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벽에 겨우 기대앉은 도기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옷 안쪽으로 넣어 약을 꺼냈다. 하필, 오늘 의뢰인은 도기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였다. 게다가 피해자인 아들은 복무 중인 군인이었단다. 도기처럼 직업군인은 아니었지만, 도기가 자신과 어머니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공통점이 많은 의뢰인과 피해자 덕에 잠시 뒤로 미뤄두었던 기억들이 또 새록새록 떠올랐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이겨낼 만했다. 무사히 의뢰도 끝낼 수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손봐주던 가해자가 자기편이 몽땅 쓰러진 줄도 모르고 사람을 불러 모으겠답시고 견장에 달려있던 호각을 분 것이다. 다행히 이미 내뻗은 주먹은 마지막 남은 가해자를 기절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제 안에 각인되어 있던 소리를 들은 도기는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겨우 한 알 삼킨 약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나타났다. 온몸에 혈류와 돌고 전신에 산소가 퍼졌다. 도기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볼을 타고 내린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다시금 심장이 조여오는 기분이 들고 도기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직도 떨쳐내진 못한 기억이 도기의 가슴을 매 순간마다 무참하게 난도질했다. 아까 전 주먹에 맞아 터진 입가보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아팠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렇게 울어도 지나간 날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가슴 속 깊이 사무쳤다.

도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난 뒤였다. 행여나 앓는 소리가 들어갈까 급하게 뺐던 인이어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자 아니나 다를까 도기를 찾는 애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도기는 차분하게 무지개 운수 가족들을 달래고 모범택시에 올라탔다.

“5283, 운행 종료합니다.”

의뢰의 루틴을 마무리한 도기는 다시 이어폰을 뺐다. 듣고 있으면 언제나 힘이 나는 목소리였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이 이상 듣고 있기에 힘에 부쳤다. 차고에 모범택시를 주차하고 원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한 너무 힘들었다. 이대로 택시 안에 누워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도기는 꾹 참았다.

와중에 집에서 마냥 자신을 기다릴 이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나는 밤새 애를 태울 게 분명했다. 옆에서 보는 이나는 그런 성격이었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은지 수도 없이 도기를 걱정했다. 도기가 조금 늦게 들어오거나 다쳐서 돌아오는 날이면 옆에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오늘도 비슷하게 굴 게 뻔했다.

“이나 씨, 옆에 없으니까 좀 허전하네.”

그렇게 한 번 떠올리고 나니 도무지 이나의 흔적을 지워낼 수가 없어 머릿속을 온통 이나로 채운 도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기는 사실 이나가 자신을 몰래 따라다니던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나의 기척을 눈치챈 건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아마 이나가 따라다닌 지 조금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뒤를 밟는 이나의 행동거지가 그렇게 자연스러울 리 없었다. 그냥 모르는 척 두었던 것은 그렇게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나는 조금씩이지만 기억을 맞게 되찾고 있긴 했다.

도기는 그게 기껍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언제나 이나의 기억이 돌아와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누군가 집에서 자신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은 도기에게 너무 먼 과거였고,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미래였다. 이나의 존재가 그걸 뒤바꿔버렸다. 그런데 이나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와 버린다면, 모든 걸 풀고 떠나가 버린다면 도기는 또다시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집에 홀로 앉아 아픔을 곱씹어야만 했다.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한 도기는 잠시 핸들에 기댔다. 이나를 이 이상 붙들고 있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특히나 이나에게. 늘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따금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 옳지 못한 생각도 문득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잔뜩 충혈된 눈을 꾹 감았다 뜬 도기는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이나를 처음 만난 날부터 언젠가 이나에게 들려줄 일이 있을까 싶어 들고 다니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틀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카세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도기, 본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윤다나예요. 저한테는 하나뿐인 가족이 있어요. 제 언니, 윤이나.

그랬다. 도기가 해야 할 일은 이나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한 번 받은 의뢰는 절대 취소하지 않는 것. 의뢰자를 버리지 않는 것. 그게 철칙이었으니. 물론 이나가 기억을 되찾는 건 온전히 이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이나를 곁에 두고 살펴보게 된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기는 그런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이나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이 나고 재생이 끝난 플레이어가 탁 소리를 내며 꺼질 때까지도 도기는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결국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마음으로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이나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도기는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수십 번도 더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계단이 오늘따라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겨우 꼭대기에 도착한 도기는 문 앞에서도 이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한참을 문 앞에 서 있다가 겨우 문을 열자, 예상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나가 뛰쳐나와 도기를 반겼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별거 아닌 이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고 이나는 있을까. 도기는 모범택시 일을 모르는 척하는 이나에게 장단을 맞춰 대꾸했다.

“장거리 손님이 타서요.”

도기는 아니나 다를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이나를 지나쳤다. 평소 같으면 곧장 욕실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일단 조금 앉아 쉬고 싶은 기분이 들어 곧장 소파로 향하니 한 세트처럼 이나가 따라왔다.

가만히 앉아 이나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제법 낮은 톤을 가진, 이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안정감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속이 빈 부분이 없었다. 아직 온전하게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이 살아온 길이 바뀐 것이 아니니 대부분 이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다른 걸 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고요?”

