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2 잔상 속 암투 이벤트 스토리 보고 머리깸 니들 편지답장 잘 주고받았던거냐

























19번째 생일 축하해, 다이루크.











다이루크에게


1년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야. 내게도 그 시간은 유효하게 작용했어. 내겐 너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복잡했던 머릿속이 얼추 정리되었어. 

너한테 편지를 쓰기로 했어. 어차피 네게 부칠 수도 없으니 이 종이도 앞으로의 종이도 내 책상 서랍장 안에만 박혀있을거야. 억울하면 행선지 정도는 알려주고 갔어야지. 물론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걸 보여주진 않을거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비밀을 보관하는 법을 한 가지 씩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내가 하나 정도 새로 장만한다 해도 문제될 일은 없겠지. 좋은 방법일지는, 글쎄, 두고 보면 알게 되지 않겠어?

나는 네가 입힌 부상에 대한 치료가 끝났고, 기사단 숙소로 거처를 옮겼어. 집안 사용인들의 눈이 불편했거든. 하루 종일 모두의 걱정하는 시선을 받으며 생활하는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인지 너는 모를 거야. 그건 기대하고 찬탄하는 시선과는 조금 달라. 어느 쪽이 낫냐고 말한다면 나도 잘 모르겠네. 나는 두 번째 시선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건 보통 너였지. 

나는 이제 네 이름을 떠올리는게 그닥 고통스럽지는 않아. 그러니까, 처음 한 달 동안에 비하면 말이야. 조금 생각을 해봤어. 네가 버리고 간 신의 눈은 내 손 안에서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어.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지. 1년 동안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몬드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그 중 누구도 널 봤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너처럼 눈에 띄는 사람은 또 없을텐데. 이제서야 말하지만 난 어릴 때 뒷골목에서 뒷골목으로 옮겨다니며 살았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이야. 거기서 네 심미안을 자극할 만한 희귀하고 아름다운 걸 찾을 순 없을 거야. 제발 부탁이니 위험한 짓만 하지마. 어차피 당연하다는 듯 제일 위험한 곳만 골라서 쳐들어가고 있겠지만. 이렇게라도 말해두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살겠어.


 XX56년 5월 3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남들 앞에서 '좋은 사람'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건 피곤한 일이야. 네가 없는 지금에서야 말하자면, 라겐펜더 저택에서 살던 시절에도 이랬어. 죄책감에 숨통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져와. 어느 쪽이 더 불편했냐고 말한다면 단연코 옛날이야. 그 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그래도 살 만한 편이지. 내 낯짝이 두꺼워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겠지만, 뭐랄까, 몬드 사람들에게 나는 이웃이잖아. 가족이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밤에 침대에 혼자 누워있으면 가끔씩 (지운 흔적) 매일 나쁜 상상을 하고 혼자 소름끼쳐해. 내 거짓말이 만천하에 폭로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내가 성당의 모든 유리창을 깨뜨려놓고, 신상의 발치에 붉은 글씨로 내 이름이 적혀있는 거야. 민폐스럽네. 

그래서 널 상대로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인 너를, 멋대로 앉혀두고 일방적으로 떠드는 이런 놀이로도, 나는 충분한 위안을 얻어. 알아, 너는 이렇게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어주지는 않겠지. 어떻게 반응할까? 내 상상 속의 너가 아니라 그냥 너라면. (이상한 사람 얼굴 그림) 그만두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나도 내가 한심해. 하지만 어쩌겠어. 이렇게라도 널 그려야 조금은 내 세상이 밝아져.

다이루크, 내 태양. 모든 걸 의심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마. 


XX56년 6월 2일

사랑을 담아,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여름이 다가왔어. 네가 보면 충격에 빠질 정도로 나는 이번 여름을 편하게 보내고 있어. 내가 여름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에 대해선 네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젠 달라. 나에겐 신의 눈이 있으니까! 그것도 얼음 원소인 신의 눈 말이야. 작년 여름에는 새벽에도 더워서 뒤척이다가 깬 적이 한 번도 없어. 더우면 얼음을 만들어서 껴안고 자면 되잖아. 올해도 그럴 거야. 벌써부터 아주 뿌듯한 걸.

