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언제나 그래 왔듯 인간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는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계절은 이미 바뀌어 있다. 새로 찾아 온 계절 역시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리고 아득히 먼 훗날에도 빠짐없이 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인사 없이 떠나는 계절은 꼭 선물 하나를 남겨 놓고 간다. 여름의 무더웠던 햇볕은 가을의 곡식과 열매를 남긴다. 아이들은 또 한 뼘 자라 있다.

 

“까꿍”

“꺄아아아”

 

“어디 간지럼을 많이 타나 보자”

 

참 많이 자랐다. 가장 큰 근심을 주던 아이는 이제 가장 큰 기쁨을 준다. 벌써 저 혼자 힘으로 앉는다. 아직 걸음마를 떼려면 더 기다려야 하지만 곧 걷게 될 것을 믿는다. 아무리 긴 여름 내내 풀이 죽어 잘 될 것 같지 않았던 곡식이라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누렇게 익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거 요거, 주머니에 넣어 다녔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제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남에게 사랑과 기쁨을 줄 줄도 안다. 태형은 늘 자신이 아이에게 준 것보다 자신이 아이에게 받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주어도 항상 모자란 기분만 든다.

아이가 잘 웃고 잘 노는 것을 보면 세상 모든 근심이 녹는다. 아이가 몸이 불편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아 악을 쓰고 울면 그 어떤 근심도 여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다행히 아이는 울거나 아픈 날보다 웃는 때가 더 많다.

 

 

“그렇게 예쁘십니까”

“예뻐서 죽겠습니다. 낮 동안 요 녀석 얼굴이 아른거려 미치겠습니다”

 

“어차피 혼자서도 아이를 잘 돌보시니 아주 정전에 데려다 놓으시지요”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태형도 한 때는 이 아이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기억 속엔 또렷하다. 이랬던 아이가 이만큼 자라 자신의 아이를 보고 사랑스러워 못 견딘다. 혜빈은 이럴 때마다 소리 없이 흘러 간 세월의 두께를 느낀다.

 

 

“선황 폐하께서 계셨으면 이 녀석을 물고 빨고 했을 텐데....”

“가끔 효민이가 얘기합니다. 보고싶다구요”

 

“그래요?”

“다른 애들은 안 그런데 그 녀석은 유달리 그럽니다”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데리고 주무시기까지도 했었고”

“어머니, 손자가 자식보다 더 예쁩니까?”

 

“하이구...뭘 벌써 그런 걸 물으십니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자식들과 손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었다. 자식들에게는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는 걸 힘들어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손자들에게는 저런 면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직 태형에게는 먼 이야기이지만 가끔은 그런 아버지의 속내가 궁금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장인과 장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석진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을 들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강직하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장인마저 손자들 앞에서는 허물어진다.

 

 

“예쁘긴 더 예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얘보다 더 예쁠 수가 있지”

 

“달리 바라는 게 없어서 그럴 겁니다”

“아....”

 

“아무래도 자식한테는 이런 저런 기대를 걸게 되니까요. 욕심도 생기고. 그런데 이 녀석들한텐 그런 걸 느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자식을 다 키워 봤으니 그런 저런 욕심이 다 부질없다는 것도 깨달았구요”

 

“꼭 제가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린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럼 제 말을 어지간히 잘 듣고 자라셨습니까?”

 

“저만큼 말 잘 들은 아들이 어디 있다구요!”

 

 

부모는 잊지 못하는 병이 있고 자식은 잘 잊어버리는 병이 있는가보다. 부모의 뇌리와 가슴 속에 올올이 짜인 기억을 자식은 공유할 수가 없다. 태형은 자신만큼 말을 잘 들은 아들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혜빈은 태형 때문에 가슴을 졸인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웃고 만다. 태형도 언젠가는, 아니 곧 그에 대한 복수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애홀에 가실 겁니까?”

