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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로글리세린은 강력한 폭발성을 가진 물질로

다이너마이트의 주요 성분으로 쓰이고

심장의 통증을 줄이는 혈관 확장제로도 쓰인다. 


CURE!

바쿠고 카츠키 드림


* 드림주의 개성은 '치유'입니다.

* 개성 발동 조건은 '접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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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A반. 최선을 다해라. 



바쿠고! 내가 날아다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날 줄 모른다고! 그런 출력도 못 내! 손 끝으로 일으키는 강력한 폭파 반동으로 솟아오른 바쿠고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어설프게 달려도 그를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 같아 번쩍거리는 그의 잔광을 쫓았다. 실전의 바쿠고는 무시무시하구나.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한계에 부딪친 듯 가슴이 답답해져 와 폐를 혹사하며 뜀박질 친다. 시린 눈을 비벼 번쩍거리는 불빛과 폭발음을 끊임없이 포착한다. 나는 학교 내에 빌런이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뛰어서, 바쿠고를 따라 학교 부지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했다.


이제는 화려하게 들쑤시고 다니는 그의 폭발 장면을 맨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졌다. 캄캄한 밤이라 검게 피어나는 연기도 통 보이지 않아서, 나는 텅 빈 거리에 멍청히 남겨졌다. A반 모두와 함께 할 걸 그랬어. 저 자식을 따라가다니 바보 같았어. 그제야 나는 탈옥수와 언제 마주칠 지도 모르는 시내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아서, 굳은 고개를 돌려보기 어려울 정도로 겁을 먹었다. 그동안 해온 훈련이 무색할 정도로 어깨가 굳어 몸이 둔해지고 시야도 좁아진다. 바쿠고가 가르쳐 준 기본 공격은 이제 쓸 수 있을까. 혹시 모르니 이 길목에 도화선을 깔아놔야 하나. 애초에 내 니트로는 근접전 용도가 아니라고. 캄캄한 거리에 홀로 남겨진 패닉이 나를 통째로 삼켜서, 머리가 그대로 멈출 것 같다. 프로 히어로는 어디에 있는 거지? 바쿠고는? 두고 가지 마. 부스럭거리는 나뭇잎의 소리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안하여 눈물이 찼다. 어떻게든 우선 프로 히어로들이 모여있는 거점부터 찾아내야 한다.



- 바쿠고. 나는 중앙광장으로 향하고 있어. 따라잡지 못해 미안해. 우선 프로 히어로를 찾아볼게.



아까 받아둔 번호로 바쿠고에게 문자를 꾹꾹 눌러 보냈다. 내심 나를 찾아주기를 바라지만, 뒤돌아보지 않는 그의 성격 상 턱도 없는 바람임을 안다. 구조자를 찾아야 쓸 수 있는 내 개성을 안고 무거운 발을 뻗는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히어로를 도와주는 히어로가 되기로 했잖아.



" 리스트는 받아놨는데, 못 뵌 얼굴도 있구먼. 전학생인가? "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부엉이 얼굴의 이형계 빌런. 체포된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2년 전,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어 타깃의 경동맥을 예리하게 그어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살인청부업자 빌런. 이로써 감옥의 보안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빌런이 지금 눈앞에 있으면 안 된다.



" ... 당신은 체포되었잖아요. 어째서. "



" 자유의 몸이 되었지. 그 분이 내게 자유를 주셨거든. 어쨌든 너도 유에이 학생이지? "



의뢰받은 건이 있거든. 유에이 학생의 피를 모아오라던데. 날카로운 쇠로 된 발톱을 드러낸 빌런이 가공할 속도로 가까워졌다. 눈 깜짝할 새에 그가 뻗은 발톱이 얼굴을 가득 덮는다. 그 순간 바쿠고에게 배운, 니트로를 촉매로 한 폭파를 일으켜 몸을 한 바퀴 돌며 공격을 피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굴이 갈렸을 것이다. 약해진 마음보다는 그동안 직접 맞아가며 수련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숨을 돌리기도 전에, 빌런이 쇠로 된 날개를 펼쳐 목 부근으로 휘두른다. 허공에 손을 뻗어 작은 폭발을 내 추진력을 얻어 후진해보지만 내 쪽의 속도가 더 늦다. 긴 머리카락이 잘리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선을 피해냈다. 이번엔 피했지만 다음엔 죽는다. 저 쪽의 속도가 우위다.