물론 나쁜 점도 있어. 여전히 겨울은 버티기 힘들어. 겨울마다 감기에 걸리는 건 예삿일이라 놀랍지 않지만, 설마 동상에 걸릴 줄은 몰랐어. 나 작년 겨울에 칼 잘못 휘두르다가 손이 칼 쥔 채로 얼어버렸다니까……. 우습게도 네 생각이 났어. 너도 신의 눈을 받고 며칠 동안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네 손바닥 위의 불꽃을 자랑했잖아? 그래도 불장난을 치다가 뭘 태워먹은 적은 없었으니 다행이지. 네 유일한 실수는 (지운 흔적) 그래도 작년보단 신의 눈을 다루는데 능숙해졌어. 조금만 더 검술에 익숙해지면 서무장 자리도 곧 내 것이야. 알잖아. 기사단 소대장 자리는 펜 좀 굴릴 줄 안다고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거.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힘내볼게. 응원해줘.


XX56년 6월 12일

케이아가






전 기병대장 귀하


하하. 별말씀을.


XX56년 6월 30일

서무장 올림






다이루크에게


여름 감기에 걸렸어. '올해도인가~'라고 생각하는게 뻔히 보이네. 무례해. 그래, 작년도 올해도 나란히 이 기간에 병가를 냈어. 지금은 침대에 누워서 편지를 끄적이는 중이야. 밑에 하드커버 책을 대고 글씨를 쓰고 있어. 베개에 대고 썼다간 잉크로 범벅이 될테니. 

이불 속은 열 때문에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뜨거운데 머리랑 팔은 내가 만든 얼음을 문대고 있어서 떨어져나갈 것처럼 차가워. 더운 건지 추운 건지 모르겠어. 허리도 아프고 관절도 쑤시고 콧물은 줄줄 나오고…….

(엉망인 글씨) 다이루크에게. 눈을 뜨고 일어나니 밤이야. 큰일 났다. 배가 고파. 나갈 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두 번째 문제야. 나가봤자 문을 연 식당도 없어. 다 나으면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방 안에 비상식량을 조금 꿍쳐둬야겠어……. 한동안은 내 사무실에서 숙식하다시피 하다보니까 방 안이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있어. 옆방 사람한테 들리게 소리라도 쳐볼까? 하지만 소리를 굳이 안 내도 내 목이 완전히 쉬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어. 곤란하네. 진짜로 김 새는 소리밖에 안 나와. 어지럽다. 그냥 더 잘래. 자면 낫겠지. 너도 잘 자. 넌 약도 밥도 잘 챙겨먹고 다녀야 할텐ㄷ


XX56년 7월 3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열은 많이 가라앉았어. 출근 안 하고 지각한 내 방까지 진이 찾아왔다가 그대로 날 업고 성당까지 데려다줬다는 모양이야. 나중에 보답을 해야겠어. 내 생각엔 아픈 몸에 밥도 안 먹고 내리 자기만 했으니 그대로 기운이 빠져서 기절해버린 것 같아. 눈 뜨니까 이틀이나 지나있더라니까. 참 이상하지. 키는 컸는데 몸무게는 더 빠졌어.  

수녀님이랑 눈 마주쳤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분명 누워있으라는 말을 하러 오시는 걸 거야. 이만 가볼게. 내 걱정은 마. 금방 나을 거야.


XX56년 7월 5일

성당 안 치료소에서,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처음으로 심연 교단에 속한 놈들을 봤어. 이봐, 비웃지마. 나는 이제나 저제나 내근 전문이라고. 애초에 몬스터 털끝도 못 보게 막은 건 너잖아. 아무튼, 가까이서 그것들을 본 건 처음이었는데, 그것 참 괴상하게 생겼더라. 그들의 가면 밑을 본 적이 있니? 확실히 가면을 쓰고싶어할만도 해. 어쩜 그리 추한 몰골인가. 신의 저주라는 건 다 그런 식이구나. 

솔직해지기로 했지, 내 태양. 모든 걸 말해줄게. 어쩌면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일지 몰라. 내가 말해줬을지도 모르지. 지금 티바트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츄츄족들의 정체는 켄리아인이야. 마물로 변하는 저주를 받은 거지. 저들에게도 나와 같은 피가 흘러. 저들도 찌르면 붉은 피를 흘린다고. 저들은 내 친척이나 다름 없어. 

