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데니에


“퇴각하라!” 퀸 에반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처절한 외침이 잔인한 소음과 끔찍한 비명을 비집고 아군들에게 닿아, 그들을 그녀에게로 끌어당겼다. 릴리의 망토 자락은 반쯤 찢겨 너덜거렸고, 어깨 보호구는 찌그러져 오히려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구색을 찾기 힘들었고, 그녀의 얼굴은 혈흔으로 얼룩졌다.

“어머니!” 왕궁의 후위를 지키고 있어야 할 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위병을 이끌고 갔던 해리 역시 중앙 홀까지 밀려, 패배감에 얼룩진 얼굴로 그의 어머니와 마주했다. 그는 다급히 릴리의 손을 잡고 홀에서 가장 높은 곳, 왕좌가 있는 곳으로 달려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그곳이었다.

“문에 철책을 둘러라! 단단히 묶어!” 릴리의 차분한 목소리에도, 병사들은 목전에서 잠식해 올 죽음이 두려워 허둥대었다.

아침까지, 아침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제임스가 지원 군대를 이끌고-,

쿵-. 청하지 않은 손님이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쿵. 쇠사슬까지 동원되어 묶인 문이 철컹대고 있었다. 장정 열여섯이 힘을 모아 걸어 잠근 문이, 흔들린다. 쿵-. 문에 달라붙은 병사들이 충격이 올 때마다 밀려났다. 왕좌 옆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그러모은 왕실 근위병들 또한 긴장과 두려움으로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쿵! 뾰족한 철갑을 씌운 충차(衝車) 끄트머리가 단단한 나무 사이를 뚫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해리가 혹시 모를 희망으로 입을 떼었다.

그러나 말을 맺기도 전, 릴리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해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떨궈지는 것을, 릴리가 손끝으로 턱을 받쳐 바로 세워주었다. 고개 숙이지 말아라, 아들아. 그녀는 아들의 손을 고쳐 잡고, 왕좌에 천천히 앉았다. 손님이 오시는데 군주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었다.

“…그 전령의 말이 사실인 건가요?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리가 떨리는 음성을 감추려 애를 썼다.

일순, 둔하고 무거운 굉음에 조금씩 금이 갔다. 그 사이로 가볍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샜다. 쾅! 문을 부수던 충차의 머리가 보였고, 문의 한쪽이 어그러졌다. 근위병들의 악을 쓰는 소리에 해리의 목소리가 묻혔다. 충차 한 번, 그 옆에서 창살을 마구잡이로 꽂아대는 병사들의 공격 한 번, 번갈아 다녀갈 때마다 아군의 피 흘리는 소리가 적나라해 졌다.

“해리.” 릴리의 표정에 드리운 공포가 무색하게, 목소리가 가을 낮의 볕처럼 따뜻했다.

꼭 닮은 색의 네 개의 눈동자가 마주쳤고, 릴리는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이 아이를 부서지게 할 수 없다. 승전국의 포로가 되어 견디게 될 고통은, 해리가 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안락한 죽음, 릴리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빠져나가는 모래를 움켜쥐듯 하던 손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아들의 손을 감쌌다.

“네가 어릴 때, 엄마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니? 요정에게 작은 물약을 선물 받은 아이.”

“그럼요." 해리는 오로지 릴리에게 집중하려 온 힘을 다했다. "그 병 안에 든 약을 마신 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얻었죠.”

떨려오는 입술가를 꽉 물었고, 부러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그래도 고통스러움에 터지는 비명이 해리의 귀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눈이 자꾸만 문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횃불을 든 적군이 먹잇감을 본 맹수들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새까만 군사들이 밀려오는 위로, 그들을 이끌고 온 자의 – 홀로 말에 올라타 – 높은 인영이 드러났다. 그는 지옥에서 보낸 사자(使者)였다.

숨이 가빠왔다. 해리의 흉부가 요동치듯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의 눈과 귀에 더 이상 릴리의 얼굴이나 말소리가 닿지 않았다. 해리의 팔이 릴리의 손에 붙들려 흔들렸지만, 공포가 그를 잡아 삼킨 지 오래였다. 순간, 해리의 왼쪽 볼이 불에 덴 듯했다. 왕좌에서 일어선 릴리의 손이 그의 얼굴을 내리친 뒤였다. 이어, 차가운 유리가 해리의 손안에 들렸다.

