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후루시호 《ZEROSE》 7월호에 공개한 글입니다.

▶ (http://zerose.creatorlink.net/7%EC%9B%94)


 


1. 언니의 뜻

“앞으로 미야노 시호 씨는 제가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소파에 앉은 남자가 부드러운 금발이 밑으로 쏠릴 만큼 아주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마주 앉은 중년의 남성이 겸연쩍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렇게 고개 숙일 것 없네. 나야말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판에…….”

“현재 그녀의 보호자는 누가 뭐라 해도 박사님이시니까. 꼭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

박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딱히 차를 마시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하기 전, 망설임을 덜어내고자 공연히 해 보는 부수적인 동작.

“아무로 군, 아니……, 후루야 군.”

박사의 얼굴엔 침울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는 오늘 후루야와 대면한 뒤 시종 그런 태도였다. 상대의 깍듯한 대접에 응하지 못하고 주눅이 든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움을 느끼게 했다. 박사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무언가를 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후루야를 향해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네. 이 시점에서 내가 정말 아이 군의, ……시호 군의 보호자라 불려도 되는지…….”

후루야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찻잔 속 반쯤 남은 홍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따뜻한 홍차가 차게 식을 동안 그는 박사에게 많은 것을 설명했다. 주된 내용은 역시 아포톡신의 기밀 유지를 당부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아포톡신의 유아화 작용에 관해.

두 달 전, 조직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메인 컴퓨터에 남아 있던 아포톡신의 관련 자료 또한 일부 복원되었다. 복원 작업은 쉽지 않았다. 연구 책임자였던 셰리가 조직을 배반한 이후 아포톡신의 연구는 완전히 중단되었고 데이터의 영구 삭제를 시도한 흔적만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후처리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각국 수사 기관은 아포톡신을 ‘체내에 성분이 남지 않는 독약’으로 인지하는 데 그쳤다. 후루야는 물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선 눈앞에 마주 앉은 박사, 아가사 히로시에게 표면상 협력을 요청했다. 데이터 복원이라는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박사를 통해 하이바라 아이가 데이터에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이바라 아이. 셰리이자 미야노 시호가 유아화 한 6살짜리 꼬마. 그녀가 아포톡신의 자료를 복원해야 하는 상황은 아이러니했다. 그것은 그녀 본인을 비롯해 쿠도 신이치와 메리 세라의 몸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해독제를 개발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작업이었으나, 또한 자신의 죄를 고발하는 증거를 스스로 파헤치는 작업이기도 했다.

작업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쿠도 신이치와 미야노 시호의 해독제를 만들기까지. 성분이 다른 메리 세라의 해독제는 한 달이 더 걸렸다. 아이는 코난보다 먼저 약을 복용해 경과를 살피고자 했지만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 코난이 아니었다. 그는 메리의 몫이 완성되기도 전에 해독제를 복용했고 무사히 고등학생의 몸으로 돌아왔다. 현재까지도 그에겐 이렇다 할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았다.

메리 세라와 하이바라 아이는 하루 간격을 두고 해독제를 복용했다. 메리의 몸이 이상 없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는 해독제를 삼켰다.

아이가 해독제를 복용할 당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메리의 증언에 의하면, 아이의 고통스러운 신음은 방문 너머로 확연히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복용 시 수반되는 고통은 신체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기에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하지만 5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땐 과연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고 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 없는 조카가 걱정되어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아이는 이미 시호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의식을 잃어 바닥에 쓰러진 채로.

“……박사님은 명실상부한 미야노 씨의 보호자십니다. 조직에서 도망친 미야노 씨가 지금껏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 박사님의 배려와 은혜 덕분입니다. 이 점은 저 개인적으로도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후루야는 순간, 굳이 뒷말은 보태지 않을 걸 그랬나, 조금 후회가 들었다. 박사는 후루야가 과거에 미야노 집안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엄격히 따지자면 실언이었으나 침울함에 잠긴 박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후루야는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큼 실의에 빠진 박사에게 연민을 느꼈다.

“박사님이 안 계셨더라면 미야노 씨는 원래의 몸을 되찾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가 해독제를 복용한 게 어떤 의미인지, 박사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이바라 아이에게 해독제의 복용이란 쿠도 신이치나 메리 세라와는 달리 단순히 원래의 몸을 되찾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 앞에 고개 돌리지 않고 의연히 맞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긴 결정이었다.

“물론 알고 있지, 알고 있지… 시호 군이 얼마나 용기를 내 주었는지.”

“…….”

“하지만 아까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 시점’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후루야 군은 나를 정말 시호 군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건가?”

그날 의식을 잃은 미야노 시호는 도쿄경찰병원으로 이송됐다.

본래 미야노 시호─조직의 간부 셰리─는 조직을 배신한 뒤 거처를 옮겨 다니며 은신하다, 버번─조직에 잠입한 공안경찰 후루야 레이─에게 꼬리를 밟혀 세상에 드러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포톡신의 유아화 작용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미야노 시호가 이 나라의 사회적 일원으로서 마땅한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게 하는 매끄러운 시나리오였다.

셰리가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는 상황은 처음 의도한 시나리오와 거리가 멀었으나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다음 날 시호가 의식을 되찾으면서 시작됐다.

─ “하이바라!”

─ “아이 군, 괜찮은 거냐?”

─ “시호. 몸은 좀 어때.”

시호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쿠도 신이치, 아가사 히로시, 메리 세라.

시호는 세 사람 중 그 누구 한 명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해독제를 복용하고 의식을 잃은 상황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순간 세 사람은 기억 상실을 의심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시호는 본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이바라’, ‘아이 군’에는 고개만 갸웃거리던 그녀가 유독 ‘시호’라는 말에 흠칫해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 그것만은 확실했다.

당황스럽기만 한 이상 징후는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간 뒤 하나의 문장으로 명쾌히 정리되었다.

미야노 시호는 기억 속에서 하이바라 아이의 시간을 깨끗이 도려냈다.

“말씀하신 대로 하이바라 아이가 미야노 시호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용기는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건네준 것입니다. ‘미야노 시호’는 바로 그분들과 박사님이 만들어 주신 새로운 삶입니다. ……설령 그 미야노 시호가, 기억을 잃은 미야노 시호라 해도.”

설령 그 미야노 시호가, 하이바라 아이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미야노 시호라 해도.

에도가와 코난의 정의와, 소년 탐정단과의 우정과, 아가사 히로시의 사랑을 전부 잊어버린 미야노 시호라 해도.

끝을 알 수 없는 속죄의 길에 한 발짝이나마 걸음을 내디뎌 보려 했던, 미약하나마 위대했던 용기를 완전히 망각해버린 미야노 시호라 해도.

“……후루야 군.”

네, 하고 대답하며 후루야는 무심코 등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만큼 박사의 호명에는 오늘 내내 그가 보인 태도와는 동떨어진 기묘한 박력이 담겨 있었다.

“시호 군을, 잘 부탁하네.”

후루야는 아가사의 말에 담긴 묵중한 무게를 이해했다.

시호가 잃어버린 아이의 시간은 언니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독약을 삼킨 비좁은 가스실에서 시작된다.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삶에서 도망친 그녀에게, 운명은 마치 비웃듯이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 세계는 일찍이 시호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보통’의 삶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기에, 차마 원하지도 바랄 수도 없었던 평범한 기적.

그건 아가사 히로시의 조건 없는 애정이었고, 에도가와 코난의 진심 어린 염려와 신뢰였다. 그건 모리 란의 타산 없는 용기였고, 요시다 아유미의 순수한 미소였다. 처음에는 받는 것조차 서툴렀던 아이였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는 받은 만큼 건네줄 수도 있게 되었다.

아이는 한 소년의 정의를 동경했으며 소중한 것을 지키려 소녀들의 용기를 답습했다. 한때는 쉬이 내버렸던 운명조차 그녀는 소중히 받들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기가 만든 약이 결과적으로 타인의 불행을 초래했다는 진실과 마주했다. 비록 속죄하는 법을 몰랐으나 천천히 함께 고민해 보겠다고, 후루야와 약속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깨끗이 도려낸 지금. 그녀가 주고받아 온 모든 평범한 기적은 새벽의 이슬처럼 아스라이 자취를 감추었다. 무한히 확장해 가던 그녀의 세계가 되감기 버튼이라도 눌린 듯 문득 팽창을 멈추고 이내 무서운 속도로 수축을 거듭한다. 좁아지고 좁아져 종국에는 터무니없이 비좁은 가스실, 딱 그만큼의 크기를 남겨두고. 그녀의 세계는 멈추었다.

그리하여 미야노 시호의 시간은 언니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독약을 삼킨 비좁은 가스실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아가사는 지금 후루야에게, 시호가 아이로서 누렸던 평범한 기적을 대신 베풀어 주길 부탁하고 있었다.

“예. 맡겨 주십시오.”

후루야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각오해 온 일이다. 미야노 시호와 하이바라 아이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후루야는 줄곧 시호에게 평범한 삶을 주고 싶었다. 하이바라 아이의 기억을 잃어버린 작금의 상황은 시호 개인에게 유감이었으나 그렇다고 후루야가 무언가를 새롭게 다짐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미스터리 트레인에서 시호를 대면했을 때의 마음가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조직에서 자라나 재능을 이용당하기만 하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언니마저 살해당해 절망하고 있을 미야노 시호.

그녀를 그 절망 속에서 구해내는 것, 일단은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후루야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래도록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잃은 자의 슬픔이 어떤 건지는.


***


눈을 떴을 때, 시호는 아주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몽롱했다. 꿈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해내려 애써도 의식만 또렷해질 뿐. 다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에 막연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언니를 잃은 상실감과는 결이 달랐다. 분명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시호는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째서인지 독약을 삼켰을 자신이 살아 있었다. 그것도 병원 침대 위에서. 그렇다면 독약은 불발이었나? 하지만 단지 약 기운에 잠든 사람을 일부러 병원까지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시호는 몸에 외상이 있는지 확인했다. 겉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침대 주위엔 변변한 신발 한 켤레도 없었다. 몇 시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이른 아침, 맨발로 어슬렁거리는 시호를 발견하고 스테이션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시호를 다시 침대에 데려다 놓은 뒤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말할 것도 없이 상대는 조직원이겠거니 시호는 생각했다. 그녀는 체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그 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웬 소년과 중년 남성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직원이라기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용모에 시호가 갸웃대는 사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이바라!”

“아이 군, 괜찮은 거냐?”

하이바라, 아이 군?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간다. 뒤이어 낮고 침착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시호. 몸은 좀 어때.”

중년 남성의 풍만한 풍채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았던 중년 여성이 마지막으로 들어서며 병실 문을 닫았다. 시호는 몸을 흠칫 떨었다. 앞선 두 사람보다는 그녀의 생김새가 조직원에 더욱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시호’라는 호명에 본능적으로 움찔 반응해버린 것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조직에서 길러졌기에 자신의 본명을 아는 조직원이 있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부러 코드 네임을 놔두고 본명을 부르는 처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호는 침묵을 지켰다.

“하이바라, 어디 아픈 덴 없는 거야? 쓰러졌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그래, 어디 불편한 덴 없니? 일단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시호는 문득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느낀 상실감을 떠올렸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기나긴 꿈, 단지 꿈을 꾸었다는 느낌만 어슴푸레하게 존재하는 붕 뜬 감각.

혹시 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당신들, 누구야?”

시호의 한마디에 병실 안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가장 먼저 기민하게 반응한 사람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시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태도는 차분했고 질문은 짤막했다. 시호의 성姓은 무엇인가. 깨어나기 전 무엇을 하고 있었나─과연 이 질문엔 사실대로 답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여성의 기세가 워낙 단호했으므로 시호는 얼떨결에 약을 복용했다고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때 복용한 약의 색깔은 무엇이었나.

단 세 가지의 질문으로 원하는 정보는 다 얻었다는 듯 그녀는 다른 두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루야 군을 부르겠다.”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당황한 낯빛의 두 남자를 데리고 병실 밖을 나섰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났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살짝 문이 열렸다. 문틈 새로, 점심시간이니 식탁을 준비해 달라는 배식원의 말이 들렸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시호는 접이식 식탁을 펼쳤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데 훈육된 몸은 명령에 따라 알아서 움직였다. 웃긴 노릇이었다.

확실히 허기가 졌다. 가스실에 감금되기 전에도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시호는 젓가락을 들어 밥알을 뒤적였다. 하지만 차마 입속으로 넣지 못했다.