빌런의 뒤에서 노란 빛이 번쩍거리며, 폭음이 뒤늦게 귓전을 때린다.



" 이딴 거에 발목 잡히지 말라고, 허접아. "



내 머리 위로 날아오른 바쿠고가 빌런의 목에 제 왼손을 조준한다. 눈 깜짝할 새에 포격을 맞은 빌런이 목을 감싸 쥐며 신음한다. 바쿠고! 나는 빛을 뿌리며 구원처럼 등장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차, 눈물이 고였던 눈을 벅벅 부비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잽싼 몸짓으로 빌런의 얼굴에 집중 포격을 날린 바쿠고가 쐐기를 박듯 빌런의 명치를 거세게 걷어차 쓰러뜨린다.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턱을 치켜올린다.



" 그렇게 굼뜨면 내 서포트도 못 한다고, 새꺄! "



" 죽을 뻔했어. 진짜로... 나... "



바쿠고는 어디서 농땡이 부리다가 찌끄레기한테 당하고 있냐고 뭐라 하려던 참에, 공포에 확장된 홍채를 확인하고- 청승맞게 울면서 걷기라도 했는지 벌게진 (-)의 눈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간도 콩알만 한 놈. 당최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지. 첫 실전부터 이렇게 찔찔거리면 뭘 해낼 수 있을지, 가르치자니 앞이 막막하다. 이 녀석이 여기서 절절맬 동안 스피드를 올려 근처를 돌며 안전한 동선과 프로 히어로의 거점을 확인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는 바쿠고가 (-)의 허리를 붙잡았다. 바, 바쿠고군? 눈이 휘둥그레진 (-)를 무시하며 빈틈없이 허리를 감싼다. 허접 불발탄. 꽉 잡아야 할 거다.


바쿠고가 어스름한 새벽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동이 트기 시작한 허공을 가르며 단숨에 거점까지 쏘아간다.



모처럼 엄청난 속도를 체험하게 해주려 했더니만, 쪼는 소리도 없이 조용하길래 허리께에 껴놓은 (-)를 확인한 바쿠고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가 거 더럽게 새롭다. 매번 저를 쏘아보기만 해서 저런 눈을 하는 줄은 몰랐다. 바쿠고는 프로 히어로의 거점에 도착하여 (-)를 내려주자마자 바삐 움직여 엔데버에게 향했다. 바쁘게 작전을 하달하던 엔데버의 눈이 바쿠고를 보며 가늘어진다. 얼굴을 비추자마자 뭘 건져오겠다더니, 여자애를 건져왔군. 바쿠고는 인사도 없이 추격조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녹아 할당한 구역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는 빠른 스피드로 하늘을 건너온 후유증에 멍하니 바쿠고의 등을 바라보다가, 인명 구조를 도와달라는 프로 히어로 버블걸의 부름에 구조자 베이스캠프로 달려갔다.



-


" 아까는 고마워. "



" 돌아가면 훈련 시간 두 배로 늘린다. 멍청아. "



" ...우선 무사히 돌아가자. "



나와 바쿠고는 각자의 조에서 일손을 거들다가, 구호 물품이 도착하자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피난용 도시락을 나눠주었다. 일대의 대피자들이 도시락을 받고, 마지막 순번으로 나의 도시락을 받았을 때 나는 바쿠고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너덜너덜해진 코스튬을 한 바쿠고가 안대를 벗으며 돌아보더니, 무표정으로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본의 아니게 귀찮게 굴었으니 내게 지랄을 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얘기는 않고 훈련 시간을 늘리겠다는 소리만 해댄다. 


