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는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여전히 저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준영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잠든 준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준영이 제가 좋아하는 것처럼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손을 뻗어 볼을 어루만지자 몸을 뒤척인다. 잘 자요.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던 형주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혹여 뒤척거림에 잠이 깰까 움직임을 멈추었으나 다행히 잠이 깬 것 같지는 않았다. 이불을 여며주고 집안을 둘러보니 평소 준영의 행동으론 있을 수 없을 만큼 엉망인 게 더 잘 들어왔다. 정리를 어떻게 하는지는 알 수 없어 한눈에 구별 가능한 쓰레기나 조금 치워주고 종류별로 정리를 하고 나니 그래도 사람 사는 집 같아 보였다. 제집도 그렇게 깔끔하게 치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다시 준영의 방으로 들어가 잘 자라고 속삭인 뒤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되돌아보았다. 몇 시간 만에 헤어지느니 마느니 하며 울었던 것이 인생 최대 흑역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들기 위해 누워있었으나 잠이 들지 않았다. 정신은 더 맑아지고 눈은 더 반짝 뜨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시계를 확인해도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피실 웃음이 샜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 정도로 웃음이 났다. 피곤함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준영을 만나는 데에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이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형주 씨?!]

 

선잠이 든 새벽 문자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깨니 준영이었다. 제 이름만 적혀있는 문자를 보고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지. 확인했다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왜 갔어요. 집이 너무 더러워서 간 거예요?”

 

형주의 웃음에 수화기에서 히잉.. 하고 울상인 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은 잘 잤어요?”

“아뇨. 괜히 잤어요. 그냥 갈 줄 알았으면 더 붙잡아 두는 건데.”

 

별거 아닌 말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지금 다시 잘 거예요? 아침을 시작하긴 이른 시간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잠들 것 같지 않았다. 아뇨. 형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 소리가 들렸다. 형주의 귓가에 들리는 벨 소리는 제가 귀에 대고 있는 휴대폰을 통해 울리듯 들리고 있었다. 어어? 형주는 잽싸게 몸을 일으키고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운동복 바지에 맨투맨. 이 정도면 양호하다. 현관 앞에 서서 자신의 상태를 다시 살펴보았다. 다행히 잠을 못 잔 것 같거나 지저분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문을 열자 초조한 표정의 준영이 전화기에서 귀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제 모습과 비교될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꾸민 모습이었다. 어색하게 팔을 들어 인사를 한 형주가 몸을 물리자 준영이 자연스럽게 형주의 집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아침에 웬일이에요.”

“보고 싶어서 왔죠. 요즘 우리 많이 못 봤잖아요.”

 

뻔뻔하게 이유를 말하는 모습에 웃고 말았다. 형주는 준영을 거실에 앉힌 뒤 먹을 게 있나 찾았지만, 딱히 내놓을 것이 없어 미지근한 물 한잔을 내놓았다. 받자마자 한 모금 마신 준영이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두더니 팔을 뻗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똑같이 팔을 펴자 준영이 형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귀 끝까지 빨개진 형주가 어색하게 쑥스러워하자 끌어안은 허리에 머리카락을 비벼댔다. 정전기 때문에 준영의 동그란 머리카락이 삐죽빼죽 섰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려는데 손에 붙어 자작자작 흩어졌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당기기에 준영의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허리에 감긴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급작스레 가까워진 자세에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준영이 다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애교가 많은 성격이라는 건 처음 알게 되었다. 준영은 어리광을 부리듯 형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안겨있었다. 형주 역시 가슴이 좀 심하게 쿵쾅거리는 것을 빼면 너무나 만족스러웠기에 준영의 체온 그대로를 느끼고 있었다.

 


“아침 먹을래요?”

 

준영은 퍼뜩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고 형주를 바라보았다. 엷은 눈동자가 거실 조명에 반짝 비쳐 보석 같아 보였다. 어떤 뜻인지 머릿속에 입력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자 준영은 그대로 일어나 형주의 조그마한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를 이리저리 열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고 수납장을 열어 이리저리 뒤지더니 금세 무언갈 만들기 시작했다. 형주는 준영의 손에 잡히는 재료를 보면서 우리 집에 이런 게 있었나? 의문을 가졌다. 척척 필요한 재료만 꺼내는 준영의 손이 마법 같아 보였다. 홀린 듯 목을 쭉 빼고 구경을 하고 있자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뚝딱뚝딱 요리가 만들어졌다.


