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촬영을 위해 꽃을 사러 갔었다. 고속터미널의 새벽 꽃 시장. 보통 당일 새벽에 들러서 구매하는 경우가 많지만, 파주에서 고속터미널은 너무나 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피곤한 것보다는 차라리 새벽에 빨리 다녀오는 것을 택했다. 그 시간엔 차도 많이 밀리지 않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덜덜거리는 모닝을 끌고 길을 나섰다. 생화 시장은 자정에 문을 연다. 문을 연 직후에 가면 복잡해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넉넉히 한 시간쯤 여유를 가졌다. 주차장은 생각보다 붐볐다. 이미 꽃을 한 아름 들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 누군가는 이제 서울에 도착해 그를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누군가는 이제부터 전쟁을 시작한다. 꽃시장이 꽃처럼 마냥 우아할 것만 같은가.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큰코다쳤지. 큰 목소리와 계산기에 적힌 숫자가 오가고, 용달 기사님을 섭외하는 사람들 사이로 무언가 잔뜩 실은 구루마가 좁은 길목을 누빈다. (구루마가 잘못된 표현인 줄은 알지만, 구루마라고 쓰고싶다) 

1층 ATM 기기엔 몇 명이 줄을 섰다. 현금을 뽑아 3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엄청 많은 물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굳이 고터까지 가야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땐 그냥 고터로 갔다. 고요한 새벽 속에 이곳만 다른 세상 같았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치열한 현장. 그 틈바구니에 껴있으면 나도 열심히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끽해봐야 몇만 원 어치를 사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팔 한 아름 꽃을 사곤 했다. 꽃을 잘 몰라 어떤 꽃이 좋은지, 요새는 어떤 꽃이 인기가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우선 무조건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사는 꽃이나 많이 진열되어있는 걸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종류를 골랐다. 거친 사장님들의 목소리에 괜히 겁을 먹어서 필요 없는 꽃을 사는 일도 있었다. 몇 번 겪어보니 그것도 적응이 되더라. 결제는 무조건 현금. 신문지에 꽁꽁 싸인 꽃다발 몇 개를 안고 있으면 팔이 아프다. 그러면 주차장으로 내려가 모닝 뒷좌석에 꽃을 내려두곤 했다. 집에서 미리 물을 받아 온 큰 통에다가 조심히 꽂아 놓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모닝이 꽃향기로 가득해진다. 몸은 지쳐도 산뜻한 향기에 기분이 좋다. 차가 작으니 이런 건 좋구나. 내비게이션에 집을 찍고 차에 시동을 건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길이 새벽엔 금방이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커피로 부여잡는다. 사고가 나면 끝장이야. 라디오를 켠다. 이 새벽에 라디오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누가 무슨 프로를 진행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옆에서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제발 이 작은 모닝을 파주까지 잘 인도해주소서. 이 꽃들이 내 마지막을 위한 꽃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핸들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차가 하나도 없는 도로를 탄다. 가로등의 주황 불빛과 빨간 신호등. 피곤한 몸과 꽃 내음.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라디오에서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 듣자 하니 특별 DJ인 것 같다. 사람들의 문자가 쇄도한다. 상구 형, 작두 틀어주세요.

뭐야, 무슨 노래 제목이 작두야.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울려 퍼지는 알 수 없는 가사와 국악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새벽에 이런 노래를 틀어준다고? 거리엔 아무도 없지, 왠지 안개가 끼는 것 같지, 그분이 오신다는 노래를 듣고 있으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아니, 랩은 또 왜 이렇게 잘해. 덕분에 잠이 다 깼다. 그 뒤론 무슨 노래가 나왔는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엔 작두가 가득했다. 다음 날 기억을 더듬거리며 노래를 다시 찾아들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힙합을 좋아해서 나도 어깨너머로 이것저것 들었었다. 다이나믹듀오, 에픽하이, TBNY. 또 누구였더라, 슈프림팀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랜만에 들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만. 그러다 쇼미더머니 시즌이 찾아왔다. 그때 듣던 가수들은 모두 프로듀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상구 형은 시스타 소유와 닮았네. 인상은 순한데 노래는 지독하네.


순하게 생긴 상구 형



얼마 전엔 넉살이 4년 만에 정규앨범을 냈다. 수많은 팬이 손꼽아 기다리던 앨범이다. 나야 뭐, 뜨내기 팬이니까.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는데, 넉살의 영상이 올라와서 알게 되었다. 일부를 라이브로 들려주는 영상이었는데, 웬걸, 작두를 처음 들었을 때의 기분을 다시 느꼈다. 랩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약간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힙합은 그냥 욕투성이에 잘난 척하기 바쁜 시끄러운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앨범을 계속 돌려가며 들었다. 덕질을 할 때나 통째로 들었는데, 이렇게 입덕을 하게 되는 건가. 처음엔 난해했던 노래들이 곧 귀에 익숙해지고, 댓글을 뒤지며 곡의 해석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BAD TRIP>보다는 <AKIRA>를 좋아한다. 앞에 깔리는 둥둥거리는 베이스의 리듬을 타면서 곡을 듣다 보면 나도 뭔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아포칼립스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 크게 틀어놓고 밤길을 운전하면 금상첨화.

앨범 덕분에 우리의 넉언니는 요새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라디오 게스트로도 몇 번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본방송을 듣진 못하고, 팬분들이 올려주는 짤막한 클립이나마 챙겨보고 있다. 오늘은 이런 말을 했더라. 그동안 행복해지려고 답을 찾아다녔는데, 답보다는 정확한 질문을 찾아야 하는 것 같다고.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진짜 행복은 무엇인지, 내가 정말 즐거운지, 슬픈지, 힘든지. 정확한 질문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답을 찾는 것보다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오, 멋진 말이네. 넉살의 앨범 제목은 <1Q87>. 아직 하루키의 <1Q84>를 못 읽었는데, 요것도 읽어봐야겠다. 이렇게 또 읽어야 할 것들만 쌓여간다. 덕질이 아니라고 하지만 계속 뭔가 하는 걸 보니 입덕부정기를 겪고 있나 보다. 사실 그렇다. <AKIRA>에 제대로 치여서 책도 샀다. 모아둔 포인트를 탈탈 털었지. 아직 여섯 권이 다 도착하지 않았다. 얼른 왔으면 좋겠다. 아까워서 어떻게 읽지. 

꾸준히 읽고 열심히 살고 싶은 게으름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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