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정국은 귀비와 함께 있던 황제를 제일 처음 붙잡아 감금했고, 도망가던 황후도 손쉽게 잡았다. 동시에 권세만 믿고 기세등등하던 황후와 태후 집안의 모든 이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잡는데 성공했다. 황궁의 모든 병사가 정국에게 투항했고 조정은 정국의 등장을 반겼다. 황제의 폭정에 질렸던 모두가 새로운 황제가 될 이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상황을 정리한 후 정국이 제일 먼저 신경 쓴 곳은 국경이었다. 지방 각 관아와 변방에 파발을 보내어 상황을 알리고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할 것을 명했다. 정국이 황제이름으로 첫 행한 일이었다.

남준과 최 장군에게 다시 보고 받던 정국은 태후가 저를 데려오라며 난동을 부린다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해야 할 일이 얼추 끝났으니 유 태비와 석진을 보러 왕부에 들리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보시는 게 어떠하실 지요.”


태후는 정국이 황위에 오른다 한들 자리에는 변화가 없었다. 선제의 황후였으니 정국에겐 적모(嫡母)가 되어 그대로 태후 자리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정국의 생모인 유 태비도 태후 자리를 받겠지만 이럴 경우 생모보다 적모의 위치가 더 높았다. 남준은 이를 생각해 정국에게 권한 것이었다. 한숨을 쉬던 정국은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들렸다가 왕부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최 장군은 정국이 왕부로 나갈 때를 대비하러 갔고 남준은 정국을 따라 태후궁으로 갔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태후궁에는 불이 훤히 켜져 있고 군사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었다. 정국이 안으로 들어서자 지키고 있던 이가 달려와 인사했다. 정국은 눈으로 인사하고 바로 전각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여러 상궁의 손에 붙들려 있던 태후가 정국을 발견하고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정국은 그럼에도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태후 마마,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네 놈이 감히!!! 감히 역적질을 해?!!!”

“…………”

“첩년의 자식 주제에 황제를 자리를 넘보다니!!!”


태후가 전각 안이 떠나가라고 쩌렁쩌렁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덕분에 태후를 붙들고 있는 상궁들이 한 차례 같이 넘어졌다가 다시 붙들고, 다시 내쳐졌다가 붙들기를 반복했다. 정국은 날뛰는 태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관들이 내온 의자에 앉았다. 태후는 그런 정국에게 달려들 것처럼 손을 뻗었다가 저를 붙잡고 있는 상궁들에게 제재 당했다.


“네 놈이 이리 나올 것을 내 알고 있었다!!!”

“………”

“그 시꺼먼 속을 다 알고 있었단 말이다. 그때 우물에 가둬 다 처리했어야하는 건데.”


우물 이야기가 나오자 정국은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정국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 틀어졌다. 의자 손잡이에 올려 진 주먹이 동그란 모양으로 가볍게 말렸다. 이를 모르는 태후는 네 놈의 역적질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거라면서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기운이 다했는지 숨을 헐떡이는 태후에 정국이 입을 뗐다.


“아바마마께서 제게 황제가 되라는 칙서를 남기셨지요. 아무래도 형님이 미덥지가 않으셨나 봅니다.”

“뭐라고? 네 놈이 어디 함부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그래봤자 첩 놈의 자식이 어찌 적자를 넘어 황제가 된다는 말이냐!!”

“걱정 마세요, 소자가 황제가 되어도 태후께서는 여전히 태후이실 겁니다.”


정국이 생긋 웃었다. 태후를 폐하거나 유배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태후궁에 유폐하여 그리 끔찍이도 아꼈던 제 아들과 며느리의 최후를 지켜보고 또 저와 석진이 황제와 황후가 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게 할 셈이었다. 그것이 태후에게 가장 큰 형벌이 될 것이니.


“오래오래 사셔야지요. 그래야 저와 제 비가 행복해하게 사는 것을 오래오래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정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왕부에 소식을 전하러 갔던 파발이 돌아왔다고 남준이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왕부 소식을 듣고 더 늦지 않게 왕부에 들려야겠다. 정국이 그리 마음먹고 등을 돌렸다.

