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이 속한 조직의 이름은 천랑성(天狼星). 한국에서 봤을 때 겨울 남쪽 하늘에 뜨는 별의 이름이었다. 예쁘게 포장하자면 그림자를 때려잡아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조직이었고, 날것 그대로 말하자면 그림자를 때려잡으면서 그림자가 빙의한 사람도 같이 죽이는 무자비한 조직이었다. 두목, 보스, 마스터, 오야붕, 선생님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우두머리 천남성은 정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의 행위를 국가가 눈감아주는 대신 정권에 따라 적절히 제약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정부와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의 존재를 대중에 밝히는 순간 혐오범죄와 공포로 사회가 엉망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판데믹 상황과 맞물리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터였다.

더 문제는 그림자의 속성 자체였다. 그것은 순도 높은 욕망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숙주삼은 인간의 몸에 상처를 낸다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그림자가 상처를 메워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쓰러뜨리려면 인간의 몸에 낸 상처와 함께 그림자도 같이 찢어야만 했다. 하지만 평범한 것들은 그림자를 찌를 수도 찢을 수도 구멍을 낼 수도 없었다. 말인즉, 평범한 인간은 절대 그림자를 쓰러뜨릴 수도, 격퇴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그들이 어떤 수를 써도 이룰 수 없는 것만이 욕망을 찢을 수 있다.

물론, 평범한 인간도 그림자를 파괴할 방법이 있긴 했다. 숙주의 몸을 한 순간에 증발시키는 방법이 그 하나였다. 다만 그림자 하나 없애자고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는 돈과 편의를 제공하고 천남성은 조직을 굴려 그림자를 억제해왔다. 그렇게 맺은 결속은 역사도 깊었고 공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천남성과 천랑성은 무엇인가? 천남성은 1000년을 살아온 자였다. 혹자는 흡혈귀라고 했고 혹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가 여성임을 집어 구미호가 아니냐 했고 누군가는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 마법사라고도 했다. 그가 마법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진리를 깨우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천랑성은 그런 천남성이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특수한 자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혹자는 진짜 흡혈귀였고 혹자는 늑대인간이기도 했다. 반요괴인 자도 있었고 우현처럼 어떤 일을 겪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자들도 있었다. 보통의 인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오래 사는 자들, 혹은 불멸의 생을 사는 자들에게 일정기간에 한 번씩 신분세탁을 해주며 관리했다. 소속되어 있기만 해도 일정 금액이 나왔고, 그림자를 잡았을 때 나오는 고강도 탄소조각을 가져가면 현금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적임자라 생각되는 인물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고난이었다. 한 곳에서 10년 이상 머물 수도 없었고,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도 없었다. 만나도 금방 헤어져야만 했고 언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신분문제 역시 큰 문제였다. 끝까지 자급자족 할 것이 아닌 이상, 그는 국민으로서 신분증명을 해야만 했고, 그 수단은 한정적이었다. 언제나 혼자라는 외로움과 싸워야만 했고 거처를 갖고 일을 하며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일정 기간마다 신분을 세탁해주고 소속감을 제공해줬다. 하는 일도 크게 보자면 세상을 지키는 일 비슷했다. 업무도 적성검사를 통해 적절한 곳에 배치해줬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는 없어도 잘 하는 일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직원들의 충성도가 높았다.