거울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이제 수염도 자랄 거 아냐. 나는 내가 조금 다르게 생겼으면, 하고 늘 바라. 머리털이 붉거나 눈이 붉거나, 피부가 조금만 더 희거나, 뭐 그렇게 말이야. 그랬다면 거울을 보는게 지금보단 덜 기분 더러운 일이었을지도 몰라. 


XX56년 8월 27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태풍이 지나갔어. 무너진 건물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어떻게 복구하면 좋을지, 하루 온종일 숫자와 씨름해. 아무리 기부금을 받는다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잠긴 길, 낙석, 흥분한 츄츄족들, 늘어난 물 슬라임. 여기서 어떻게 더 손을 써야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눈이 핑핑 돌아. 남자 기사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노려봤어. 내가 농땡이를 치고 있다고 착각하나봐. 누군 놀고 있는 줄 아나. 용역이나 다름 없는 것들이. 저렇게 부주의해서야 금방 쫓겨날테니 얼굴은 굳이 기억해놓지 않아도 괜찮겠지. 

와이너리 사업도 신경 써야 하는데. 엘저 씨가 울상일 거야. 포도밭이 많이 상하지 않았길. 샌드위치를 다 먹어가. 다시 일을 시작할 시간이야. 늘 고마워, 다이루크. 어디에 있든 너도 열심히 해.



XX56년 9월 2일

한창 바쁜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조금은 여유가 생겼어. 샌드위치와 작별한 건 나흘 만이야. 커피는 그대로지만. 책상 위에 커피 잔만 네 잔이야. 메이드를 불러야할까.

하루하루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자니, 근무시간에도 딴생각이 들어.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해. 첩자가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기사 일 말고. 거리에서 꽃집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술집 바텐더도 나쁘지 않아. 기념품 상점은 어떨까? 온갖 보물들을 손질하고 관리하고,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제법 재밌을 거야. 어린 손님들이나 놀러온 연인들을 꼬셔내는 일은 자신 있으니까. 그리고, (지운 흔적)

만약 내가 자유의 몸이었다면, 여행을 해보고 싶어. 티바트 곳곳을 돌아다니고 모르는 것들을 전부 물어보면서 다닐 거야. 몬드에선 못 보는 풍경을 잔뜩 봐야지. 두 눈으로 직접!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 만년 동안 쌓여있던 빙설, 금빛 사막 위의 오아시스 같은 것들 말이야. 이나즈마에도 가보고 싶어, 쇄국 상태라 무리지만. 티바트 유람 가이드에선 그곳의 벚꽃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쁘다고 했어. 봄에 내리는 눈싸라기 같대. 정말일까? 꽃잎 크기가 손톱조각 정도라고 하던데, 많이 피어봤자 얼마나 많이 피겠어? 

어쩌면 네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이유가 네가 이나즈마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알아, 헛소리지. 네가 거길 왜 갔겠어. 그곳의 신은 잔인하고 냉혹하기로 악명 높잖아. 네가 쫓는 그 정체불명이 힘이 번개 신의 힘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더 있다간 쓸데없는 걱정만 계속 하게 될 것 같아. 이만 서류에 집중해야겠어. 


XX56년 9월 4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어쩌다 보니 사업을 확장하게 됐어. 내 멋대로 손댔다고 화내지 말아줘. 정말로 좋은 조건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계속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어. 벌써 두 번의 여름을 헛되이 보냈어. 아버지가 계실 때와 연수익을 비교하면 처참할 정도로 손해가 막심해. 변명을 하자면, 난 할 만큼 했어. 내 사업 수완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튀어버린 건 확실히 네 잘못이니까.