정국의 등이 보이자 태후가 상궁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정국에게 그대로 달려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거셌다. 하지만 정국은 더 재빨랐다. 뒤돌아 태후의 팔을 붙잡은 정국이 가볍게 뿌리쳤다. 그러자 태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먼지를 털어내듯 정국이 태후가 잡았던 옷을 털어냈다.

네 놈!!! 울부짖는 태후의 눈이 끝내 핏줄이 터졌는지 새빨갰다. 정국은 뒤에서 울부짖는 태후를 무시하고 전각을 나서려고 했는데 쿵, 쿵하고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태후와 눈이 마주쳤다.


“네 놈이 원하는 건 결국 다 얻지 못할 것이다. 네 손안에서 모래처럼 흩어질 것이야!!!!”


그렇게 저주하고는 태후에 정국은 말없이 돌아섰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황위는 원래 정국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도 그러했다. 정국이 내내 원해온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모든 것을 손에 틀어쥔 이 순간까지도.

정국이 태후 전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이가 다가와 정국에게 고했다. 군사로 겹겹이 지키고 있던 왕부는 이 혼란 속에서도 무탈했다.


“다들 무사하신데, 비께서 탈진하셨다 합니다.”

“부인이? 의원은 불렀다더냐.”

“예. 긴장이 풀어지셔서 그리하셨다합니다.”


의원을 불러 진맥하였는데 온종일 마음을 졸였던 마음이 풀어져서 기력이 떨어졌다고 했다. 다행히 쉬면 나아진다고 했다니 정국은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분명 석진은 제가 나간 뒤 계속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느라 기력을 다 쓴 것이 분명했다. 정국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태후의 말도 안 되는 악다구니를 듣고 있었더니 그 무엇보다도 석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폭신한 이불 안이 따듯했다. 방 안도 훈훈한 것이 설아가 화로에 탄을 채워준 것 같았다. 석진은 온 몸이 노곤해서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지만 뺨에 닿아오는 손등에 눈꺼풀을 꾹 밀어 올렸다. 가물거리는 시야로 남색 침의를 입은 정국이 보였다.


“……전하.”


자다가 막 깨어선지 목소리가 탁했다. 석진이 목을 가다듬는 사이 곁에 앉아있던 정국이 다시 한 번 뺨을 쓸어주었다. 왕부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잠들어 있는 석진을 확인했다. 그저 기력이 떨어졌을 뿐 건강에는 이상 없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정국이 마음을 놓았다. 이어서 유 태비께 인사를 드리고 정화에게도 들른 후 옷을 갈아입고 석진의 곁에 한참을 앉아있었던 차였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언제 오셨어요. 깨우시지 않고요.”

“탈진하지 않으셨습니까. 쉬셔야 합니다.”


석진이 내내 기다리다가 탈진하였다는 말을 어미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유 태비는 석진이 우리 모자에게 해주었던 그 많은 일들을 절대 잊지 말라고 정국에게 당부했다. 격랑 같던 세월 속에서 석진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견딜 수 있겠냐고 하면서. 정국은 그에 동의하면서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리 유 태비를 안심시키는 말에는 정국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석진이 몸을 일으켜 앉는 것을 정국이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물을 가져오게 했다. 물을 마신 석진은 한 결 잠기 가신 얼굴로 제 곁에 있는 정국을 바라보았다. 정국은 석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입을 떼었다.


“이제 좀 더 주무세요. 아직 시간이 많이 이릅니다.”

“전하께서도 눈을 붙이셔야죠.”

“……어쩐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큰일을 치러서일까. 아니면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정국은 바싹 곤두선 신경에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앉아있던 석진은 아무 말 없이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한 참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그 눈 안에 담긴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석진이 손을 뻗어 정국의 팔을 붙잡았다.

