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썰과 연성은 원작 소설의 설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 위무선이 포산산인의 제자인 if 루트 이야기

- 산인기담의 바탕이 된 썰입니다.





위무선이 포산산인의 제자인 if 루트도 보고 싶다. 효성진이 열일곱에 하산한 뒤로 '나도 열일곱에 하산해야지!' 라는 꿈을 키우는 꼬맹이... 그렇게 딱 열일곱이 되자마자 시원스레 '사조님! 저 가요!' 하고 산 박차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그 때가 사일지정이라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 보고파.. 


어디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없나. 모름지기 사내가 창생구제의 포부를 품었으면 가장 험한 곳으로 가야지! 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산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사람 붙잡고 '이보시오, 지금 이 땅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디요?' 하고 물었는데 하필 그 인간이 가르쳐 준 곳이 이릉 난장강이라, 난장강은 어디로 갑니까. 이쪽? 얼마나 걸리지요? 달포요? 그럼 검 타고 날아가면요? 안 날아봐서 몰라요? 쫑알쫑알거리다 지도까지 한 장 얻어서 난장강으로 직행하는, 내내 산 속에 처박혀서 수행만 하느라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수사.


막상 난장강에 도착했더니, 아니 이거 정말 큰일이거든. 난생 처음 보는 괴이하고도 위험한 미지의 땅에 입 딱 벌리고 '사조님, 속세는 본래 이러합니까...' 멍하게 영혼 흩날리다 마음 다부지게 먹고 그날로 난장강에 눌러앉아 사기와 음기를 정화하고 한 많은 혼을 도화하느라 정신없는 위무선...


그 바람에 속세로 내려가면 효성진부터 찾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홀랑 까먹었으니, 이름 석 자조차 모르는 그 난장강의 위인을 어느 순간부터 이릉 사람들은 이릉노조라고 부르고 있더라. 


위무선이 들었더라면 '내가 어딜봐서 노조야!!' 하고 팔딱 뛰었을 소리였음. 아직 약관도 되지 못한 싱싱한 청년에게 노조라니! 노조老祖라니!! 더 좋은 호칭 많잖아!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산 위에 버티고 있기도 바빠 한 달에 고작 두 번쯤 마을로 내려올까 말까 했으니 그 사실 까맣게 모르지. 


포산산인의 밑에서도 벽곡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기에 난장강의 가난도 그리 고되진 않은데 그와는 별개로 남들 보기엔 퍽 불쌍한 꼬라지였을 것이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낡은 검은 옷에(원래 입던 흰옷이 난강장 흉시들의 피와 재로 엉망이 되자 적선받았다) 허리춤엔 피리 하나, 손에는 패검 하나. 


머리카락도 어설프게 찢은 흰천(예전에 입던 옷의 잔해)으로 대충 졸라묶고 달포에 두 어번 들리는 이 의문의 청년을, 그래도 이릉 사람들은 제법 좋아했는데, 수박 한 조각이나 찐빵 하나만 건네줘도 말갛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잡귀도 물리쳐주고 부적도 써주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보고 싶었던 건 가뜩이나 사일지정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신경이 곤두선 기산 온씨가 자기네 관할인 이릉 난장강 쪽에서도 이릉노조라는 의문의 인물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그 실력마저 출중하다니 경계를 가지고 포섭, 혹은 토벌을 할 준비를 하던 참에 다른 수선계 사람들도 난장강에 포산산인의 제자가 있단 소문을 듣고 사일지정에 도움을 받기 위해 그를 찾고, 이릉 작은 마을에서 기산 온씨와 각 가문 사람들이 드글드글 신경전 벌이는 와중에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 눈 빛내면서 수박 얻어먹는 무선이가 보고팠다.. 


아무도 이 소박한 청년이 이릉노조란 것을 몰라... 두 집단 중 어느 쪽이 이겼냐면 수선계 쪽이 이겼습니다. 이유는 효성진을 데리고 나타난 송 도장님 덕분에... 


