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이렇게 달아놓으니 자전적 레즈비언 에세이라도 쓰려는 것 같지만 그건 경험을 더 쌓은 뒤로 미뤄두기로 하고, 지금 쓰려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한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글이다. <여주인공이 되는 법>을 읽으면서 나도 (서맨사 앨리스만큼 재미있게 엮어낼 수야 없겠지만) 컨텐츠 속 여성 캐릭터들(과 나)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어져서, 처음으로 독서 일기도 번역도 여행기도 아닌 포스트를 써보기로 한다. 나와 닮아서 또는 나와 달라서 사랑하는 가상의 여자들에 대한 글. 

 나는 서사 중독자이고 그 주인공들과 쉽게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 캐릭터들이 너무 많아서, 이 포스트는 시리즈물이 될 예정이다. 가장 처음으로는 어느새 내가 햇수로 3년째 중독되어 있는 컨텐츠의 보고, 넷플릭스 속의 여자들을 다뤄 보기로 했다. 한국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기준으로 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한 포스트에 다섯 명씩, 두 개 또는 세 개 포스트로 나눈다. 첫 다섯 명을 소개한다.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 <데어데블>,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보잭 홀스맨>,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루스 와일더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


루스는 120%의 사람이다. 주변인을 귀찮게 할 만큼 끈질기고, 사소한 일에까지 과하게 노력하는 사람. 좋아하는 일에 꼭 온몸을 투신해야만 하는, 그래서 쉽사리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 

나는 고등학생 때 연극을 했는데, 조연을 맡았다. 극본을 써준 선배들이 가장 성의 없이 썼다는 게 거의 확실한, 심지어 이름도 없는 여왕의 '꼬붕녀' 였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통지받은 날 나는 조금 울었다. 여하튼 나는 부당하게도 배우이면서 연기 말고 캐릭터의 이름과 성격을 정하는 일까지 해내야 했다. 절대로 '꼬붕녀'로 남고 싶지 않은 절박한 마음으로 매일 새로운 캐릭터를 고안했다. 내 파트너, '꼬붕남'은 그걸 좀 버거워했다. 나는 '꼬붕남'과 스스로를 괴롭히는 중에도 다른 배우들에 대한 피드백을 아끼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은 그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나와 '꼬붕남'은 영자와 영구라는, 놀랍도록 언피씨한 동네 바보 캐릭터에 안착했다. 그리고 진행된 중간 리허설에서 우리의 분량은 한이 서린 내 열정만큼이나 늘어나 거의 한 시간에 육박했고, 객관적으로 연극에서 가장 덜 중요한 캐릭터였던 우리는 분량을 1/10로 줄이라는 또 하나의 충격적 명령을 받았다. 그날은 조금이 아니라 펑펑 울었다. 캐릭터는 다시, 또 다시 바뀌었고, 결국 '패션 바보'라는, 개그콘서트의 긴 역사 동안 심심할라치면 등장해 온 동네 바보 캐릭터와 '스타일'의 장도연과 박나래를 합친 괴상한 캐릭터를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한 시간짜리 연극 동안 10분도 안 나오는 캐릭터였지만,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영자를, 그리고 우리 연극을 사랑했다. 

그래서 나는 유치하고 저급한 'Zoya The Destroya', 그리고 러시아를 상징하는 조야와 더불어 놀랍도록 백인, 그리고 미국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유색인종들을 손쉽게 악역으로 써먹는('Welfare Queen', 'Beirut', 'Fortune Cookie' 모두 얼마나 혐오로 범벅된 캐릭터들인가!!), 헐벗은 여성들이 머리를 뜯고 싸우는 모습을 눈요깃거리로 소비하는 삼류 프로레슬링 쇼 <글로우>에 대한 루스의 애정을 마음 깊은 데서부터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삼류 쇼에 출연하는 프로레슬러라는 사실이 그 자신까지 삼류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루스로 사는 일은 정말 피곤할 것이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아직 쇼 속 루스보다 어린데도) '루스적인' 광기와 열정을 포기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일 대신 나를 지나치게 기쁘거나 슬프게 하지 않을 일을 선택했고, 무언가를 밤새워 파고들거나 남을 귀찮게 할 만큼 무언가에 열정을 쏟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나는 루스 시절의 나를 자주 부끄러했고, 내 안의 루스를 숨기기 위해 메타와 시니컬로 무장했다. 그것은 굳은살처럼 내 성격의 일부가 되었다. 

