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든은 피곤한 낯으로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경비대의 간부인 라이언으로 부터 전해져 온 것이었다.


경비대, 부락을 지키는 무력 집단들 중 하나. 참고로 이 경비대의 총 책임자는 루시안이었다. 그리고 그 말인 즉, 이 보고서는 루시안의 권한으로 처리 할 수가 없어 아이든에게까지 올라온 것이다.


피곤한 눈을 굴리며 보고서를 읽는다. 검은 글자를 머릿속에서 조합해 뜻을 해석하면 할수록 아이든의 얼굴에 피곤이 짙어졌다.


"제길."


이 보고서의 요지는, 인력 부족이었다.



아이든 헌터가 책임지는 부락은 항상 장기적인 목표를 먼저 세우고 세부적인 목표를 나중에 세운다. 그러니 아이든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대부분 2-3년을 내다보는 장기 프로젝트.

그 중 하나가 부락에서 전투인원으로써 자원하지 않은 이들도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무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교를 세우고 체육을 가장 중요한 과목 일순위에 넣은 것이고, 동시에 농업을 몇몇을 제외한 모든 부락민이 참가하도록 한 것이다.

그 외에도 최소한의 기상 시간을 정하고 다 함께 운동을 한다던가 하는 시스템도 시행 중이었다. 물론 꼬박꼬박 운동을 나온 이들에겐 특벽한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런 시스템으로 인해 아이든의 부락은 다른 마을에 비해 건강한 사람들의 수가 월등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그 깨진 균형을 다시 맞춰주었다. 안 좋은 의미로.



'새로 들어온 포로들, 그러니까 갱단에서 구출한 이들의 건강상태가 심히 나쁘며, 그들을 돌볼 인원이 부족함. 건강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이들이 다수로써 기본적인 박투 훈련을 시키기 이전에 재활이 시급함.'


그리고 문제는 이 '재활'이다.

재활은 잃어버린 능력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몸을 다시 단련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재활을 돕기 위해 최소한 둘에서 셋 이상이 달라붙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한 때 투입되는 것이 보통 경비대와 의무대. 경비대는 루시안의 휘하, 의무대는 프리즈의 휘하에 있다.


그리고 라이언이 이끄는 부대는 의무대와 협력을 가장 많이 하는 이들이다.




아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다. 저 많은 사람들이 지낼 숙소도 인원을 갈아넣고 아이든 스스로가 건설에 참여하여 겨우 지었다. 난방 시설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재활은 솔직히, 열악하다.

더군다나 재활이 필요한 인원이 족히 열다섯이 넘는다. 경비에 필요한 인원과 의무대에 협력할 인원, 그리고 평소 부락민들의 훈련을 봐주던 인원들이 재활치료에 투입되어야 한다.


아슬아슬하던 균형이 깨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오..."


이런 상황에서 뉴메니와 합병? 절대 무리야. 아이든은 그리 생각하며 얼굴을 구겼다.


"부족한 인원은... 간병이 쉬운 일은 아니란 말이야. 제길, 전문인력이 필요해.. 전부 중앙에 가 있고 염병할 아드리안 놈이 일을 쳐서 지원을 바라기도 힘들어."


아이든은 머리를 굴렸다. 아, 젠장. '이상한 나라'에 함부로 기대서는 안된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허깨비한테 기대다니. 그럼 안돼. 더 이상 '이상한 나라'에 의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빈자리가 커지면 무너지고 말거야.


무너지고 말텐데..


아이든은 벌떡 일어나 종이파일 한 권을 꺼내들고 창고로 달려갔다. 남은 물자의 수를 헤아리고, 종이를 파르륵 넘겨보길 몇번.

아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다. 아슬아슬하지만 가능하다. 아니, 차라리 뉴메니 합병마저도 가능 할 것이다. '그곳'의 물자와 설비는 부족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대가는 치뤄야 해. 아이든은 물자의 보급로를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결심을 굳혔다.


아무리, 아무리 불확실한 요소가 많더라도 필요하다면 써야 하는 법이다.


아이든은 느리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켜 익숙한 번호를 두드렸다.


















금붙이를 챙겼다. 이런 것은 넘쳐난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탕-


어쩌면 폭죽 소리가 아니라 권총이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 * *







슉-!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로버트가 뒤를 돌았다. 동시에 아이든이 수려한 낙법으로 착지한다. 입을 딱 벌리고 뻐끔거리는 소년에게 아이든이 잠깐 침묵하다 인사했다.


"..안녕."

"....안녕.."


아이든?! 잠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브루스가 입을 딱 벌리고 소리쳤다.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교하던 중이야?"

"으응..."


로버트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든은 따라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데려다 줄게."

"..으응."


