 핏물과 먼지를 씻어내고, 손재주를 발휘해 크로커스의 찢겨진 머리를 봉합했다. 이후 깨끗한 기름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자, 크로커스는 생전의 사랑스럽고 아름답던 그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헤르메스는 하염없이 크로커스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몸을 일으켜 자신을 끌어안고 반갑게 웃다가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너의 샤프란이 왔잖아. 왜 아직도 잠들어있는 거야."


나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나는 다른 신들과는 달리, 어리석은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필멸자에게서 눈을 떼야 했다. 한 사람의 인간을 너무 총애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구든 시샘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크로커스에게 너무 좋은 것들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나 그에게 눈을 두어야 했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전령신이었다. 크로커스는 바쁜 헤르메스마저 사랑했다. 애초에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신의 사랑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었기에 사랑한 것이다. 헤르메스는 그런 크로커스를 사랑했다.


이제 그는 두번 다시 크로커스를 볼 수 없다. 그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순간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헤르메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던 일을 왠만하면 거의 다 이루는 편이었다. 그는 능력 밖의 일을 원한 적이 없었고, 다재다능한 신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불가항력적인 규칙이 그를 옭아맸고, 밀려드는 무기력감과 죄책감은 그의 발마저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날 두고 죽을거야?"


나는 크로커스 없이 살 수 있을까?

헤르메스는 그 대답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는 영생을 사는 신이며, 무언가 하나의 충격에 영원히 얽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는 크로커스를 적당히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며 또 다른 이를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공포였다.

그렇게 크로커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간다는 것이,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그렇게 흩어진다는 것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가 말했잖아, 사랑은 무엇보다 강하다고."


아프로디테는 누구보다 먼저 헤르메스에게 찾아와 그런 말로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사랑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으나, 그 대상이 헤르메스인 것은 처음이었다.

헤르메스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올림포스에서 그 누구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전능함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아프로디테는 그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해주었다.


헬리오스의 태양마차가 흘러간다.

아르테미스, 셀레네, 헤카테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천체들은 돌고, 계절은 샤프란에서 봄으로 흘러간다. 크로커스의 계절이 되었다.


헤르메스는 사랑하는 자신의 연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고, 그와 손을 잡고 저승으로 내려갔다. 카론은 늦게 도착한 영혼임에도 하데스의 언질을 받았는지 말 없이 크로커스를 데려갔다. 크로커스는 마지막으로 헤르메스에게 '사랑해요' 라고 말했다. 헤르메스는 거기에 웃으며 '나도 사랑해' 라고 대답했다. 헤르메스는 오르페우스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신으로서, 하데스의 조카로서, 제우스의 아들로서 받은 예우는 그의 사랑을 위한 애도의 시간이 전부여야 했다. 그 이상은 제우스조차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필멸자는 필멸해야 한다. 망자는 저승의 강을 타고 흘러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선다. 그러면 영원히 모든 이승의 것들과 작별이었다.


사랑은 신들조차 피할 수 없는 강렬한 불꽃이었다.

헤르메스는 가장 영리한 자신조차, 가장 사기를 잘 치는 자신조차 죽음과 사랑 앞에서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헤르메스의 신상 근처에는 봄마다 보랏빛 꽃이 핀다.

샤프란과 비슷하게 생긴, 그리고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이의 머리카락을 닮은.


Geez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