언니가 조직에 살해당했다. 음식 따위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죽였느냐고 몇 번이나 따졌지만 조직은 그럴싸한 해명조차 내놓지 않았다. 철저한 인간 이하 취급에 시호는 치를 떨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조직에 헌신해 온 시호다. 별다른 사명감이 있지도 않았으니 ‘헌신’으로 칭하기에 어폐는 있었지만 그만큼 부자유한 삶이었다. 사적인 부분은 모조리 통제당해 조직 밖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춘기가 오기 전에도 시호는 또래와 비교했을 때 자신의 처지가 아주, 그것도 아주 이상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시호는 조숙한 아이였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조감하고 분석하기엔 역시나 어렸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모든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리며 겉돌았다. 외로움이 기저였던 시호의 삶에 아케미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조직에서 자라난 시호와는 다르게, 평범한 학교에 다니며 평범한 친구를 사귀고 평범한 생활을 하던 시호의 언니.

단 하나뿐인 혈육이나마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시호의 유일한 기쁨이었는데.

그랬는데, 조직은 그마저도 간단하게 부숴버렸다.

아포톡신의 연구를 중단하겠다는 협박도 해 봤지만 그것 또한 간단하게 묵살. 언니의 죽음을 해명하라는, 아마 조직 바깥에선 한없이 합리적이었을 요구가, 조직 내에서는 괘씸한 반항으로 취급되어 시호는 결국 가스실에 감금되었다.

그러니까, 언니가 죽든 말든 입 닥치고 개처럼 연구를 계속하라.

그것이 조직의 입장이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또 한 명의 개가 오셨군. 시호는 왜인지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조직 사람이 왔다는 예감이 들어서였을까. 시호는 천천히 열리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꽤 장신의 남자가 시호와 눈을 마주치자 엷게 웃었다.

“식사 중이셨네요.”

그는 회색빛의 정장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금발에 어두운 피부색, 그리고 푸른 눈. 범상치 않은 외모였으나 그 점이 오히려 조직원이라는 확신을 안겨 주었다. 시호는 체념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또 누구실까?”

“처음 뵙겠습니다. 버번, 이게 제 코드 네임입니다.”

코드 네임까지 붙은 자가 행차하다니. 시호는 지금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지 아닌지 헷갈렸다. 사지가 멀쩡한 채 별다른 감시도 없이, 그것도 쾌적한 1인실에 혼자 놓인 상황 자체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이 코드 네임, 들어본 적 없나요?”

돌연히 질문이 날아와 시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버번, 확실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알고 있어. 언니 애인이었던 모로보시 다이와 라이벌 관계인 조직원. 언니 말로는 서로 끔찍이 싫어했다던데.”

“아아, 이번에도 그 자식 이름이 먼저 나오네요.”

씹어뱉듯 말한 그는 왠지 언짢은 것 같았다. 크게 화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농담조도 아닌 미묘한 줄다리기였다. 그 와중에 ‘이번에도’라는 단어가 신경 쓰였으나 시호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모로보시 다이라는 이름이 등장해 본의 아니게 사고가 그쪽으로 튀어버린 탓이다.

모로보시 다이. 언니의 애인. 라이라는 코드 네임까지 얻은 조직원이었으나, 실체는 조직에 잠입한 FBI 수사관.

2년 전 진과 엮인 첫 번째 임무에서 작전을 들키고 노크NOC임이 탄로가 나 그대로 도주해버렸다.

언니와 자신을 버려둔 채.

이후 라이와 밀접한 관계였던 아케미는 물론 시호도 적잖이 험한 꼴을 당했다. 원래도 삼엄하던 경비가 몇 배로 늘어난 건 물론이고 철저한 수색과 지루한 심문이 거듭됐다. 하지만 시호는 전부 참을 수 있었다. 언니인 아케미만 무사하다면. 시호는 조직 내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영악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은근히 어필해 아케미가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노크나 스파이같이 조직을 위협하는 민감한 사안에 시호의 천재적인 재능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시호가 너무 유능하기 때문에, 조직의 핵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행여나 중요한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진 않았을까, 혹시나 지금도 새어 나가고 있지는 않을까─. 위에서는 전전긍긍인 모양이었다. 시호는 필사적으로 결백을 주장했다. 언니는 그저 그 남자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아니, 실제로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일관된 진술 덕에 위에서도 섣부른 결정은 보류한 모양인지 시호와 아케미는 살얼음판 같은 감시 속에서도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시호는 처음부터 이 조직에 대단한 충성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타인의 의심 어린 눈초리나 배신자 취급 따윈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언니에게 날아와 박히는 모욕만은 참을 수 없었다. 노크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이 아케미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치정이란 확실히 인간의 본능적인 흥미를 들쑤시는 구석이 있었다. 성적인 호기심과 수치를 자극하는 저질스러운 모욕이 입에서 입으로, 그저 가볍게, 차츰 정도를 더해가면서.

그건 끝나버린 관계에 으레 여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세상의 부당한 관례였다. 시호는 세상을 미워하는 대신 한 남자를 저주했다. 그런 거, 그 남자도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본인이 도망치면서 홀로 남겨진 언니가 어떤 취급을 당할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대체 뭐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준다는 거야.

대체 뭐가 FBI라는 거야.

대체 뭐가 경찰이라는 거야.

결국 조직의 집요하고 은근한 압박에 굴한 언니는 말도 안 되게 무모한 결단을 내렸다.

─ “그런데 요즘 언니 어때? 뭔가 위험한 일에 손을 댔다고 들었는데…….”

─ “걱정 마. 잘되고 있으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건 시호 너야. 이제 약 같은 건 그만 만들고 애인 좀 만들어 봐. 언니는 괜찮으니까.”

그리고 목숨을 잃었다.

“당장 눈앞의 일에 사로잡혀 사냥할 상대를 착각하지 마라.”

아마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시호의 주먹 위로 남자의 커다란 손바닥이 덮였다.

“라고 멋대로 떠들어댔죠, 그 남자.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남자의 표정과 말투는 언뜻 침착해 보였다. 그러나 푸른 눈동자만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막연히 차갑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멈춰버릴, 절대 0도에 가까운 냉랭함. 왜 저리 싸늘할까, 의아했지만 시호는 이내 그가 모로보시 다이를 끔찍이 싫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정확한 내막은 몰라도 눈앞의 남자가 지닌 증오는 상상 이상으로 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살갗 위로 덮인 그의 손바닥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해서. 주먹을 어루만지듯 감싼 손에는 딱 적당한 힘이 담겨 있었다.

“남의 궁극적인 목표를 제멋대로 재단한 거로도 모자라, 이쪽에서 바라지도 않던 사과 한마디를 툭 던져 놓고. 제일 열 받는 게 뭔지 알아요? 그 남자에겐 그 일을 사과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시호의 손을 잡으려고 상체를 살짝 숙이고 있던 남자가 그대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접이식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식탁에 놓인 시호의 손과 이어진 따뜻한 손바닥은, 여전히 그대로.

“그 남자는 살릴 수 있었지만, 정작 살릴 수 없도록 막은 건 나였어요. 나는 원망할 명분도 자격도 없는 놈이었죠. 뭐, 그런 점에선 ‘사냥할 상대를 착각하지 말라’는 충고는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사냥할 상대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시호는 그가 하는 말을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니고서야 지금 그가 두 사람의 악연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살리려고 했지만 살릴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통해 어렴풋이, 이 남자 역시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모로보시 다이를 증오하는구나, 생각했다. 이상한 동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긴 건 누가 뭐래도 녀석의 선택이었어요. 그 순간에 내가……, 내가 발소리를 냈더라도, 녀석에겐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라이가 협상을 걸어 온 이상, 적어도 발소리가 누구 것인지는 확인한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

“녀석은 망설임도 없이 쐈어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찰나에 내린 냉정한 판단에 의해서. 그리고 심장에 겨눠진 총구 끝엔 주머니 속 휴대폰이 있었다……. 녀석한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단 얘깁니다.”

그가 휴대폰을 언급한 순간에 시호는 맞닿은 피부를 통해 움찔대는 그의 손을 느꼈다. 그건 이야기하며 머릿속으로 떠오른 영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버린 것 같은, 사소하지만 심란한 움직임이었다.

“누군가가 녀석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내 오만이었어요. 살리지 못했다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도 월권이었고요.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겼는지 생각해 보면, 무엇을 지키려고 죽음을 선택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녀석의 뜻을 지키는 길이었으니까요.”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지 시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연스레 아케미를 떠올렸다.

아케미는 어째서 위험한 일에 손댔을까. 조직에서 먼저 제안해 왔다 해도, 그런 터무니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라이가 도망친 지도 벌써 2년. 시호와 아케미의 결백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듯했고 시호의 연구 또한 본래 목적과는 멀어졌지만 소소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케미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야노 시호 씨.”

어느덧 힘이 풀린 시호의 주먹 속을 파고들듯이 그가 손을 잡았다. 또 한 번 불린 본명에 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야노 아케미는 당신을 조직에서 빼내려고 진과 거래했습니다. 당신을 조직에서 영영 제명하겠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무모한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무모했지만 그녀는 약속대로 10억 엔을 강탈하는 데 성공했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진.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남자의 입에서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호는 왠지 모르게 이미 아는 내용을 다시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뻔한 스토리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웬만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한 사건에 언니가 휘말릴 리 없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조직에서 빼내기 위해서였다니.

그런 거 가능할 리가 없다. 조직이 그렇게 순순히 나올 리가 없잖아. 그런 것쯤 언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생각해 보면 10억 엔이란 돈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커다란 금액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케미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 걸지도 모른다. 이 말도 안 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러면, 정말로 조직에서 여동생을 빼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러나 그런 건 어디까지나 실낱같은 희망.

“미야노 씨. 다른 것들은 다 잊으세요. 조직이든 모로보시 다이든 다 접어두고, 미야노 아케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만 집중하세요.”

남자의 신비로운 푸른 눈은 정확히 시호를 바라보고 있다. 시호는 그 시선에 얽매인 것처럼 그를 마주 보았다.

시호는 여태껏 아케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언니가 죽은 것이 너무 충격이라서, 서러워서, 허무해서. 나중에는 너무 분해서. 이 빌어먹을 인생이 지긋지긋해서. 조직에 어설픈 반항을 시도하다 실패하고는 결국 자기 손으로 죽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 “그런데 요즘 언니 어때? 뭔가 위험한 일에 손을 댔다고 들었는데…….”

─ “걱정 마. 잘되고 있으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건 시호 너야. 이제 약 같은 건 그만 만들고 애인 좀 만들어 봐. 언니는 괜찮으니까.”

‘잘되고 있다’고 단언할 정도로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니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시호는 걱정 말라며 환히 웃던 언니의 미소를 떠올렸다. 분명히 두려웠을 텐데, 무서웠을 텐데, 힘들었을 텐데. 언뜻 그녀는 설레 보이기도 했다. 아마 가장 낙관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던 때였겠지. 그녀가 그리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평범한 학교에 다니며 평범한 친구를 사귀고 평범한 생활을 하던 아케미. 그녀가 그리던 미래는 그다지 거창할 것도 없는 평범한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에서 자라난 시호에겐 한없이 기적에 가까운 평범한 삶.

……약 따위 만들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삶.

아케미는 시호에게 평범한 기적을 건네주려 말도 안 되는 범행을 감행했다. 거꾸로 말해, 아케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시호는 평생 평범한 삶을 얻을 수 없었다.

아케미는 시호가 평범한 삶을 살기를,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바랐다.

“누군가에겐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지켜지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요.”

남자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미야노 씨. 가스실에서 그 약을 먹었더군요. 죽을 생각이었습니까?”

“…….”

“아케미가 지키려고 했던 건 당신의 삶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숨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시호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역시 그 약은 불발이었나.

“청산유수 같은 당신 말은 잘 들었어. 그렇지만 마지막 말에는 공감이 안 가네. 언니가 지키려고 했던 건 오지 않을 내 평범한 삶이지, 다시 조직에 끌려가서 그 해괴망측한 약 연구를 계속하는 삶이 아니야. 조직에서 평생 썩을 바에야 그냥 죽어버리는 게 언니 뜻에 더 맞는 일인지도 몰라.”

그 말에 남자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묘해서 시호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말에 하나부터 열까지 반박하고 싶지만.”

기계처럼 말을 쏟아낸 뒤 그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치밀어 오른 감정을 삭이듯이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만 깜빡인 것뿐인데 그의 표정은 금세 분위기를 바꾸며 부드러워졌다.