사람들이 모두 네가 어디 갔냐고 물어. 나도 대답해줄 말이 없어. 나도 알아. 뒤에서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무리가 있다는 걸.(저택 사람들은 내가 눈치 못 채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힘들지.) 나였어도 꺼림칙하게 여겼을 거야. 아버지도 아들도 같은 날에 사라지고, 입양된 자식이 떡하니 틀어앉아선 사업이고 재산이고 다 틀어쥐고 휘두르고 있으니. 나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은 이게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까 버틸 만 하지만, 네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참기가 힘들어. 누구는 네가 반병신이 되어 저택 안에 누워있다고 그러고, 누구는 네가 어떤 귀부인과 눈이 맞아 도망쳤다는 소리를 씨부려. 가장 듣기 힘든 건 네가 변절했다는 의심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표정관리도 매번 실패하게 돼. 네가 배신자 의혹을 받다니. 바로 코 앞에 있는 첩자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까막눈들이 태도는 뭐가 저렇게 당당한지.

저기, 다이루크. 어서 돌아와. 돌아와서 이 헛소문들을 면전에서 부정하고, 네 입으로 아니라고 말해줘. 


XX56년 11월 1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네게 고마움을 느낀다면 내가 그래서는 안 됐는데. 

네 얼굴을 보고 사과하고 싶어. 이런 편지를 써봤자 아무도 읽지 않는 걸.


XX56년 11월 30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지금 몬드에는 눈이 오고 있어.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낮에 잠시 눈발이 그치는가 싶더니 또 다시 폭설이야. 드문 일이지. 모처럼이니까 조금 더 구경하다 잠드려고 해. 여긴 성 안이잖아. 포도밭에서 보던 눈 내리는 광경이랑은 조금 달라. 등불에 눈들이 알알이 빛나는 모습은 정말이지 멋져. 별하늘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너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남부에선 눈을 보기 힘들다고 하니까, 화산 지역이나 정글 지역에 있다면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겠네. 하지만 어느 곳이라도 같은 하늘 아래인 건 똑같으니까. 조금은 쉬고 있지?

(지운 흔적) 다이루크, 전에도 말했지만, 나도 많은 곳을 여행해보고 싶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무서웠어. 설명하기 어렵네. (지운 흔적) 나는 나에게 많은 권한이 허락되는 게 무서웠어. 나에게 지식은 무기고, 족쇄야.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더 많은 임무를 맡게 되지. 나중에 이용당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내가 배신했을 때 너에게, 너희들에게, 몬드 성의 모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느니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로 있는 게 백배 천배 나아.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기사단에 입단한 것도 잘못된 선택이야. 나는 지금도 나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허락되어있다고 생각해. 첩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내가 여전히 서무장 자리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기사단을 탓할 일은 아니지. 라겐펜더 가의 보증을 등에 업은 아이를 누가 감히 의심하겠어? 나쁜 건 애초에 모두를 속이고 들어온 첩자인 나야. 그들이 많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기대는 접어야겠지. 네 말이 맞아, 다이루크. 난 (지운 흔적) 배신자야. 그 사실에 대해 너무나도 큰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껴.


XX56년 12월 2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올해도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어. 곧 있으면 새해가 뜰 거야. 주변이 온통 푸르고 붉은 색으로 어스름해. 장관이네! 난 지금 바람맞이 봉우리에 있어. 몬드에선 (지운 흔적) 티바트에선 여기가 가장 동쪽이잖아. 네가 여기 없으니, 넌 나보다 몇 시간은 더 늦게 일출을 보게 되겠구나. 하하, 안타깝게 됐네!

저길 봐. 해가 뜬다.

(일출 장면을 그린 듯한 낙서)

새해 복 많이 받아, 다이루크.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다 잘 풀리기를 바라. 설마 실마리 정도는 찾았겠지? 난 들어갈게. 여기 생각보다 춥다. 

 

XX57년 1월 1일

바람맞이 봉우리에서,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유서를 쓰는 건 처음이야. 두근두근하네. 서무장이 무슨 위험한 임무냐고? 그냥 잠입 임무일 뿐이야. 귀족들을 쫓아다니고 우인단 집행관을 찔러보고, 그 정도? 말해두지만 거창한 건 아니야. 스파이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긴다니! 미안해요, 님프 경.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이번에는 열심히 일할게요.

아무튼 같이 나가는 남자애가 울면서 가족에게 미리 남길 유서를 쓰고 있길래, 나도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은 참이야. (잉크가 똑똑 떨어져있다, 고민한 흔적) 그날 너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말들을 여기에 전부 적어놓으려고 해. 이런 방법으로밖에 남기지 못하는 동생이라서 미안해. 그날 어디까지 말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네. 난 기절했었잖아. 깨어나보니 넌 사라져있었고. 뭐, 이미 한 번 들은 얘기더라도 그냥 두 번 들어. 어쩔 수 없어.