마침 흙먼지 날리는 길바닥에 앉아서 수박 껍질까지 오독오독 씹어먹는 청년이 자꾸 눈에 밟혔던 남망기가 음식 쓰레기를 먹지 말라며 새로 수박을 사주던 참이었는데(위 : 어, 나 쓰레기 먹는 거 아닌데? 이거 껍질도 먹을 수 있어! / 남 : (문화충격)) 효성진이 '아선'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대번에 화색으로 '사숙!' 하고 뛰쳐나가는 위무선 뒤에서 잠시 넋 놓는 함광군... 그 와중에 송람은 바닥에 떨어진 수박껍질(반 조각) 보고 알만하다는 표정 짓고 있을 것이다.(이쪽도 효성진과 만난 초반에 많이 겪어본 일이라) 


그렇게 사일지정이 무사히 끝난 뒤 다시 난장강으로 돌아가려는 위무선을 남망기가 일단 붙잡아 앉혀두겠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과 온갖 일을 함께 겪었을거라. 


피해가 심한 운심부지처 대신 연화오의 방을 빌려 머무르는데, 남망기가 전후수습에 정신없는 사이 혼자 놀러갔다 오겠다며 연화오를 나갔던 위무선은 잘 돌아다녔는지 해시가 간당할 무렵에야 돌아왔음. 



- 잘 다녀왔어? 

- 응! 배는 좀 고프지만. 

- ...저녁은? 

- 네가 얻어먹고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다.. 이 if 세계관에서도 위무선은 가난했고 또한 그에 몹시 익숙했으니... 순간 남망기 창백해진 낯으로 내가 아침에 돈을 주지 않았나 기억 되짚어봤는데 맨몸으로 보냈더라고... 해시가 되었으니 자자며 옷 벗고 냉큼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을 남망기가 도로 끌어내는 사이 연화오의 주방엔 다시 불이 켜졌다더라. (요리사님 화이팅!) 


그 다음 날에도 놀러가겠다며 목화 신는 위무선에게 이번엔 은자 금자 가득한 염낭 꼭 쥐여서 들려보냈는데 해질 무렵에 석양과 함께 돌아온 위무선은 이번에도 시무룩한 낯이었음.



- ...밥 안 먹었어? 

- 못 먹었어... 



아니 대체 왜?

이번엔 제대로 돈을 줘서 보냈는데 어째서. 설마 외부인이라고 음식을 안 팔진 않았을 테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도로 염낭 건네받아서 혹시 내가 잘못줬나 풀어보는데 반짝이는 돈은 여전히 가득 차 있었음. 고뇌하다 못해 연화오의 주인인 젊은 종주에게 물어봐야하나 하던 참에 위무선이 말하길, 



- 거슬러 줄 돈이 없대. 

- ...뭘 사려고 했어. 

- ? 당호로 하나. 



남망기는 그만 이마를 짚고 말았음. 운심부지처가 불타도 남망기가 오대세가 둘째 공자님으로 풍족하게 살아왔던 과거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이쪽도 따지고 보면 금전감각은 아주 엉망이었음. 위무선보다야 상식을 잘 알 뿐.


물론 그렇다고 남망기가 시장바닥에서 동화 따윌 짤랑이며 돌아다닌 적은 없었고 거슬러 줄 돈이 없으면 그냥 받으시라며 은자 하나 가볍게 내밀어줄 정도의 융통성과 배포가 있었을 뿐이었으나, 다만 위무선은 그 융통성마저 없는 사람이었던 게 요 이틀간의 비극을 초래한 것... 


돈이 없었던 첫날에도 나 저기 연화오 어디에 머무르는 아무개요 소리 한 마디만 했어도 다들 선뜻 외상을 달아주었을 텐데, 처음부터 가르쳐주지 않은 제 잘못이지 누굴 탓하랴. 오늘도 거스름돈이 없다는 가게 주인 앞에서 함께 어떡하지,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었을 게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또 하루종일 쫄쫄 굶었다는 사람에게 상부터 차려준 남망기는 다음부턴 거스름돈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돈을 내고 원하는 것을 취하라 당부했음. 이러다 셋쨋날엔 거하게 사기를 당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적잖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 종일 굶는 것보다야 그게 나으니. 


사일지정 당시에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픔에 시달릴 때도 위무선은 눈앞에 땅에서 자라난 푸른 것이 있으면 일단 뜯어서 입에 넣고 봤더랬다. 그 목덜미 낚아채서 '위무선! 내가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랬지!' 하고 호통을 치는 건 강만음의 몫이었고 우물거리는 입 억지로 열어서 이름도 모를 풀떼기 뱉어내게 하는 건 남망기의 몫이었고 그 와중에도 요령 좋게 먹을 것을 구해와서 먹이는 건 섭회상의 몫이었으니, 그 가운데 강만음과 섭회상이 떨어져나간 지금 위무선을 돌봐줄 사람은 남망기가 다였음. 사실 돌봐준단 말도 우습지. 자기랑 비슷한 또래의 사지 멀쩡한 남자인데. 