형주는 입을 틀어막았다. 과장을 보태서 제가 여태까지 집에서 해먹은 음식 중 가장 맛이 있었다. 스스로 요리 부심이 있었지만 셰프에겐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형주의 표정을 본 준영이 이상한가 싶어 얼른 다시 맛을 봤다. 갸우뚱- 고개가 돌아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꼭 강아지 같아 가슴이 울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맛있어요.”

 

형주의 말에 안심한 표정을 한 준영은 그제야 예쁜 웃음을 짓는다.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깨어 지각을 면하면 다행이라 아침을 챙겨 먹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 괜히 허기진 느낌에 크게 밥을 떠 넣으니 천천히 먹으라 저를 챙겨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주는 순간 여전히 제가 꿈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밥을 한가득 넣어 불룩한 볼 위에 간지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눈을 뜨자 여전히 준영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 형주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그제야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물우물 밥을 씹는 움직임이 경쾌했다.


형주의 차를 타고 경찰서 앞까지 부득불 따라온 준영은 형주의 사무실 앞까지 배웅해주고 돌아갔다. 싱글벙글 웃으며 사무실을 들어오는 형주를 본 사경이 컨디션 좋네. 하고 말을 붙여온다. 형주는 순간 사경이 했던 어장 관리가 어쩌고 하는 조언이 생각나 눈에 힘을 주어 사경을 노려보았다.

 

“아, 그 표정 뭐야 지형주.”

“너 어디 가서 연애 상담해주지 마.”

“왜? 좋은 조력자를 뺏기는 것 같아 억울해?”

“진짜 엉터리야.”

“뭐? 뭐!”

 

사경이 형주에게 따져 묻기 위해 다가갔지만 잡아채는 순우의 행동이 더 빠르긴 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사경은 형주를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어제와는 180도 달라진 얼굴에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형주의 연애 놀음에 쏟을 시간도 없을 만큼 일이 바빠 금세 수그러들었다. 다른 팀원들에 비해 여유롭던 형주였지만 마음이 편안해지자 저도 사건 현장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팀원들이 들었다면 어딜 짐을 지우려 하냐 구박을 당했겠지만, 형주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00동 00번지 건물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은 팀원이 하나둘 짐을 챙겨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형주는 팀장님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야, 지형주. 너 어디 가!”

“형사가 현장 나가지 어딜 가겠어요. 이 뛰어난 두뇌를 놀리는 건 국가적 손실이라고요.”

 

형주가 뻔뻔하게 대꾸하더니 다른 팀원들을 따라 사무실을 쏙 빠져나갔다. 저거, 저거. 좀 살만하다고 어휴. 걱정 가득한 말투에 형주는 풋, 작게 웃었다. 사건 현장으로 가면서 방해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들은 형주는 제가 형사 짬밥이 몇 연차인데 그런 걱정을 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형주의 농담에 오랜만에 차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사건 현장은 끔찍했다. 현관으로 도망치려 했던 것인지 방안부터 현관까지 피가 떨어져 있었다. 잔인한 범인은 마지막까지 피해자를 확실히 죽이려 했었던 것 같았다. 이미 국과수에서 사람들이 나와 증거를 채취하고 있었다. 형주는 피가 번지지 않게 조심히 자리를 옮겨 집 안으로 들어갔다. 피해자는 그 집에 사는 50대 남성으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우발적인 범행이라면 피해자를 그렇게 잔인하게 폭행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형주는 원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제 파트너와 함께 주변 탐문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야외에서 몸을 움직이자 운동량이 모자랐던 몸은 쉽게 피로를 이야기했다. 동네를 돌며 피해자와 관계있을 만한 사람을 알아보던 형주는 차로 돌아오자마자 피곤한 몸을 쓰러뜨렸다. 야야, 얘 누가 데려왔냐.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형주는 휘휘 손을 흔들었다. 나갈 때는 쌩쌩하게 나갔으면서 들어올 때는 핼쑥해져 들어오는 모습을 보던 팀장님이 혀를 끌끌 찼다. 형주는 이제 곧 회복할 거라 뻔뻔하게 답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때마침 준영에게 문자가 왔다. 확인하니 저녁같이 먹자고 자신의 가게로 오라는 문자였다. 24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세상이 180도 뒤집힐 수가 있는 것인지.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못하면서 볼 때마다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얼굴을 박고 한참을 실실 웃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입 파트너가 지 경장님 괜찮으시냐 물어오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퇴근 30분 전부터 마음이 붕붕 뜨기 시작하더니 오늘도 땡! 하자마자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발걸음 가볍게 차에 올라탄 형주는 거리낄 것 없이 준영에게로 가기 시작했다. 매장 앞엔 이미 준영이 나와 형주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반, 차를 먼저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반이라 주차선에서 조금 삐져나가게 차를 대고 빠르게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와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게 형주를 끌어안는 준영을 보고 있자니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지는 거다.