내 본명은 케이아 알베리히야. 정확한 나이도 생일도 모르지만, 지금 세는 나이랑 큰 차이는 안 날 거야. 기껏해야 몇 달 차이겠지. 어머니는 아예 몰라. 이름도 얼굴도, 아버지와의 관계도. 내 얼굴이 어머니와 닮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 기억상(이건 확실하지 않아) 나는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던 것 같아.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 얼굴과, 이 알베리히라는 이름이야. 그건 오래된 동화에서 보물을 훔친 난쟁이 도둑의 이름과 똑같아. 궁금하면 나중에 찾아서 읽어봐. 내 방 오른쪽 책장 맨 아랫줄에 꽂혀있어.

나는 버려지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이끌려서 뒷골목을 돌아다녔어. 주로 들린 곳은 암시장이야. 아마 아버지는 켄리아인의 정체성에 미련을 갖고계셨던 것 같아. 언제나 사는 건 골동품과 고서적들 뿐이었거든. 대부분 쫓겨다니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을 매번 질리지도 않고 사시더라. 나는 그가 모처럼 돈이나 장물을 훔친다면 그걸로 책 대신 먹을 것이나 좀 사주었으면 했어. 그리고 뭐, 사는게 힘들어지니까 버려졌지.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지만 그대로 십년째 얼굴도 못 보고 소식도 못 듣고 이 상태 이 꼴이야.

네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을 돌아다닌 것도 2년째니, 다른 켄리아인들도 몇 명 만나보았겠지? 어땠어? 나랑 닮은 것 같아? 나는 동족들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어. 우린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니까. 모여서 돌아다니거나 볕에 나오기만 하면 죄인의 핏줄이라고 돌을 얻어맞았거든. 돌림병자도 받아주는 몬드가 특이한 거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아픈 일만 있던건 아니니까. 그때도 종종 즐거운 일은 있었어. 쥐와 친구가 된 적도 있어. 그리고 그 시간들을 견뎌서 나는 클립스 어르신을, 너를 만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어릴 적 생활도 나쁘지만은 않은 추억이지.

어째서 그날 너를 배신했냐면,

네가 훗날 날 경멸하게 되는 게 무서웠어. 그 순간 네 무구한 동생인 척 너를 두 팔로 감싸안아 위로하고, 널 위하는 척 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조차 거짓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숨이 턱 막히더라. 세상에 영원한 거짓말은 없잖아, 들키게 된다면 분명 나를 경멸하게 될 거야. 차라리 증오를 받는 편이 나았어 그래서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방식으로 내 비밀을 폭로한 거야. 너에겐 잔인한 결정이었겠지만. 

내가 큰어르신을 죽인 배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 어찌 되었든, 내가 널 배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분명 배신자에게 걸맞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야. 그래도 내가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특이한 눈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남들 말만 따르며 살았지만, 나 같은 것도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내가 한때 행복했던 사람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거야, 아무리 너라도 말이야.

어차피 네가 이 편지 뭉텅이를 읽게 되는 건 내가 죽은 이후거나, 죽음을 앞둘 만큼 늙었을 때겠지. 그러니 마음껏 말할게. 난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평화롭게 살다가 늙어죽고 싶어. 

이런 유서 같은 거 쓰기 싫어.


XX57년 2월 3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어. 의연한 척 하고 싶지만, 너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네. 응, 조금 충격이야. 아직도 손이 떨려. 어쩌다보니 얼굴에 정통으로 얼음을 쏴버렸는데, 상대의 머리통이 그대로 얼음통이 되어버렸지 뭐야. 눈알이 쩌저적, 하고 얼어붙더라. 눈동자 위로 반쪽 금이 갔어. 그 상태로 뒤로 넘어가더라. 몇 달 동안은 그 얼굴이 꿈에 나올 것 같아.