붙잡은 팔을 끌어당기며 석진은 자리에 누웠다. 정국도 석진에게 이끌려 순순히 자리에 누웠다. 작은 이부자리에 두 사람이 모로 누워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석진은 이불을 끌어당겨 정국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어깨까지 이불을 덮은 석진이 손을 뻗어 앞으로 쏟아져 내린 정국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카락 뒤에 숨겨져 있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고요히 빛났다. 석진은 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정국에게 물었다. 자리를 내오라고 하면 될 일이긴 했지만 오늘은 이렇게 있고 싶었다.


“따듯하시지요?”

“예, 따듯합니다.”


두 사람의 체온으로 이불 안이 따듯했다. 밖은 겨울이 한참인데 이 방 안에는 어느새 봄이 온 것 같이. 고생하셨다며 큰일을 치루셨다고 속삭이는 석진의 목소리는 어느새 잠이 묻어 있었다. 따듯한 이불 속에 들어오니 몸이 노곤해진 모양이었다. 점점 늘어지는 말소리와 감기는 눈꺼풀에도 정국은 석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석진이 잠에 들자 정국은 손을 뻗었다.

태후는 정국이 원하는 것은 다 얻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하지만 태후는 죽어도 깨어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정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미 이렇게 정국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석진만 이렇게 제 옆에 있어주면 된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지친 밤, 저를 이렇게 위로 해주며 기꺼이 제 곁에서 재워주는 석진이 있으면 됐다.

끌어안자 익숙한 듯 품에 안겨오는 석진이 세상 무엇보다도 따듯했다. 마른 등을 끌어안으면서 정국은 석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오지 않던 잠이 석진의 곤한 숨소리와 함께 스르르 파도처럼 흘러 들어왔다. 눈을 감으면서 정국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석진의 체취가 가득 밀려들어왔다.

 





정국은 감국(監國)이 되었다. 감국이란 나라를 굽어 살핀다는 뜻이었다. 정국이 황제로 정식 즉위하기 전까지 마땅히 드높은 직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신하들이 지어 올렸다. 아직 황위를 이어받은 것은 아니기에 황색 용포는 입지 않았지만 검정색에 금박을 입힌 용포를 입었다.

감국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은 백성들에게 과하게 부과된 세를 줄이는 일이었다. 이어서 태후와 황후의 집안의 가산을 몰수했고 그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관료에 오른 이들을 가려내 모두 잡아 들였다. 황제를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고 아부하고 유흥을 즐기도록 권한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도 안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사들로 분주했다. 그동안 백성들을 착취했던 탐관오리들이 잡혀가는 길에 백성들이 나와 손가락질 하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제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면서 백성들은 새 황제가 될 영친왕에 대한 기대를 드높였다.

전 황제와 황후, 그 비빈들에 대한 처분에 대한 논쟁으로 조정은 며칠 내내 시끄러웠다. 온건한 대신들은 황제가 수많은 잘못은 하였지만 정국의 이복의 형제로 피를 나누었으니 독주를 마시게 하는 것으로 위신을 지켜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부 극진적인 대신들은 아무리 황제였던 자라 하더라도 나라를 어지럽게 한 일은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일벌백계하는 의미로 장안에 효수하여한다고 주장했다.

두 주장이 어지럽게 상충하는 가운데 정국의 결단만이 남았다. 그 와중에 태후는 끝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감시를 철저하게 하라고 일렀는데 어디엔가 독약을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성격머리에 독을 먹지 않았으면 목이라도 메었을 것이니 정국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다만 지난 번 석진의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모조리 색출해내 죄를 물었다. 석진은 그 사건으로 열흘이 넘게 앓았고 결국 유모를 잃었다. 내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는 정국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정국은 살려달라는 이들의 청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문제의 우물도 없던 것처럼 메워버렸다. 평평한 땅이 된 곳에 정국은 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나무가 우거져서 그늘을 만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수 있도록.

