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희조가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언젠가 자기혐오와 회의감을 무시할 수 없어질 때가 와.”


동료가 지나가며 한 말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일을 그만둘 때야.”


센터에 들어오기 전 이미 다른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꽤 했다던 사람의 말이라 어쩐지 기억에 남았다. 이 순간 희조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그래요.


그리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그만둘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생각이 많아서 힘들지?”

“…….”


희조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하라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여태껏 겪지 못한, 그래서 도무지 정의 내리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에 일순 풍덩 빠져버린 기분 때문이었다. 당황과 절망이 마치 희조에게 최고의 불쾌감을 선사하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놀랐니?”

“…….”


속눈썹이 파르르 거릴 정도로 눈동자를 떨어본 적이 있었던가. 희조는 놀란 마음을 감추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당장 제 얼굴이 얼마나 창백하고 경황없는 낯으로 질려있을지 알 것 같으면서도 희조는 당최 평소 그 차분하고 도도한 포커페이스를 요만큼도 소환해내지 못했다.


블랙아웃.


이 순간 희조는 제 세계에 일순 정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적어도 머릿속에선 그랬다. 오랫동안 아등바등 일을 하며 깨달은 바, 희조는 인간의 의지력이나 인내력도 체력과 같아서 분명한 한계치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 근래 몰아치듯 일어났던 다이내믹한 사건은 희조의 의지와 인내의 힘을 이미 모두 소진시킨 터였다.


이혼, 해고만도 못한 인사 조치, 코앞으로 다가온 대출 상환 일자,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의 빚 독촉, 유일한 가족의 계속되는 병상행, 그리고……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합법적인 하극상까지.


최근에 일어난 굵직한 일들만 모아도 이 정도였다. 아마 다른 이들이라면 진작 포기했을지도 모를 이 불행의 굴레를, 그나마 생애 대부분의 시기를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탓에 본의 아니게 단련이 되어버린 희조니까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젠-


“솔직히 말하는 편이 좋겠다.”


그나마 최후의 보루로 삼고 있던-


“나, 사실 꽤 오래전부터 네 자리 대신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었어.”


그야말로 유일하게 삶을 지탱했던 자존심까지 무너지게 생겼다.


“그게 무슨…….”

"너 대신 들어와 달라고 하시더군.”


이사장님이 말이야. 하라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잇대었다. 몇 번이고 직접 연락을 주셔서 끝내 거절을 못 하겠더라.


“……!”

“전혀 몰랐니?”

“그게…… 그게 무슨…….”

“정말 몰랐어?”


아니, 잠깐. 하라가 퍼뜩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는 게 더 이상하겠구나.”


뭐가 좋은 말이라고. 달래는 투로 하라가 말을 이었다.


“끝까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

“근데 내가 거짓말을 못해.”


우리 앞으로 자주 볼 텐데 그때마다 괜히 켕기는 마음으로 널 만나는 것도 싫거든. 하라의 목소리엔 의심의 여지없는 넉넉한 연민이 담겨있었다. 어쩐지 마음 편히 자책의 반응을 보이기 힘들 정도로 너무 잘 정제된 느낌의 위로였다.


“…….”

“…….”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라는 희조를, 희조는 테이블 위로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엔 전채로 나온 요리들이 하얀 접시에 담겨 꼭 전통 자수처럼 고상하고 수려한 플래이팅으로 멋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전복 내장과 감태로 만든 죽, 훈연한 도미회를 얹은 연근 샐러드, 참깨 소스를 곁들인 민들레 국수, 유자즙을 뿌린 연두부, 어육 간장으로 맛을 낸 민어 사슬적…….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하는 오색찬란한 음식들은 그러나 내리 하루 종일 굶다시피한 희조의 입맛을 조금도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희조는 수저조차 건들지 않은 상태였다. 손도 대지 않은 말끔한 애피타이저들을 보며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 몇몇이 약간 당황한 눈치로 언제 메인 요리를 내야 할지 난감해 하고 있었다. 


“희조야.”


하라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뗐다. 줄곧 그 이름을 자주 부르고 입에 담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괜찮니?”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


비참함과 충격에도 통각이 작용한다는 걸 희조는 새롭게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급하게 뜀박질이라도 한 사람마냥 숨이 가쁘고 가슴께가 조여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 그렇게 충격이야?”


하라는 예상 밖의 반응이라는 듯 놀란 눈을 감추지 않았다. 그 무구하고도 악의 없는 호기심에 대고 희조는 차마 당연하지 않겠냐고 서럽게 대꾸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 내가 좀 더 시간을 두고 말해야 했나 봐. 하라는 진정 놀란 듯 보였다. 밥이라도 좀 먹이고 이야기할 걸 그랬네. 곧 아이를 어르는 사람처럼 상냥하고 지극한 눈빛과 말투가 이어졌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기꺼이 다 받아줄 것만 같은 연상의 절대적인 자상함. 누군가 바로 옆에서 하라를 지켜봤다면 백이면 백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런 줄은 몰랐어요…….”


희조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건조하면서도 녹녹한 목소리. 쥐어짜낸다면 원통함과 함께 배신감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음색이었다.


그랬다. 배신감.