굳은 살 많고 갈라진 손에 어린 아이의 작은 손이 잡혔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로버트 브루스 배너를 이끌고 아이든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소년을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딩동-

초인종이 눌리고, 누군가가 문을 연다. 익숙한 여자다.


"어, 브루스 왔니.. 아이든?"

"안녕하세요."

"오, 세상에. 정말 다시 왔구나."


당혹과 곤혹이 섞인 시선이다. 하지만 그 보다 먼저 반가움이 섞인 시선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든은 어깨를 으쓱이곤 로버트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네.. 오늘은 숙박비도 챙겨왔구요."


그리 말하며 허리가방을 끌른 아이든이 속에서 한주먹 무언가를 쥐었다.


"잠깐 손을."

"응? 여기?"

"...."


차르르- 레베카의 손 위에 보석으로 만든 악세서리들이 떨어졌다.


"숙박비에요. 환전은 못 하니까.. 이렇게 낼게요."

"...아니, 세상에.. 아이든!"


이런 걸 바란게 아닌데! 레베카가 입을 빠끔거렸다.


"아, 그리고 혹시 운전 할 줄 아세요?"


아이든은 정말 뜬금없는 걸 물었다.


"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 그래..? 그게 누군데..?"

"패기 카터요."

".....?"


너무나도 빠른 전개에 레베카가 따라가기엔 무리였다.








페기 카터와 아이든 헌터의 인연은 짧다. 하지만 그 둘의 사이엔 분명 무엇인가 특별한 전우애가 있었다. 함께 군대에서 지냈다는 동질감 같은 것이 그 예였다.

그리고 아이든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여성으로써 높은 지위까지 오른 페기 카터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에게 미래의 일부분을 살짝 알려준 일이 있었다.


반드시 성공하는 주식.


그리고 과연, 현명한 페기 카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책자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페기 카터는 주식 투자로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다고. 그리고 그 재산 대부분을 다른 이들에게 기부하는 삶을 산다고.


페기 카터, 널 만나야겠다.

부락의 리더, 아이든 헌터가 생각했다.






쉴드, 즉슨 방패. 아이든은 이 이름을 듣자마자 이 방패가 누구의 방패에서 따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상징은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방패, 미국을 지키던 그를 기리기 위해 이런 이름을 쓴 것이겠지.


아이든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쉴드에 관한 책자를 덮었다. 당시 아이든은 생각했다. 만약 페기 카터가 자신을 기억한다면 분명 여러가지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위조된 신분이라든지.




그리고 지금 아이든에게 필요한 건 위조된 신분이 아니었다. 많은 양의 물자들이지. 돈은 있다. 벌 수도 있다. 하지만 신분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레베카가 그것을 도와주긴 요원하다. 결혼을 한 1970년대의 주부에겐 적어도 10상자가 넘는 생수와 통조림 구입을 돕긴, 힘들테니까.


하여 아이든은 페기 카터가 필요했다. 자신에게 우호적이며 돈이 많고, 그러한 물자들을 대신 사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떻게 만나야 하는 거지."


원한다면 쉴드 건물에 침입할 수도 있긴 하다만, 그건 좀 그렇잖아. 그냥 전화 때려볼까, 고민하기도 했고 진짜로 쉴드까지 가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실현하기 힘든 일이었다.


전화번호부에 국가안보기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긴 했다. 하지만 거기에 전화를 건다고 해서, 과연 페기 카터를 만날 수 있을까? 번호표 뽑고 5년 쯤 기다리면 가능하겠네. 그리고 그런 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아이든에겐 있었다.


일단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만 한다면 게임 끝, 아이든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게 더럽게 힘들어서 문제지.


"운전 면허 있으시군요. 다행입니다."

"그, 그렇지..? 그나저나 아이든, 갑자기 이 보석들은.."

"제가 사는 세계에서 가져온 거에요. 많으니까 괜찮습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니..?"


당황스러워 보이는 레베카의 말에, 아이든은 미간을 꾹 누르며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좀 급해서요.. 페기 카터를 꼭 만나고 싶은데 방법이 막막하다보니.."


아이든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안경을 다시 썼다.


"제가 사는 곳에 물자가 필요해요. 최근 큰 침략을 받아서.. 그리고 곧 겨울이라 월동 준비도 해야 하고.. 그런 와중에 이곳이 떠올랐어요."


아이든이 말했다.


"이곳에서 물자를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위기는 해결 되고, 제가 합법적으로 가장 빠르고 쉽게 물자를 얻는 방법이 카터를 만나는 것이다 보니.. 좀 성급했네요."


죄송합니다. 아이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베카를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마음이 좀 급할 수도 있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든이 조금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로버트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두 사람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런 로버트를 알아챈 아이든이 잠깐 침묵하다 말했다.


"음, 팬케이크 구워줄까."






지구가 망해도 밥은 먹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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