여러 날을 고심하던 정국은 결국 황제와 황후, 귀비를 모두 그 자리에서 폐위하고 독주를 내리기로 했다. 귀비 이하 비빈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전 황제의 하나뿐인 핏줄 공주는 공주의 직책은 폐하고 황자의 딸인 현주로 격하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있기는 했지만 공주는 아직 어리고 여아였으니 정국이 강행했다. 그리하여 현주는 유 태비가 키우기로 하였다. 이는 석진이 원한 것이기도 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조카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정국에게 상처로 남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먼저 청한 것이었다.

와중에 귀비가 석진을 만나고 싶다며 청해왔다. 귀비는 그 동안 여러모로 영친왕 부부를 도와주었던 이였다. 그래서 정국은 석진에게 소식을 전했고 아직 왕부에 머무르던 석진은 정국의 허락을 받아 귀비를 만나러 왔다. 작은 전각에 갇혀있던 귀비는 석진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마마. 자운의 부름에 석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이래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석진이 자운의 목숨을 살려주며 여러 번 도왔고 자운 역시 석진을 몇 번이나 도와왔다. 우물 사건 때에도 자운이 황제에게 보고 싶다며 서찰을 쓰지 않았다면 황제는 이르게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었고, 또 황궁 문 앞에서 석진이 잡혀왔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석진은 더 크게 다쳤을 것이었다. 그 때 일을 입에 담으며 감사하다는 석진에 자운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던 일인지도 몰랐다.


“마마, 공주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하신 일이지요.”

“그래도 마마의 청이 아니었다면 전하께서도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어린 공주가 목숨도 부지하고 하물며 노비가 되지도 않았다. 현주가 되고 유 태비가 양육하시니 이는 제일 나은 처사였다. 자운은 그것에 너무 감사하여 울었다. 제 목숨은 황제와 함께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공주가 목숨만은 부지하기를 바랐는데 정국이 너무나 큰 은혜를 내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면에는 석진이 있음을 자운은 잘 알고 있었다. 황자의 비였을 때부터도 석진은 인정이 많고 일개 백성의 목숨도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공주의 처분에 감사 인사를 올리던 자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부디 황후가 되세요, 마마.”

“…………”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은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자운은 진심으로 석진이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석진은 그런 자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처럼 입을 떼었다. 그저 지금 원하는 것은 자운이 편하게 가기를 바랐다.


“편히 가세요.”

“황공하옵니다.”


석진의 인사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운이 이마를 땅에 대며 깊이 인사했다. 그 가지런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석진이 천천히 전각에서 나왔다. 그새 밤이 깊었다. 설아가 석진의 어깨 위에 다시금 따듯한 옷을 둘러주었다.


“겨울이 길구나.”

“예, 마마. 하오나 해가 바뀌었으니 봄도 머지않았습니다.”


모두가 정신없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여러모로 길었던 겨울이 성큼성큼 가고 있는 것이었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까. 따듯해지면 얼어붙은 이 황궁 안에도 봄바람이 불까. 석진은 숨을 가득 몰아쉬었다.

 


석진이 자운을 만나고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 사람의 형이 집행되었다. 일몰 시간에 맞춰 독주를 든 관원들이 무리를 나누어 세 사람이 머무르는 전각으로 각각 향했다. 이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 정국은 보던 장계를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곁에서 정국을 돕고 있던 석진과 앞에서 보고를 하고 있던 남준이 그런 정국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만 해야겠습니다.”

“예, 그럼 소신은 물러나겠습니다.”


정국의 말에 남준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전각을 나섰다. 정국은 남준이 나가자 곁에 있던 석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석진이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자 정국은 석진의 손등에 제 뺨을 가져다댔다. 닿아오는 체온이 찼다. 혼란스러운 정국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석진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국이 석진의 손을 잡은 채 전각을 나섰다. 성큼성큼 걷는 정국에 석진은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고 내관들도 종종 걸음으로 쫓아왔다. 정국이 향한 곳은 일이 늦어져 왕부로 돌아가지 못하면 임시로 묵고는 하는 궁이었다. 정국이 먼저 정전 안으로 들어가자 석진이 설아에게 주안상을 부탁했다.