우현 역시 천남성을 처음 만나 조직에 소속된 초반엔 나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1265년에 만나 대충 850년쯤 지내니 감사와 충성심보다는 은퇴를 시켜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더 컸다. 850년치 퇴직금만 주면 감사하겠다며 계산을 요청했지만, “죽을 때까지 은퇴는 불가능하므로 퇴직금 계산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믿기지 않는 대답을 받고선 아연해져서 한동안 업무 보이콧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자는 동안 마법사인 천남성이 집에 결계를 걸어 집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3개월간 비자발적 자가격리를 당한 우현은 울면서 일 잘 할 테니 바깥에 나가게 해달라며 하루를 꼬박 빌어서 겨우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 다시는 은퇴나 보이콧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론 죽기 전에 퇴직한 인물이 없지도 않았고 그를 조직에서 쫓아다니며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려면 퇴직금도 없이 해외로 도주해야만 했다. 말인즉슨 국내에서는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악덕업주 같으니라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현은 투덜거렸다. 한숨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은근슬쩍 욕을 해봐도 가라앉은 마음은 미동도 않고 엘리베이터처럼 아래로아래로 침몰해 검은 바닥에 내려앉아 묵직하게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렸다.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어떻게 해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지하 5층입니다, 건조한 안내음성이 나오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창백한 색의 조명이 빈틈없이 안을 비추고 있는 엘리베이터 내부와 대조적으로 지하는 상당히 어두웠다. 조명이라곤 건물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에 달린 노르스름한 간접등과 바닥에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에서 나오는 은은하고 붉은 빛이 전부였다. 둘 다 조도가 낮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시계가 훅 어두워졌다. 우현은 눈이 적응하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거 하나 못 해내다니.”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지하 5층 전체를 쓴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난반사되며 어지럽게 울렸다. 우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시체는 내가 빼앗긴 게 아니야. 문책할 거면 무아를 문책해.”

변명을 하며 우현은 여자의 옆에 섰다. 여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앞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에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굳게 다문 입술은 의지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천남성“

우현이 그를 불렀다. 그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버릇없게 맹주의 이름을 막 부르다니, 무슨 짓이야. 임무도 실패한 주제에.”

“못한다는 걸 억지로 맡긴 쪽이 잘못한 거지.”

우현의 말에 천남성이 픽 웃었다. 그는 팔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일련의 동작을 하곤 다시 팔을 제자리에 두었다. 두 눈은 우현을 보는 일이 없었다.

“네가 임무를 성공시켰다면 내게 큰절을 세 번은 했을 텐데 제 복을 차는 걸 내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지. 이런 멍청이를 여기까지 끌고 와 준 것만 해도 용하지. 능력도 좋고 성격도 좋은데 인류를 구할 치료제를 길바닥에 내버릴 신우현을 거둔 것이 일생의 불운인 여자라. 불쌍하기도 해라.”

“......”

우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로는 이러니저러니 했어도 그도 여러모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임무를 실패한 것에도, 소율을 죽인 것에도, 치료제를 건지지 못한 것에도. 그가 놓친 것은 그저 최소율의 목숨과 그냥그런 약이 아니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일 수도 있었다. 비단 유행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료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는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사람들일 터였다. 그리고 우현의 마음에선 그 중 최소율의 목숨이 가장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밤은 악몽이 예약을 잡아놓고 있었다.

“최소율을 습격한 것은 그림자였어. 알고 있었나?”

우현이 묻자 천남성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은 욕망이 폭발하는 시기야. 불안과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고, 이전이라면 평화로웠을 사람들의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욕망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어. 그림자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천남성이 말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그림자들이 진화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라는 거지.”

우현은 그렇게 말하는 천남성의 옆얼굴을 봤다. 아담한 체구에 20대 초중반쯤 돼 보이는 오밀조밀한 얼굴, 작은 손발을 하고서 그는 언제나 큰 그림을 봐왔다.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으며 한 나라 사람들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는 지금처럼.

“이제 그림자들이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됐단 말이야?”

우현이 묻자 천남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보단 더... 아, 집중 안 되니까 이제 말 그만 걸어.”

부를 때는 언제고. 우현은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욕망을 억제하는 술식을 걸어도 사람들은 욕망에 잠식당했다. 마스크 공장을 습격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끊임없이 도둑질을 했다. 당장 물품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불안이 고조되면서 물품을 집에 쟁여놓고도 또 털었다. 기본소득과 노동임금만으로는 ‘충분히 만족할 만큼’ 생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질병은 극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공권력은 상당히 기울어진 모양새로 돌아갔다. 원래는 인력으로 돌아가던 것이 대부분 AI로 대체된 까닭으로, 여태까지 인류가 그래왔듯이 차별의 빅데이터가 입력된 AI도 차별적으로 굴게 된 것이다. 물론, 인력은 자정의 노력이나 대쪽 같은 인물이 내부고발을 하거나 언론에 폭로하여 차별을 수정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어 어느 정도 조율이 되었지만, ‘공무를 수행하는 AI‘는 그렇지 않았다. 몇 개 기관에서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이 전국으로 퍼졌고,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대부분의 것들이 마무리되었다. 덕분에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은 공권력에 대한 기대를 진창에 처박았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생존 앞에서 사적 구제를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 시대에서 천남성은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만든 조직은 조폭이나 다름없는 무력집단이었지만 어떻게든 인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우현 역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우현은 천남성에게 다시 말을 걸어볼까 싶어 그의 옆얼굴을 봤지만, 이미 아득히 그려진 마법진을 바라보며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 이지안 말인데”