“미야노 씨, 여기가 어느 병원인 줄 알아요?”

“…글쎄?”

“도쿄경찰병원입니다.”

시호는 말문을 잃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물론 미야노 씨는 제 소개로 여기에 온 것이고요.”

“……당신, 정체가 뭐야?”

“일단 처음부터 버번이라 소개한 건 사과하죠.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만.”

“…….”

“다시 한번, 처음 뵙겠습니다. 경찰청 경비국 경비기획과 소속 후루야 레이입니다.”

보통 같아서는 악수라도 해야겠지만 두 사람은 이미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후루야는 잡고 있던 시호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입가엔 이 병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처럼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건상 경찰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첩 같은 건 없지만요.”

시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줄곧 잡혀 있던 손에서 그의 손이 멀어져 간다. 경찰병원, 경찰청, 경찰. 그렇지만 버번. 그렇다면 이 남자의 정체는.

“당신도 모로보시 다이 같은 거야? 스파이?”

“……‘모로보시 다이 같은 거’란 말은 전혀 맘에 들지 않지만. 네, 뭐.”

시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굳어 있었다. 오전에 찾아온 사람들을 떠올린다. 확실히 조직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세 사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불렀던 호칭.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이름엔 가까운 대상을 부를 때와 같은 친밀함이 담겨 있었다.

아주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듯한, 정작 꿈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몽롱한 느낌. 다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만이 막연하게 남아 있다. 설마 이 상실감, 착각이 아니라는 건가. 시호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뚜렷한 목적은 없었으나 분명히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시계라든가, 달력이라든가, 이 붕 뜬 감각을 현실로 되돌려 줄 어떤 객관적인 지표를.

“……오늘 며칠이야?”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고.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아직 한 입도 안 먹었네, 중얼거리며 후루야는 숟가락을 집어 밥을 떠냈다. 그러고는 마치 받아먹으라는 듯이 숟가락을 시호의 입까지 가져갔다. 그 태연하고도 능청스러운 행동에 시호는 발끈하며 말했다.

“장난할 시간 없어. 지금 바로 말해.”

“밥 먹는 건 장난이 아니에요.”

사뭇 진지한 대답이 돌아와 시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선 한 가지만 먼저 말하죠. 당신은 앞으로, 아케미가 목숨과 바꿔서라도 건네주려 했던 평범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 살기 위해 먹으세요. 그 밖의 이야기는 밥을 다 먹고 난 다음입니다.”

그리고 후루야는 숟가락을 손수 시호의 손에 쥐여 주었다.




2. 부모의 뜻

[그래, 보호사는 무사히 후루야 군으로 결정되었다는 건가.]

“예. 지금 바로 퇴원 수속 밟으러 갈 예정입니다.”

[아쉽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 편이 더 낫겠지.]

“……직접 얼굴을 뵈면서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늘 전화로만 전해드려 죄송합니다.”

[후루야 군이 바쁜데 어쩌겠나. 나도 지금은 둘째한테 얹혀사는 입장인 데다 계획이 틀어져서 정신없는 상황이고. 그러고 보면 계획에도 없던 일을 처리하느라 후루야 군도 혼란스러웠을 텐데, 와중에도 일 처리를 빨리해 줘서 정말 고맙군.]

“별것 아닙니다.”

후루야는 그렇게 대답하며 왼 손가락으로 미간을 지그시 눌러 마사지했다. 별거 아닌 듯 말했어도 실은 요 며칠 후루야에겐 두 발 뻗고 편히 잠들 시간도 없었다. 

그만큼 미야노 시호의 기억 상실은 난감한 이변이었다. 후루야에게 그녀는 조직과 관련된 기밀 사항 그 자체였다. 그녀는 아포톡신을 복용하고 유아화 한 대상이자 동시에 그 약을 개발한 당사자였다. 마찬가지로 유아화 했던 쿠도 신이치와 메리 세라와는 입장부터가 달랐다. 그녀에겐 유아화 사실을 함구하는 것에 덧붙여 앞으로 자신의 재능을 건전한 방향으로 발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이바라 아이는 이에 대해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유아화 된 시점부터 조직에 쫓기는 신세였으니, ‘유아화’란 그녀에게 ‘절대 밝혀져서는 안 될 진실’로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이런 약, 애초에 만들어선 안 되는 거였다고. 혼잣말처럼 읊조린 말이었지만 후루야는 똑똑히 듣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본인이 직접 유아화를 겪으면서, 하이바라 아이의 삶을 살아가면서, 아포톡신이란 약에 대해 많이 숙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이바라 아이가 아닌 미야노 시호는 어떨까. 셰리로서 한창 아포톡신 연구를 하고 있었을 미야노 시호는, 과연 그 약에 대해 얼마만큼의 경각심을 가지고 있을까. 바로 그 점이 베일에 싸여 있어 후루야는 선뜻 어떤 조치도 내릴 수 없었다.

[그날 겁이 나더군. ‘시호’라고 부르는 나를 마치 타인 보는 듯하던 그 애의 눈을 보고 말이야.]

“아아, 아찔했죠. 저한테는 ‘당신은 또 누구냐’고 묻던데요.”

[그동안 만나지 못한 시간만큼의 공백을 메꾸자고 각오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순간, 이건 내 능력 밖이란 생각이 들었어.] 

예정된 시나리오대로라면 미야노 시호는 가정환경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여러 사안이 정상 참작되어 성년이 될 시점까지 보호관찰 처분을 받게 되어 있었다. 보호 주체는 현재 통화 상대인 메리 세라. 미야노 시호의 친모인 미야노 엘레나의 친언니로, 그녀와는 3촌 이내 인척이었다.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는 점,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 등 여러 결격 사유가 있었지만 메리의 뜻이 워낙 강경했다. 최근까지도 그녀는 딸 마스미와 시호, 셋이서 함께 살 집을 신중히 고르고 있었다.

[어디 사는 바보 같은 아들놈 때문에 안 그래도 인식이 마이너스인데, 설상가상 언니가 죽은 직후로 기억이 끊겨 있다니.]

그 말에는 후루야도 쓰게 웃었다. 후루야에게 메리는, 처음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공적으로는 각 기관의 수사관으로서 공조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문제는 사적인 영역. 그녀는 후루야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카이 슈이치의 친모였으나 한편으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미야노 엘레나의 친언니이기도 했다.

뜻밖에도 먼저 손을 내밀어온 쪽은 메리였다. 

─ “자네가 레이 군인가.”

엘레나가 동네 병원을 운영하던 당시 메리는 몇 번이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늘 싸우고 다쳐서 아케미에게 붙잡혀 오는 혼혈의 남자아이. 그 애도 언니랑 나랑 같은 금발이야, 하며 엘레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도 전해지는 여동생의 즐거움에 그날 이후 메리에게 ‘레이 군’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메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그것뿐이었지만,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20대 후반 남성의 본명이 후루야 레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 공안경찰인 그가 카라스마 조직에 잠입해 있었다는 사실엔 필연마저 직감했다. 당연히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엘레나 선생님을 찾으려고 경찰이 되었다는 후루야의 고백에도 메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군, 한마디를 툭 던져 놓았을 뿐.

그 덕분인지 메리는 후루야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시호와 관련된 일이라면 특히 그랬다. 아포톡신을 복용한 시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긴급 상황에도 메리는 침착히 후루야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의식을 되찾은 시호가 이상 징후를 보였을 때도 마찬가지. 메리는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후루야와 상의했다. 메리는 현명하고 똑똑한 여성이었다. 엘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후루야 군이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야.]

“……무슨 그런 과분한 말씀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호와 지내면서, 정확히는 해독제 관련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느낀 건, 시호가 생각보다 그 약의 메커니즘을 두려워하고 있었단 사실이야. 아마 만들 당시에는 몰랐겠지. 오히려 꿈만 같은 약이라고 들떠 있었을지도 몰라. 본인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의 삶이 유아화로 인해 어떻게 뒤틀렸는지를 직접 목도하면서 그 애도 많은 걸 깨달았겠지. 하지만 그 자각의 과정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지금, 공안이 직접 시호를 감시하게 된 건 응당한 처분이라 생각해.]

그 말은 후루야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는 오전에 박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아화 된 시호와 처음 만났을 당시의 상황을 알려 달라는 후루야의 부탁에 박사는,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지…….”라며 먼 시선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시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쿠도 신이치의 집을 필사적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쿠도 신이치의 유아화 가능성을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 짐작을 바탕으로 투여 리스트 중 사망 여부가 불확실하던 쿠도 신이치를 확실히 사망 처리했던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당연하게도 쿠도 신이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너무나 흥미 있는 소재였기 때문에, 조직에 보고하는 순간 그는 살해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즉─ 하나의 ‘샘플’을 놓쳐버릴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에.

현재 미야노 시호는, 아포톡신의 유아화 작용을 그저 흥미 본위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건 공안으로서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시호가 기억을 되찾지 못하는 한, 솔직히 그 애가 일평생 공안의 감시 밑에 놓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만큼 아포톡신은 터무니없는 약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시호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후루야 군이라면…… 안심이 될 것 같군.]

후루야는 무어라 대답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입만 달싹이기를 몇 번. 그는 머뭇거린 끝에 “……감사합니다.” 짤막하게 인사했다.

[후루야 군.]

아, 이건 기시감이다. 후루야는 지금과 똑같은 무게와 박력으로 자신을 부르던 박사의 비장한 얼굴을 떠올렸다.

[시호를 잘 부탁해.]

오늘만 두 번째로 되풀이되는 말을 들으며 후루야는 멋쩍게 웃었다. 메리의 말에도 역시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직에서 연구를 강요당하기만 하다 목숨을 잃은 여동생 부부, 그 연구를 계승하다 만들게 된 독약으로 자살 시도를 한, 단 하나 남은 조카. 그 사이에는 18년이란 지난한 세월이 존재했다. 메리로서는 지금부터라도 시호를 자신의 슬하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8년 동안 왜곡되고 비틀려 있던 여동생 부부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바꿔 주고 싶었을 터.

“예, 맡겨 주십시오.”

후루야는 이번에도 거침없이 대답했다. 미야노 부부의 따뜻함이라면 후루야 역시 시호에게 줄곧 알려 주고 싶던 것이니까. 가까운 거리에서 엘레나의 넘치는 자애를 한 몸에 받은 후루야다. 그에겐 엘레나의 숨결마저 고스란히 시호에게 전달해 줄 자신이 있었다. 이미 그녀가 하이바라 아이였을 때도 몇 번이나 전해 준 것이긴 하지만. 선생님에 관한 기억이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반복할 수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후루야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메리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다른 화제를 찾다 후루야는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엘레나 선생님은, 미야노 선생님은…… 대체 어떤 약을 만들려고 하셨던 걸까요.”

그 대답은 시호조차 몰랐다. 시호가 부모에게서 연구를 넘겨받았다고는 하나, 초기에는 사실 ‘넘겨받았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골자가 없었다. 대부분의 데이터가 화재로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각난 파편들을 잇는 전체적인 짜임새, 즉 연구의 목적이나 취지는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시호는 조직이 일방적으로 하달한 목적에 따라 움직였을 뿐 본래 부모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후루야는 알고 있었다. 미야노 부부가 카라스마 그룹에 끈질기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 이유는 이미 미야노 아츠시가 특정 연구로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라는 사실. 지금은 조직에 의해 한참이나 뒤틀리고 이지러진 결과를 가져왔지만 분명 그가 처음에 지녔던 신념은 사람을 해치는 독약 따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메리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슬슬 거북해질 때쯤 그녀는 말했다.

[몰라, 그런 거.]

“…….”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애가 만든 약이 내 목숨을 살렸다는 거다.]

……정말 그렇네요. 후루야는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


후루야는 주차된 차의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호는 마침내 그가 3개째의 캐리어를 꺼냈을 때야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뭔 짐이 그렇게 많아?”

“아, 이 중 하나는 미야노 씨 거예요. 일단 급한 대로 필요해 보이는 것만 챙겼습니다. 미안한데 이것만 끌어 줄래요?”

그는 시호 몫의 캐리어를 그녀에게 넘겼다. 시호는 그의 뒤를 따라 캐리어를 굴리면서 상황을 좇아가려 애썼다. 

“그럼 나머지 두 개는 당신 거란 소리야?”

“네.”

“…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데?”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닫힘 버튼을 누른 그는 이어서 숫자 20을 누르고는 살짝 어이없다는 얼굴로 시호를 쳐다보았다.

“저도 생활은 해야 하니까요.”