이 말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나의 동생을 통해 들은 이나의 삶은 도기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이나는 동생이 있어 도기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뿐, 스스로 갉아먹는 삶을 살아온 것은 같았다. 이나 역시 자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세우며 사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렇게 살아온 이나 덕분에 비슷한 삶을 유지해 온 도기가 조금 느슨해질 수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처음으로 타인과 공유하는 일상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이 안온함을 조금만 더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도기는 약을 바르라고 재촉하는 이나의 말에도 씻고 나와 바르는 게 나을 거란 말은 굳이 하지 않고 착실하게 따랐다.

물론 아픔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도기를 놓아주지 않았다. 도기는 나름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꿈속은 엉망이었다. 모든 것이 망가진 삶 속에서 감히 네가 지금 이런 평온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냐며 타박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도기를 괴롭혔다.

도기는 엄마를 애타게 불러도 보고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봤다. 하지만 남아있는 게 없으니 돌아오는 반응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그저 색이 바랜 과거 속에 덩그러니 놓인 도기였다. 홀로 남겨진 그곳은 결단코 고요하지 않았다. 주전자의 물 끓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것이 더욱 도기를 아프게 했다.

꿈속인데도 가슴이 죄이듯 아프고 숨이 막혀왔다. 온몸에 열도 오르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도기는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 마냥 울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울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혼자 남겨진 줄만 알았는데 아직은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로도 도기는 안심했다. 그래서인지 그날 처음으로 도기는 꿈에서 깨지 않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 * *

오래간만에 질적으로 만족할만한 잠을 잔 도기는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침실에 있는 작은 창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기분 좋기까지 했다. 도기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나가 봤다면 어떻게 사람이 침대에서 뒹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느냐며 역시 사람이 아닌 거 같다며 놀랐을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이나라는 사실이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도기의 무릎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아직 축축한 수건이었다. 도기는 잠이 덜 깼나 싶어 멍하니 수건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침대 끄트머리에 간당간당하게 누워 잠들어있는 이나가 보였다.

“귀신은 못 잔다더니.”

언젠가 이나가 한 말을 떠올리고 피식 웃고 만 도기는 축축한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제일 먼저 간 욕실이 아주 난장판인 것을 목격했다.

“도기 씨.”

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도기는 문 쪽을 돌아봤다. 어느덧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이나가 욕실 입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미안해요. 수건만 꺼내고 적시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고마워요.”

애초에 괴롭히려고 이런 사태를 낸 것도 아닌데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네?”

“고마워요, 이나 씨.”

도기가 웃으며 다시 한번 되새기듯이 이나에게 말했다. 이나는 뭐가 문제인지 도기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시선을 피했다. 도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도기 씨가 나한테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건 처음 봐서요. 조금 어색하달까. 그, 몸은 좀 괜찮아요? 어제 많이 아픈 거 같던데.”

“걱정 많이 했어요?”

“아니, 그, 뭐야, 당연하죠. 내가 지금 이 상태로 볼 수 있는 건 도기 씨뿐이고 이 집에서 나갈 수도 없는데 도기 씨 잘못되면 어떡해요. 그럼, 저 꼼짝 없이 지박령이 되는 거잖아요.”

상투적인 물음이었는데, 이나는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지 한참 말을 더듬다가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던 중에 도기는 자신을 순순히 믿는 이나를 보며 종종 들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뭔데요?”

“제가 의심스럽진 않습니까? 보통 귀신이라고 하면 자기가 원한이 있는 곳에 나타나기 마련이잖아요.”

뜻밖의 물음이었는지, 이나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곧이어 이나가 말했다.

“음, 그걸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요. 도기 씨는 그런 사람 아닌 거 같아서요.”

“내가 어떤 사람인 거 같은데요?”

“잘생긴 사람.”

도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는데 이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착한 사람. 겉보기랑 다르게 다정한 사람.”

이어진 말은 첫 번째 말처럼 엉뚱하진 않았다. 도기가 잔잔하게 웃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여기까지 계속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담담하게 말하던 이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이 나올지 점점 궁금증이 커질 무렵 드디어 이나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로운 사람.”

도기는 그만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도기 본인도 알고 있었고, 제 곁에 있다 보면 이나도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그 입으로 들은 말은 파급력이 컸다. 아주 짧은 그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 말. 꿈이 일깨워주었던 것처럼 도기는 혼자라고 외치는 듯한 그 말. 그 덕에 눈을 뜬 순간부터 줄곧 기분이 좋았던 도기는 조금 착잡해졌다. 그때, 문가에 서 있던 이나가 성큼 다가왔다.

“맞다. 나 이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도기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당연히 따뜻한 온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닿았다는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각이 따스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나는 마냥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연습하면 도기 씨 얼굴에 약도 발라줄 수 있고 도기 씨 없을 때 내가 보고 싶은 거 골라 볼 수도 있어요. 도기 씨 안 괴롭히고 혼자서도 할 수 있단 뜻이죠.”

순간 이게 얼마나 서운한 말인지 이나는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나는 늘 도기의 생각과 많이 엇나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처음 만난 순간부터가 그랬다. 도기에게 이나는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나가 무슨 말을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거 같았다. 놀라지 않으려고 했다.

“근데 그럼 도기 씨가 서운할 거 같으니까 같이 있을 땐 도기 씨한테 부탁할게요. 그래도 되죠? 약은 내가 발라주고 도기 씨는 TV를 틀어주고. 어때요? 좋은 생각 같죠?”

하지만 별수 있나. 누가 복싱 선수 아니랄까 봐 막기도 전에 훅 들어오는데. 도기는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그 말에 놀라고 기뻐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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