“오늘은 예약 없었어요?”

“저한테 중요한 날이니까 미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죠.”


칭찬을 바라는 듯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제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얼른 들어가요. 준영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 형주는 손님용 테이블이 아닌 준영의 앞에 있는 요리 작업대에 앉았다. 몸이 한껏 기울어 턱을 괴고 있는 형주의 얼굴을 보더니, 예의 그 예쁜 웃음을 지었다. 언제봐도 참 감탄이 나오게 하는 얼굴이었다. 형주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던 준영은 약간은 상상에 빠진 듯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것을 보더니 왜냐고 물어온다.


“잘생겼어요.”


홀린 듯 대답하는 형주의 대답에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떨며 웃음을 지었다. 


“저 잘생겼어요?”


형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 어렸을 땐 한 번도 못 들어 봤었어요. 우리 부모님만 나 잘생겼다고 했거든요.”

“거짓말이죠?”


형주가 준영의 답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궁금해요.”

“에이, 안 돼요. 그때 나 보고 나서 못생겼다고 싫어하면 어떡해요.”


준영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해 형주는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준영은 다시 입꼬리가 예쁘게 말리게 웃으며 오늘 저녁 메뉴를 읊기 시작했다. 새우가 듬뿍 들어간 감바스에 로제 파스타. 연어 샐러드. 그리고 화이트 와인이었다. 술을 못 하는 형주 때문에 도수는 높지 않은 것으로 준비했다고 했다. 나란히 앉아서 먹고 싶었는데 준영은 서서 형주가 잘 먹는지만 바라보았다. 뜨겁고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스파게티를 입으로 밀어 넣던 형주는 결심한 듯 크게 떠 준영에게 내밀었다. 잠깐 행동을 멈추었던 준영은 그대로 와앙 입을 벌려 형주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준영의 친구나 가족들이 봤으면 기함을 할 일이었다. 깔끔이를 넘어서 결벽증에 가까운 준영이 남이 먹던 수저를 입안에 넣는다고?! 형주는 준영이 전혀 먹지 않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준영 역시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형주는 준영을 먹여주는 데에 재미를 들인 것 같았다. 자신이 먹는 것보다 먹여주는 횟수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준영은 처음엔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울상을 지으며 맛이 없느냐 물어왔다.


“아니, 진짜 아니에요. 정말 맛있어요.”

“그런데 왜 나만 줘요? 형주 씨는 안 먹고?”

“먹어요!”


준영은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먹는 형주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준영이 식후에 먹을 디저트를 챙기느라 몸을 움직이자 형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눈만 도르륵 굴러가고 움직이던 손은 멈추었다. 턱을 빼 흘끔 쳐다보는 모습을 확인한 준영이 피식 웃자 그제야 멈추었던 손이 급하게 움직였다. 부끄러움은 숨기지 못한 건지 와인 몇 잔에 취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준영은 형주가 접시를 비우는 것을 확인하고 준비한 디저트를 내놓았다. 직접 만든 수제 케이크라고 했다. 딸기가 가득 박혀있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근데 나는 손님도 아닌데 계속 여기 혼자 앉아 있어야 해요?”


준영은 그제야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자리를 옮겼다. 부산한 걸음으로 형주의 옆자리에 앉아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빤히 쳐다본다. 형주는 손을 뻗어 차가운 준영의 손을 살그머니 잡아본다. 움찔- 몸을 떠는 준영 때문에 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준영은 손을 잡는 대신 옆에 앉은 형주를 끌어안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정한 사람이 이렇게 귀엽기까지 한건 불법인 것 같았다. 형주는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소소하게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주고받다가 오늘 오랜만에 현장에 나갔는데 너무 피곤했다는 소리까지 나오자 준영이 날카롭게 되물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몸을 하고 어딜 갔다고요?”


준영의 반응에 눈만 깜빡이던 형주는 이내 푸흐흐 웃어버렸다. 


“경찰이 현장 나가는 게 이상한 일이에요? 준영 씨도 모르는 거 아니면서 왜 그래요. 그냥 둘러보기만 했어요. 그리고 탐문 조사 좀 하고. 범인 쫓거나 뛰거나 한 거 아녜요.”