“……설마 여기서 같이 사는 거야?”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아.”

그는 미간을 찌푸려 기억을 되짚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두 눈을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인상은 어린아이의 무구함을 담고 있어 시호는 조금 놀랐다.

“음…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네, 미야노 씨는 앞으로 이 집에서 저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

까먹을 얘기가 따로 있지, 싶었지만 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현 상황을 논리정연하게 파악하길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일 전, 후루야가 처음 병원을 찾아왔을 때 그는 지금보다 더한 폭탄선언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던져놓았다. 예를 들면 지금은 시호가 가스실에서 약을 복용한 날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이라든가. 조직의 보스와 주요 간부들은 두 달 전의 극비 작전으로 모두 사망 내지는 체포를 당한 상황이라든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운데 정작 그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때가 되면 하겠다며 얼마 안 돼 병실 밖을 나섰다.

이후 3일간 시호는 꼼짝없이 병실 신세였다. 하지만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더럽고 비좁은 가스실보다는 두말할 나위 없이 쾌적한 환경이었다. 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배달되는 병원 밥은 빈말이라도 맛있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시호는 묵묵히 씹어 삼켰다. 맛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후루야의 말마따나 그녀는 오로지 살기 위해 먹었다. 이미 이 세상에 죽고 없는 언니 아케미를 떠올리면서.

그녀는 후루야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늘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병실 안에만 있어 미처 몰랐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분명 한겨울이었다. 시호가 가스실에서 아포톡신을 삼킨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초봄 무렵. 이렇듯 나무가 저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황량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널찍한 1인실 안에서 시호는 과연 그가 말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일지 추측했다. 당연히 시호에게 공백으로 남아 있는 8개월간의 이야기겠지만, 대체 어떤 내용이어야 조직이 사실상 괴멸했다는 내용보다 중요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장 안쪽 방을 미야노 씨가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후루야도 이 집에 발을 들이기는 오늘이 처음인지,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복도 양옆으로 열려 있는 방문을 지나, 왼편의 주방과 오른편의 욕실과 화장실도 지나, 주방과 연결되어 탁 트인 거실, 바로 그 옆에 위치한 방 안까지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집 안은 썰렁했다. 아마 이 집에 처음부터 딸려 있었을 냉장고나 식탁이 놓인 주방 쪽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방 안에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밖에는 으레 있을 법한 TV도, 소파도, 책상도, 그 무엇도 없었다. 집 안을 멀거니 둘러보는 시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후루야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가구는 하나씩 들여놓을 예정이니 걱정 마시고.”

“별로. 상관없어.”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시호도 멍청히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8개월간의 과거는 알 수 없었기에 대신 그녀는 미래를 생각했다.

조직의 보스 및 주요 간부가 사망하거나 혹은 검거당한 상황이라면. 마찬가지로 조직의 간부였던 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연구 부서였다고는 하나 그녀는 떳떳하지 못한 약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눈앞의 남자는 이미 그 약의 존재를 알고 있다. 심지어 그게 독약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러니 그는 시호에게 마냥 호의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는 시호가 ‘평범한 삶’을 살게 되리라 말했지만 그게 꼭 장밋빛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고는 돌고 돌아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갔다. 시호는 타고나길 회의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났는지 아니면 비정상적인 성장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됐는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마는 건 그녀의 버릴 수 없는 습성이었다. 어쨌거나 시호는 이번에도 최악의 경우 철창신세마저 고려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부자유한 삶이 되리라 예상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상관없으면 곤란해요. 그래도 앞으로 살 집인데.”

“감시 카메라나 도청기가 몇 대 달려 있는지는 좀 궁금한걸.”

그래서 후루야가 자신을 멀쩡한 집으로 데려왔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외관에 속아 방심할 순 없었다. 

뜻밖에도, 후루야는 웃었다. 시호로서는 내심 그의 허를 찌르기 위해 꺼낸 질문이었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 그는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감시 카메라나 도청기는 없습니다. 이건 믿어도 돼요. 따로 감시 도구가 붙지 않는 것이, 저와 함께 사는 조건이니까요.”

“아, 그럼 그쪽이 직접 감시하겠다는 얘기?”

“이어서 얘기하려면 본격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만, 그 전에.”

그는 활짝 열려 있는 방문에 기대어 체중을 약간 실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아 손가락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 보면 오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계속 피곤해 보였다.

“제가 3일째 한숨도 못 자서. 물론 간간이 쪽잠을 자기는 했지만 지금 살짝… 제정신이 아니에요. 좀 이르긴 하지만 오늘은 먼저 들어가서 자겠습니다. 중요한 얘기는 내일 하는 거로, 괜찮죠?”

3일째라면 공교롭게도 시호가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다. 단정할 순 없지만 시호는 왠지 그가 자기와 관련된 일 때문에 잠들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밤낮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전하며 뛰어다녔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런 거, 근거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데도.

“괜찮아.”

“감사합니다. 그럼 현관에서 오른쪽 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노크하시고요.”

그러면서 그는 뒤를 돌았다. 그가 입은 검정 코트의 끝자락이 휘날렸다. 쉽게 등을 보이는 무방비함에 시호는 비꼬듯이 말했다.

“내가 이대로 도망치면 어쩌려고?”

최소한 수갑 정도는 채워 놓을 줄 알았다. 후루야는 우뚝 멈춰 서서, 그러나 뒤돌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도망쳐서 갈 데라고는 있습니까?”

“…….”

“그럼 내일 봅시다.”

그리고 그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또다시 자유가 찾아와 시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병실에 혼자 남겨졌을 때도 느꼈지만 그녀는 이런 식의 자유에 익숙지 않았다. 단순히 감시의 눈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보다 본질적인 자유.

시호는 어릴 적부터 조직의 강요에 따라 살아왔다. 영재 테스트를 받으라 해서 검사를 치렀고, 유학을 하라 해서 미국에 넘어갔고, 좋은 성적을 받으라 해서 죽어라 공부했고, 약 연구를 시작하라 해서 아포톡신을 만들었다. 그마저도 도중에 본래 취지를 버리고 독약을 만들라고 명령받아 시호는 그렇게 했다. 시호는 한순간도 자기 의지에 따라 살아본 적이 없었다.

후루야는 그녀를 일평생 얽어매던 조직이 사실상 괴멸했다고 말했다. 물론 시호는 실감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그런 말을 들어 봤자 심경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렵다. 아니, 실감이 난다고 해도 그녀는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랐다.

기쁨? 슬픔? 허무함? 해방감? 막막함? 홀가분함? 어쩌면, 이 모든 것?

그리고 지금,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방 안에 들어선 시호는 비로소 제게 찾아온 첫 번째 감정과 마주했다.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이내 온몸을 집어삼키는 막연한 두려움.

─ “도망쳐서 갈 데라고는 있습니까?”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직후부터 얻은 정보는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였다. 시호가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느낀 증거는 현재 계절이 겨울이라는 것뿐. 그렇다면 그는 충분히 신뢰할 만한 인물인가? 후루야는 자신을 경찰로 소개했지만 증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를 믿을 수 없다면 그의 발언 하나하나를 의심하고 파헤쳐 보는 것이 맞았다. 

시호는 당장이라도 이 집에서 뛰쳐나가 조직이 정말 와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곧이곧대로 만천하에 드러났을 리는 없을 테니, 두 달 전쯤의 신문 기사를 찾다 보면 작은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몰랐다. 예컨대 조직 본거지 근처의 화재나 폭발 사고라든가, 조직에서 암약하던 사회 저명인사의 돌연한 은퇴 선언이라든가, 혹은 그들의 행방불명 및 사망 소식 등등.

하지만 시호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직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정말로 조직이 무너진 거라면, 제 발목을 평생 구속하던 족쇄가 풀린 거라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 조직 없는 삶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자유롭다는 감각이 두려웠다.

그래서 시호는 두 발에 족쇄가 풀리고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3. 부모의 뜻 (2)

후루야가 식빵 두 장을 비뚤어진 부분 없이 정확히 겹쳐 놓았을 때, 타이밍 좋게 욕실 문이 열렸다. 어서 앉아요. 자연스러운 권유에 세안을 마친 시호가 쭈뼛쭈뼛 식탁 옆으로 다가와 섰다.

“당장 요리할 여건은 안 되고 급한 대로 샌드위치를 만들었어요. 우유 마실래요?”

아침 일찍 일어나 후루야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근처 마트였다. 일단 냉장고를 채워야겠다는 의무감에 식자재를 이것저것 쓸어 담았으나 생각해 보니 이 집은 조리에 필요한 도구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날을 잡아 대대적으로 쇼핑해야 할 듯싶었다.

조리 과정이 간단한 식사를 물색하다 불현듯 떠오른 음식이 피넛버터 블루베리 샌드위치였다. 식빵에 잼만 바르면 끝이니 지금 상황에선 최적의 레시피였다. 시호는 일회용 접시에 담긴 샌드위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는 유학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유학했을 때 생각나네.”

예상했던 반응이 그대로 나와 후루야는 살짝 놀랐다.

유학 시절에 이 샌드위치를 즐겨 먹었다는 얘기는 그녀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샌드위치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답해 주며 나온 얘기였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입에 담지 않았지만 간혹 지금처럼 별 저항감 없이 사소한 에피소드를 늘어놓을 때가 있었다. 자고로 사람은 음식처럼 흔하고 무해한 주제 앞에선 긴장이 느슨해지는 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유학했을 때 많이 먹었나 봐요?”

“응.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대화는 그때와 엇비슷하게 흘러갔다. 후루야는 새삼 그녀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이 맞는다고 실감했다.

생각해 보면 지난날 후루야는 시호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벨트리 급행열차 사건 때만 하더라도 그의 눈에 비친 시호는 두려운 것이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가스실을 탈출한 방법도 조직 내 스파이의 조력 덕분으로 생각했고, 이후 그녀가 보인 행보 역시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 찍힐 만한 대담한 행동뿐이었다. 베이커가와 하이도가를 중심으로 탐정과 FBI의 손을 잡고 조직의 뒤를 캐는 움직임은 분명히 치밀한 계획에 따른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폭탄이 잔뜩 실린 화물칸의 문을 닫아버렸을 때도 후루야는 동요하지 않았다. 소문대로 골치 아픈 아가씨군. 못 말리고, 제멋대로에,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 이쪽 뜻에 순순히 따라 주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그만큼 조직에 깊은 원한을 맺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조직으로 다시 돌아갈 바에야 그냥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나중에야 알았지만 시호는 그가 생각한 것만큼 대담하지도, 조직에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가스실에서 탈출한 이유는 그저 쓰레기 배출구를 통과할 수 있는 몸으로 유아화 했기 때문에. 유아화 한 이유는 직전에 삼킨 아포톡신이 기대와 어긋나는 부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에.

기대하던 작용이란, 아주 적은 치사량으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생화학 반응을 무력화시키는 것─ 곧, 죽음이었다.

사실상 그녀가 가스실에서 했던 행위는 자살 시도였다.

이후 후루야는 미야노 시호라는 인물의 해석을 모조리 뒤집었다. 그녀는 언제나 죽음으로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에겐 무언가를 선택할 의지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조직을 마음껏 적대시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행동 기제는 전부 두려움이었다.

“난 8개월 동안 의식이 없었던 거야?”

묵묵히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가 싶던 그녀가 말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바로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과연 미야노 시호에게 본인이 유아화 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후루야는 아직껏 고민했다. APTX4869의 유아화 작용은 중대한 기밀이다. 제아무리 당사자라 한들 유아화 당시의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사정이 달랐다. 유아화 사실을 모르는 ‘외부인’에게 함부로 기밀을 누설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포톡신이 독약 외 다른 효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효력은 하이바라 아이가 이미 제 입으로 털어놓은 바 있었다. 쿠도 신이치의 유아화를 손쉽게 간파한 이유도 본래 그 약의 목적은 독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기억을 잃었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아포톡신의 중요 관계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론상으로 아는 것과 실제 사례를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앞으로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아포톡신을 부작용 없는 독약으로만 인지할 것이다. 대외적으로 그러하듯이.

“그럼… 8개월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건가?”

“그렇죠.”

“……저기, 지금 나랑 스무고개 할 생각이야?”

시호가 묻고 후루야가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는 상황은 확실히 스무고개를 연상케 했다. 그 모습을 부감해 보고서 후루야는 속으로만 웃었다. 그녀는 세 번째 질문을 하고 싶겠지만 아마 상상력이 따라 주지 않을 것이다. 가진 정보가 현저히 모자란 탓이다. 그는 넌지시 힌트를 던져 보기로 했다.