배우이면서 프로듀서나 연출자보다도 다른 배우들을 귀찮게 하는 루스,  '빵 터지는' 캐릭터 하나를 찾기 위해 오만 개 캐릭터를 가져와 시험하는 루스, 배우로서 기회를 잃었을 때 세상을 잃은 듯이 우는 루스, 시작한 일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루스.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루스. 그런 루스에게서 과거의 나를 보았다. 그래서 루스가 너무 싫은데, 너무 좋았다. 아니, 존경스러웠다. 나와는 달리 오래오래 루스답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가 배우로서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는 점도 좋았다. 그럼에도 배우로 남고 싶어하는 시즌3의 피날레도 좋았다. 루스는 머리를 쓸 줄 모른다. (데비가 머리를 쓸 줄 알고, 그래서 멋진 캐릭터인 것과 대비된다.) 그는 사랑하는 일을 온몸을 불살라 해내는 것밖에는 모르고, 그래서 정말 멋지다. 골반뼈를 다 내놓는 체조복을 입고 바닥에 털썩털썩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글로우>의 마지막이 될 시즌4에서 제작진이 루스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내가 미워했던 과거의 나를 위해서라도 멋진 결말이 루스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샘 실비아나 엮어주는 바보 같은 제작진이 루스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선고하더라도, 루스는 꿋꿋이 사랑할 일을 찾아내 120%를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 제발 샘 실비아와 엮이는 결말이 아니기를 바란다!! 샘 실비아가 싫은 건 아니지만, 루스랑 더 엮이느니 죽었으면 좋겠다. (!!) 건강도 안 좋은 것 같던데 이제 죽을 때도 됐지 영감...

++ 사실 <글로우>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를 좋아한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도 그렇고, 젠지 코한은 살아있다못해 펄쩍펄쩍 뛰는 여성 캐릭터들과 그 사이의 애증 관계를 정말 잘 그리는 것 같다. 특히 데비, 제니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2.  카렌 페이지 (<데어데블>, <디펜더스>, <퍼니셔>)


카렌은 아마 <데어데블> 시즌 1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캐릭터일 것이다 - 피스크보다도! '민폐 여주'라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욕 먹는 여자를 좋아하는 변태 같은 습성이 있는데, 아마 그래서 카렌을 더 좋아하고 흥미롭게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남성 히어로물의 여주인공은 딱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그래서 남자 주인공이 구하러 와야 할 만큼의 고난만을 겪다가, 딱 죽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출되거나 간발의 차이로 죽어 버리는 바람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의 그웬 스테이시가 좋은 예시다) 남주인공에게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기는 역할을 한다. 그에 비해 카렌은 어떤가? 가만히만 있으면 초능력을 가진 맷 머독이 구하러 올 텐데, 그걸 못 참고 자기 마음대로 도망치고 분투한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다음, 또 다음 사고를 친다. 초능력이 없으니 가만히 있는 게 남는 캐릭터인데, 그러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폐 여주'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내가 카렌을 좋아하는 이유는, 카렌이 슈퍼히어로 세계관의 무기력한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렌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에서 삽으로 퍼담아 슈퍼히어로 세계관에 옮겨 심은 것처럼 이질적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타당한 방법으로 사건에 뛰어들고, 목숨을 걸고 살아남는다. 혼자만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함께 살리려고 한다. 카렌은 당연히 맷 머독보다 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맷 머독의 도움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슈퍼히어로물의 공식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슈퍼히어로물 안에 들어갔으니, 당연히 사건사고가 따를 수밖에 없다. 카렌을 '여주'로 보기 때문에 그가 '민폐 여주'로 보이는 것이다. 카렌은 '여주'감이 아니다. 다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가 슈퍼히어로 세계관에 옮겨심어지면, 카렌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해내기 어려울 거다. 

<데어데블>은 사람을 피떡이 되도록 패는 슈퍼히어로물답지 않게 직업의식이 투철한 직업인들이 많이 나온다. 변호사인 포기와 기자인 카렌, FBI의 나딘 요원 같은 사람들. 이들의 초능력은 프로페셔널리즘이다. 카렌은 언론과 진실의 힘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기자가 된 것이고, 초능력 대신 저널리즘으로 악과 싸운다. 카렌은 보통인인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고, 초능력 없는 우리의 슈퍼히어로다. 

마지막이 된 시즌3에서 카렌이 기자 커리어를 포기하고 수사관으로서 법률사무소의 일원이 되는 건 기자로서의 카렌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좀 아쉬웠지만, 진실을 포착하면 겁 없이 달려들어 무슨 수를 써서든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들을 구하는 카렌은 수사관으로서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Karen은 캐런에 더 가깝게 발음된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카렌'이라 쓰게 되는 이유는 뭘까? 