참고로 그 무렵 효성진의 역할은 무엇이었느냐면, 위무선이 함부로 주워먹었다가 등짝 맞은 풀을 직접 뜯어먹어보곤 '아, 이건 먹어도 되는 풀이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하고 해설해주는 쪽이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싸하면 '아선은 쉽게 배탈이 나지 않으니...' 라고 덧붙이다 송람에게 끌려갔다) 


남망기는 그날 제 막사로 위무선을 데리고 돌아와 두 손 꼭 부여잡고 '네가 사숙을 몹시 아끼고 따른다는 것 잘 알지만 그래도 세상의 배움엔 정도라는 것이 있으니 속세의 사람들과 계속해서 어울려 살아갈 것이라면 다른 이의 목소리도 좀 더 귀담아 듣는 것이 좋다.' 로 시작되는 일장연설을 했고 졸립고 배고파서 이리저리 꺾이는 머리를 간신히 가누던 위무선은 '알았다고 대답하면 자도 돼?' 라고 물었다가 남망기가 '....약속한다면.' 이란 미끼를 던지자 대번에 '알았어!' 경쾌하게 답하곤 푹 꼬구라져서 잠들었다. 그 덕분에 아직 남망기의 말은 듣는 척이라도 하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 이후 남망기는 제가 한시름 놓게 될 줄 알았으나, 실상은 무지막지한 질문 폭탄에 휩쓸릴 뿐이었으니... 바빠 죽겠는데 시도때도 없이 뭔지도 모를 것들을(어째서 '것들'이냐면 풀이 아닌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들고와서 '이건 먹어도 돼? 이건? 왜? 왜 안 돼? 먹어도 안 죽는데? 속세의 사람들은 왜 이걸 안 먹지? 혹시 먹을 줄 몰라서 그래? 너도 한 번 먹어볼래?' 하고 줄기차게 묻는 위무선 때문에 남망기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넋을 놓았을 것이다. 무시로 일관하기엔 제 입으로 '다른 이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어라'라고 했던 마당에 어찌 그럴까. 


게다가 위무선은 자신이 들고온 것들의 이름을 몰랐기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판단은 온전히 남망기의 몫이 되었는데, 그걸 직접 먹어볼 수도, 위무선에게 먹이고 경과를 지켜볼 수도 없으니 이 일 덕분에 만난 이래 위무선이 남망기에게 가장 많이 듣게 된 말은 '不可' 한 마디가 되었음. 


사실 위무선이라고 항시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언제나 몰풍한 낯을 하고 있는 이 젊은 수사가 유독 제게 관련된 일에서만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잃는 게 너무나 즐거워서 그랬다더라. 안타깝게도 남망기는 그런 속내 뚫어볼 심안 갖추질 못했으니 전쟁통에 여러모로 농락당할 수밖에. 


보다못한 섭회상이 위무선을 대신 데려다가 볶은 땅콩이며 연자육 따윌 쥐여주며 남망기를 조금 쉬게 해줄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 감사를 표하고 모처럼 참선을 하려 구석에 앉았다가도 혹시 저 사람 또 이상한 걸 주워먹진 않을지, 답해줄 이가 없어 제멋대로 굴진 않을지, 오히려 정신이 산란해져 이 각(약 30분)도 채 되지 못해 더욱 파리해진 얼굴로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음. 앓느니 죽는다고 미지의 불안을 키우기보단 차라리 눈앞의 골칫덩이를 직접 확인하는 길을 택하신 함광군... 


하산하자마자 삼 년이나 되는 시간을 난장강에 틀어박혀 살았던 위무선은 암만 포산산인의 제자라 해도 혼육의 쇠약을 피할 수 없었으나, 허나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서 깔깔 웃으면서 잘 놀다가도 돌연 풀썩 쓰러진 뒤 '어,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쉽게 열이 나?' 등의 실없는 소릴 해서 주변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재주가 아주 탁월했음. 그러니 남망기 걱정이 그칠 새가 없지. 


살기 위해서 산 자를 베어내는 전쟁의 복판에서 다들 피냄새를 휘감고 다니는 건 그리 특출날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 날도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날....로 끝날 수 있었는데, 유독 위무선의 근처에서 진동하는 피냄새에 코끝을 찡그리던 강만음이 얼마 못 가 경악한 낯으로 '야!!'하고 이목을 집중시켜 얄팍한 평화는 순식간에 깨지게 되었음. 