“쿠도 신이치를 알고 있습니까?”

시호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후루야는 그녀의 모든 변화를 면밀히 살피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다.

“……알지, 잘난 체하며 혼자 범죄 영화 찍다 봉변당한 고등학생 명탐정. 아냐?”

“당신이 만든 약을 먹고 말이죠.”

침묵이 깔린다. 후루야는 엄지로 유유히 입가를 닦았다.

“내가 먹인 거 아냐.”

“그렇겠죠.”

“먹이라고 한 적도 없고.”

“그래요?”

“독 같은 거 만들 생각도 없었다고.”

“그렇군요.”

“…….”

후루야는 샌드위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마주치지 않는 시선과 성의 없는 대답을 마주하고 시호는 한껏 얼굴을 구겼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로,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글쎄요. 저랑 얘기하고 싶어 하는 건 미야노 씨 아니었나요?”

“그래서, 그 독약 때문에 여기서 나를 감시하는 거야? 당신이 무슨 권리로? 당신이야말로 이런 거, 감금죄 아냐?”

“글쎄요. 간밤에 도망치지 않은 건 미야노 씨 아니었나요?”

“……말장난 그만해.”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미야노 씨는 이곳에 도착한 뒤 바로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의 유무를 신경 썼을 정도로 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제가 병원에서 했던 말도 100% 신뢰하지 않았겠죠. 그럼 어젯밤이라도 여길 빠져나가 혼자 힘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죠. ‘하지 않았다’보단 ‘하지 못했다’가 더 맞는 말이겠네요.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웠을 테니까.”

탕! 시호가 두 손으로 식탁을 짚었다. 그러고는 드르륵, 기세 좋게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보 취급하지 마. 난들 혼자서 여길 못 나갈 것 같아?”

그녀는 거리낌 없이 발소리를 내며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외투를 손에 든 그녀가 현관 쪽을 향한다. 후루야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자기 바로 옆을 스쳐 갈 즈음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쿠도 신이치는 살아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이번엔 그가 눈을 제대로 맞춰 주었다. 

“살아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

어느 때보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시호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인다. 이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그녀는 허공을 주시했다. 이따금 움찔거리는 입술과 생기 있게 번뜩이는 눈은 미약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후루야는 그 모든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녀가 문득 후루야 쪽을 쳐다보고는 말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뒤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데?”

“최근까지도 만났으니까요.”

“……쿠도 신이치를?”

“네, 참고로 고등학생의 모습입니다. 방금 미야노 씨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모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시호의 손에 들려 있던 코트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 정도면 힌트가 충분했을까요?”

“……설마, 나 8개월 동안.”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일단 자리에 다시 앉아 주실까요.”

후루야는 맞은편에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를 향해 정중히 손짓했다.

시호는 떨리는 손으로 코트를 주워 느릿느릿 제자리로 향했다.


***


쿠도 신이치.

APTX4869를 복용했으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사망 여부가 불확실하던 인물. 그가 정말 사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호는 두 차례나 쿠도 저택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첫 조사에서 한 달 간격을 두고 이뤄진 두 번째 조사에서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옷장 속에 있었을 그의 어릴 적 옷만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친 건 동물 실험 단계에서 아포톡신을 투여받은 뒤 성장이 후퇴해버린 쥐 한 마리였다.

쿠도 신이치는 죽지 않고 어린아이의 몸으로 유아화 했다.

확신에 가까운 생각과 함께 시호는 그를 사망 처리했다. Sherry. 수정된 투여 리스트에 필기체의 서명을 했다. 코드 네임을 걸고 저지른 독단이었다. 쥐 한 마리에도 그토록 흥분했던 셰리다. 하물며 인간인 쿠도 신이치는 흥미롭기 그지없는 샘플이었다. 경솔하게 조직의 손에 죽게 놔둘 순 없었다.

그런데 후루야는 지금 쿠도 신이치의 유아화를 기정사실화한 것도 모자라, 미야노 시호 역시 유아화를 했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건 정말 조직이 괴멸했다는 사실보다 훨씬 중요했다. 게다가 유아화 했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해독제까지 존재한다니. 시호는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졌다.

“유아화 관련 정보는 아포톡신을 복용하고 유아화 했던 당사자들과 몇몇 주변 인물, 그리고 저를 포함한 공안 측 소수만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FBI나 SIS에도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수사관들이 있습니다만, 이건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제가 무엇보다 당부하고 싶은 건 유아화 관련 기밀 유지입니다. 이것 때문에 제가 미야노 씨와 함께 생활하는 거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명료하게 이해됐다. 요점은 아포톡신의 유아화 작용이었다. 성인의 몸이 유아기까지 후퇴하는 작용은 확실히 일반 상식에 크게 벗어난다. 밖으로 드러나면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치안 유지를 우선시하는 공안 측에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구하고 싶을 사안. 그렇게 생각하니 시호는 후루야와 같이 사는 이 특이한 감시 체계도 납득이 갔다.

“원래 계획은 동거까진 아니었는데, 미야노 씨가 기억을 잃으면서 일이 좀 복잡하게 꼬였습니다. 부득이하게 보호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었어요. 하이바라 아이… 아, 미야노 씨가 유아화 했을 당시의 이름입니다만, 저는 하이바라 아이와 미야노 시호를 각기 다른 인물로 취급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름도 따로 있었나 보네.”

“8개월이 짧은 기간은 아니니까요. 많은 일이 있었죠.”

하긴, 조직이 무너졌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시호는 새삼 8개월간의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설명하자면, ‘다른 인물로 취급한다’는 부분이 중요한데. 미야노 씨가 의식을 잃은 뒤 어제까지 사흘간 제가 계획에도 없던 공간을 준비하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전부 미야노 씨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아화 했던 미야노 씨죠. 편의상 앞으로 하이바라 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하이바라!”

─ “아이 군, 괜찮은 거냐?”

병실에서 절박하게 불렸던 이름이, 그제야 떠올랐다.

당황한 얼굴로 병실을 찾아왔을 정도니까 그들은 하이바라 아이를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튀어나온 호칭은 다급한 와중에도 친밀한 대상을 부르는 듯 자연스러웠다.

아프면 누군가가 바로 달려와 걱정해 주고 염려해 준다.

그건 여태 살면서 한 번을 받지 못한 따뜻한 관심이었기에, 시호는 순수하게 하이바라 아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분명 기억을 잃기 전의 자기 자신일 텐데도 어쩐지 타인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하이바라 아이는 아포톡신을 포함해 본인이 아는 선에서 조직의 정보를 전부 제공했습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 저희는 해독제를 복용한 미야노 씨가 보호 처분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절차를 준비해 놓았고요. 덕분에 계획이 살짝 틀어졌어도 일 처리가 빠를 수 있었죠.”

“…뭐야, 결국 사법 거래를 했다는 거네.”

“용어는 좋을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시호는 딱딱한 말투로 일관하는 후루야를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그나저나 조직 관련 정보를 전부 불었다니. 나에게도 그런 적극적인 면모가 있었나, 시호는 조금 놀랐다.

“하이바라 아이가 동의한 내용 중에는 아포톡신 데이터의 영구 삭제 또한 포함됩니다. 당초에는 해독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데이터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독제가 완성되면서 그 필요성은 사라졌으니까요.”

어머, 그 아까운 걸.

시호는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하지만 아쉬움은 눈빛과 표정으로도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후루야는 줄곧 담담히 이어가던 말을 멈추고, 그런 시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관찰하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시호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까운가요?”

“……뭐?”

“데이터 말입니다. 과학자로서 그냥 내버리기는 아쉬울 텐데요.”

시호는 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간파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보아하니 그는 ‘하이바라 아이’와 제법 교류가 있었던 모양으로, ‘미야노 시호’의 성격이나 행동 패턴, 가치관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시호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봐도 시호가 불리한 상황. 그녀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저는 하이바라 아이의 보호사가 아닌 미야노 시호의 보호사입니다. 아포톡신의 데이터 파기에 동의한 사람은 하이바라 아이지, 미야노 씨가 아닙니다. 저는 미야노 씨의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할 생각입니다. ‘하이바라 아이와 미야노 시호를 각기 다른 인물로 취급한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럼 내가 원한다면 아포톡신 데이터를 파기하지 않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한 말이랑 너무 모순되는데?”

그는 처음부터 유아화의 기밀 유지를 당부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기밀의 핵심인 데이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남기려 하다니, 이건 거의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격이었다.

“물론 데이터는 파기합니다. 당장 파기할 수 없을 뿐이죠. 해독제를 복용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니까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데이터는 향후 5년간 순차적으로 파기됩니다. 그 사이에 복용자의 경과 관찰이 이루어지고, 만일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기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고요. 실제로 미야노 씨가 기억을 잃은 것도 일종의 문제 상황으로 분류 중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존중해 준다는 내 의사는 뭔데?”

“미야노 씨가 원한다면 향후 5년간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

시원스럽게 날아든 제안에 도리어 시호는 머리가 아팠다.

도저히 이 남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시호는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이바라 아이는 저 제안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 전후 사정은 몰라도 조직의 정보를 전부 제공했다는 걸 보면 하이바라 아이는 공안 측에 꽤 협조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존재가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고 한낱 조직의 일원으로 원상 복귀했으니, 그들로서는 퍽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에겐 미야노 시호의 사상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후루야는 지금 아포톡신 데이터를 미끼로 함정을 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의사를 존중하니 마니, 아까부터 말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냐? 내가 그딴 잔꾀에 넘어갈 것 같아?”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건 미야노 씨를 시험하는 제안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아, 혹시 독약 때문에 그래? 내가 그쪽들 위해서 비밀리에 독약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이런 경우엔 유아화라는 부작용이 없는 완전한 독약, 뭐 그런 거려나?”

상대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조직’, 속칭 제로. 경찰청의 내부 부국으로 공안 경찰의 사령탑이다. 비밀주의를 철저히 고수한다는 점은 흔적을 남기길 꺼리는 카라스마 조직과 닮아 있다. ‘체내에 성분이 남지 않는 독약’은 그들에게도 매력적이다. 만약을 대비한 자결 수단으로 이보다 깔끔한 물건은 없기 때문이다. 유아화라는 부작용만 없었다면 당장 실용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소 공격적인 시호의 태도에 후루야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가 커지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미야노 아츠시 선생님의 뜻을 이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설마설마, 여기서 부모의 이름이 나오리라곤.

시호는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말장난에도 정도가 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장난뿐이다. ‘사법 거래’를 ‘협조’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것이나, 사실상 ‘감시’에 지나지 않는 처분을 ‘보호’라는 말로 허울 좋게 포장하는 것이나. 그래도 여기까진 언어 선택이 신중한 셈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독약을 만들어 달라는 은근한 제안을, ‘부모의 뜻을 이어 달라’고 입발림하는 짓은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 아닌가.

“난 있잖아, 당신들 위선에 구역질이 나. 솔직하게 독약을 만들어 달라고 할 순 없는 거야? 차라리 그냥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자식답게 처신하라고 말해, ‘선생님’ 소리 같은 시답잖은 예의 차리지 말고!”

시호는 악에 받쳐 언성을 높였다. 말끝이 올라가며 거실과 주방을 아우르는 공간이 약하게 울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한동안 흐트러진 숨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미안합니다. 앞뒤 설명이 없었네요. 확실히 미야노 선생님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오명을 쓰고 계셨지만, 지금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후루야는 한껏 수그러든 기세로 시선을 떨구었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그가 처음으로 무른 감정을 보여 시호는 화내던 것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미야노 씨도 알다시피 선생님은 동네 병원을 운영하던 당시 카라스마 그룹에 몇 번이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의를 꾸준히 거절해 왔죠. 엘레나 선생님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괴롭고, 선생님의 언니분도 그 그룹을 수상히 여기고 있다는 이유로요. 하지만 어떤 계기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고, 엘레나 선생님은 기꺼이 병원을 접고 남편의 연구를 돕기로 했습니다.”

“…….”

“‘당신 꿈이니까, 쉽게 포기하지 마.’ 엘레나 선생님은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시호는 그의 곧은 눈을 마주 보았다. 결코 거짓을 말하는 자의 눈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그가 말한 내용은 시호도 아케미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저렇게까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예컨대 아빠가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이유라든가, 아빠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엄마의 말이라든가. 대체 후루야가 어떻게 저런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후루야는 마치 그 상황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지?”