석진이 정전 안으로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있는 정국이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 관절로 너무 꾹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아 석진은 정국의 손을 떼어 내려놓고는 제 손으로 가볍게 눌러주었다. 머리가 아프십니까? 석진이 묻자 가만히 고개를 끄떡인 정국이 석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연이어지는 석진의 손길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정국은 뻑뻑한 두 눈을 감았다.

늦지 않게 궁녀들이 주안상을 가져왔다. 정국은 답지 않게 술을 연거푸 마셨다. 아무리 대의라지만 제 형제를 사사하는 것이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석진은 그 마음을 헤아려 빠르게 술을 마시는 정국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온기를 나눠줄 뿐이었다.

잘 취하지 않는 정국이었지만 정사에 바빠 저녁도 거른 상태에서 연신 술을 들이켰더니 취기가 빨랐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국이 다시 술잔을 들었을 때, 전각 밖에서 내관이 고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정국은 들어오지는 말고 거기서 고하라고 하자 내관이 닫힌 문 밖에서 외쳤다.


“죄인들이 모두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뒀다 합니다.”

“…………”

“하명하신 대로 동이 트면 관이 황궁 밖으로 나갈 것입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죄인들이었으니 장례를 치르거나 묘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산에 묻어줄 것이었다. 그것이 정국이 최대한으로 베풀 수 있는 인정이었다.

정국은 석진의 팔을 붙잡은 채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이 나라에는 정국 밖에 없었다. 봄이 되면 즉위식을 치르고 정국은 황제가 되어야만 했다.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정국은 한참 이마를 묻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석진을 바라보았다. 석진 역시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이 퍽이나 좋아하는 다정한 시선으로. 온기가 뚝뚝 묻어나오는 시선이 정국은 언제나 좋았다. 그래서 석진의 어깨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폭신한 입술 새를 가르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일이었다. 순순히 입술을 벌려 정국의 입술이 제 입술을 물게 둔 석진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정국의 지척에 있는 가지런한 석진의 눈꺼풀이 촘촘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정국의 혀가 석진의 볼 안을 깊숙이 핥고 석진의 혀를 옭아맸다. 한참이나 그렇게 얽히다가 정국이 점점 석진에게 무게를 실었다. 석진이 자연스럽게 긴 의자 위에 누웠다. 정국도 같이 허리를 숙여서 한참이나 그렇게 입을 맞추었다.

한참 그렇게 석진의 입 안을 유영하다가 정국이 입술을 뗐다. 정국이 막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데 석진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웃는 석진에 정국이 왜 그러시냐고 묻자 석진이 송구하다며 입을 떼었다.


“술 냄새가 납니다, 전하.”

“그래서 싫으십니까?”

“아니요. 흔한 일은 아니어서 신기합니다.”


정국은 술 대신 차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다. 못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에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니 정국에게 폴폴 나는 술 냄새가 좀 신기했다. 석진의 말에 정국 역시 핏 웃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했다. 가벼이 웃은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석진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몸에 무리가 갈 테니 의자에서 일을 치루는 것은 좋지 않았다. 손을 꼭 잡은 채 침상으로 향하자 석진의 귓바퀴가 언제나 그랬듯 붉어졌다. 정국은 침상에 앉은 석진의 귓바퀴가 빨개진 것을 눈치 채고는 다시 웃었다.


“아직도 그리 부끄러우십니까.”

“전하.”


혼인한지도 이제 7년이 넘어가고 몸을 맞춘 것은 세지도 못할 만큼이었는데도 석진은 한결 같았다. 정국이 옷의 매듭을 풀어내자 석진의 귓바퀴가 더 빨개졌다. 정국은 귓바퀴를 가볍게 입술로 물면서 입술을 붙였다.

