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헤이미치와 네가 나를 따돌릴 때 기분이 딱 저랬어.”


 피타가 말한다.


 “그건 따돌린 게 아니라...”


 “알아. 나를 안전하게 지키려고 했던 거지. 캣니스를 포함한 네 소중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피타는 의자를 정리한다.


 “아까 그것도 거짓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역시 눈치가 너무 빠르다. 그 눈치로 시계의 의미를 잘 파악해주면 좋을 텐데. 지금은 너무 이르긴 하지만.


 “나중에 사실대로 말해줘.”


 피타는 한숨을 쉰다.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할 말을 찾은 나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자매와 싸워서 울적해진 여자아이처럼 보이는 데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충분히 울적하니까.


 “화해할 수 있을까?”


 “지금은 시간을 좀 줘. 시간이 좀 지난 뒤에 과잉보호를 반성한다고 솔직하게 말해.”


 “솔직하게?”


 “솔직하게.”


 캣니스가 앉았던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그녀가 꾸러미를 놓고 간 걸 알아챈다. 꾸러미에서 익숙한 책이 삐져나와 있다. 애버딘 가문의 약초 책이다. 식물 그림과 의학적 효능이 가득 적혀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그건 뭐야?”


 “아, 이거?”


 피타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을 꺼내 보여준다. 캣니스의 아버지가 먹을 수 있는 식물에 대한 부분을 추가하셨다. 그 뒤로 5년 넘게 비어 있던 페이지가 채워져 있다. 우리 사냥팀이 알아낸 식물에 대해 기록해두고 있나 보다. 그림은 피타의 도움을 받았고. 아직 초기 단계인지, 처음 몇 개 식물만 스케치가 그려져 있다.


 “캣니스가 좀 더 많은 식물을 기록해두고 싶다고 해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받았어.”


 “아름답네.”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추고 얼추 완성된 스케치를 매만진다. 내 꽃, 윈터 다프네(Winter Daphne; 서향)가 그려져 있다. 그 옆쪽에 윈터 다프네에 대한 설명이 있다.


 제일 윗부분에 ‘식물 전체가 독성을 띄고 있음. 사용에 주의할 것’이라는 문구가 있다. 그 아래의 설명은 제법 자세하다. 재배 방법까지 써 놓았다.


 ‘더위에 약함.’


 그래서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걸지도 모른다. 여름은 너무 더운 계절이라서. 더울 뿐만 아니라 잔인한 계절이기도 하다. 헝거 게임이 개최되니까.


 ‘수분에 뿌리가 썩기 쉬움.’


 아무래도 이번 여름에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할 수도 있겠다.




 피타가 캣니스와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하며 내 집을 나선다. 둘만 온 것을 보아하니, 피어니가 많이 바쁜 것 같다. 괜히 숲속에 들어가서 보살필 환자만 늘렸다고 후회하지만, 보니와 트윌을 떠올리자니 복잡한 기분이 든다. 눈이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을 테니까 그 둘에게 축복이 된 거면 좋겠다. 냉정한 저주가 아니라.



 나는 물을 컵에 따라 마시고, 빵 한 덩어리를 먹는다. 그러고 보니 깜박한 게 있다. 피타와 캣니스가 왔을 때 2층에서 향초 재료 좀 가져와 달라고 할걸. 나는 쓰다 만 노트에 향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하다가 어두워지자 잠에 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난다.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라 초점이 흐릿하다. 눈을 깜박거리자, 초점이 맞춰지며 헤이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어머, 일어났니?”


 헤이즐은 탁상 위에 내 아침 식사를 둔다. 부엌에서는 스튜가 끓고 있다. 내가 들은 소리가 헤이즐이 요리하는 소리였던 것 같다.


 “게일이 말해줬어. 네가 옛집의 지붕을 수리하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쳤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피어니에게 너를 보살펴주겠다고 했지. 어차피 나는 헤이미치도 돌보니까.”


 “고마워요, 헤이즐.”