무심히 내뱉은 이름에 우현의 귀가 번쩍 뜨였다. 목이 아플 정도로 홱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천남성은 그를 보지도 않으면서 심드렁히 말했다.

“단서를 찾은 것 같아. 좀만 더 기다려봐.”

두근. 그 이름에 반응하듯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우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이름인가. 1500년간 단 한 시도 잊지 않았던 그 이름이었다. 그 때문에 불로불사의 몸이 되고 나서 우현은 아주 길고 고단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를 찾아 전세계를 뒤지고 다니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필 왜 이런 시기에? 질병으로 몰락해가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과거에서 답을 찾았던 것일까?


지상으로 올라오자 바닥 광택과 유리로 번쩍번쩍 빛이 나는 빌딩 로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보살, 아니 무아가 우뚝 서 있었다. 핸드폰을 한 손에 들고 서 있는 폼이 소율의 시신을 빼앗기고 임무를 실패한 사람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였다. 우현은 순간 얼굴을 구겼다.

“야단 잘 맞고 왔어?”

무아가 먼저 우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우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조금 비켜 무아를 맞았다.

“시신은 왜 뺏겼어?”

우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되물었다. 무아는 태연히 어깨를 들어올렸다.

“유가족이 경찰 대동하고 왔는데 어떻게 버텨? 공무원 죽이면 안 되는 거 몰라?”

우현은 무아의 말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재빨리 시체를 갖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네가 치료제를 가져올 거라 생각했었고.”

무아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우현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원론적으론 맞는 말이긴 했다. 시신을 유가족에게 돌려줘도 치료제만 찾아왔으면 됐을 일 아니냐. 결국 누구 혼자만의 실패는 아니란 얘기였다.

“네가 실패했더라도 장례식 하는 동안 시신을 빼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식도 없이 곧바로 화장을 할 줄은 몰랐지. 유가족이 이렇게 대놓고 수상쩍기도 힘들어.”

치료제 확보에 실패하고 시신을 당연히 챙겼을 거라 생각한 우현은 별도의 연락 없이 본부로 곧바로 돌아왔었다. 그때서야 둘 다 실패했단 사실을 안 무아와 우현이 유가족을 찾아갔지만, 그땐 이미 소율의 시신은 불타고 있었다. 둘은 소득 없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최소율 집에 갈 건데 같이 갈 거야?”

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의 집이나 연구실이나, 혹은 다른 어딘가에 치료제의 데이터가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거라도 확보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염병을 끝장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매일 감염자와 죽음의 숫자를 확인하는 짓거리를 이젠 끝내고 싶었다. 그는 무아와 함께 지하주차장에 세워놓은 무아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익숙하게 글러브 박스를 열어 과자 하나를 꺼냈다.

“먹지 마! 부스러기 흘러!”

“......(와작)”

“아, 먹지 말라고!”

무아는 가볍게 짜증을 내며 내비에 목적지를 찍었다. 우현은 처음 보는 주소였다. 송파에 있던 그 집은 자가가 아닌 모양이었다. 친정집이나 시가, 혹은 차명으로 빌린 집이었을 것이다. 우현은 과자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소율의 죽음은 이상했다. 그림자가 그를 쫓아 기어코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그랬고, 유가족이 나타나 시체를 가져가 불에 태웠다. 마치 천랑성에 뭘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화장을 한 것도 이상했다. 한때는 화장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산화탄소와 미세먼지 배출에 관한 법률로 2032년에 금지되었다. 매장할 곳도 없고 다른 시체들과 같이 한꺼번에 묻어두기 싫어서 암암리에 화장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불법은 불법이었다. 현재 가장 중요한 토픽인 감염병의 치료제를 만들 정도의 엘리트를 배출해낸 집이 그렇게 가난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남은 답은 유가족이 그림자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뿐이었다.