 


황제의 형이 집행되었으니 일은 더 빨라졌다. 전횡을 일삼던 황후의 오라비와 태후의 오라비는 참수되어 백성들이 자주 드나드는 길목에 걸렸다. 그 식솔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같이 사형된 이들도 있고 유배가 결정 난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 진영의 남편은 유배가 결정이 났다.

석진은 그래서 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소식을 전해주자 눈에 뜨이게 안도하는 석진에 정국은 자신이 약속하지 않았냐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부인께서는 저를 믿지 못한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럼요?”


정국이 짐짓 무표정으로 묻자 석진이 허둥지둥 댔다.


“제가 전하를 못 믿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저어되었던 것뿐입니다, 전하.”


횡설수설하는 석진에 쳐다보고 있던 정국이 핏 웃음을 터트렸다. 정국이 웃자 당황했던 석진이 말을 멈췄다. 곧 정국이 저를 놀렸음을 깨달은 석진은 안도하면서 너무 하시다면서 웃었다.


“큰 형님도 괜찮을 것입니다.”


문제는 남석이었다. 황제의 막역지우로서 황제를 올바른 길로 이끌지 않았다면서 다수의 신하가 참형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국은 남석 본인은 사치를 하거나 전횡을 일삼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유배로 충분하다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제 말에 동조하는 이들이 없지 않으니 정국은 그대로 주장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국이 잠시 말을 흐렸다. 석진은 정국의 찻잔을 채워주고는 옆에 앉았다. 지난 번 남준이 들렀을 때 미리 언질을 주었다. 정국의 후궁에 사람이 없다면서 공신들이 너나할 것 없이 제 딸을 보내겠다고 나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국은 나라 안을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라며 모두 거절하였다. 하지만 최 장군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조 대신의 딸은 정국이라 하여도 계속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전하, 저는 그 누가 들어온대도 상관없습니다.”

“부인.”

“그저 이렇게 전하의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석진은 매일 양심전에 와서 정국의 업무를 도와주면서 곁에 있었다. 서찰을 분류하고 먹을 갈고, 이렇게 따듯한 찻물을 채워주면서 늘 곁에 있었다. 그러다 정국이 쉴 때면 소소히 담소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이 순간이 석진은 좋았다. 그러니 누가 정국의 부인으로 들어올지라도 크게 상관없었다. 이미 정화가 들어온 순간부터 석진은 마음을 놓았으니까. 정국은 아무 말 없이 석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왕부에 정국의 세 번째 부인이 들어왔다. 정국을 연모해 받아만 달라 했던 정화와 달리 공신의 딸로 당당히 왕부에 입성한 사라는 다소 기고만장했다.

유 태비와 정국에겐 공손 했으나 정화와 석진에게는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석진이 정국의 영친왕 시절 정비이긴 했으나 황후자리는 누가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 아비에게 황후가 될 수도 있다는 언질을 받은 듯 했다. 그에 정화가 무슨 소리냐면서 깜짝 놀랐지만 석진은 별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차만 마셨다. 일이 있다면서 사라가 먼저 자리를 뜬 후 정화가 석진에게 입을 뗐다.


“당연히 마마께서 황후가 되셔야지요.”

“최 부인.”

“제가 아버지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황도 안에서 금술이 좋기로 유명했던 두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화는 왕부에 오기 전에도 여러 번 석진과 정국의 다정한 모습을 봤었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고 왕부에 왔는데도 가끔 석진을 향한 정국의 연모에 놀랄 때가 있었다. 정국은 정화에게도 다정하고 따듯하였으나 석진에게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석진에게 곧게 뻗어가는 눈빛, 손짓, 행동. 그 모든 것들에는 너무 커다란 연모가 묻어 있었다. 정화는 그것을 분명히 목도했다. 정국은 아마 황후로 다른 사람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저는 안 됩니다.”

“마마.”