나는 차분해진 그가 그새 자란 것 같아 속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편입하고 나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힘들게 훈련을 끌고 가서 밉기는 하지만, 지금 바쿠고에게 어쩐지 고맙다. 그 빌어먹을 훈련이 그래도 효과가 있더라. A반 동급생으로 만난 게 아니었다면 그에게 속절없이 끌려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프로 히어로로 목격했다면 1호 팬이 되었을지도 몰라. 나는 언제나 깔끔을 떨어 말끔한 얼굴이던 바쿠고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픽 웃었다. 언젠가 근사한 식당에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려고 했는데, 겨우 대면하고 함께 하는 식사가 흙바닥이라니. 타이밍이 안 좋다. 나는 열정적으로 밥을 퍼먹는 바쿠고를 멍청하게 관찰하다가, 대피자 캠프가 술렁거리는 소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복귀한 토도로키다. 안색이 안 좋은데? 그 역시 건물의 잔해를 뒤집어써 엉망이 된 모습이다. 개성의 규모가 큰 만큼 몸에 부담도 많이 가겠지, 나는 그에게 물이라도 가져다주려고 무릎을 받치고 일어났다.


" 멍청아, 한눈 팔지 말라고. "


" 어? "


" 뭘 보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구조자 인계나 해. 인력 부족하잖냐. "



손목을 낚아챈 바쿠고가 제 쪽으로 팔을 끌어당기는 탓에 휘청거리며 그에게 되돌아갔다. 훅- 매캐한 폭약 냄새가 코를 훑는다. 저 녀석은 너 같은 게 안 챙겨줘도 강하다고. 잡은 손목은 놓지도 않고 나를 내려다보며 설교하는 그의 속내가 질투인지 훈수인지 잘 모르겠다. 바쿠고는 참 한결같네. 상냥하지 않아. 추격조로 분리되어 곧 다시 나가야 하는 그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할 수 있는 가장 유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돌아가면 마파두부 해 먹자. 바쿠고. "


" 뜬구름 잡지 마라. 불발탄. "


미련 없이 돌아선 바쿠고가 안대를 눌러 썼다. 아직 땀이 마르지 않아 축축해진 이마를 쓸어 넘긴다. 저 놈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온다. 고새 딴 놈 본 주제에 말 걸고 지랄이야. 돌아가면 훈련으로 복수한다. 새벽부터 학교 침입하는 이 놈이고 탈옥해대는 저 놈이고 머리가 아픈데, 저 녀석까지 집중을 흩트려놓으니 일진이 퍽 좋지 않다.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잡아넣어서 반드시 이긴다. 그렇게 다짐한 바쿠고가 추격조 캠프로 돌아갔다.



-



그렇게 관할하는 구역으로 뛰어 들어간 바쿠고가 맞닥뜨린 상대는, 프로 히어로도 버거워하는 빌런이었다. 빌런 연합에 가담하는 인물인가? 바쿠고가 그에게 돌진하며 머리를 굴렸다. 저 새끼, 여기서 물이나 흐릴 몸집이 아닌데. 인턴 활동과 일련의 사건들로 이미 여러 번 빌런을 상대해 온 제게도 버거운 상대에- 바쿠고가 이를 부득거리며 그에게 맞섰다. 그러나 후드를 뒤집어써 개성 파악은 물론 정체조차 유추하기 어려운 빌런이,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어 올려 바닥에 처박힌 바쿠고를 깔아뭉갰다. 거대한 무게의 압박 속에서 바르작거리던 바쿠고가 연속 폭파를 일으켜 콘크리트를 부수고 일어서는 순간, 빌런은 제 허리에서 날카로운 꼬챙이를 뻗쳤다.