“찾아온 유가족들은 관계가 어떻게 됐어?”

우현의 질문에 무아가 그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음, 잘 모르겠는데. 남편 같아 보였는데.”

“안 물어봤어?”

“우리 사이에 경찰이 여섯 명, 운전기사 한 명이 버티고 있었거든.”

“경찰은 왜 그렇게 많이 온 거야?”

“물었더니 도로를 이 꼬라지로 만들어 놓고 정말 궁금해서 묻냐던데?”

“......”

도로를 그 꼬라지로 만들어놓았던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혼자 임무를 보낸 천남성이 나빴다. 우현은 잠시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집에 데이터가 남아있을까?”

우현이 가로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알 수 없지. 비밀번호 걸어놨어도 해킹툴 가져왔으니 있는지 없는지 확인은 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유가족들은 전부 장례식장에 가 있을 테니까. 아, 마스터키도 가져왔어.”

꼼꼼하게도 챙겼네. 

한동안 차를 몰던 둘은 한남동의 고급 주택 앞에 멈춰섰다. 무아가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던 최소율의 집이었다.

우현은 최소율에 대한 인상을 다시 정립해야만 했다. 솔직히 잘 사는 집 사람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설마 한 집의 담벼락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고, 그게 최소율의 집일 줄도 정말 몰랐다. 주택 터가 어림잡아 200평은 될 것 같았다. 서울 안에서 이런 대저택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터였다.

차에서 내리자 명패도 없는 대문이 둘을 반겼다. 대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 위에서는 CCTV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현은 피로한 얼굴로 카메라를 흘끔 보고는 대문 잠금장치로 시선을 돌렸다. 무아가 마스터키를 대자 삑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 사이로 널찍한 잔디밭과 정원수가 보였다.

“난 부자가 싫어.”

부지로 들어서며 무아가 투덜거렸다.

“자격지심이야.”

“1500년 프롤레타리아 외길인생을 산 사람이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무현의 빈정거림에 무아가 받아쳤다. 평소의 티키타카가 그랬기에 그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부자가 싫었다. 하지만 소율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무아가 현관을 여는 것을 보며 못마땅한 기분을 안으로 삼켰다.

부지에 비해 집 자체는 작았다. 물론 작다고 해도 1층에만 방이 세 개에 거실과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이 있었다. 방문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방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드레스룸이나 화장실은 제외하고 말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이기도 했다. 인테리어 방송에나 나올 법한 내관이었는데, 신축에 인테리어도 물건도 모두 새것이었고, 먼지 하나 없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돈되어 있는데도 묘하게 생활감이 느껴지는 게 아주 쾌적하고 편안한 느낌을 줬다. 아마 집주인은 대충 살고 사용인이 그걸 열심히 청소해 최고의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최소율에 대한 인상도 결벽적으로 정리정돈하고 청소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 시동생이었나 본데? 찾아왔던 남자랑 닮았지만 다른 사람 같아.”

무아가 벽난로 위에 얹힌 사진을 보며 말했다. 소율은 남편과 아직 어린 아들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현은 그걸 슬쩍 본 후 입을 꾹 다물고 방문을 열었다. 굳이 그 사진을 보며 죄책감을 증폭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데이터가 먼저였다.

그는 일단 침실로 들어갔다. 소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치료제 데이터를 거실이나 주방에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저장매체는 데스크탑이나 랩탑 하드, 태블릿pc 하드, 마이크로SD카드, 클라우드 같은 것일 터였다. 컴퓨터나 태블릿은 쉽게 눈에 띄니 찾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SD카드가 문제였다. 너무 작아서 찾기가 힘들었다. 무식하리만치 꼼꼼히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율이 갖고 있던 건 없었나?”

우현은 침대 주변을 살피며 무아를 향해 소리쳤다.

“핸드폰과 지갑은 챙겨서 연구팀에 넘겼어.”

“결과는?”

“뭐가 나오면 나한테 연락한댔어.”