생각해보면 너도 이랬겠지? 네가 기사단에 들어간 건 열두 살 때였으니까. 성인식을 치루기도 전에 벌써 첫 살인을 저질렀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부끄러워, 다이루크. 어떻게 이 짐을 네가 혼자 들게 했을까. 나는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세상에는 사람 숫자 만큼의 죽음의 종류가 존재하겠지. 아버지가 네 품에서 검게 녹아내렸듯이. 그렇다면 내 아버지는 어떻게 죽었을까. 살아있다면 진작 날 찾으러 왔을 거잖아. 하지만 어떻게 죽었을까? 설마 그가 마음 편한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난 너무 오랫동안 방치당했어, 다이루크. 슬슬 외롭다고 느껴. 사실 내가 스파이로 파견되었다는 것조차 내 착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그렇다면 네가 떠난 이유는 뭘까. 나는 왜 아직도 네가 없는 몬드에 혼자 남아있는 거야. 내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하루가 너무 길어. 조금 자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아.


XX57년 4월 3일

어딘지 모를 동굴에서,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다행히 5월을 넘기지 않고 몬드에 돌아올 수 있었어. 장기 임무였으니 며칠 간은 푹 쉴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방에 들어오자마자 푹신한 침대에서 머리 풀고 뒹굴다가 지금은 네 생각에 편지를 쓰고 있어. 

먼 곳까지 출장을 나갔을 때, 네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봤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어. 

몬드에서 보던 것과는 별자리가 조금 달라서,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타국의 밤은 이렇구나, 하고. 넌 자주 내 눈이 별빛 같다고 말했지만, 진짜 별은 너야, 다이루크. 아무리 컴컴한 어둠에 둘러쌓여 있더라도, 네가 그 모든 어둠과 시련을 뚫고 새벽을 알리는 닻별이 되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넌 어디에 있던 빛나는 사람이야.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도록 해.

와이너리의 모두는 널 자랑스러워 해, 다이루크. 네게 이 편지를 보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텐데. 편지를 민들레처럼 가볍게 만들어 날릴 방법은 없는 걸까?


XX57년 4월 27일

모처럼의 몬드에서,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20살 생일 축하해. 이젠 명실상부 어른이 되었구나. 키도 많이 컸을거고 몸도 더 다부져졌겠지? 얼굴은 여전히 어려보이는 인상 그대로이려나? 어디 한 군데 크게 상한 곳이 없어야할텐데. 뭐가 됐든 네가 보고 싶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낮에는 와이너리 사람들과 식사를 할 예정이야. 아버지의 무덤은 조금 늦게, 혼자서 찾아가려고. 네 안부를 아버지께 전해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분의 영혼이 네 옆에서 널 지켜주고 있을 거야. 아버지가 널 미워하실 거라고 생각하지마. 나는 아버지의 무덤에 들릴 때마다 그 분이 너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동시에 느껴. 언제나. 아버지 뿐만이 아니야.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너를 걱정하고, 너를 사랑해. 넌 혼자가 아니야. 마음이 흔들릴 때면 늘 이 사실을 떠올려줘. 


XX57년 4월 30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오늘은 조금 웃기고, 우스운 소식을 전해주려고 해. 믿겨져? 나 파산했어. 라겐펜더 가문의 양자가 파산이라니. 나도 웃겨, 안 믿겨져. 주머니에 돈이 얼마 남아있는 지도 신경 끄고 살다가 단골도 아닌 술집에서 외상을 낼 뻔 했다니까. 로자리아 수녀님이 대신 술값을 내주었어. 어찌나 민망하던지. 

나는 저축하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아. 그렇게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왔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지, 다시 돌아와 네게 편지를 쓰고 있자니 내가 돈이 있어서 어디에 쓰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보통 내 월급은 죄다 술, 선물, 성당 기부에 털어넣고 있어……. 저 세 개가 끝이야. 생각해보면 다이루크 너도 돈을 한 푼도 안 챙기고 나갔잖아. 그야 기사 생활만 몇 년이니 노숙취사는 익숙하겠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티바트라 해도 야생에서 살아가긴 힘들다고? 네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유쾌해지는 걸.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단 걸 알지만. 조금 농담 좀 해봤어. 밥 잘 챙겨먹고 다녀.