“저는 최 부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화는 온화하고 현숙했다. 잘 자란 대감가의 규수였다. 더군다나 정국을 많이 연모했으니 황후 감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석진은 정국에게 최 부인을 추천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정화가 사색이 되며 손을 저었다. 제가 감히 정국의 옆자리를 탐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석진이 아니라고 충분하다며 입을 떼었는데 밖에 사람이 왔다.

오늘 유 태비의 건강이 좋지 않아 석진이 입궁하지 않았는데 정국이 찾는다는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석진이 정화에게 유 태비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채비하러 나가는 석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정화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차를 타고 바로 입궁한 석진은 정국이 있다는 양심전으로 향했다. 정국은 오늘 석진이 왜 입궁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었다. 아침에 유 태비가 신열이 있어서 보살펴 드려야겠다고 석진이 정국에게 말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국이 저를 찾는 게 꼭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석진은 남석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정국이 지켜준다고 했으니 그럴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얼까.

석진이 내정에 막 발을 들였을 때 얼굴이 익숙한 내관이 달려와 맞이했다. 황자시절부터 여태껏 정국을 모신 내관은 이제 총관이 되었다. 마마. 석진에게 공손히 인사한 임 총관은 석진을 서둘러 양심전으로 모시고 갔다.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소인이 감히 아뢸 수는 없고, 가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임 총관은 전각 앞에서 큰 소리로 알렸다. 전하,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당장 안으로 모시라는 정국에 문이 열렸다. 마마, 드시지요. 임 총관에 석진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안으로 들었다.

전각 안은 조용했다. 전하. 석진은 정국을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탁자 앞에 서있던 정국은 숨을 길게 내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 석진을 보는 정국의 얼굴에는 안도의 감정과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정국이 손을 뻗자 석진이 다가가며 그 손을 붙잡았다.


“전하?”

“부인.”

“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정국이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붙잡은 손으로 그 떨림이 석진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언가에 단단히 흥분한 모양새였다. 대체 무엇이 정국을 이렇게 뒤흔들었단 말인가. 석진은 궁금했지만 일단 흥분한 정국을 가라앉히는 게 먼저라 생각해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차를 따라 주려고 했는데 정국이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아 석진도 그대로 옆에 앉게 됐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석진의 말에 정국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석진의 손을 붙잡으니, 이렇게 곁에 있어주니 또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날마다 조회를 열어 정사를 보살피기에 여념이 없던 정국이었다. 전 황제가 밀어두었던 일들에, 즉위를 앞두고 민심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경계하는 일, 또 즉위식에 관한 일까지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았다. 정국이 황자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변방에서 일을 익혔다지만 아직 제국을 운영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 주장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그 뜻을 여러 번 따라주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제가 너무 약하게 보였던 걸까. 정국은 너무 뜻밖의 말을 들었다.


“오늘 조회에서 대신 몇몇이 조 부인을 황후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

“정비인 부인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물으니, 부인의 가문을 들먹이면서 정당성을 논하더군요.”


그 정도는 정국도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석진 형제들의 반이 전 황제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석진은 선(先) 황제인 제 아비가 제 짝으로 정해준이였다. 그것만으로 석진의 정당성은 차고 넘쳤다. 석진을 부정하는 일은 제 아버지의 선택을 부정하는 결과였으므로.

그래서 정국이 차분히 반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 대신의 측근 하나가 석진의 부덕함을 언급한 것이었다. 혼인한지 7년이 되어 가는데도 아이를 낳지 못했고 투기하여 다른 부인을 얻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대죄인데 다른 부인까지 얻지 못하게 투기를 하였으니 정비는 황후가 될 수 없다며 정국더러 통촉하라고 했다. 정국은 석진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남자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목덜미는 서늘하게 식었는데 피는 끓어오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공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정국의 물음은 다정하였지만 음절마다 뚝뚝 끊어졌다. 정국을 오래 보아온 남준과 최 장군은 정국이 화가 났음을 짐작했다. 하지만 대신은 눈치 없이 정국이 저의 의견을 들어주는 줄 알고 계속 떠들었다.