“제가 왜 애홀에 가요”

 

“가신다고 들었는데”

“아니요. 제가 거기까지 가는 게 아니라 중도에서 만날 겁니다”

 

“아무튼요”

“왜요. 걱정되십니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한 번은 치러야 할 일입니다. 잘 하고 올 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결국 태형은 결단을 내렸다. 올해가 가기 전, 보다 정확히는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매듭 짓고 싶었다. 준비는 끝났다. 애홀의 황제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직접 찾아 갈까. 아니면 그에게 나를 찾아 오라고 말할까. 직접 찾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고 그에게 오라고 하는 건 역시 애홀의 황제가 탐탁치 않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중도에서 만나 이야기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협박을 하려고 한다. 나는 당신들이 벌인 이러이러한 짓에 대한 증거를 모두 갖고 있다. 당신들이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연의 황제 역시 당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곤란해졌다. 이 일을 어떻게 할지는 당신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

황제의 거동은 많은 위험이 따르고 그만큼 크고 중한 의미를 갖는다. 태형이 궁을 벗어나 멀리까지 가는 건 남포에 다녀 온 걸 제외하곤 처음이다. 태형이 아이들에게 그러하듯 혜빈은 그런 태형을 염려한다. 나이 서른을 코 앞에 둔 아들. 게다가 만인지상의 직위, 황제인 아들이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자식이라는 점은 남들과 같다.

 

 

“어머니”

“예”

 

“외숙부 말입니다”

“.............. 걘 왜요”

 

 

태형은 어머니가 오해할 것이 늘 염려스러웠다. 다른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팔려 제 외숙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다고 어머니가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혜빈은 겉으로는 자신의 유일한 형제에 대해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가슴의 응어리다.

전 황태자 태민은 비록 신분을 완전히 복권하지는 못 했으나 이제 자유로운 몸이다. 그에게 굴레를 벗겨 준 것도 벌써 두어 해가 지났다. 애초에 태형의 외숙이 죄인이 되어 유폐 당한 것은 태민과 얽힌 사건 때문이었으므로, 태민이 자유로워진 이상 태형의 외숙이 더 유폐되어 있어야 할 명분이 없다.

 

 

“이제 좀 자유롭게 사시도록 해 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

 

“잊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늘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황상을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전 그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가 지은 죄로 저러고 사는데 마음에 걸려 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아직도 원망스러우십니까?”

“............예 아직은요”

 

혜빈은 자신의 남동생이 저지른 불량한 행실이 태형에게 폐가 될까봐 늘 노심초사하던 사람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무능하고 방탕한 가장의 전형을 그도 그대로 닮아 있다. 혜빈은 자신이 빚 대신 궁녀로 팔려 오던 날을 여전히 기억한다. 동생만큼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길 바랐는데 결국 그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이제 세상을 떠나 실체가 없는 아버지 대신 그녀의 원망은 남동생을 향해 있다. 지민과 그 형제들의 안타까운 정상을 알면서도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지민이랑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고. 사돈댁들에게도 민망스럽기도 하구요”

“.............”

 

“그 애들이 앞으로 떳떳이 잘 살려면.. 외숙부가 죄인이라는 이름을 벗으셔야 합니다 어머니”

“죄인이 죄인 소릴 듣고 사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럴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복권시키자는 게 아니라. 형님처럼 그저 마음대로 돌아다니실 수 있게 만이라도...”

“또 노름판부터 갈 겁니다. 그 꼴은 못 봅니다 나는”

 

노름에 미친 사람은 그 손목을 잘라도 잘린 손목을 들고 노름판에 간다는 속언이 있다. 마음은 빤하지만 혜빈과 지민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고 태형은 생각한다. 그래서 더는 우기지 않고 가만히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애홀에 다녀 오셔서 차차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은 아직 저는... 선뜻 마음이 안 내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민이한테도 한 번 물어 보구요... 지연이 지훈이한테도 물어 봐야 하구요”

 

“................”

“이번에 지훈이 처가 해산하는데 선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황상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황후께서 이야기를 하시던데. 우리 둘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

 

 

가슴에 한 번 응어리가 생기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걸 녹여내기는 무척 힘든 것 같다. 태형은 어머니의 가슴 속에 맺힌 원한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다 알지 못한다. 알 수도 없다. 자신이 이 세상에 생겨나기 아득히 전부터 맺혀 자라온 원한이기에 그걸 다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자신이 잘 모르는 다른 이의 원한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조심스럽다. 태형은 더는 어머니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말을 접는다.

 

 

 

 

 

 

 

 

 

 

“어디 갔다 오십니까?”

“어? 어. 폐하께 갔다가 나오는 길이다. 넌 어째 그쪽에서 나오냐?”

 

“저 황태자 전하께 다녀 오는 길입니다”

“아아....”

 

“주희 또 왔던데요?”

“어어. 맞아.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셨다고 하더라”

 

윤기의 삶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태형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으로 여섯 달 치의 녹봉을 받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끝난 건 천운이었다. 만일 법대로 처리했다면 윤기는 적게는 파직, 그리고 심한 경우 유배형에도 처해질 수 있었다. 그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으로 그친 데 대해 말들은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남의 말을 입에 올리는 것도 잠시뿐이다. 어느덧 윤기에 대한 무성한 뒷말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근데 넌 황태자 전하께는 왜?”