“당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

“저는 그 병원이 있는 동네에 살던 아이였어요. 엘레나 선생님과도 제법 친했고요.”

시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놀라움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두 분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계셨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뭐, 인품과 연구 실적은 별개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미야노 선생님은 절대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불릴 만한 분이 아니셨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 말에는 결코 선생님을 비하하고자 하는 뜻이 없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

“아니, 나도…….”

다짜고짜 화내서 미안해.

그런 낯간지러운 말, 할 수 있을 리 없다. 기분도 이상해질뿐더러 어딘가 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곡해한 건 진심으로 미안했다. 시호는 후루야의 말을 넘겨짚어 그를 상처 입혔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아버지를 욕되게 했다. 그 또한 미안하고 수치스러웠다.

비록 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아빠를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손가락질했더라도, 딸인 자신만큼은 그래서는 안 됐다. 

“미야노 씨가 부모님께 연구를 넘겨받았다고는 해도 그 연구의 목적은 부모님의 뜻이 아니라 조직의 뜻이었다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그 연구엔 분명히 미야노 선생님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말한 ‘선생님의 뜻을 이어 달라’는 말은, ‘선생님의 꿈을 이뤄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꿈’이라는 게 굉장히 막연한 데다 대부분의 데이터는 화재로 소실된 상태에, 사실상 5년이란 기한이 있어 여러모로 쉽지 않은 길이리라 생각은 합니다만…….”

“…….”

“저는 미야노 씨의 보호사입니다. 미야노 씨 눈에는 제가 감시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 나름대로는 보호사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미야노 씨의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하겠다는 말은 감언이설 따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강요가 아닙니다. 하나의 제안일 뿐, 받아들일지 말지는 미야노 씨의 선택입니다. 자유롭게 결정하면 돼요.”

선택. 자유. 결정.

제 인생에 이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나열된 적이 있었던가. 시호는 과분한 대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녀는 발밑에서 타고 올라오는 두려움의 감각을 기억했다.

강요 없는 타의가 두려웠다.

온전히 주어진 자유가 두려웠다.

그리고 아마, 선택으로 말미암아 짊어질 책임이 두려웠다.

하지만 난생처음 오롯이 내릴 선택이, 부모의 뜻과 맞닿을 수 있다면.

시호는 두려움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미야노 씨, 부모님의 뜻을 이어 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후루야는 엷게 웃었다. 처음 시호의 병실을 들어섰을 때도 그는 저렇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시호는 깨달았다. 그의 미소도, 그날의 따뜻함도, 전부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후루야 레이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걸.

“좋아, 그렇게 할게.”

시호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4. 아이의 뜻

반죽을 누르고, 주무르고, 돌린다. 표면이 매끈해지면 둥글게 펴서 밀대로 늘린다. 전분을 덧뿌리고 밀대로 말았다가 다시 펴내는 작업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한다. 후루야는 이 모든 작업에 진지한 얼굴로 임하고 있었다. 그의 까무잡잡한 손가락 위로 군데군데 묻은 흰 가루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반죽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정성스러운 손길. 마침내 완성된 반죽을 세 겹으로 접어놓고 그는 도마 위로 전분을 뿌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정한 간격으로 반죽을 썰어내며 그는 보이지 않는 뒤쪽을 향해 말했다.

“시호, 이제 슬슬 대파 좀 썰어 줄래. 무도 갈아 주고.”

“알았어. 와사비랑 같이 담아 두면 되는 거지?”

“응, 저번처럼 너무 많이 넣지는 말고.”

“바로 안 넣을 거야, 그냥 담아 두기만. ……그리고 그거 실수라고 했는데 자꾸 걸고넘어질래?”

“하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야.”

말하는 와중에도 후루야의 자세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가지런한 면에 묻은 가루를 살살 털어내고 그는 면을 삶을 냄비를 꺼냈다. 더위가 한창인 여름이라 되도록 불을 사용하고 싶진 않지만 잠깐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모처럼 후루야의 비번 날이었다. 명시적으로 정하지는 않았어도 이런 날은 대개 후루야가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책임졌다. 평소에도 요리를 하지만 아무래도 바쁜 날이 많아 시호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보니 이런 날은 요리에 단단히 기합을 넣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 점심은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시원한 소바. 시중에서 판매하는 면과 육수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후루야는 기성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어젯밤에 디포리로 우려낸 육수를 냉장 보관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 정성스레 손 반죽한 메밀 면을 삶고 찬물에 헹구기만 하면 끝.

그는 적당히 삶아진 면을 솜씨 좋게 채반으로 건져 찬물에 씻었다. 어느새 제 할 일을 마친 시호가 그런 후루야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당신은 정말 못 하는 요리가 없네.”

“이런 간단한 요리로 칭찬받으려니까 기분 묘한데.”

“조리법이야 간단하지만, 요즘 누가 이렇게 면을 직접 만들겠어. 어머, 이 칼 같은 균일함 좀 봐.”

“나머지는 다 했어? 이제 물기 빼고 판에 올리기만 하면 돼.”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식탁에는 이미 두 개의 원목 트레이 위로 면을 제외한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알맞게 희석한 육수도, 곱게 갈아낸 무도, 가지런히 썰어낸 파도, 적당히 덜어낸 와사비도. 같이 소바를 먹는 일이 처음도 아닌 데다, 이미 몇 개월간 함께 생활해 온 덕분에 웬만한 역할 분담은 두 사람 다 척하면 착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시호는 젓가락을 든 손으로 합장했다. 후루야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기 전에 그녀가 치르는 작은 의식이었다. 다른 때 말고 오직 후루야가 만든 음식 앞에서만 보이는 행위였기에 처음에는 숨은 의미라도 있나 싶었지만, 정작 시호는 별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누군가가 만들어 준 음식에 무의식적으로 보내는 감사. 제 성의를 보답받는다고 생각하면 후루야는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맛 어때?”

“말하면 입만 아프지. 요리사 안 하고 뭐 했어?”

시호의 화법은 독특하다. 맛있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솔직하게 맛있다고 대답하는 법이 없다. 분명 맛있다는 뜻으로 말했을 텐데 언뜻 듣기에는 시비조로 들릴 때도 있다. 그런 점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후루야가 웃으며 받아쳤다.

“맛있다는 소리지? 고마워.”

“아니, 정말로. 보면 요리 말고도 웬만한 일은 다 잘하는 것 같던데, 대체 어쩌다 경찰이 된 거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시호가 핵심을 파고들어서 후루야는 우뚝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상대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겠지만 후루야는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찰나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음…… 그건.”

대답에 뜸을 들인 순간부터, ‘경찰이 된 데에는 아주 무겁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호 역시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그녀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후루야를 바라보았다.

“…그건?”

“엘레나 선생님, 때문에.”

결국 말해버렸다. 물론 언젠가는 말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후루야는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엄마 때문에?”

“응.”

“어… 엄마가 권유라도 했어? 경찰이 되라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후루야는 엘레나와 함께한 짧은 나날을 떠올렸다. 혼혈의 생김새란 참 묘했다. 누구나 식별할 수 있는 탓에 차별받기 쉬웠으나 그만큼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쉬웠다. 상대에게 자신의 아픔을 투영하기는 엘레나와 후루야,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 “별일이군. 낯을 가려서 환자하고도 꼭 필요한 얘기밖에 안 하는 당신이 다른 집 아이와 사이좋게 얘기하다니.”

─ “여보, 저 아인 특별해! 나랑 같은 혼혈이거든.”

다만 엘레나는 어른이었다. 그녀는 각별한 마음으로 후루야를 신경 썼지만, 그렇다고 소년의 세계를 ‘우리’와 ‘그들’로 나누지는 않았다.

─ “인간 따윈 겉모습은 달라도 속을 갈라서 한 꺼풀 벗겨내면 죄다 똑같은 피와 살덩어리…. 그 증거로 흑인도, 백인도, 황인종도… 죄다 이렇게 붉은 피가 흐르잖아?”

나와 너는 같은 혼혈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그들은 다 같은 인간이다. 후루야가 엘레나에게 받은 사랑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았다. 엘레나의 보금자리에 머물면서도 그는 바깥세상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건 푹신푹신한 담요로 몇 겹이나 싸여 있는 것 같은 아늑함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세계였기에 그 안에서 버리거나 버림받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았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포용, 인정, 허락만이 존재하는 곳.

그러나 포근한 안식처에서 순식간에 내동댕이쳐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별이 너무 갑작스러웠어. 어디로 가는지 여쭤 보지도 못했고.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어.”

─ “바이바이야, 레이 군.”

이후 ‘바이바이’라는 말은 후루야에게 진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적어도 그에게 ‘바이바이’란, 잠깐의 이별을 암시하는 인사말이 아니었기에.

“그럼, ……엄마를 찾으려고 경찰이 됐다는 거야?”

“응. 놀랐어?”

“그야 당연히……. 뭐, 엄마가 당신을 치료도 해 주고 좋은 말도 해 줬다는 건 몇 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엄마 때문에 경찰이 됐다니, 그건 또 뭔가 다른 차원의 얘기인 것 같은…….”

그렇게 말하며 시호는 젓가락 끝에 닿은 입술을 한껏 오므렸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기야, 결코 가볍게 들릴 만한 얘기가 아니라고는 알고 있다. 상대의 생업이 자기 어머니에 의해 결정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그는 잠자코 시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일단은 먹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는 메밀 면을 집어 육수에 흠뻑 적셨다. 

“이제야 이해가 가네.”

“응?”

“나한테 아포톡신 데이터를 넘긴 것 말이야. 아빠의 꿈까지 헤아려 준 건 당연히 고마운데,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싶었거든.”

“……아아.”

“생각보다 당신한테 커다란 존재였구나, 우리 엄마 아빠.”

그러면서 시호는 해맑게 웃었다. 가족 얘기를 들을 때면 그녀가 언제고 지어 보이는 순수하고 깨끗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그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갰다. 아주 조금이나마 기억의 단편이 남아 있어서, 그리고 그녀에게 고스란히 건네줄 수 있어서. 후루야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내가 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아빠의 꿈을 찾는 거 말이야. 하이바라 아이한테도 제안해 본 적 있어?”

별일이군. 후루야는 속으로만 놀라며 시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먼저 ‘하이바라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타인을 대하는 듯한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하이바라 아이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여 인식했다.

아마 그녀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기억 속에 없는 내가, 지금의 나와는 묘하게 다른 인격이었다는 사실이.

“아니, 해 본 적 없어.”

“이유를 물어도 될까?”

“음…… 그때 넌 굉장히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하이바라 아이는 아포톡신을 만든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베이커가에 들이닥친 어두운 그림자를 최악의 상황으로 단정 짓고 자기 자신을 모든 일의 원흉으로 여겼다. 조직의 배신자로서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 그러나 유아화 된 몸으로는 함부로 발각되어 죽을 수도 없는 딜레마, 그러는 사이 차례차례 조직의 타깃이 되어 가는 주위 사람들.

무엇보다 당시 하이바라 아이에겐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었다. 박사님을 비롯한, 하이바라 아이에게 평범한 삶을 건네준 많은 사람들. 행여나 그들이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는 순간순간이 그녀에겐 끔찍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후회?”

“그 약을 만든 걸 후회하고 있었어.”

“흐응…….”

시호는 면을 한 젓가락 집고는 육수에 담갔다. 그리고 입에 넣기 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몸이 작아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걸까.”

호로록 면을 들이켜고는 심란한 얼굴로 우물우물 씹어 삼킨다.

지금의 그녀는 약을 만든 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조직의 명령이었으니까. 그 약 때문에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들 그녀는 부차적인 책임만 느낄 뿐, 본인을 ‘원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미묘한 차이가 미야노 시호와 하이바라 아이를 갈라놓았다.

미야노 시호는 쓸데없이 과도한 죄책감을 짊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던 소중한 사람들을 망각해버렸다.

좋은 점이 있으면 당연히 나쁜 점도 있다지만, 문제는 그 둘을 저울질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하이바라 아이란 이름은 누가 지은 거야?”

“박사님이랑 너랑 같이 지었다던데.”

“박사님이라면… 아가사 박사님?”

“응, 두 명의 탐정 이름을 따서 지었대. 코델리아 그레이, V·I 워쇼스키.”

“아무리 그래도 아이愛라니, 너무 낯간지러운걸. 뭐, 어린 여자애 이름으로는 안성맞춤이었겠지만.”

“아, 그게…….”

그러고 보니 시호는 하이바라 아이의 한자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후루야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애정의 아이愛가 아니야. 애수의 아이哀.”