3. 레베카 번치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불행한 청소년은 세 부류로 나뉜다. 인디 힙합을 듣는 부류, 인디 밴드를 듣는 부류, 그리고 뮤지컬 넘버를 듣는 부류.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행복한 청소년은 멜론 탑 10을 듣는다고 했다. 동의.) 내가 세 번째 부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뮤지컬 영화 속 세계의 그 키치한 발랄함이 좋았다.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현실과 단절되고, 모든 문제가 가사로 요약되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세상이. 당시 나는 theater kid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나와 비슷하게 불행을 감당해내는 십대들이 따로 이름이 붙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몰랐는데, 알았으면 조금 덜 불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Diagnosis>의 가사처럼, 나도 내 부족(tribe)를 애타게 찾고 있었으니까. 

나는 레베카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아마 많은 여자들이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거고, 그래서 레베카는 잘 만든 캐릭터일 것이다.) 나의 경우 고기능성 회피형 인간인 것과 뮤지컬을 좋아하는 외톨이 십대였던 것. 남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그러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그래서 솔직히, 처음에는 레베카를 좋아하기 쉽지 않았다. 보면서 너무 수치스러웠다. 나와 닮은 면은 나와 닮아서, 나와 다른 면은 또 나와 달라서. 사실 쇼의 문법에 적응하는 데도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내가 기존의 뮤지컬 영화를 소비하던 방식으로는 소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척 봐도 우유부단하고 별볼일 없는 조쉬라는 남자 한 명을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는 시즌1, 2의 레베카를 온전히 사랑하기란 힘들었다. 편집증적인 외톨이 출신으로서 별 생각 없이 선량한 캘리포니아 미남에게 빠져버리는 레베카를 이해할 수 있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시즌 1, 2에 비해 서사적으로 루즈해졌다는 평을 듣는 시즌 3과 4를 지나오면서,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레베카를 사랑하고,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레베카의 여정은 결국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자기파괴적이었고 실제로 자살시도까지 했지만, 절실히 살고 싶어했다. 레베카의 모든 '미친' 행동들이 사실 불행과 싸우는 그만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레베카를 싫어할 수 있을까.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용서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상처입혀온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레베카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도 조금은 과거의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한 레베카의 면면은 결국 내가 싫어한 나를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나, 내 자신에게 너무나 관심이 많은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나, 그러는 중에도 진짜 내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해온 나. 그런 나를 사랑할 방법을 찾는 데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와 레베카는 웃기지만 진실한 도움이 되어주었다. 

이것은 모두 캐릭터를 대하는 데 너무나도 사려 깊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작가진 덕일 것이다. 사실 나는 폴라와 발렌시아와 헤더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싫은 인간으로 남지 않았고, 레베카와 함께 성장해서 결국 사랑스러운 인간들이 되고 말았다. (특히 폴라의 성장은 레베카의 것과 더불어 너무나 뭉클했다.) 이것은 세 남자 주인공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캐릭터에 대한 제작진의 애정과 책임감은 조쉬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데 이른다. 레베카는 자신에게 차가웠던 주변인들을 버림으로써 성장하지 않는다. 그의 성장은 자신을 위한 것, 그리고 자신에 의한 것이지만, 또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우리의 성장이 그래야 하듯이. 


4. 다이앤 응우옌 (<보잭 홀스맨>)


미국 컨텐츠에서 아시안이 별다른 이유 없이 서사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최근에 그 경향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시리즈에 쓸 캐릭터들을 찾으면서 유색 인종, 특히 아시안이 얼마나 없는지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을 비춰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수준이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서사를 가진 캐릭터를 찾기 어려웠다. 이렇게 혹독한 상황에서 <보잭 홀스맨>의 다이앤은 빛을 발하는 아시안 캐릭터다. 아시안에 대한 편견을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아시안.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시안으로서 당하는 차별과 가진 문화적 맥락이 삭제되지도 않는다. 작중 지나가는 새끼가 '칭찬' 삼아 말했다고 주장하는 "곤니치와, 프린세스 뮬란." 에 "첫 번째로 곤니치와는 칭찬이 아니라 일본어로 '안녕'이라는 뜻이고, 둘째로 나는 일본인이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모습은 <보잭 홀스맨>의 크리에이터가 백인 남성이라는 걸 잊게 할 만큼 좋았다. 주요 캐릭터 중 유일한 인간형 캐릭터가 아시안인 다이앤이라는 것도 <보잭 홀스맨>의 특이하게 좋은 점 중 하나다. 