“전하께서 아까 저를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널? 왜 직접?”

“저더러 오늘 바쁘냐고 물으시더니, 주희가 오늘 들어 올 것이니 주희 좋아하는 간식 좀 만들어 놔 달라구요”

 

“하... 내가 이래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못 들어 오게 하고 싶은 건데”

“뭐 어때서요? 이미 궁 안에서는 주희가 황태자 비가 될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데요”

 

주희가 자주 궁에 드나드는지를 호석이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주희가 들어오기로 한 날이면 으레 효민은 조용히 호석을 찾는다. 그래서 주희가 즐겨 먹는 간식 거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호석은 굳이 무엇이라고 집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주희가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 올린다.

 

조금 전에도 효민의 부탁을 받고 간식을 만들어 황태자 궁에 직접 올렸다.

 

윤기는 여전히 주희가 황태자 비가 되는 일에 대해 탐탁치 않은 표정이다.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걱정이 많아 보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주희가 황태자 비가 꼭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윤기 혼자만이 여전히 내켜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히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딸의 앞날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살아간다는 것. 더군다나 황태자 비, 훗날 황후가 될 그 자리에 앉아 살아간다는 건 보통의 의지와 강단으로는 불가능하다. 석진이 여기까지 온 것은 그에게 어릴 적부터 남 다른 끈기와 강단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기가 생각하기에 주희는 턱없이 부족하게만 보인다. 그 자리를 무난히 지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뒤에서 듣게 될 숱한 말들. 주희에게 마디 마디 상처가 될 만한 말들도 문제다. 석진 역시 그 무수히 소란스러운 말들을 꾸역꾸역 못 들은 체 견디고 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받게 된다. 책임질 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이들의 비난과 원성을 받기 십상이다.

 

윤기는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굳이 그런 고역을 감수해가며 살길 바라지 않는다.

 

“황후 마마께서는 아직 별 말씀 없으십니까?”

“아직은. 아직은 주희가 너무 어리잖냐”

 

“주희가 내년이면 몇 살 되지요?”

“내년에 겨우 열 살인데 뭐”

 

“아... 아직은 많이 어리구나”

“아직은 의논을 할 때가 아니야”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 어른스러우셔서 제가 잠시 착각을 했나 봅니다”

“전하께서는 우리 주희에 비하면 어른이시지... 생각도 깊으시고”

 

“저도 가끔 놀란다니까요. 너무 어른스럽게 말씀을 하셔서”

 

 

심지어 윤기에게는 효민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것마저 마음에 걸린다. 그는 훗날 태형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런 황태자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조숙함을 가진 것은 당연히 장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희와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윤기가 보기에 효민은 나이보다 웃자라있고 주희는 그에 비해 너무 어린 아이 같다. 나이를 몇 살 더 먹는다 해도 그 간극이 쉽게 좁아질 것 같지가 않다.

 

 

“형님은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냐”

 

“그러게요. 저 같아도 뭐....”

“어디에다 말도 못 하는 거고 이건”

 

“...................”

“너 행여나”

 

“말씀 안 드립니다. 제가 뭘 그런 걸 황후 마마께 전하겠습니까”

“그래. 조심 좀 해 주라”

 

석진과는 이십 년이 넘은 인연이다. 자칫 아이들 문제로 인해 그 길고 두터운 인연에 흠집이 갈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왜 형님네는 아직 조용합니까?”

“뭐가 조용해”

 

“주희 동생 안 보십니까?”

“야 뭐 그런 걸....”

 

“일부러 피하시는 겁니까?”

“아직... 애들이 마음이 쓰여서”

 

“참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시면서 속으론 생각이 너무 많으신 게 탈입니다”

 


윤기는 지금처럼 누군가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면 자신의 속내를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속이 곪아가는 것도 굳이 남이 함께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윤기가 재혼을 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새 아이 소식은 없다. 호석은 윤기 부부에게 새 아이 소식이 없는 이유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안 그렇다. 나한텐 주희 뜻이 제일 중요하니까. 지금 이 사람이랑 재혼하는 것도 주희가 싫다고 했으면... 난 아마 안 했을 거다”

 

“형님. 주희는 나중에 제 인생 알아서 살 텐데 왜 굳이 그렇게까지...”