“해리, 반을 마셔.” 릴리가 애원하듯 말했다.

켄트 왕실 근위병을 몰살한 적군은, 마침내 이곳의 주인들을 생포하려는지 경계 태세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압박해 오는 적병들로부터, 릴리가 등을 지고 해리의 앞에 섰다. 그러나 말을 탄 적장은 여전히 릴리의 어깨너머로 실루엣을 보였다. 릴리는 서둘러 작은 플라스크의 코르크를 열었다. 잉크처럼 새까만 영액이 튀어나와 해리의 손등에 방울졌다.

“어서.”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해리가 곧장 병에 입술을 대었다.

영액의 반을 채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 날카로운 화살촉이 릴리의 어깨를 뚫고 해리와 마주했다. 해리의 얼굴에 그녀의 뜨거운 핏방울이 흩뜨려졌다.

“어머니!!!” 해리에게서 경악에 찬 외침이 터졌다.

그는 쥐고 있던 병을 떨어뜨렸고, 그것은 바닥에 부딪혀 잿가루처럼 바스러졌다. 고통에 찬 릴리의 신음이 해리의 뇌리를 찔렀다. 해리는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 안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만, 그는 비틀거리다 왕좌의 팔걸이에 이마를 찧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해리는 릴리의 발치에서 그녀의 신발만 볼 수 있었다. 아니, 말 위에서 아직도 텅 빈 활을 겨누고 있는 사람도 보았다.

그 사람은 켄트의 왕좌 바로 앞까지 말을 타고 올라와서야 안장에서 내렸다. 죽음의 사자는 해리에게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의 철컥거리는 갑옷 소리와 인영은 오히려 희미해 졌다.


*


“말해. 블랙 놈과 내통한 게 뭔지.”

“그런 거 없어!” 릴리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릴리의 무례한 시선을 받은 자가 그녀의 옆에 선 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화답하듯, 불에 달군 쇳덩이가 릴리의 어깨를 지졌다. 등허리 쪽은 이미 시커멓게 뒤덮여, 인두가 지나가지 않은 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높고 날카로운 음성이 터질 것 같은 예상과 달리, 수차례 고문을 겪은 그녀의 목에서는 낮게 피 끓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명령을 내리는 자가 손을 까딱여 고문을 멈추었고, 소음이 잦아들자 다시 입을 떼었다.

“내통 외에 포터 놈이 블랙과 붙어먹을 이유가 뭐지? 당신 남편이 남첩이라도 필요했나? 아니면, 제임스가 그놈의 첩이 됐다든지.” 살이 타 들어 가는 악취에 취조를 하던 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실, 대답은 딱히 필요치 않아. 그 망나니 시리우스가 그의 나라를 팔아 먹으려던 게 분명하니까.”

켄트의 붉은 여왕은 더 이상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보지 못 했다. 그는 가슴팍 안쪽을 뒤적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코끝을 쥐고 자신의 지시에 의해 피어오른 냄새를 막았다. 손수건의 구석에 가지런히 수 놓인 노섬브리아의 왕가 문장이 손에 쥐어 구겨졌다.

“아쉬운 건 시리우스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건데….”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와 동시에 릴리에게서 무거운 숨이 한 번에 트였다. 시리우스가 잡히지 않았다면, 분명, 분명 제임스 역시-,

“아아-. 안도하지 마. 제임스는 오후에 참수형이 있을 예정이야.” 그가 사뭇 침울하게 말했다.

꼿꼿이 버티고 있던 릴리의 상체가 결국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오물과 무른 흙으로 뒤덮인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미동도 없었다. 일말의 기대도, 희망도 없는 포로는 숨 쉬는 송장, 그뿐이었다.

“얌전히 굴어. 아들놈의 잘린 목도 보고 싶지 않으면.” 그는 릴리가 다시금 신문에 말려들 수 있는 - 마지막 남은 혈육인 켄트국의 후계자로 - 미끼를 던졌다.

그가 포로에게서 몸을 돌리자, 문간에 선 경비병이 일제히 문을 열어 그 주인이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감옥 밖, 빛을 볼 수 있는 곳에 나오자마자 손수건을 버렸고, 붉은 여왕의 유일한 약점이 있는 - 키우는 사냥개가 지낼 만한 공간에, 짚으로 채운 커다란 주머니를 넣은 것이 다인 - 곳으로 찾아 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해리가 헐떡이는 숨으로 짧은 단어를 뱉고 있었다.