 자꾸 감사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것 같다. 게일은 내가 댈 핑계를 만들어주었고, 헤이즐은 나를 보살펴주기로 했다.


 “그럼 어제도 오신 거예요?”


 “응. 잠깐 들렀다가 피어니와 마주쳤어. 그때 내가 보살피겠다고 했고. 많이 피곤해 보이더라.”


 민폐를 끼쳤다. 다친 데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그래야 약재상의 일손을 도울 수 있다.


 “너무 걱정 말고 쉬어. 약재상에 환자가 많진 않아.”


 그러면 대부분은 심각하게 다친 환자들이겠지. 달라진 근무환경 때문에 그렇게 다치는 거다. 게일은 잘 하고 있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스튜와 빵을 입에 넣는다. 헤이즐은 이제 청소 도구를 가지고 집을 쓸고 닦는다. 그녀에게 돈을 더 주려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실랑이 끝에 내가 발목이 아프다는 말에 헤이즐이 돈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캣니스와 싸운 지 나흘 뒤에 프림이 눈찜질팩과 발목보호대 같은 것을 들고 방문한다. 프림에게 살짝 부탁해 향초 재료를 1층으로 가져온다.


 “캣니스 언니는 화가 많이 났어. 근데 그게 다프네 언니에게 화난 건 아니야.”


 “무슨 말이야?”


 프림이 내 발목에 눈 찜질팩을 대주겠다며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언니는 이 상황에 화난 거야. 자기가 힘없는 구역 사람이라서 다프네 언니를 충분히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다프네 언니가 캣니스 언니에게 말을 하지 않은 거라고.”


 “그런 게 아닌데...”


 “이제 캣니스 언니는 다프네 언니를 지키고 싶은 거야. 다프네 언니가 경기장에서 심하게 다쳐서 왔으니까.”


 프림은 담담하게 말한다. 이제 갓 13살이 되는 아이가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을까.


 “음... 그러면 시간을 좀 주면 될까?”


 “그러면 될 것 같아. 자, 다 됐다.”


 붕대 위에 눈 찜질팩이 단단히 매여 있다.


 “눈이 다 녹으면 풀어서 버려. 목발 짚는 연습은 꾸준히 하고.”


 “그럴게.”

 



 일요일에는 게일이 찾아온다. 침대와 식탁 의자를 오가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게일의 손에 이끌려 뒷마당에 나간다. 청량한 공기는 오랜만이다. 멀쩡한 발로 땅을 두드려보니, 눈이 그새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뒷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밤을 굽는다.


 “맛있겠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열기에 드러난 속살이 샛노랗다. 나는 껍질을 까 입에 집어넣는다.


 “너, 조심해야 돼.”


 다른 누구도 아닌 게일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입이 밤으로 가득해서,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다.


 “캣닙이 진짜 화났던데. 너와 자기 사이에 신뢰가 사라졌다나. 조만간 활을 가지고 네 집에 잠입할지도 몰라.”


 놀리는 거다. 내가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는 거에 게일은 그다지 화난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제 무장하고 있다고 전해 줘. 난 활을 쏘기 전에 충분히 칼을 날릴 수 있다고.”


 “퍽이나 그렇겠다.”


 게일은 내 발목을 곁눈질하며 나뭇가지로 꺼져 가는 모닥불에 눈을 덮는다.


 “너는? 괜찮아?”


 “네가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는 거? 뭐,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 힘든 일을 쉽게 말할 수는 없지. 특히나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은 상대에게는.”


 게일은 이해한다는 얼굴이다. 그도 자기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게 많겠지. 게일도 힘든 부분을 괜찮다는 말로 가렸으리라.


 “하지만, 그들을 언제나 보호할 수는 없어, 다프네.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줘야 돼.”


 “그렇다면, 네게 생긴 힘든 일을 하나만 말해줄 수 있어?”


 게일은 나뭇가지를 놓고 나를 가만히 마주 본다. 석탄이 타고 남은 회색 재처럼, 열기를 품고 있다.