“주희는 제 인생 살아야지. 아비인 나는 그렇지만 그게 아닌 거고. 난 저 녀석이 아니면... 진작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부모를 잃은 자식은 어떻게든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살아 남게 되겠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숨이 붙어 있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윤기 역시 마찬가지여서 만일 주희가 없었더라면 그는 진작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분신이자 제 삶의 전부인 딸아이를, 그는 세월이 더 흐르더라도 쉽게 마음에서 놓지 못할 것 같다.

 

 

“차차 내려 놓으셔야 해요. 주희가 정말로 몇 년 뒤에 시집이라도 가 버리고 나면 어쩌시려구요”

“그러게. 네 말도 맞긴 한데”

 

“남준이 보십쇼. 적당히 제 것도 챙기며 살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제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려다가 이제 돈줄까지 막혀버린 그놈?”

 

“풉. 얘기 들으셨습니까?”

“온 황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간도 크지. 천 이백 냥이라는 돈을 사기를 맞고... 집에서 안 쫓겨 난 게 천만다행 아니냐? 나는 제수 씨가 정말 호인이라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그냥...”

 

“제 안사람도 그 얘기 합니다. 제가 만약 그런 일을 저질렀으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라구요”

“으휴... 정신 좀 차려야 할 텐데. 걘 제가 꽂히는 것엔 돈을 아낄 줄을 몰라”

 

 

남준이 진품이 아닌 그림을 천 이백 냥이나 들여 샀다가 뒤통수를 맞은 일을, 이제 황궁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비록 자신의 눈썰미로 사기꾼을 잡았고 돈 천 이백 냥도 돌려는 받았으나 그 처의 분노는 대단하다고 한다. 천 이백 냥을 들여 그림을 사는 걸 허락해 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그 천 이백 냥을 사기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반응은 뻔한 것이다.

덕분에 남준은 집안에서 경제권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그는 사고 싶은 그림이나 책이 생겨도 남에게 돈을 꿔 가며 사야 할 판이다.

 

 

 

 

 

 

 

 

 

“이 옷이 왜 이렇게 낯설지? 내가 요즘 이 옷을 통 안 입었었나?”

“요즘 안 입으셨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잠행도 잘 안 나가시고”

 

“하긴. 내가 잠행도 안 나갔었구나 근래 몇 달은”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나 아니면 당신?”

“당연히 저죠”

 

“내 걱정이 아니라? 허....”

“폐하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못 자는 거라구요. 꼭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 아시나...”

 

“듣고 싶어서 괜히 찔러 보는 건 줄은 모르는 모양이군”

 

태형은 용포를 벗고 사복으로 갈아 입은 후 어쩐지 낯선 기분에 자꾸 경대에 제 모습을 비춰 본다. 이제 태형은 애홀과 맞닿은 국경 쪽으로 떠난다. 정식으로 행차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변복을 하고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떠난다. 만백성이 이 일을 알도록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은 때문이다.

곧 떠날 태형을 앞에 두고 석진은 근심이 크다. 물론 태형의 옆에는 수많은 호위군들이 역시 변장을 한 채로 따르겠지만, 몇 달 전 목숨까지 위험했던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는 게 당연한 일이다. 또한 태형이 황궁을 비운 동안 혹시 궁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도 저절로 염려스럽다.

 

 

“저 큰일 났어요”

“왜?”

 

“자꾸 걱정이 많아져요. 나이 먹나 봐요”

“얼굴은 아직 아닌데. 희한하네”

 

 

태형은 석진의 뺨을 만지면서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석진은 자신의 걱정이 점점 늘어나고 무거워지는 것도 염려스럽다. 전에는 이만큼 걱정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비록 걱정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도 어떻게든 방법은 있을 것이다. 곧 이 고민은 해결될 것이라 믿고 용기 있게 맞서던 것이 그였다.

그런데 올 들어 많이 마음이 변한 것 같다. 막내 아이가 태어나고 신변의 위협을 받는 일을 겪고 난 후 달라졌다. 이제는 걸핏하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걱정이 앞서는 것 같다. 그것이 결코 위기를 극복하고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안다. 하지만 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

 

 

“누가 그래요? 걱정이 많아지면 나이 먹는 거라고?”

“누가 그런 거면. 헛소리라고 해 주시게요?”

 

“응. 사람한테 뭘 그런 소리를”

“할마마마께서 하셨는데요?”

 

“아.... 그렇구나....”