어,


복부가 그대로 관통당한 바쿠고가 폭발의 출력을 끌어올려 무리하게 궤도를 변경했다. 이렇게라도 피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심장 부근까지 주욱 찢겼을 것이다. 이를 악문 바쿠고가 정체불명의 빌런을 피해 빌딩 잔해 사이로 몸을 피했다. 썩을, 썩을,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응급처치라도 할 요량으로 뒷주머니에 넣어둔 거즈를 찾던 바쿠고가 머리가 아득해지는 고통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의 다리를 감싸 단단하게 지탱해주던 스테인리스 보조 코스튬도 무수히 뻗어 나오던 꼬챙이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부서져 떨어졌다. 더는 무리다. 부상이 심해 행동에 제약이 걸리고 있어. 아까 상체 그대로 콘크리트에 깔려 넘어지며 상당한 충격을 받은 갈비뼈는 날카롭게 부서져 폐 쪽으로 찌르는 듯하다. 지상에 발을 딛자 마자 쇼크가 올 만큼 어마어마한 고통의 바다에 바쿠고가 던져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까 구조자 베이스캠프의 (-)를 떠올렸다.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된다.


' 바쿠고. 바쿠고. 혹시라도 말이야. 진짜 죽을 것 같으면 날 찾아와. '


' 아앙? 그 입을 따주랴? 이 몸이 죽을 일은 없다. 재수 없는 소리 할 거면 썩 꺼져. '


' 이건 부탁이야. 등신아! 사람 말 좀 들어.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


' 그러냐. 대체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건데. 눈물 콧물이나 쏟고 앉았겠지. '


' ... 시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어... '


' 이 새끼가! '


한 달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나누며 말이 트여, 장난같이 나누던 말. 바쿠고와 (-)가 한 조가 되어 과제를 수행할 때 마다 나눴던 재수 없는 이야기들. 이상하리만큼 그 대화가 상기되어 바쿠고는 마지막 출력을 내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쿨럭, 검붉은 피가 잇새로 질질 흐른다. 손으로는 꺼져가는 폭발을 강제로 터뜨려가며, 아까 파악해 둔 구조자 베이스캠프 빌딩 근처로 나아간다. 살아야 해. 어려울지도 몰라. 한계치를 넘어간 온 몸이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외친다. 알고 있다고, 망할... 정신을 잃을까 바쿠고는 입 안 여린 살을 씹어가며 고개를 돌렸다. (-)를 찾아야 한다. 그 애에게 간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정신이 흐려질수록 아이러니하게 (-)를 봐야 한다는 강박에 잠긴다. 길가에서 뒤질 순 없다. 차라리, 당장 눈에 담고 싶어. 곁에 있고 싶다. 점점 간결하고 노골적 이어지는 생각이 바쿠고를 잠식한다. 의식이 흐릿해지자 그는 거의 (-)만이 눈에 새겨진 듯 전진하며 나아갔다.



" 바쿠고? "


바쿠고가 앞서 내려준 빌딩과 머지않은 구역에서 인명구조를 돕던 (-)가 뒤를 돌아보았다. 타는 듯한 화약 냄새를 미약하게나마 맡은 덕이었다. (-)는 본능적으로 화약 냄새가 이끄는 길목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번뜩해 내, 버블걸에게 막무가내로 가봐야 한다고 소리를 지른 후 그때부터 줄창 뜀박질했다. 바쿠고. 어디야. 바쿠고. 날 불렀어? 차오르는 숨에 폐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우선은 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턱 끝까지 찬 숨을 내뱉지도 못하고 벌게진 얼굴로 뛰었다. 길목의 매캐한 화약과 뒤섞인 니트로 냄새. 그 끝에는 보답하듯 엉망진창이 된 바쿠고가 서 있었다.



" 바쿠고! 괜찮아? 야, 너... "


" 여유다. 썩을... "


금방이라도 몰아쉬는 숨이 꺼질 것 같아 나는 급하게 바쿠고를 쥐어 잡았다. 야, 죽지마라. 폭심지. 정신 차려봐. 바쿠고- 잠들면 안 돼. 내 다급한 목소리에도 바쿠고는 바람이 새는 모양으로 힘겹게 숨을 내쉰다. 배고 입이고 붉은 피가 질질 흘러나온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살리지 않으면 지금 바쿠고는 죽는다. 나는 죽음의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아. 왜 유에이에 들어왔는지 기억해. 히어로를 구하고 싶었잖아.