우현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을 갖고 있다면 최소율의 클라우드나 핸드폰에 저장된 여러 가지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인터넷상에 있는 관련 정보는 그쪽 팀에서 모을 것이다. 그렇다면 둘이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업로드하지 않은 정보를 찾는 것이다.

둘은 1층을 빠르게 수색했다. 볼 수 있는 곳들은 모두 확인했다. 적어도 침실이나 운동방(세 개의 방은 각각 부부침실, 게스트룸, 운동기구들이 놓인 운동방이었다.)에는 뭔가가 있을 줄 알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와중에 집밖으로만 나돌았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안방에서 남자의 속옷이 한 뭉치 없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게 끝이었다.

둘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1층과 달리 거실이 없었다. 거실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방은 세 개가 있었는데, 둘은 서재, 하나는 아이의 방이었다. 아이의 방은 유일하게 정돈이 되어있지 않았다. 침대며 책상에 아이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옷장도 열어보니 옷을 뒤져 꺼내간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현은 시선을 들어 아이의 방을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채광이 좋은 방이었다. 옅은 초록색으로 도배된 방에 널찍한 책상과 고급 의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엔 아이가 보던 책이 삐뚜름하게 놓여 있었다. 필기를 하고 있었는지 요즘 세상에 드물게 샤프펜슬이 놓여 있었다. 책상 옆엔 상당히 큰 책장이 있었는데, 동화책은 한 권도 없었다. 대신 자그마한 아이의 침대에 비해 유난히 성숙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분야는 다양했다. 일반 고등학생이 보는 교재부터 시작해서 역사, 수학, 철학, 경영, 경제, 기후, 복지, 정치 등의 서적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 칸에 아이의 취향이 반영된 듯한 공룡대백과사전과 소설과 위인전, 드로잉북이 꽂혀 있었다.

우현은 아이 침대를 다시 봤다. 역시 시트며 이불이 흐트러져 있어 아이가 여기 머물렀던 흔적이 보였다. 베개에는 아이의 연한 머리카락이 있었다. 안방 침대에는 없던 것이었다.

“부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좀 된 것 같은데. 아이는 계속 있었던 것 같고.”

우현은 아이의 침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애가 영재인지 뭔지였던 것 같아. 학대에 가까워 보이는데?”

무아가 답했다. 우현도 느끼던 것이었다. 집이 작은 감옥처럼 느껴졌을까? 하지만 주방에 아이를 위해 만들어놓은 전용 의자와 아이를 위한 수저와 식기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싱크대와 찬장 안에는 아이가 먹을 법한 음료와 파우더, 간식들이 있었다. 안방 드레스룸과 화장실에도 아이를 위한 여벌옷과 물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 방은 이렇다니 이상했다.

“다른 방도 가 보지.”

우현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바로 옆방이 서재였다. 둘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서재였다. 벽면 가득 여러 언어로 적힌 전공서적이 가득했고, 몇 번이고 봐서 손때가 묻은 종이뭉치들이 아무렇게나 쑤셔박혀 있었다. 꽤나 넓은 공간이었는데도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서 어디든 틈이 있으면 테트리스를 하듯 책과 파일들, 종이들을 끼워놓은 곳이었다. 다만 그 중 책장 하나는 어린이용 위인전과 소설, 동화책, 시집, 만화책 등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아이 방과 책꽂이 하나가 바뀐 것 같은데?”

무아가 중앙의 책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우현도 동감이었다. 다만 왜 이런 배치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재의 주인이 아이를 매우 아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도구를 쓸 때가 왔군!”

무아가 즐거워하며 해킹 툴을 꺼냈다. 원목 책상 아래쪽, 서랍처럼 생긴 수납장을 열자 데스크톱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원을 켜고 자리에 앉아 느긋이 부팅이 되길 기다렸다.


「생체 데이터를 입력해주세요.」


로그인 메시지가 뜨자 그는 얼른 툴을 연결했다. 툴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곧 로그인 성공 화면이 나타났다. 작게 환호를 지른 그는 가져온 하드에 연결해 본체 데이터를 통째로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 혹시 모르니 종이로 된 연구자료도 찾아보지.”