“…….”

“박사님께선 애정을 추천하신 모양인데, 너는 애수가 마음에 들었나 봐.”

후루야가 미야노 시호의 유아화를 의심할 당시 하이바라 아이를 눈여겨본 이유는 그녀의 이름 때문이기도 했다. 이름이 아이라면 보통 한자로는 愛를 많이 쓰지, 哀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가명이라든지 별칭이라든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짓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참, 나다운 발상이네.”

시호는 씁쓸히 웃었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읊조린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아 후루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록 가명에 불과할지라도 이름을 애정으로 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애정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미야노 시호다운 발상.

“이름 하니까 말인데, 난 시호라는 이름이 좋아.”

“……후후, 갑자기?”

“뜻志을 지키다保つ. 너한테 잘 어울려.”

엘레나가 후루야 곁을 떠날 때 그녀의 배 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그땐 아직 이름이 없었기에 후루야는 아이를 부르지 못했다. 그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이름이 미야노 시호라는 사실은, 이후 10년도 더 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조직에 잠입해 코드 네임을 얻은 뒤에야 간신히 접근할 수 있었던 조직 내 데이터베이스. 그 안에서 셰리의 본명을 발견했을 때의 전율을 그는 아직도 몸으로 기억했다.

미야노 시호宮野志保.

미야노 선생님, 엘레나 선생님. 당신들께선 대체 이 아이에게 어떤 뜻을 사하려 하셨던 겁니까.

그가 온 마음을 다해 물어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후루야는 다만 망자의 생전 행적을 통해 그들의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말 한마디,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강렬했던 사생결단. 그는 고르지 못한 씨실과 날실을 엮어 가장 이데아에 가깝게 수놓고자 했다. 그리하여 미야노 시호가 그 뜻을 보존할 수 있도록.

“그래……?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나한테 이렇다 할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처럼 투철한 정의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거창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너는 그냥 언니의 뜻을 지켜 평범하고 행복하게 지내면서, 부모님의 뜻을 찾아 연구를 계속하면 되는 거야. 이미 그렇게 하고 있잖아?”

“…….”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시호.”

시호.

폐에서 밀려 나온 공기가 성대를 울리며 소리의 형태를 갖추는 그 모든 과정을 음미하며, 후루야는 엷게 웃었다.


***


아침에 눈을 뜨면 가끔 상실감에 시달렸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은 하루의 시작을 울적하게 만든다. 시호는 잡히지 않는 어렴풋한 느낌을 떨쳐내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차피 곧 사라질 감각이다. 평소에는 희미한 감각을 끈질기게 쫓아 보기도 하지만, 오늘만큼은 굳이 우울 속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시호, 좋은 아침.”

“후루야 씨… 좋은 아침.”

“오늘 꽤 일찍 일어났네.”

“응.”

눈을 비비며 방문을 나서면 후루야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몫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아침을 먹은 뒤 나갈 준비까지 끝마친 상태. 그 증거로, 그는 늘 입는 회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보통 두 사람의 아침은 전날 시호가 만든 저녁 반찬에 된장국과 샐러드, 계란말이 혹은 두부 따위를 곁들인 정도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라서 후루야는 2인분을 만들어 시호 몫을 따로 빼놓고는 했다. 야행성인 시호가 일어날 즈음엔 떠 놓은 밥과 국이 다 식어버릴 테니 아쉬운 대로 반찬만 준비한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반찬을 예쁘게 담아 놓은 그릇 위에 랩을 한 번 씌우고 있었다.

“아침 지금 먹을래? 국 떠 줄까?”

“응. 근데 국은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바로 나가려던 거지?”

“그럴래? 바로 나가 봐야 하긴 해.”

그러면서 그는 식탁 의자에 걸쳐 놓은 코트에 한쪽 팔을 뀄다.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다른 한쪽도 꿰고는 옷매무새를 가볍게 바로잡는다. 시호는 무심결에 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며 구두에 발을 집어넣던 후루야가 문득 시호를 알아채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호는 아침에 약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후루야를 배웅한 날은 이날 이때까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 최근에 한 배웅도 벌써 6개월 전. 후루야의 출근길에 마주 선 상황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생소했다.

“아, 저기, 음… 다녀와.”

‘어서 와’ 같은 저녁 인사는 매일같이 하는데도, 안 해 버릇하던 아침 인사를 하려니 영 어색하기만 하다. 시호가 목덜미를 쓸면서 민망한 듯 그를 올려다보면 후루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호, 생일 축하해.”

“어…… 알고 있었어?”

“? 당연하지.”

오늘은 시호의 스무 번째 생일. 작년 생일은 기억에서 깨끗이 사라졌으니 시호로선 한꺼번에 두 살을 먹는 셈이다. 갑자기 다가온 스무 살이니만큼 그녀는 이래저래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사안은 보호사인 후루야와의 생활. ‘보호’의 조건은 ‘미성년자인 피보호자’다. 시호는 이제 미성년자가 아니므로 보호 처분은 오늘부로 끝이 난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해 시호는 요 며칠 불안한 상태였다.

“오늘, 일찍 올게.”

그녀는 후루야에게 ‘일찍’이란 과연 몇 시쯤일지 생각했다. 8시? 9시? 희망 섞인 기대를 담아 7시까지도 추측해 본다.

“꼭 해야 할 말도 있고.”

아, 7시를 바라던 마음이 한순간에 뒤집혔다. 영영 오지 않았으면. 아니, 후루야가 오지 않는 건 곤란하니까 이대로 시간만 멈춰버렸으면. 시호가 그런 어림도 없는 공상에 빠져 있을 때 후루야는 어느새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그리고 조심스레 닫혀버린 문.

잠깐 사이에 밀려 들어온 바깥의 냉기가 시호의 피부를 스쳤다. 가시지 않은 울적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녀는 실내화를 직직 끌며 주방까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릇 위에 어중간하게 씌워진 랩을 걷어내고 밥과 국을 준비한다. 이 집에서 먹는 마지막 아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호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동안 동거인의 배려 덕분인지 시호는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다. 어디 아침뿐인가. 가끔 점심은 거를지언정 저녁은 늘 함께였다. 후루야가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을 빼고는.

이 생활이 끝나면 아마 많은 것이 변하겠지. 우선 여기를 나가 혼자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집도 공안 측이 지정하겠지만 어쨌든 혼자 생활하는 건 확실했다. 과연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을지 시호는 걱정이 들었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그런 일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일상의 중심이 되는 ‘연구’. 아버지의 뜻을 찾아 시호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 중인 데이터 분석 작업이야말로 문제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룬다. 시호에겐 분명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나 낭만과 현실은 달랐다. 그나마 낭만이 현실을 버티게 하지만, 무턱대고 직진하기엔 5년이란 시간이 너무 짧았다. 같은 과학자라고 해도 아츠시와 시호의 세부 전공은 전혀 다르다. 생전에 사비로 출판했다던 그의 책도 시호가 읽으면 이해 가능한 수준일 뿐, 그 내용을 직접 연구하기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시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국내 대학원 몇 군데를 진지하게 물색해 보기도 했다. 발목을 붙잡는 건 역시나 5년이라는 한정된 기간. 대학원은 하고 싶은 연구에 마냥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과제도 해야 하고, 교수 비위도 맞춰야 하고, 동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럴 시간에 차라리 방 안에 틀어박혀 연구에 매달리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 5년을 틀어박혔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아니, 애초에 5년이란 시간을 멀쩡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시호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미 몇 개월 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 “아빠의 꿈을 찾는 거 말이야. 하이바라 아이한테도 제안해 본 적 있어?”

그래서 궁금했다. 하이바라 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흔들림 없이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갔을까.

후루야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하이바라 아이는 아포톡신을 만든 걸 후회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데이터 다루는 일은 권유조차 하지 않았다고.

후회라니, 시호는 그런 물러터진 발상 따위 이해할 수 없었다. 아포톡신이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독약이 된 건 맞지만 그 약은 아직 실험 단계였다. 신약 연구 단계에서 독성 물질의 우발적 발현은 흔히 있는 일이다. 아포톡신은 하나의 사례일 뿐, 연구자에게 그런 우발적인 변수까지 미리 내다보고 방지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다. 그런 변수를 걸러내기 위해 이 세상에는 동물 실험과 임상 시험이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진짜 문제라면 아직 동물 실험 중인 약을 인간에게 투여했다는 점인데, 그건 다른 조직원들이 저지른 짓이지 시호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일에 후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회…….’

시호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단지 미래에 후회하게 될까 봐, 그건 조금 무서웠다.

만약 정말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5년이 흘러 아포톡신 데이터가 파기된다면.

그녀는 그때 자신이 느낄 후회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그게 더 현명한 선택 아닐까? 지금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후루야 씨마저 없으면 어떻게 하지? 질질 끌수록 시간만 낭비하는 것 아닐까? 이러다 5년 뒤에 실패로 드러나면? 그때 실망할 바에야 미리 포기해버리는 게 훨씬 낫지 않나?

하지만.

─ “난 시호라는 이름이 좋아.”

─ “뜻志을 지키다保つ. 너한테 잘 어울려.”

─ “너는 그냥 언니의 뜻을 지켜 평범하고 행복하게 지내면서, 부모님의 뜻을 찾아 연구를 계속하면 되는 거야. 이미 그렇게 하고 있잖아?”

─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시호.”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마 실패한 결과보다 섣부른 포기에 더 실망할 것이다. 그래서 시호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녀에게 후루야는 아빠와의 가느다란 인연을 이어 준 소중한 은인이었다. 피붙이도 아닌 타인에게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 주는 고마운 사람. 지금 이 순간 시호가 누구보다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

시호의 뜻이라면 그게 무엇이 됐건 전적으로 존중해 주는 보호사.

‘……헤어지기 싫다.’

그가 어서 집으로 돌아왔으면. 그러나 동시에,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런 모순된 마음을 견디며 시호는 젓가락을 들었다.

스무 번째 생일이라 해도 딱히 특별하지 않았다. 유독 올해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호는 20년을 통틀어 생일을 축하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릴 때는 언니인 아케미가 축하해 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미국에 유학했을 때나 귀국한 이후에는 언니와 제대로 만날 기회도 없어, 생일날에도 그저 짤막한 메시지를 주고받았을 뿐.

오늘도 그저 평소와 같은 나날이었다. 아무리 일러도 7시쯤 오리라 예상했던 후루야가 6시 정각에 벨을 눌렀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후루야 씨? 엄청 일찍 왔네?”

“잘 있었어? 아직 저녁 만들기 전이지?”

오는 길에 마트에서 장까지 봐온 듯 그는 들고 있는 짐이 많았다. 한 손에는 찢어질 듯 한가득한 마트 봉투, 다른 한 손에는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힌 케이크 상자. 그리고 그 손의 엄지와 검지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풍성한 꽃다발. 한눈에 봐도 시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호사스러움이었다.

“응… 그렇긴 한데.”

“오케이. 그럼 나 좀 도와줄래? 거창한 건 아니고, 스테이크 할 건데.”

성큼성큼 주방에 들어선 후루야가 두 손 가득한 짐을 내려놓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가 씻고 올 동안 대강 정리만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향했다. 시호는 봉투 속을 뒤적거렸다. 큼지막한 스테이크용 고기 두 덩이, 그리고 함께 곁들여 먹을 각종 채소. 내용물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니 딱히 필요한 준비랄 게 없어서 시호의 시선은 자연스레 꽃다발로 향했다.

여러 종류의 꽃이 갖가지 색으로 어우러져 있지만 결코 화려하지는 않은, 파스텔톤의 차분한 꽃다발이었다.

누군가에게 꽃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일까. 아니, 꽃을 받아 본 적이 있기는 하던가? 하기야, 하이바라 아이는 꽃을 받아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왠지 모르게.

─ “그래, 꽃은 나약하고 덧없어. 비바람을 피하려고 무턱대고 울타리로 감싸면 꽃은 태양이 그리워서 시들어버려….”

“……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시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듯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시호, 다 했어?”

간단히 세안을 마친 후루야가 앞머리에 맺힌 물방울을 가볍게 털어내며 다가왔다. 정신이 팔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시호가 눈에 띄게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았다.

“어? 아, 그게….”

“……왜 그래?”

시호의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눈치챈 그가 바싹 다가왔다. 그녀는 몸을 모로 돌려 다시 거리를 넓혔다.

“아냐, 아무것도.”

후루야도 그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상당히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흐음…. 고기는 어디에다 뒀어? 냉장고?”