바쿠고. 좀 아파도 참아.



나는 늘어진 바쿠고의 몸을 질질 끌고 빌딩 사이 으슥한 골목으로 피신했다. 구 하나가 엉망진창이 될 정도의 비상 상황에 거리마다 정신이 없었지만, 우선은 바쿠고를 살리고 볼 일이었다. 그의 무겁고 커다란 어깨를 내 어깨에 맨 채, 발에 커다란 족쇄를 주렁주렁 찬 듯 힘겹게 골목으로 들어섰다. 끊임없이 바쿠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바쿠고, 바쿠고, 죽으면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내 애원 같은 울음소리에 바쿠고는 꺼져가는 목으로 답한다. 시끄러워, 애송이... 위험할 적에도 바쿠고는 바쿠고구나. 험한 말을 놓지 못하는 바쿠고에 왈칵 눈물이 나온다. 말하지 말라고. 한적한 골목 어귀에 바쿠고를 끌고 오는 데에 간신히 성공한 나는, 벽에 기대 앉은 뒤 내 몸 위에 바쿠고를 뉘었다. 어깨에 제 얼굴이 폭신하게 닿자, 바쿠고는 감고 있던 눈을 간신히 뜬다. 피가 울컥거리는 입을 쇄골에 부비며,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낸다.


울지 마라. 이런, 걸로... 안 죽어.

네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바쿠고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래.

나는 끊어질 것 같은 그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양 팔을 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갈비뼈도 복부도 전부 으스러져 괴로운 신음을 내는 바쿠고를 온 힘을 다해 안는다. 바르작거리며 끓는 신음을 내는 바쿠고의 고통스러운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바쿠고의 피에 뜨끈하게 적셔지는 코스튬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치유하는거야.


그럴 듯한 필살기 명도 없어 나는 머릿속으로 개성을 사용하던 느낌을 추상적으로 그려 발동시켰다. 바쿠고를 감싼 팔과 몸에서 일순간 하얀 오라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수상한 빛이나 기운을 감지한 빌런들이 우리를 금세 찾아낼지도 모른다. 치유보다 먼저 목을 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머릿속으로 목숨의 무게 같은 것을 계산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바쿠고를 살려야 한다. 그런 절박함이 이성보다 훨씬 빠르게 두뇌에 도달해서, 나는 개성을 사용했다. 끊어질 것 같은 통성을 뱉던 바쿠고가 뚝 소리를 멈춘다. 나는 조금 더 집중해 신체의 모양을 그려냈다. 끊어진 근육, 조각난 뼈, 부서진 혈관을 맞추는 상상을 하며 바쿠고의 커다란 몸을 품었다. 살아, 바쿠고. 이 개자식아.



-


나는 대강 회복시킨 바쿠고를 업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야. 바쿠고. 네가 나보다 훨씬 커서 너를 업었는데도 다리가 질질 끌리더라. 전보다는 평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바쿠고를 끌고 가며, 나는 바쿠고가 일어나면 꼭 저 말을 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힘이 빠지는 다리를 다시 세웠다. 폭심지의 부상은 추격조에게도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와, 바쿠고의 구역에 프로 히어로 몇 명이 재배치되고- 인력이 턱 없이 부족한 병원은 바쿠고의 부상에 기꺼이 병상을 내주었다. 바쿠고는 탈옥 사건이 종료된 후로도 3일, 총 5일 간 깨어나지 못했다.


나는 사건 종료 이후에도 인명구조 캠프 근처에서 후처치 임무를 수행하다가 건물 잔해에 깔려 머리를 다치고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상황에 어이없게도 처참한 몰골을 했던 바쿠고가 생각나서, 바쿠고의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졸라댄 덕에 바쿠고의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왜 말 안 했냐.