돌아보는 얼굴은 '나?'하고 되묻듯 여상한데 강만음은 분명 보았거든... 검은 옷자락 아래로 뚝, 하고 방울져 떨어지는 핏방울을. 사방에 혈향이 진동하니 이게 내 피냄새인지, 남의 피냄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자기 다친 것도 모르고 돌아다니던 위무선은 일차로 강만음의 손에 등짝을 훤히 깠고 이차로 남망기의 손에 넘겨져 아랫도리까지 홀랑 벗겨졌음. 


파렴치하다고 실눈 뜨지 마시라. 순전히 몸 어디에 또 상처가 있을지 몰라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니. 언제 났는지 모를 생채기들과 등을 가로지른 자상을 살핀 남망기는 이를 스스로의 실책으로 여겼음. 모르긴 몰라도(정말 제 맘 속도 한 치도 몰라도) 위무선의 부상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게 강만음이라는 것부터가 영.. 좀 그랬거든. 


입 꾹 다물고 피 닦아내고 약 바르는 와중에도 막사 안에서 부실한 침구를 대신해 남망기의 장포를 깔고앉은 위무선은 내가 정말 다쳤냐며 발이나 까딱까딱 하고 있겠지. 일신에 지닌 재주가 워낙 출중해서 나서는 곳은 언제나 가장 치열한 곳, 가장 험난한 곳, 가장 위험한 곳인 위무선이 과연 사일지정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남망기는 내내 걱정이었음. 그 걱정 입 밖으로 꺼내 말린다 해도 하산하자마자 난장강으로 기어들어간 성격이 바뀌겠냐마는. 


이렇듯 제 건강에 자부심이 넘치고 효성진이 '아선은 배탈이 잘 나지 않는다'라고 보장해주었던 위무선도 한 번쯤은 배탈이 났으면 좋겠다. 그것도 엉뚱하게 사일지정이 다 끝난 마당에. 






강만음을 따라 남망기와 함께 운몽으로 향했던 위무선은 연화호 그득히 널린 게 전부 연방이란 말에 당장에 두 눈 땡그래지며 몹시도 행복해했을 것... 안 그래도 강염리에게 간식을 받아먹을 때 가장 많이 먹었던 게 연자육이라 연꽃은 어찌 생겼나, 실물로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에 이 넓디 넓은 호수 전체가 온통 그 좋아하는 연방이란 말을 들었으니 오죽 행복할까. 


섭명결이 온약한의 목을 베어 종전을 선언했을 때도 이만큼은 기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주 물 만난 물고기, 배추밭의 토끼가 따로 없었음. 그 반짝이고 간절한 얼굴에 강만음은 모처럼 조금 우쭐한 기색으로 운몽 강씨 종주의 이름으로 허락해줄테니 네 원껏 즐기라 말해주었으리라. (종주의 권위!)


신이 나서 달려가는 위무선을 한동안 지켜보던 남망기도 위무선이 제법 능숙하게 노를 젓는 걸 확인하곤 만일 너무 멀리가더라도 어검을 해서 돌아오겠거니, 하고 연화오로 발걸음을 돌렸음. 


하지만 암만 원껏 즐기란 말을 들었대도 이렇게까지 즐길 일인가? 


위무선은 정말로 그날의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모조리 잘 익은 연방에서 연자육을 쏙쏙 뽑아 배를 채우곤 밤 깊은 시간이 되어서야 연화오에 기어들어가 남망기의 방이 어딘지를 물었음. 남망기는 당연하다는 듯 제 방으로 찾아온 위무선을 씻기고 눕혀 재우면서도 어째 그 얼굴이 피곤해보인다 싶었고. 


그래도 하도 놀아서 그런가보다 여겼지 누가 천하의 위무선이 배앓이 때문에 늘어진 것이라 짐작이나 했겠냐 말이다. 고소가 아닌 운몽 땅에서도 묘시 정각에 어김없이 눈을 뜬 남망기는 습관처럼 위무선 누운 자리를 살피다 어린 동물처럼 낑낑 앓는 소리에 잠시 어리둥절해졌음. 