“응, 냉장고.”

“그럼 일단 밑간 좀 할게. 당장 배고프진 않지? 40분 정도 해둘 거라.”

“상관없어. 그나저나 오늘 너무 호화스러운 것 아냐? 무슨 피보호자한테 베푸는 최후의 만찬이라도 돼?”

냉장고에서 꺼낸 고기를 스테인리스 트레이 위에 올려놓으며 후루야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그러네.”

“…….”

농담처럼 건넨 말에 마찬가지로 가볍게 받아넘긴 말이었지만 시호는 말에 담긴 부분적인 진실을 잡아챘다. ‘최후의 만찬’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뜻은 후루야 역시 아는 것이다. 오늘로써 이 보호 관계는 끝이 난다는 걸.

“이게 다가 아냐. 너한테 줄 선물도 있어.”

“선물?”

“응, 잠깐 기다려. 이거 소금만 뿌리고 금방 줄 테니까.”

“……? 아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까진…….”

“아니, 서둘러야 해. 내가 그동안 그거 주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는데.”

거짓말은 아닌지 후루야의 표정이 묘하게 들떠 있었다. 평소에 그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지만 때때로 저런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는 했다. 그건 꼭 방심한 순간에 튀어나온 본연의 모습처럼 보였다.

“자, 다 됐다. 냉장고 넣고 45분. 기다릴 동안 선물 줄게. 소파에 가서 앉아 있을래?”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애도 아니고, 얌전히 앉아 있을 필요까지 있나 싶었지만 시호는 군말 없이 거실로 향했다. 선물을 준다는데 일일이 불평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방으로 들어간 후루야는 얼마 되지 않아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손 안에 쏙 들어갈 크기의 기계와 직사각형 물체가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 아무리 봐도 그건 선물이라기보다 여느 사건 현장에 있을 법한 증거품으로 보였다. 시호가 눈을 가늘게 떠 더욱 유심히 살피면 후루야는 어느새 소파까지 다가와 시호의 옆자리에 풀썩 걸터앉았다.

“……카세트 플레이어?”

가까이서 보니 그가 들고 있는 기계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언뜻 보기에 구식 모델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레트로 감성을 구현한 요즘 제품이었다. 그는 플레이어에 연결된 이어폰 한쪽을 시호에게 건넨 뒤 다른 한쪽은 자신의 왼쪽 귀에 꽂았다.

“MP3로 변환한 파일도 있긴 한데, 이렇게 듣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시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뭔가 좋아할 만한 노래라도 들려주려나, 그렇다기엔 시호의 노래 취향을 그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비닐봉지에 담긴 세 개의 카세트테이프 말고도 이미 플레이어 안에는 또 하나의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후루야는 시호가 이어폰을 제대로 꽂았는지 확인하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앞부분의 공백이 조금 길었다. 곧이어 마이크가 마찰하는 약간의 잡음.

[생일 축하해, 시호. 이제 스무 살이 되었겠구나.]

귓가에 감도는 자애로운 목소리에 시호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후루야를 쳐다보자마자 그는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네가 같이 들어도 된다고 하면, 나도 같이 듣고 싶은데. 들어도 될까?”

“이건…….”

“엘레나 선생님이 남기신 거야. 네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의 생일 축하 메시지.”

“…….”

시호는 비닐봉지 속 카세트테이프를 바라보았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라고 한다면 20년 동안의 축하 메시지가 저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혼자 듣는 게 낫겠어? 나머지 한쪽도 줄까?”

왼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려 하는 그의 손을, 시호가 덥석 붙잡았다.

“아니… 같이 들어 줘.”

그녀는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 후루야는 웃으며 그녀의 피부 위에 손을 미끄러뜨렸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낀다. 포개진 두 손을 무릎 위로 떨구며 후루야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시호가 어엿한 숙녀가 된 모습… 엄마도 정말 보고 싶어. 만약 조금 특별한 머리색 때문에 신경이 쓰이더라도, 시호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알았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엄마는 생각하지만 말이야. ……막 스무 살이 되어서 두렵지는 않니? 돌이켜 보면 엄마는 정말 불안했던 것 같은데, 막상 왜 그리 불안했나 떠올리려고 하면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아. 그만큼 실체 없는 두려움이었다는 소리겠지. …엄마는 시호가 어떤 길을 택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응원할게.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렴. 지금 뜻하는 바가 무엇이든, 네 안에는 이미 그 뜻을 이뤄낼 능력이 있으니까.]

포개진 시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달래듯이 후루야도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한참의 공백이 이어졌다. 이어서 들리는 엘레나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엄마가 내렸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해 달라는 건 아직 너무 이른 부탁 같지만….]

─ [아, 그리고… 이제 슬슬 너한테 말해도 될 때가 온 것 같기도.]

“아.”

또다. 머릿속을 스치듯 헤집는 기억에 시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 [사실 엄마는 지금 굉장히 무서운 약을 만들고 있단다.]

[시호도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 어쩌면 그때쯤엔 이해해 줄 수도 있겠구나.]

─ [하지만 그 약을 완성하려면 엄마랑 아빠는 너희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돼… 이해해다오, 시호.]

“……시호? 왜 그래?”

─ ‘미안해, 엄마. 난 정말 몰랐어. 이런 약… 만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

“시호?”

─ “왜…, 왜 언니는 구해 주지 않았어? 너 정도의 추리력이었다면 언니 일 정도는 간단하게 알 수 있었잖아!”

─ “그거 알아? 이걸 끼고 있는 한 정체가 들킬 리는 절대 없어.”

─ “우리 몸을 이렇게 만든 APTX4869의 AP는 아포토시스, 프로그램 세포사를 뜻하는 말이야. …… 가만히 듣기나 해! 이제 두 번 다시 너하고는 얘기를 나눌 수 없을 테니까!”

─ “도망치지 마, 하이바라!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쳐선 안 돼!”

─ ‘싫어, 쿠도 군. 이건 내 문제야. 너랑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죽지 말아 줘, 죽으면 안 돼!’

─ “아유미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 도망치면 이길 수 없어! 절대로!”

─ ‘이런 데서 내 정체가 발각되면, 조직을 버린 배신자라는 게 알려지면, 나와 함께 버스에 탄 박사님도, 아이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당해버릴 거야. …… 부탁이야, 제발… 들키면 안 돼!’

─ “녀석과 약속했어. 위험해지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 “미안하지만, 박사님이 인질로 잡혀 계셔. 지금 난 박사님을 구하겠다는 생각뿐이라고.”

─ “용기라는 단어는 몸을 기운 돋게 하는 정의로운 말. 사람을 죽이는 이유에 쓰면 안 되는 말이에요.”

─ “가면 안 돼요! 코난이라면 괜찮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말아요!”

─ “네 잘못이 아니야, 원흉은 나. 이게 다, 나를 둘러싼 최악의 상황이 초래한……!”

─ “웃기지 마! 사람을 해치는 독을 만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이야?!”

“헉!”

날카로운 물체가 심장을 부욱 찢고 지나간다. 시호는 가슴께를 틀어쥐며 몸을 크게 움츠렸다. 그 탓에 오른쪽 귀에 끼어 있던 이어폰이 조심성도 없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아직 잡고 있는 후루야의 손을 있는 힘껏 붙들었다.

“……시호, 너.”

“…….”

“기억났구나.”

철컥. 정지 버튼이 눌린 카세트 플레이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진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시호가 문득 괴로움을 느끼고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내가 역겹지 않았어?”

기나긴 침묵 끝에 시호가 말했다. 후루야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기가 만든 약으로 타인의 인생을 뒤틀어놓고, 자기가 만든 약을 먹고 주위에 폐를 끼치고, 결국 자기가 만든 약을 먹고 기억을 잃어서,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그 약을 태연하게 연구하는 내가…. 당신이 보기엔 역겹지 않았어?”

후. 그는 시선을 위로 하며 앞머리가 날리도록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넌 그 연구를 관두고 싶어?”

“…….”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난 네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으니까.”

“난…….”

“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면 적어도 그 방향은 착각하지 마. 넌 그 사람들의 인생을 평생 뒤틀어놓은 것도 아니고, 주위 사람에게 마냥 폐를 끼친 것도 아니야. 너의 죄를 약의 우연한 작용이나 하이바라 아이에게 전가하려 하지 마. 진짜 잘못은 너한테 있어. 독성이 있는 약을 만들면서도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무감했던 천재 과학자 미야노 시호, 잘못을 빌고 싶거든 네 약 때문에 죽어간 동물들과 인간들을 위해서 해.”

후루야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냉정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매서운 날이 되어 가슴을 얇게 저미는 것 같았다. 시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신이치에게 변명처럼 내뱉은 말도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약 따위 만들 생각 없었다는 말, 독약을 만들고 나서 해 봤자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난….”

왈칵 치민 눈물은 너무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시호는 무너지듯 손바닥 위로 얼굴을 덮었다.

“……시호.”

시호의 굽은 등을 후루야가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미안해, 말이 좀 심했어?”

그녀는 훌쩍이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진심으로 그런 어리광 따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네가 하이바라 아이의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을 땐 솔직히 기쁜 마음도 있었어. 지금 네가 느끼는 지나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찝찝한 것도 사실이지. 그건 너에게 죄책감을 일깨워 준 소중한 존재들을 잃어야 한다는 거니까.”

“…….”

“내가 그 빈자리를 채우려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만큼 하이바라 아이에겐 소중한 것이 많았다는 얘기야. 너도 이제부터 잘 떠올려 보면 알게 되겠지. 그 애는 슬픔이라는 이름 뜻이 무색하도록 충분한 애정을 주고받으며 살았었다는 걸. 그러니까 하이바라 아이는 남에게 폐만 끼쳤다든가, 그런 말은 이제 하지 마.”

“……응.”

엎드린 상태에서도 시호가 잔뜩 힘주어 대답했기 때문에 후루야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 눈물 닦고. 얼굴 좀 보여 줘.”

“…운 적도 없는데, 무슨.”

손목으로 눈 주위를 사납게 훔쳐낸 시호가 투덜거렸다. 후루야는 그 손목을 가볍게 잡아채며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잘 들어, 나는 네가 역겹다는 둥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너의 죄는 과학자로서 비윤리적인 태도일 뿐이지 법적인 영역이 아니야. 나는 그걸 멸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길로 지도하기 위해서 보호사를 하고 있는 거야. 무엇보다 지금 네가 하는 연구는 독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있다고 말하면 그건 미야노 선생님을 모욕하는 거겠지.”

“……그러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을 숙지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연구를 관두길 원한다면 그 의사 또한 존중할게.”

“…….”

“그러니까 지금 말해 줄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시호는 눈을 내리깔았다. 격하게 휘몰아치던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차분해진 마음은 냉정한 판단을 요구했다. 비논리적인 감정을 모두 걷어내고 현 상황을 직시한다.

“후루야 씨, 오늘은 내 생일이지?”

“응? 뭐… 그렇지?”

“이제 스무 살이 됐으니까 이 보호 처분도…… 오늘로 끝인 거지?”

시호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카세트테이프 속 엄마의 따뜻한 응원을 들었을 때부터.

─ [엄마는 시호가 어떤 길을 택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응원할게.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렴. 지금 뜻하는 바가 무엇이든, 네 안에는 이미 그 뜻을 이뤄낼 능력이 있으니까.]

“응, 오늘이 마지막 날.”

“이제 후루야 씨랑 나는 어떻게 돼?”

“완전히 감시를 끊어내긴 어렵지만 지금보다는 더 자유로워질 거야.”

“나, 아빠의 꿈을 꼭 이루고 싶어.”

시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정말로 기특해 보였는지 후루야가 활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엄마랑 언니의 꿈도 이루고 싶어.”

“엄마랑 언니의 꿈?”

─ [시호도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 어쩌면 그때쯤엔 이해해 줄 수도 있겠구나.]

─ “이제 약 같은 건 그만 만들고 애인 좀 만들어 봐. 언니는 괜찮으니까.”

“응.”

“그건 처음 듣는 소리인데? 어떤 꿈인데?”

“지금은 비밀. 이건 이루고 나서 알려 줄게.”

“흐음……?”

정말로 감을 못 잡겠다는 듯 후루야는 표정을 찌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시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배고파, 일부러 들으란 듯이 보채면 후루야는 조건 반사처럼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요리를 시작하는 그의 옆에서 익숙하게 보조를 맞추며 시호는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




5. 시호의 뜻

엄마, 아빠, 언니.

부디 제가 이 사람과 지금처럼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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