“그래도 완벽하게 낫기 전까진 위험한 일 하지 말아요.”

“와- 아는 사람이 더해.”

“형주 씨는 내가 다쳤으면 좋겠어요?”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돼요?”

“이제 서로 몸을 공유하는 사이도 됐는데. 조심하자 이거죠. 아픈 거 다친 거 보고 싶지 않아요.”


준영의 말에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몸을 공유하다니! 연애를 아예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어린애 장난 같은 선에서 끝나긴 했었다. 성적 호기심도 남들에 비해선 없는 편이기도 했고. 그랬기 때문에 준영의 저 말은 형주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말로 박혀버린 것이었다. 직접적인 경험이 없을 뿐이지 간접 경험도 없는 건 아니라서 제 눈앞에 살 색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긴 한 것이었다. 갑자기 덜커덩거리는 형주 때문에 덩달아 당황한 준영이 부산스레 몸을 움직이다 멈추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리는데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형주의 얼굴이 보였다. 준영의 웃음이 잦아들자 낮게 깔린 조용한 음악만 들렸다. 눈이 마주치고 달싹대는 입술로 시선이 쏠렸다. 가볍게 몇 번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간지럽게 들렸다. 자연스럽게 풀어진 표정에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눅눅하고 말랑한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다가 몸을 더 가까이 붙이자 갑자기 형주가 눈을 번쩍 뜨며 준영을 밀어냈다.


“지금! 너무 빠른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서는 좀..”


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키스하는데도 장소가 중요하지만 여기는 둘밖에 없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이미 블라인드를 쳐둔 상태라 제 앞에 있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어제도 했는데. 여기선 키스하면 안 돼요?”


준영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형주는 제가 스텝 1이 아닌 스텝 9로 건너뛰어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허옇게 질리다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사람의 얼굴색이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형주가 가야겠다고 말을 뱉자 준영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형주 씨. 하루 만에 제가 지겨워 진 거예요?”

“아녜요!!”


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왁 소리를 쳤다. 준영의 오해는 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제가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알려야 하고. 형주의 표정이 금세 울상으로 변했다. 준영이 손을 뻗어 형주의 손을 잡았다. 그 행동이 제 마음을 토닥이는 것 같아 더듬더듬 말을 건넸다.


“여기서 하자는 말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 우리는 이제 사귄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너무 빨라서 정신을 못 차릴 것 같고.. 진짜 좋긴 한데.. 첫날부터 이러면 다음엔 어떻게 하나 싶고….”


형주의 말을 듣는 준영의 표정 역시 당황으로 가득 찼다. 눈이며 귀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은 덤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형주는 이미 키스하고 섹스하는 것까지 생각했다는 말이었다. 사귄다면 자연스럽게 배드인을 할 거로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그려보지 않은 건 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전히 횡설수설 하는 형주의 입술에 다시 가볍게 도장을 찍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이 붉다.


“싫어하는 것만 아니면 돼요. 나 하루 만에 차이는 줄 알았잖아요.”

“미안해요. 준영 씨.”

“이만 정리하고 갈까요!”


경쾌한 준영의 말에 형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주는 제가 너무 바보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우당탕 굴러 여기까지 왔으면 좀 잘 해야 할 텐데 이건 10대 고딩들보다 못한 것 같은 거다. 매장 안을 정리 하고 형주의 차에 오른 둘은 어색한 공기를 한가득 싣고 준영의 집으로 향했다. 형주는 준영이 내리자마자 곧장 차를 출발하려 하기에 준영이 급하게 형주를 붙잡았다. 운전석 옆으로 와 창을 똑똑 두드리기에 창을 열었다. 창틀에 팔을 걸고 섭섭하다는 얼굴을 한다. 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굿나잇 키스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아..


“그냥 갈까요?”


준영의 말에 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자 준영을 밀어낸다. 준영은 웃으며 쉽게 몸을 물려주었다.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한 형주가 이제는 정말 차를 몰고 멀어졌다. 준영은 형주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한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형주는 이불 속에서 저의 흑역사를 곱씹으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다가 제가 찾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그냥 화면을 닫아버렸다. 역시 또, 진사경인가. 연애 결혼까지 성공한 성공자의 조언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형주는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지형주. 아주 아침마다 감정이 널을 뛰는구나.”

“아! 아녜요. 팀장님.”