위무선이... 아파...?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 두 개가 머릿속에 퐁퐁 떠오르고도 넋을 빼고 있던 남망기는 황급히 위무선이 머리끝까지 끌어 덮은 이불을 휘떡 들추고 위영! 하고 높은 소릴 냈음. 이마엔 미열이 나고 잔뜩 웅크린 모양새가 딱 봐도 배탈이라 우선 영력을 좀 넣어주다 아차 내 이럴 때가 아니구나, 뒤늦게 정신차리곤 전쟁터에서도 해 본 적 없던 침의차림으로 달리기를 실천했으니 졸지에 고소 남씨도 아닌데 덩달아 묘시에 깨게 된 강만음만 더욱 어이가 증발하고 말았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막 주워먹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했지만.. 내 분명 그랬지만... 하필이면 내 고향 땅에서, 그것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후에 이럴 일이냐고... 


그래도 아픈 사람 들여다보긴 해야하니 의원 대동하고 그 방을 찾았는데 앓는 와중에도 위무선은 창을 넘어서 연화오 뒤뜰이나 헤집고 있었다. 너 대체 뭘 하느냐 보쌈하듯 업어 돌아오면 배탈에 좋은 약초를 찾고 있었다는데, 아니 아프면 약방을 찾을 것이지 어디서 무슨 약초를 뜯어서 언제 낫겠다고. 포산산인은 대체 제자들에게 무얼 가르치는 것인지 범인들의 생각으론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싶었음. 


게다가 아픈 원인? 말 할 것도 없지. 원래 연자육을 생으로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기 마련이라. 연심을 제거하고 먹으면 괜찮지만 대개 남이 까주는 것만 받아먹었던 위무선에게 그런 세심함이 있었을 리가. 사일지정의 영웅이 전쟁의 종결보다 연방 가득한 호수를 더 좋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 그 쓰러져 눕게 된 이유가 맹독도 아닌 연밥 때문이어서야 창피해서 어디 말도 못한다. 


강만음이 빡침을 억누르느라 심호흡을 할 적에 남망기는 남망기대로 따라갔어야 했는데, 하고 자책하기에 여념없었으니 방 안 분위기가 끝내주게 울적했음. 남망기는 죽을상, 위무선은 죽을맛. 서로 박이 이렇게 잘 맞으니 아주 천생연분이 따로 없지. 


다행히 금단 맺은 수사라 금방 자리 훌훌 털고 일어났지만 그 사이 강만음은 인근 호수 주인들에게 위무선이 오거들랑 절대 들여보내지 말거라 단단히 주의를 준 뒤였음. 내주었던 호의를 도로 거두어들이는 게 꼴불견이어도 차라리 이 편이 맘이 편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삽시간에 저 좋아하는 간식이 넘치는 천국을 빼앗긴 위무선이 상심을 감추지 못하니 마음이 약해진 남망기가 세상엔 연자육보다 맛난 게 많다며 운몽 거리를 몇 번 구경시켜준 뒤론 위무선도 호수보다 거리로 자주 나섰는데, 그래서 어찌되었느냐면 상술했던대로 돈 쓸 줄 몰라 쫄딱 굶은 이틀이었지.. 


결국 바쁜 일 대강 처리하고 처리 못한 일은 강만음에게로 미뤄둔 남망기가(강만음의 동의는 없었음을 미리 밝히는 바입니다) 다시 위무선을 이리저리 챙기기 시작하면 뭇사람들이 농으로 '이릉노조께선 함광군 없이 어찌 사시렵니까' 하는데 그 말에 위무선이 고개 갸우뚱하며 


'그러게? 나 남잠 없을 땐 어떻게 살았지?' 


하고 맞장구 쳐주면 남망기 심장 덜컥 내려앉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너 없인 못 살겠단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떨리고 설레는지. 남망기에게 죄가 있다면 이릉 길바닥에서 얇게 썬 수박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움켜쥐고 껍질까지 야무지게 뜯어먹던 청년에게 동정을 품은 게 그의 원죄였겠지마는, 원래 동정同情도 정情이라 그 때부터 이미 마음이 기울었던 것을 어찌하랴.


...어쩌긴 뭘 어째. 기왕 주워온 것 끝까지 끼고 살아야지. 


애당초 제 사숙 말이라면 무엇이든 철썩 잘 믿던 위무선을 꼬셔서 그 사람 말이라고 다 믿지 마라. 내 하는 말도 잘 들어라 타일러 둔 게 본인인 것을. 모름지기 짐승이든 사람이든 길들였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 세상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하산하는 일로 포산산인에게 의절당한 위무선에게 달리 돌아갈 곳이 없는 게 언젠가는 남망기에게 오히려 다행인 날도 올 거라. 








- 2020년 4월 10일에 풀었던 썰.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Roof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