한참이나 듣고 있던 정국이 갑자기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는 태화전을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신하들이 부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마음을 좀 진정시키기 위해서 양심전으로 왔는데 따라온 남준이 화내시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하시라고 해서 더 화났다. 누구도 아닌 석진의 형인 남준이 그렇게 말해서.

정국이 더 말을 잇지 않자 석진이 가볍게 웃었다. 그 신하가 무엇이라 더 말했을 지는 석진이 더 잘 알았다.


“그리고 제가 아이도 못 낳고 부덕하다고 하였습니까?”

“…………”

“사실이지 않습니까. 전하.”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정국도 알지 못하는 이유를 남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 석진은 가벼이 웃었다. 황도에는 이미 여러 소문이 퍼져있었고 석진은 누구보다도 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석진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정국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고 싶지 않던 말이었지만 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영영 용기가 안날 것 같았다. 석진은 이제껏 생각해왔던 말을 정국의 앞에 꺼내놓았다.


“전하. 최 부인을 황후로 맞으세요.”


석진의 손을 쥐고 있던 정국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국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무언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

“제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은 부인을 지키기 위해서 라고요.”


누구보다도 석진이 이렇게 말할 줄은 정국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로지 석진만이 정국이 정말로 황제가 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국은 나라나 백성을 위해서가 아닌 단 한 명 석진을 위해서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석진이 다른 사람을 황후로 추천하다니? 정국은 너무 어안이 벙벙하여 제 귀를 의심했다.


“연유가 어떻건 전하께서는 이제 황제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정당성에 흠이 없는 부인을 황후에 봉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정국이 치세함에 있어서 석진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석진은 그것만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정국이 자유롭게 주관과 생각을 펼쳐나가기를 바랐다. 날개가 되어주지 못할망정 족쇄가 되느니 석진은 정국의 옆이 아니라 뒤에 있는 것을 택할 것이었다.


“황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전하 곁에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저는 전하의 아이를 낳지 못했고, 앞으로 가질 수 있을지 없을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는 부인으로서 가장 큰 부덕입니다. 그러니 저를 황후에 책봉하지 마세요,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부인.”


이제껏 해온 생각을 막힘없이 쏟아내는 석진을 막아선 것은 갈라진 정국의 목소리였다. 석진을 바라보는 정국의 충혈 된 두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전하. 그것에 석진이 놀라서 손을 뻗었을 때, 정국이 그 손을 쳐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전각 안이 고요에 빠져 들었다. 정국이 석진의 손길을 거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는 부인에게 비밀이 없습니다.”


정국이 석진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 일은 단 하나였다. 아주 예전에 최 장군이 혼담을 제의한 것. 그거 하나였다. 이후로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정국은 언제나 있는 사실 모두 석진에게 이야기했고 서로 의논하며 살아왔다. 부부 사이에 비밀이라는 것이 아무리 서로를 위한다고 해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석진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저에게 최 부인을 황후로 삼으라고 말하면서 말을 쏟아낸 것을 보면 지금 당장 떠올린 생각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대체 어디까지 홀로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까.”

“전하.”

“제가 부인도 지키지 못한다면, 이 나라를 어찌 지키겠습니까.”

“………”

“부인이 이리 저를 믿지 못하는데, 그 누가 황제라고 저를 믿겠습니까.”


그것이 너무나 정국은 서운했다. 처음으로 석진에게서 벽이 느껴졌다. 석진은 언제나 제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이렇듯 한발 물러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손을 놓아버리는 상상까지 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꽉 막혀 피가 거꾸로만 돌 것 같았다. 정국의 눈가가 그 열기로 금세 새빨개졌다.

석진은 정국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시금 손을 뻗었다가 방금 전 정국이 쳐냈던 것을 떠올리고는 금세 손을 거뒀다. 그것에 정국이 먼저 석진의 어깨를 붙잡았고 입술을 붙였다. 콱. 정국의 입새에서 석진의 입술이 꽉 물렸다.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는 듯, 콱.


우주를 주고 싶은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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