XX57년 5월 3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일이 아주 바빠, 다이루크. 편지를 쓸 시간도 여유도 부족하기만 해. 바르카 단장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서툴러. 저 사람은 만사에 깐깐하게 굴면서도 이상한 부분에서 무관심해서 부하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소홀하게 굴어. 기사단의 모두가 그에게 피곤해하고 있어. 다이루크, 너는 그러지마. 스스로를 잘 챙기는거야. 네게 신의 눈이 없어서 다행이지, 상처를 불로 지지는 짓 따윈 하지 못할테니. 하지만 안심되진 않아. 상처 대충 방치해뒀지? 나중에 후회해. 얼른 꼼꼼히 치료하는 게 좋아.

밤이 깊어, 다이루크.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사람은 잘 때를 놓친 나밖에 없을 거야. 

요즘은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시고 있어. 아직 성인식 전이지만 괜찮아. 몬드에서 이 정도 일탈은 이상한 게 아니니까. 담배는 몰라도 술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어. 즐기는 거라고 둘러대면서 매일 같이 술을 마셔. 이젠 밖에서도 안에서도 포도주 향기가 나. 아무래도 나한테서 나는 향 같아.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책상 한구석에도 와인병과 잔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어. 어떻게든 버티면 네가 올 거라고 믿고 있어. 지금 네가 바다 건너 반대편 대륙에 있다 하더라도 네가 반드시 올 거라고 믿고 있어. 널 걱정하지 않아. 걱정스러운 건 나야. 내가 널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날 이해해줄 거라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다이루크, 생각해보면 나는 몇 번이고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있었어. 내 두 다리는 자유로워. 언제나 도망칠 수 있었다고. 지금 당장이라도 널 기다리는 걸 포기할 수 있단 말이야. 저택 안에 박혀있고 기사단 안에 박혀있고, 스스로를 죄인이라 부르며 몬드에 가둬두는 삶보다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었을 거야.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까지 내가 보내왔던 수백일의 밤을 한순간에 밝힐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고 믿어. 그곳으로 가고 싶어. 지금까지 내가 버텨온 일에 대한 일말의 가치를 그곳에서 찾고 싶어. 신이 내게 그것을 허락하신다면.

동이 트기 전까지 조금 눈을 붙이려고 해.


XX57년 8월 20일

알베리히가






다이루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줄게.

일록 경이 축출당했어. 그동안 바쁘다고 했잖아. 오늘 드디어 성과를 봤어. 바르카 단장이 바닥을 기는 그의 앞에 대검을 꽂아넣자 모두의 앞에서 꼴사납게 겁을 먹고 오줌을 지리더라. 누가 코를 틀어막는 걸 보았지만 누군지는 확실치 않아. 하루 종일 붕 뜬 기분이야.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들었어. 일록 경이 아버지를 모욕했었다지? 네게 사과할게, 우선 아버지가 이상한 힘을 쓴 건 밝힐 수 없어. 그런 사실이 밝혀졌다간 라겐펜더 가문의 명패에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가 새겨질지도 몰라. 너 없이 나 혼자서 수습하기엔 한계가 있어. 하지만 아버지가 마차 사고에서 너를 포함한 많은 이들을 구했다는 소문은 충분히 넓게 퍼졌어. 모두가 클립스 라겐펜더를 추모해, 다이루크. 그 사실이 우리에게 조그마한 위로로 다가오는 것 같아.

일록 경이 내통하던 대상은 심연 교단이야. 무엇을 대가로 받았는지가 불확실해. 어쩌면 세뇌나 인질일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어.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의 처우가 가벼워지진 않겠지만. 

심연 교단의 행보가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하고, 악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들이 벌써 몬드의 소대장에게까지 손을 뻗었다는 걸 되새길 때마다 몸서리를 치게돼. 게다가, 알잖아, 심연 교단이 숭배하는 그것은 켄리아를 저주하고 멸망시킨 힘이야. 내게 껄끄러운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몬드에 실질적으로 위협이 돼. 시드르 호수가 검게 물드는 장면을, 몬드가 심연에 삼켜지는 장면을 상상해. 끔찍한 상상이야. 일록 경은 어째서 그런 놈들과 내통하고 있었던 거지? 

그는 추방되지 않을 거야, 다이루크. 이곳에서 비밀리에 처형될 거야.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해. 3주 뒤야. 나도 첩자임이 밝혀진다면 모두의 앞에서 저런 굴욕을 당하게 되는 거구나. 역시 메뉴얼을 아무리 읽어봤자야. 눈으로 직접 보는 게 훨씬 더 귀중한 경험이네. 