꼴사납다. 그의 포로는 – 분수에 맞지 않게도 –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애새끼처럼 제 어미를 찾는 모습이라니. 해리의 곁에 앉아 있던 나이 든 사람이 - 삐걱이는 무릎을 짚고 - 일어서서 그의 왕을 맞이했다. 모르는 자가 보기에, 그 사람이 해리를 간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해리에게 여러 약물을 투여하며 실험을 하고 있었다.  짚주머니 위에 던져진 해리가 그것을 견디며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래서, 이 자가 들이켰던 약이 무엇인지 알아냈나?” 마이스터의 형편없는 실력을 알고 있는 왕이 의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예상대로, 그의 하문에 마이스터는 굽실거릴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앞으로 쓸모 많을 인질을, 실험의 희생양으로 둘 수 없었다.

“놀이는 그만둬. 깨어나면 바로 지하 던전으로 옮겨라, 이놈 어미의 맞은편 방으로.”


*


두 손목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양쪽에 채워진 수갑은 쇠사슬로 이어져 감옥의 벽에 고정되어 있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은 어깨를 뽑아내려는 듯했다. 며칠째 정신을 잃었던 해리를 고꾸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부작용이 심했다. 해리는 욱신거리는 목덜미에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맞은편 감옥을 보려고 애썼다. 

“어머니-. 어머니. 대답, 대답 좀 해보세요….” 소리를 내기 힘들어, 자꾸만 말이 끊어졌다.

해리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없어 맞은편까지 닿지 못한 거라고, 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됐다.

“해리….”

암흑 속에서 해리가 소원하던 목소리가 닿았다. 차갑고 혹독한 노섬브리아 땅에 유일하게 해리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흠집이 너무 많아, 모르는 이가 듣기에 릴리의 단정한 목소리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내 잘못이야…. 제임스를, 제임스가 직접 떠나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어….” 릴리가 흐느꼈다.

그녀의 자책에도, 해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팔을 비틀고 당겨 보아도, 쇠사슬의 노랫소리만 커졌다. 아버지가 곧 어머니를 구하러 오실 거라고, 조금만 견뎌보자고, 릴리에게 달려가 끌어 안으며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때, 멀리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던전 입구가 열렸고, 새까만 어둠 새로 빛이 들어왔다. 달갑지 않은 발걸음 소리들이 릴리와 해리가 갇힌 셀까지 이어졌다. 타오르는 횃불이 눈앞에 섰고, 오랜만에 마주한 빛은 각막을 태울 것 같았다. 그들은 릴리의 감옥 쪽에 불을 걸어 두고, 열쇠를 찾았다. 분명 릴리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리란 것을 눈치챈 해리가,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를 내버려 둬!"

해리의 발악 뒤에 정적이 흘렀다. 수행병사들 뒤에 팔짱을 끼고 섰던 자가 느릿하게 뒤로 돌았다.

"아, 드디어." 조용한 목소리가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고갯짓은 해리가 갇힌 셀을 가리켰다. "열어."

“뭐든지-, 뭐든지 할 테니 제발 해리는-!” 릴리가 쇠에 긁힌 음성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앞이 짧은 길이의 베스트, 다리에 달라붙은 팬츠, 무릎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레더부츠, 거기에 해리의 뒷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뒤로 젖힌 가죽장갑까지. 그의 복장이 방금까지 승마를 하고 왔음을 알렸다.

 “어미는 자식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지.” 그의 말에 릴리가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식도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네.”

해리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저절로 입술이 물렸다. 그리고 그의 코끝으로 – 이 축축하고 지옥 같은 곳의 공기와 다르게 – 옅고 가벼운 바람 냄새가 스쳤다. 오랜만에 맡는 자유의 내음에 해리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갔다. 남자의 찬란한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기를 뽐내, 탐스러울 지경이었다. 과연, 말포이 왕가(王家)의 적통(嫡統)다웠다.

“내게 영원한 복종을 맹세해 봐.” 드레이코가 요구와 함께 해리에게 한쪽 발을 내었다. 