하루하루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형주를 보며 팀장님은 혀를 끌끌 찼다. 넌 오늘 어디 밖에 갈 생각 말고 안에나 있어. 형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네. 대답했다. 하지만 어제 준영에게 들은 ‘몸을 공유하는 사이’ 이기 때문에 다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며 실실 웃음이 나왔다. 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한참이나 진정시켰지만 계속 웃음이 났다. 


어제 사건 현장에서 넘어온 사진 자료를 분류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유심하게 살펴보던 형주는 현장 사진 끝에 어떠한 물체 끄트머리가 찍혀있는 걸 보았다. 옆에 앉은 파트너를 툭툭 건드려 어제 현장에서 이걸 보았느냐 물어보니 증거물 중 하나인 것 같다고 했다. 피 묻은 흉기였는데 사진을 몇 장 뒤로 더 넘기자 망치처럼 생긴 물건이 찍혀있었다. 낯이 익은 느낌이었지만 언뜻 기억나는 게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런 건 진짜 어떤 놈들이 들고 다니는 거야? 그냥 집에서 쓸 수 있는 물건들이잖아. 으으. 언제쯤 범죄자들 없어지냐.”

“네가 일하기 싫다는 소리를 그렇게 돌려 하는구나.”

“아니, 경찰이 범인 잡는 일만 하나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형주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조서를 작성하고 사경과 순우가 알아 온 피해자 주변 인물들에 관련된 자료도 정리했다.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의 입장에선 선하고 좋은 사람일 뿐이란 말 만 확인해 원한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끔찍한 죽음을 맞은 피해자에게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범인을 찾아주겠다 약속했다.


형주는 중간중간 오는 준영의 연락 덕분에 오늘은 풀타임으로 손님이 있고, 저녁 늦은 시간 마칠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까지 밥도 못 먹고 있을 테니 함께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무실에선 남은 자료를 정리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가 내일 와서 골골거릴거면 들어가라는 호통에 경찰서를 나왔다. 어디 갈만한 데가 있으려나 찾다 준영의 레스토랑 근처 만화방이 있는 걸 확인했다. 매번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에겐 근처 만화방에 있겠다 메시지를 보내고 들어갔다. 요즘엔 대부분 웹툰을 즐겨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다 보니 만화방에 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널찍하고 편안한 쿠션이 있는 장소에 눕듯이 앉아 근래 재미있게 봤던 웹툰이 책으로 나와 시리즈로 쌓아두고 읽기 시작했다. 그 세계에 빠지기라도 하듯 집중해서 읽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제 옆으로 오기에 슬쩍 몸을 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옆으로 더 다가오는 느낌에 만화책을 치우자 웃고 있는 준영의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가려고 했는데! 형주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서 데이트 해요.”


준영 역시 형주에게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준영은 형주가 보고 있던 만화책을 집어 들고 형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어느새 제 책은 어디로 집어 던졌는지 형주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만화책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빠르게도 넘겨보고 천천히도 넘겨봤지만 준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나 싶어 고개를 슬쩍 내려보자 어떻게 알았는지 시선을 맞춰온다. 배시시 웃다 살짝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다. 형주가 몸을 일으키면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주위 사람들은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만화책 안 읽을 거면 밥이나 먹어요. 원래 이런 데가 진짜 맛집이에요.”


형주는 한쪽 벽에 있는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유심히 살폈다. 준영의 얼굴이 또 형주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추천해 줘요. 나는 처음이잖아요.”


음... 형주는 골똘히 생각하다 스팸 마요 볶음, 김치 치즈 볶음. 그리고 떡라면과 우동을 선택했다. 준영이 제가 주문하겠다고 나가더니 시킨 음식에 음료까지 착실하게 챙겨왔다. 만화책이 접히지 않게 살짝 뒤집어 둔 형주는 라면부터 한 젓가락 크게 집어 들어 올렸다. 후후 불어 먹는 모습을 쳐다보다 준영도 형주를 따라 먹기 시작했다. 메뉴의 맛이나 영양 구성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런 날도 있어야 제가 또 챙겨줄 수 있는 틈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준영은 밥을 먹고도 형주의 옆에 들러붙어 만화책을 다 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중간중간 음료수를 입에 갖다 대 주기도 했다. 마지막 권 책장을 덮자 준영은 주변을 정리했다. 이런 조용한 데이트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형주가 절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며 만화책방에서 산다는 걸 알았다면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형주의 마음속에선 5점 만점에 5.5점을 주었기 때문에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순리 같은 거였다.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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