“할마마마께서 그러세요... 저더러. 걱정이 부쩍 많아진 걸 보니 황후도 나이를 먹는가보오 - 하고요”

 

“할마마마께선 뭘 그런 말씀을... 내 눈에는 아직 그대로구만”

 

태형 역시 석진에게 일어난 이 작은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요즘은 푸념도 투정도 잦아졌다. 그리고 걸핏하면 나이 이야기를 한다. 석진은 올해로 꼭 서른. 이 가을이 지나면 삼십의 고개로 완전히 기울어진다. 태형에겐 아직 3년이 남았다. 석진은 자신의 나이가 태형보다 먼저 앞이 바뀐 것이 영 탐탁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늘 나이를 들먹이며 자신이 초라해져 간다는둥 전에 않던 소리를 한다.

 

“예뻐. 예뻐. 세상에서 제일 예뻐”

“자꾸 그러시면 저도 진짜 그런 줄 알아요”

 

“응. 맞는데 왜?”

“휴.....”

 

“아무래도 요즘 내 애정이 부족했어. 그래서 당신이 그런 것 같아”

 

태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다. 석진은 태형만큼 다정한 사람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태형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분에 넘칠 만큼 충분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태형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클수록 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서 남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태형에게만큼은 숨길 수가 없다.

태형은 석진을 바싹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다. 마음 같아서는 이 모든 불편하고 버거운 일들을 다 내던져 버리고 석진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숨어 들어 가고 싶다. 가끔은 자신이 이 자리와 맞지 않는 사람인가 고민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짊어진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 석진도 그래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우리 이제 한 열흘은 못 보겠네”

“.................”

 

“보고 싶어도 좀만 참아요”

“우리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 있었어요?”

 

“아아니... 없을 걸?”

“진짜 없나...”

 

“응. 내 기억엔”

“후....”

 

석진은 귓가에 어머니의 꾸지람이 들리는 듯하다. 저는 마마의 아버님을 죽을 자리에 내 보내 놓고도 의연하게 견뎠는데 마마께선 대체 왜 그러십니까? 태형과 열흘이나 떨어져 있을 일을 생각하니 눈 앞이 암담하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지만 적어도 석진에게는 처음이라 너무도 막막하다.

 

“참내....”

“왜요?”

 

“갑자기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요”

“응? 장모님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

 

“아니. 어머니가 이걸 보시면... 저더러 유난 떤다고 뭐라고 하실 게 뻔하니까”

“아아. 열흘이나 떨어져 있는데 유난을 안 떨면 어떡해”

 

“그러게 평소에 좀 떨어뜨려 놓으시지 그랬어요”

“지금 원망이 나한테로 돌아온다....?”

 

“평소에 연습을 좀 해 뒀으면 이렇게까지는.....”

 

석진은 어처구니 없이도 태형에게로 탓을 돌린다. 이런 일을 대비해 떨어져 있는 연습을 하자고 태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면서도. 태형은 아직 떠나기 전인데도 석진은 벌써부터 느낀다. 내 삶에서 그를 떼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니 태형과는 잠시도 떨어져 있지 말고 한 데 살다가, 한 날 한 시에 나란히 손을 잡고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

 

“애들 일어나면 얘기 잘 해 줘요. 인사도 못 하고 가네”

“큰애들은 알아요. 아까 얘기했어요”

 

“아 그래? 뭐라고?”

“그냥 알겠다고만 하더라구요. 별 말은 안 했어요”

 

“아... 이 녀석이 눈에 아롱거릴 것 같은데 큰일이네”

 

태형은 나서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 잠든 막내 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아이에게 다가가 몸을 낮추고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본다. 곤히 잠든 아이를 차마 깨울 수 없어 눈으로만 그 모습을 담는다.

 

“밖에서 사람들 기다립니다. 어서 나가 보세요”

“이제 용무 다 끝났다고 나가라?”

 

“아주 안 가실 거면 더 남아 계시구요”

“쳇. 가요. 간다”

 

“....................”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구”

 

“네”

“걱정이 늘어졌을 노인 양반들이랑 손 꼭 잡구 잘 기다리고 있어요”

 

“풉.. 다 일러바칠 거예요”

“내가 거짓말 했나 뭐”

 

 

야음을 틈타 태형은 이제 먼 길을 떠난다. 오고 가는 데에 열흘이면 사실 대단히 먼 길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러 가는 것이므로 석진의 시선은 태형의 뒤를 계속 따를 수밖에 없다. 태형은 더는 나오지 말라는 듯 문 앞에서 손을 흔든다. 석진도 더는 나가지 않으려 한다. 문 너머로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태형의 모습이 어둠 속에 완전히 묻힐 때까지, 석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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