발등을 향해 숙여지는 허리도,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의 질문은 메아리 쳐서 감옥의 문밖으로 빠져나간 듯했다.

“아둔한 고집은 화(禍)를 불러오지.” 드레이코가 전혀 아쉬운 투 없이 말했다.

그의 제안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은 누구든 짐작할 수 있었다. 드레이코가 짧게 손짓해 수행병 둘이 불렀다. 그들은 해리가 수감된 셀로 들이닥쳤고, 우악스럽게 그를 잡아 세웠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릴리보다는 자신이 겪는 게 낫다고, 해리가 스스로에게 읊조렸다.

“내실로 올려보내.” 드레이코가 단조롭게 말했다.

“뭐, 뭐 하려는 거야! 날 대신 데려가!” 릴리가 악을 질렀다.

“열심히 기도해, 당신 아들이 말썽부리지 않기를.”

릴리가 해리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그녀의 쇳소리가 차가운 돌벽을 타고 감옥 밖으로 끌려나가는 해리의 귓가에 닿았지만, 그녀를 향해 돌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로 다시 화살이 돌아갈까, 해리는 그 어떤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다.


고통이 끊이지 않았다. 질문도, 말소리도 없었다. 원하는 게 무어냐고 악에 받쳐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채워진 헝겊 조각은 억억거리는 소리만 내게 했다. 꿇린 무릎을 세우진 못 해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온 허리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기다란 채찍이 등줄기를 따라 두껍게 휘감겼다 떨어졌다. 한계였다. 해리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곧바로 어깨를 잡아 세울 것 같던 집행자는, 그저 해리의 입안에 있던 헝겊을 마구잡이로 빼어갔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핏물이 거꾸로 삼켜져 괴로웠다. 피폐해진 몸과 마음이 해리로 하여금 울분을 토하게 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의 - 릴리를 위한 - 다짐은 계속해서 짊어지기에 너무나 힘겨웠다.

“그냥 죽여-!” 비틀어진 비명이 울컥대며 튀어나왔다.

“역시나, 부모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하는 발언이군.” 노랫말처럼 흥얼거리는 말투였다.

아침 식사 여부를 묻던 수행원의 목소리 마냥, 그렇게 가벼웠다. 드레이코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책상 위의 초에 불을 붙여 놓은 뒤, 해리의 앞으로 걸어왔다.

해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저 자가 주는 고통 때문에 잊고 싶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상기되었다. 릴리, 켄트국의 왕. 그녀의 생사는 켄트인 중 해리만이 알고 있었다. 제발-, 

“어머니를-, 어머니를 제발 보내줘.” 해리는 땅에 처박혀 있던 이마를 짓이기며, 억지로 허리를 세웠다. 퉁퉁 부어 떠지지 않는 눈으로, 그의 앞에 선 지배자의 정강이 언저리를 보았다.

불에 달군 쇠사슬로 내려쳐도 꿈쩍 않을 것 같던 해리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태세 전환이, 드레이코는 매우 흥미로웠다.

“감히 요구부터 하는 모양새가, 나름 패전국(敗戰國)의 왕자여도 왕자라는 건가.” 즐거운 듯 웃던 그는 이내 해리의 얼굴을 케인으로 후려쳤다. “건방져.”

해리는 종잇장처럼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드레이코가 여유 가득한 걸음으로 다가가, 해리의 머리통을 밟아 눌렀다.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도 생각했겠지? 아, 영원한 복종 정도로 끝내는 건, 네가 기회를 날려 먹었어.”

“대신 날 죽여….” 신발굽과 바닥 사이에 짓눌린 입술로 해리가 벙긋거리며 말했다.

“그건 아까워. 네가 알고 있을 많은 정보가 필요하니까.” 드레이코가 굽혀진 무릎 위로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해리의 머리가 더욱 세게 내리눌렸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자면, 붉은 마녀가 네게 먹인 약이 뭐지? 마이스터가 말하길 아직 이곳에선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하더군.”

작은 헛웃음 소리를 들은 드레이코는 귀를 의심했다. 어디에서 흐르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핏방울을 뚝뚝 떨어지는 주제에, 해리가 웃음소리를 냈다.

“Fairy’s Blessing.” 해리가 갈라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뭐?”

“소년에게 준 요정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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