 “네게 이번에 생긴 일을 들었을 때, 나는 진작 나서지 않은 걸 후회했어.”


 “나선다니?”


 “그렇게 두 명이 돌아올 줄 알았다면 그 남자아이 대신 자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게일이 내 손에 깍지를 낀다. 그의 손이 내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그랬다면 남매 컨셉은 설득력이 없게 되는데.”


 내가 듣기에도 형편없는 대답이다.


 “대신 연인으로 행세할 수 있었겠지. 마지막에는 서로를 찔러 줄 수도 있었을 테고.”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는다.


 “죽지 않을 만큼만. 우리가 둘 다 살아올 수 있는 정도로. 그랬다면, 네가 쓸모없는 행사에 끌려가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결혼해야 했을 거야.”


 우리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게일은 나와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걸까?


 “캐피톨이 만든 것 중에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을 거야.”


 게일은 나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다.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는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저녁을 앞두고 프림과 피어니가 버터컵을 데리고 찾아온다. 한 사람의 빈 자리가 아쉽다. 예상하고 있지만 굳이 확인하기로 한다.


 “캣니스는요?”


 “할 일이 있다는데?”


 피어니가 어색하게 말한다. 캣니스가 거짓말을 못하는 건 역시 피어니에게서 배운 탓인가 보다. 그건 나도 그렇고. 프림이 버터컵을 내려놓자, 버터컵은 재빨리 난롯가 의자에 뛰어오른다. 아직도 나를 경계하는 건 여전하네. 캣니스는 너를 죽이려고 했지만 나는 네게 약을 발라준 사람이라고.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프림에게 남겨 둔 고기 몇 조각을 건넨다.


 “자, 버터컵. 다프네 언니가 너 주려고 남겨 둔 거래.”


 프림이 고기 조각을 내밀자, 버터컵은 그것을 재빨리 낚아챈 뒤, 의자에 내려놓고 이리저리 물어뜯는다. 프림은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내 옆에 앉는다.



 피어니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치즈빵과 구운 채소를 꺼낸다. 채소들은 약용으로도 쓰는 것들이다. 내 시선을 느낀 피어니가 고개를 들어 나에게 웃음 짓는다.


 “다행히 요즘 약 수급이 원활해졌어. 너 먹일 약초는 충분하단다.”


 상황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다. 나는 프림과 함께 음식이 담긴 그릇을 받아든다. 버터컵이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의자에서 내려와 소파로 다가온다. 버터컵은 자기에게도 치즈빵을 주길 바라며 불쌍한 눈빛을 보내지만, 프림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다.


 “안 돼. 버터컵. 이런 걸 먹으면 몸이 안 좋아져.”


 버터컵은 성이 난 듯 꼬리를 크게 휘두르더니, 소파 앞 탁상에 튀어오른다. 버터컵의 앞발이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른 건 그 때다. 텔레비전에서 장례식이 방송되고 있다. 아그리파 장군의 장례식이라고 한다.




 평화유지군들이 관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캐피톨 사람들은 관이 지나가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살짝 허리를 굽힌다. 물론 이런 때에도 그들의 요란함은 여전하다. 검은 옷에도 이리저리 장식을 붙이고, 흐느낌과 울음을 큰 소리로 내뱉는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의 비통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그리파 장군은 지난 전쟁 때 구역 반군들의 봉쇄를 뚫고, 굶주리던 캐피톨을 해방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화면에는 국가가 흐르고 아그리파 장군의 사진을 보여준다.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캐피톨 투어에서 본 그 사람이겠지. 시끄러운 인파에 섞이는 걸 거부하고 홀로 난롯가에 앉아있던 사람.


 “버터컵, 왜 그랬어.”


 프림이 앞발을 붙잡고 버터컵을 나무라고 있다. 분명 내가 충격받은 기색을 드러낸 탓이리라.



 아니운서는 노인의 사인을 말한다.


 “아그리파 장군은 지병인 위장병로 사망했습니다.”


 “아니야, 프림. 버터컵이 아주 똑똑한 일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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