갑자기 잠수를 타곤 계약을 지키지 못하겠다며 제 뒤통수를 때린 이한에게도, 지금껏 수도 없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사기꾼 아버지에게도, 느닷없이 새살림을 차려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던 어머니에게도, 심지어 세상 다시없을 드라마틱 한 하극상을 보여준 승아에게도 이만큼의 배신감은 느끼지 못했다.


그랬다. 배신감.


지금 희조를 절망시키는 감정은 바로 배신감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배신해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절대 그래선 안되는 게 있었다.


일.


그것만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희조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일. 그것은 분명 희조에게 족쇄였으나 동시에 인생 그 자체였다. 생애 단 하나의 보람이고 긍지였다. 그야말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목숨을 바쳐 해온 것이었다.


동종업계의 비슷한 직급을 달고 있는 이들 중에 비전공자에 석박사 학위도 없고, 그 흔한 해외 경험조차 전무한 사람은 희조가 유일무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내 5대 전시 센터이자 지역에선 최고로 꼽히는 문화 시설의 2인자의 자리라는 건 누군가에겐 문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과 영혼까지 갈아 넣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희조는 그만한 커리어를 이룬 것치곤 젊은 축에 속했다. 사람들이 희조를 두고 현대 미술의 본산인 뉴욕의 어느 유명 아트 갤러리 출신일 것이라 짐작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만한 커리어를 이루는 건 사실상 엄청난 야망을 품은 독종이거나 모종의 비리를 행할 만한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암묵적인 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희조는 이따금 아주 천연덕스러운 투로 뉴욕 어느 대학을 나왔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희조는 잔잔하고 유유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이건 제 전시가 아닌걸요. 그러니 작가님의 프로필에 더 관심을 가져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쩐지 희조의 그 기품 있는 겸손과 절제의 태도에 괜히 찬탄의 구실을 만들며 생각하는 것이다.


역시 ‘백조’로 불리는 이유가 있군, 하고.


‘백조.’


실로 그 별명 또한 희조가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회자된 것이었다.


수면 아래에선 치열하고 냉정하게, 그러나 겉으론 그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고고하고 우아하게 예술을 다루는 여자. 내로라하는 학력과 화려한 경력, 심지어 범접할 수 없는 재력까지 갖춘 많은 경쟁자들에게도 절대 꿀리지 않고 자신의 커리어를 침착하게 지켜 온, 그리고 앞으로도 지켜 갈, 그야말로 고요하게 빛나는 호수 위에 한 마리 우미한 백조 같은 사람-


-으로 보이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고 분투했는데…….


그리고 마침내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한데, 이젠 그런 자긍심이 와르르 무너지게 생긴 것이다.


비록 지금은 얼떨결에 승아의 개인 전담 비서로 강등되다시피 한 처지지만, 희조는 내심 이런 처사가 임시적인 조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바랐다. 아마 센터의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었다. 한 회사의 최고 경력자가 갑자기 신임 보스의(그것도 이사장이 가장 아낀다는 막내 손녀딸의) 개인 비서로 보직 이동이 된다는 건 까놓고 말해 요즘 같은 세상엔 비상식적이다 못해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실로 이번 일의 전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런 추측들을 내놓았다.


이사장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 손녀딸을 신임 관장으로 임명한 뒤 마음이 편치 않아 사내에서 가장 노련한 희조를 손녀의 경영 과외선생격으로 옆에 붙여준답시고 개인 비서로 전락시켰다거나, 승진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희조가 혹 앙심을 품고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 견제책을 겸해 잠시 희조의 기를 꺾어버릴 요량으로 강등을 명령한 게 아닐까, 하고.


희조 역시 속으론 그리 생각했더랬다. 서글프지만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하늘 아래 혈연보다 더 끈끈한 것도 없음을, 희조는 이미 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날들을 혹독하게 살아오며 몸소 실감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희조가 마냥 절망하지 않았던 건-


일, 그것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일에 대한 자긍심, 그것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래봤자 자신은 언제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제가 있던 자리는 결국 다시 저를 찾아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는 자신감.


죽을힘을 다해 아등바등 이를 악물고 쌓아 올린 커리어가 그토록 쉽게 무너지고 무시되고 잊힐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 설령 후임자가 들어온다 해도 정식으로 미리 인수인계 절차를 밟은 것도 아니니 조금만 지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미리 귀띔해 줄 걸 그랬나 봐.”


진작부터 그런 믿음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을까.”


물밀듯 밀려오는 비참함. 이제야 알게 된 진실. 


자신은 승아가 아니더라도 진작 내쳐질 처지였던 것이다.


사직서를 내지 않아도, 승진을 하지 못해도, 관장이 바뀌지 않았어도 어차피-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쉽게 밀려나고 교체되어버릴 존재였음을.


‘내가 비서가 좀 필요한데.’


어째서 이 타이밍에 승아의 그 새침하고 도도한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그랬더니 선배 밖에 안 떠오르는 거 있죠.’


멍한 머릿속은 꼭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측 같은 건 번개처럼 깨닫게 한다.


“……하아.”


희조는 저도 모르게 길고 진한 날숨을 내어놓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어떤 진실을 깨닫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승아는 자신을 구해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진실.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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