병실문을 열어젖힌 바쿠고가 심통 가득한 얼굴로 절뚝이며 다가왔다. 살려줘도 지랄이야. 노을 진 병실에 우두커니 선 바쿠고에게- 나는 대답 대신 두터운 깁스를 한 팔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이제는 너를 안아줄 수가 없다. 말하자면 그런 뜻. 뭐라 하려던 바쿠고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다친 팔을 보고 이내 조용해진다. 그의 빨간 눈이 땅 아래로 잠긴다.


" 바쿠고. 아... 폭심지. 몸은 괜찮아? "


" ...미등록 개성, 불법이잖냐. "


" 알아. "


" 곧 들킬 거다. 내 비정상적인 회복 기록이 수술 과정에서 추적됐어. "


" 어... 솔직히 무섭네. "


나는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뚱하다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얼굴을 한 바쿠고가 나의 부러진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도 바보가 아니니 내가 개성을 왜 숨겼는지는 알 것이다. 빌런들에게 이미 한 차례 노려진 적 있는 바쿠고라 더 잘 이해해주는지도 모르겠다. 내 개성이 세상에 드러나면- 어느 쪽에서든 노려진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쓰고 싶었던 상황에 썼어. 줄곧 히어로를 구하고 싶었거든. 나는 멋쩍게 웃으며 진심을 뱉었다.



바쿠고는 깨어난 후 줄곧 (-)가 급조한 티가 팍팍 나던 개성을 사용하던 모습, 갑자기 히어로과에 편입돼서는 기초 체력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모습 등을 곱씹으며, 저가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을 부서져라 안은 (-)의 모습과 특이한 회복 흔적을 언급한 의사의 말을 대조하여 그제야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그래서 (-)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병실로 찾아온 것이다. 개성을 숨겼구나. 네 놈. 제 안쪽 볼을 잘근 씹어댄 바쿠고가 고개를 홱 돌리고 그르렁댔다.


" 칫,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귀띔하라고. "


"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욕 할 때는 언제고. 이 등신아. "


" 하? "


" 여태 그래 놓고는. 뭐라 했더라, 그때. "


네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바쿠고, 고백도 할 줄 아냐? 분위기를 풀어보려 툭 던진 말에 바쿠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의 벌게진 볼이 우스울 정도로 귀여웠다. 솜털같이 휘날리는 머리를 하고는 온 몸을 떨어대며 분노하는 그가 밉지 않다. 입으로는 온갖 욕을 담아 ' 야, 그건! 혼자 뒈지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한 말이라고. 망할! ' 같은 변명을 줄줄이 읊고 있지만 나는 어렴풋이 안다. 그게 그냥 한 말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조금 더 진심 같은 말을 내어놓은 그에게 나는 빨려들 듯 개성을 사용했다. 너는 내게 특별한 거야. 나도 네게 특별했던 거였으면 좋겠다. 그니까 조금은 솔직해져라 바쿠고. 이 지랄맞은 폭심지야. 뒤질 때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 ... 내가 네 놈을 지킨다. "


" 뭐? "


" 그러니 너는 전적으로 나를 살려. 망할 개성을 최대치로 사용하라고. "


쉽사리 근심 가득한 낯빛을 회복하지 못하는 나를 파악한 바쿠고가 타이밍 좋게 말을 돌렸다. 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지켜주겠다는 말인 거지? 무슨 수로, 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기꺼이 목구멍 뒤로 삼켰다. 저 애라면 저를 내놓고라도 나를 지킬 것 같아서- 왠지 마음이 놓인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폭심지의 에스코트라니 감지덕지다. 나는 걱정을 조금 거두고 환하게 웃었다. 그 말 꼭 지켜. 나 없는 데서 뒈지지 말고. 바쿠고의 말투를 똑 닮은 내 회답에 바쿠고의 빨간 눈이 화르륵 번떡거린다. 뭐? 난 안 뒈져! 단순하기 그지없게, 조금만 자극해도 날뛰는 바쿠고를 보고 있으니 그의 몸이 다 나아진 것 같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 바쿠고. 와줘서 고마워. "


" ......"