다이앤의 유일한 특성이 아시안이라는 게 아니라는 점이 좋다고 말해 놓고 다이앤이 얼마나 좋은 '아시안' 캐릭터인지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이앤은 복잡한 캐릭터다. 일례로 다이앤은 완벽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다. 다이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공공연히 선언하고,  페미니즘을 다룬 에피소드들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한 기준은 놀라우리만치 낮다'거나, '미국은 총을 사랑하지만 그것보다 더 여성을 미워한다'는 대사 같은 것들을 보면 그가 페미니즘 계도물의 '똑 부러지는 페미니스트'의 전형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이앤은<보잭 홀스맨>에서 대놓고 여성혐오자로 묘사되는 보잭의 가까운 친구이고, 전혀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쇼 <필버트>의 '여성 시각 슈퍼바이저'로 거의 이름만 빌려주는 데 동의하기도 하며, 여성 연예인에 대한 가십을 싣는 자칭 걸 파워 언론사, 타칭 여초 황색언론에서 일한다. 다이앤은 글을 써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불의를 못 참지만 동시에 무엇이 '불의'이고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한다. 

이런 다이앤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현실 속의 페미니스트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 찬 사람이기 마련이다. 자신과의 화해에 어려움을 겪으며 일상적으로 우울과 싸우는 다이앤의 면면은 나를 비롯한, 자신만의 이유로 '나쁜 페미니스트'인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쉽게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일이 조금만 덜 풀려도 좌절하는 사람, 잇츠 미! 주변과 때때로 타협하지만, 그리고 자주 방향을 잃지만, 굴하지 않고 언제나 옳은 일을 하려고 하는 연약하지만 올곧은 의지는 다이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5. 테이스티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살아 숨쉬다 못해 미쳐 날뛰는 여성 캐릭터들의 쇼,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어떤 캐릭터를 '최애'로 꼽을지 오래 고민했다. 하지만 마지막 시즌을 본 이후 나는 이제 망설임 없이 테이스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에는 푸쎄와 테이스티, 니키 중에서 고민했다. 사실 나는 평균 시청자들에 비해 파이퍼도 좀 좋아하는 편이다.) 

쇼 초반의 테이스티는 긍정과 흥겨움의 아이콘이다. 춤을 추며 복도를 걸어다니고, 감옥 안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지낸다. 중간에 출소했다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부러 다시 감옥으로 들어올 만큼, 감옥 안과 그 안의 사람들을 편하게 여긴다. 물론 이것은 테이스티가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형벌 시스템이 수감자들의 재사회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 테이스티에게 미안하지만- 테이스티가 웃음을 잃는 시즌5 - 그러니까 푸쎄의 죽음 이후- 부터 테이스티를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리더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발휘하는 때이기도 하다. 

사실 테이스티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수감자들 중 가장 똑똑한 인물이라는 것은 쇼 초반부터 암시되어 왔다. 그는 푸쎄와 함께 감옥 도서관을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고, 취업 인터뷰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한다. 그는 실제로 카푸토의 비서로 채용되어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또 그의 리더십 역시 감옥에서뿐 아니라 수감되기 전 소속되어 있던 일종의 '가출팸'에서 도 증명되어 온 것이다. 테이스티는 저소득층의 흑인이라는 배경에 의해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을 잃어버린 대표적인 인물이고, 그런 배경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미국 사회의 폭력과 몰이해를 대표한다. 미국 사회가 정말로 순도 100%의 능력주의였다면, 테이스티는 애초에 감옥이 아니라 워싱턴DC에 있었을 것이다. 

시즌5에서 본격적으로 폭동이 시작되자 그는 수감자 중 거의 유일하게 본래의 목표 - 푸쎄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 를 잊지 않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테이스티가 원래 감옥 속 흑인 그룹의 리더이기는 했지만, 시즌5에서 그는 리치필드 감옥 폭동의 리더로 우뚝 선다. 감옥 앞에서 치토스를 불태우며 한 연설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폭동이 끝나고 그 의의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던 테이스티가 아무 죄도 없이 피스카텔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테이스티가 감옥 안을 편안해했다고 해서 나갈 기약이 없는 무기징역수가 되기를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사람이 추풍낙엽처럼 죽어 나간 시즌7에서 테이스티의 자살 시도는 가장 개연성 있는 죽음에의 시도였지만, 나는 그가 살아서 기뻤다. 그가 꿋꿋이 살아가며 수감자들의 교육과 처우 개선에 앞장서는 것을 보고, 그런 두꺼운 절망 아래에서도 자신만을 위한 숨구멍을 뚫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며 나는 많이 울었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까지 겪은 일을 보면 시즌1에서 테이스티의 긍정 역시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시즌7 엔딩에서 그의 웃음과 활기찬 태도는 보고 있기만 해도 눈물이 줄줄 날 정도다. 살아갈 용기를 갖고,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 테이스티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가장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다. 

+ 테이스티는 당연히 나와 달라서 좋아하는 인물이다. 나와 제일 비슷한 인물은 아무래도 파이퍼나 소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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