우현은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뒤져서 보긴 했지만 그는 곧 작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화학식이나 염기 배열을 본다고 뭘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봐도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었고, 무엇에 대한 연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소율이 제목이나 알기 쉽게 적어놨기를 바라며 무작정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곧 무아도 그 작업에 합류했다. 어차피 수백 엑사바이트(EB;1018바이트. 1TB의 백만 배)를 다운로드하고 있는 동안 그도 할일이 없었다. 데이터 다운은 어차피 기계가 알아서 한다.

우현은 페이지를 촤르륵 넘기면서 옛날 판타지 영화와 SF 영화를 떠올렸다. 마법의 가방에 쓸어담거나 사람과 짐을 한꺼번에 공간이동 시키거나 하던 것이 예전 사람들이 미래 기술에 가졌던 꿈이자 희망이었다. 하지만 기술 발달이 그렇게 편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고(의존도는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바퀴를 이용해 자동차를 끌고 다니며, 이삿짐은 사람 손으로 옮겼다. 그걸 모두 ‘SF적’으로 바꾸기엔 남은 자원과 대기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인류는 21세기에서 그리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역시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이 맞았다. 전부 쓸어가서 연구실 놈들에게 보여주면 걔네들이 알아서 뒤져볼 텐데! 그런 눈에 띄는 짓을 했다간 천랑성이 최소율의 집을 털었다고 그림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가 날 것이다.

아니, 잠깐, 왜 안 돼? 어차피 최소율을 데려가던 시점에서 다 알고 있던 상황 아니었나?

“아날로그 기록은 차로 싣고 가서 연구소에 째로 넘기는 게 어때? 우리가 봐봤자 모르잖아. 어차피 단행본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테고, 종이뭉치로 된 것만 가져가면 될걸.”

우현은 턱 소리 나게 보던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제법 두터운 종이더미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런 자료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와중에 무아는 비상금 10만원을 발견했다. 그가 재킷 주머니에 돈을 쑤셔넣는 것을 보며 우현이 눈으로 그를 비난했다.

“왜?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비상금이야. 푼돈 터는 재미로 한 번 해보지 그래?”

“그만둬. 부처님 얼굴을 하고 못 하는 말이 없어.”

우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데이터는 다운로드 중이었다. 혹시 다른 저장매체가 있는지 책상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비상금을 또 찾은 무아를 뒤로 하고 그는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도 서재였다.

마찬가지로 상당히 고풍스러운 느낌의 서재였다. 원목으로 된 튼튼하고 무거워 보이는 책장에 장서들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책도 크기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주로 하드커버 종이책들이었다.

원목으로 된 묵직한 책상 위엔 모니터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모니터 왼편으로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고, 오른편엔 볼펜과 이제는 보기 드물어진 만년필이 꽂힌 연필꽂이와 명함꽂이가 놓여 있었다.


‘도일건설 대표이사 이민현’


명함을 꺼내 본 우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도일건설. 도일그룹의 계열사였다. 길을 다니다 보면 도일건설에서 지은 아파트 브랜드를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 기업이었다. 도일그룹 자체가 글로벌기업으로 전자, 건설, 유통, 의류, 식품, 요식업, 자동차, 보험, 엔터테인먼트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기업집단이었다. 그 중 전자와 건설, 유통이 알짜배기로 회장의 장녀, 장남, 차남이 운영을 맡고 있었다. AI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몇 개의 안으로 묶어 선택지 몇 개를 추천하고 그 중 하나를 고르는 정도를 운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민현은 그룹 회장 이상회의 자식들 중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우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최소율이 재벌가 사람이었다니. 그리고 그 남편이 그림자와 관련이 있었다니. 그는 그림자의 지갑에서 봤던 명함을 떠올렸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소율은 남편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그는 서재를 샅샅이 뒤졌지만 딱히 단서를 더 찾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싣자!”

종이뭉치 뒤지기에 지쳤는지 밖에서 무아가 채근했다. 우현은 명함을 하나 챙겨 주머니에 넣고 서재를 나섰다.



SF를 읽으며 앞으로 저장매체가 어떻게 발달할지를 봤어야 했는데 바이러스 쪽으로만 자료조사를 해서 너무나 2020년대스러운 저장매체들이 나열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 뒤가 올라올지는 모르겠네요. 언젠가 쓰긴 써야 할 텐뎈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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