" 그리고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워. "


바쿠고는 이어 붙인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한참이나 음미하듯- 앙다문 입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옴짝달싹 않던 바쿠고가 끔뻑거렸다. 고맙다는 말에는 정상적으로 대답하는 메커니즘이 없는 건가, 라고 (-)는 생각했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의 진심에 바쿠고는 어떻게 화답해야 할지 몰랐다. 원체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는 바쿠고이지만, 지금 저를 똑바로 보고 빙그레 웃는 (-)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저번이랑 똑같아.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사고에 흐릿한 감정만이 잔잔한 수면에 파동을 일으키듯 진해진다. 심장이 쿵, 쿵, 진득하게 온 몸을 울려댔다. 몸이 좋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기에는 귀까지 울리는 박동이 몸을 간지럽힌다. (-)를 가득 눈에 담고 있던 바쿠고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도 밖으로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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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원하자마자 깁스를 맨 채로 개성을 등록하러 향했다.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아이자와 선생님과, 개성의 유사성을 확인하기 위해 리커버리 걸이 동행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툴툴거리는 바쿠고도 함께했다. 왜 바쿠고도 함께냐는 내 물음에, 아이자와 선생님은 믿기지 않겠지만 본인의 의사였다고 전해주었다. 멋대로 따라온 주제에 그러면 왜 툴툴거리는 거야. 쳇쳇거리는 바쿠고를 뒤로 하고 나는 조금은 안정된 마음의 상태로 개성을 등록했다.


무섭지 않냐고? 실은 무서워 죽겠다. 사망선고라도 미리 받은 것 처럼 의지와 다르게 머리가 달달거리고 떨렸다. 병실에서의 마지막 면담에서, 아이자와 선생님은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한창이나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꼬맹아. 애썼다. 선생님은 나를 존중한다고 하셨다. 개성을 등록해서 정식으로 히어로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개성을 등록하지 않고 숨긴 채 비공식적으로 A반 학생들에 한하여 도움이 되는 것도 모두 존중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의 속내에는 내게 닥치는 위험의 정도가 생각보다도 크다는 것을 무언으로 인정하는 것 같아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외에 알려진 리커버리걸만큼, 어쩌면 그보다 크고 불안정한 힘을 가진 내가 혼란스러운 현 세태에 어떤 영향을 가지고 올지는 아이자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광활한 미지수에 쉽사리 정론을 내놓는 건 힘들었다.


그런데, 바쿠고가 내 품에서 죽어갈 때 또렷하게 느낀 게 있다. 그때 나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그를 살리는 것을 선택했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그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만이 일직선으로 뻗어 뇌까지 닿았다.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도 나는 개성을 사용할 것이다. 계산보다 마음이 빠르다면- 마음이 닿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는 발을 뻗어보기로 했다. 개성을 밝히자. 그리고 히어로에 둘러싸여 히어로를 구하자.


감탄을 연발하는 의사와 연구원을 만나 개성을 진찰하고- 정식 개성 등록 서류가 처리되는 동안 발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애꿎은 신발 밑동을 긁어댔다. 진짜로 저질러버렸다. 꿈지럭거리며 어떻게든 불안감을 떨쳐낼 심산이었다. 세 자리 정도 떨어져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던 바쿠고가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본다. 잠자코 앉아있다가 무심히 말을 툭- 내려놓는다.




" 긴장되냐. "


" ...어. 꽤? "


"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라. "


지켜준댔잖냐. 걱정할 시간에 개성을 어떻게 사용할지 좀 더 고민하라고. 머리를 굴리라는 듯 제 손가락을 머리에 툭툭 두드리는 그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나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일까. 저 재수 없는 놈의 막말이 나쁘지 않게 들리게 된 것은. 그 말이 고마워서 나는 바쿠고에게 언제나 그랬듯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알 바냐. 넌 나까지 지키려면 매일 매일 특훈해야 할 거다.



이과의 은밀한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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