XX57년 9월 9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종이에 적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못 적겠어.

나중에 그게 뭔지 물어보러 와. 대답해줄게. 내가 충분히 준비가 됐다면 말이야. 아마 네가 돌아왔을 때 쯤이면 대답해줄 수 있을거야.

난 좀 자야겠어.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XX57년 9월 10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나의 제일 큰 두려움은 너를 잃는 것이지만, 다이루크, 두 번째로 두려운 건 네가 이 지옥 속에서 나를 두고 혼자서만 성장하는 거야. 다시 만났을 때 너는 달라졌는데 나는 열여섯 살 때 모습 그대로라면 나는 네 앞에 제정신으로 설 수 없을 거야. 네가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헛된 꿈이겠지. 차라리 네가 당장 내일 돌아오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아보여.

나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몬드는 너무 조용하고 평화롭고 사건사고가 적은 곳이야. 갑자기 바뀔 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어. 나는 겁쟁이잖아. 하늘에서 뚝 하고 계기가 떨어졌으면 좋겠어. 게다가 나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어. 성숙해진다는 게 뭐야? 

상부는 매일 내 출신에 대해서 의심해. 바르카 단장은 날 이용하려고만 해. 진은 나서서 날 챙길 입장이 아니지, 걔도 바쁜 건 마찬가지고. 후배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건 익숙해. 게다가 이 사람들도 처음보단 많이 나를 받아들였어. 하지만, 내 정체를 눈치챈다면 내가 쌓아온 성과는 바로 어린애가 쌓은 돌탑처럼 무너지고 나는 감옥에 갇힐 거야. 일록 경은 정신이 나갔어. 나라도 그럴 거야. 캄캄한 감옥에 시간도 모르고 갇혀있다가 나오자마자 바르카에게 목이 잘리는 건 조금 무섭, (지운 흔적)

다이루크, 나는 (지운 흔적)

어처구니가 없어. 난 죽는 걸 무서워 하고 있어. 그럼 스파이로서의, 켄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면 되잖아. 이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너는 3년 째 행방불명이고, 나만 (지운 흔적) 켄리아에 대한 걸 모두 잊고서 저들에게 진실되게 다가가면 되는 일이야. 그런다면 죽을 일은 없겠지. 간단해. 왜 이걸 못 하지?

그야 아직 저 바깥에는 내 아버지와, 내 친척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야. 내 몸 속엔 그들과 같은 피가 흘러. 태생이 위험분자야. 그들이 언제 찾아와 나를 뒤흔들지 모르잖아. 그걸…… 내가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들이 날 필요로 하고, 내 도움을 원한다면, 내가 과연 그걸 매정하게 내칠 수 있을까? 누군가 나에게 있을 자리를 준다면, 그 유혹 앞에서도 태연할 자신이 없어. 인간은 마음도 몸도 약해빠진 생명이니까. 슬퍼. 그들이 영영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 동시에 그들을 보고 싶다고 바라는 내가 있어.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헀어. 여전히 그를 기다려. 아버지와 네 관계를 질투했다고 말하면 혐오할 거야, 다이루크? 하지만 정말로 그랬는걸. 큰어르신이 날 서재로 부를 때마다 무언가를 잘못했나 지레 겁 먹고 몸을 떨었어. 그렇게 살았어. 나는 비오는 날 내 아버지의 로브자락을 붙잡고, 붙잡고, 붙잡았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후회해. 누군가를 속이며 사는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몰랐던 어린 나를 죽도록 때리고 싶어.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겠지. 네게 그렇게 얻어맞았는데도 여전히 깨우친 게 없는 나를 봐. 나는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게 좋아. 그것밖에 못하겠어. 나는 여전히 널 기다리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그들을 기다려. 계속 기다릴 거야. 나는 변화하지 못해, 다이루크. 나는 영원히 성숙해지지 못할 거야.


XX57년 9월 19일

케이아가






그리운 다이루크에게


축하해줘, 다이루크. 오늘은 내 열여덟 살 생일이야. 아무도 성대하게 축하해주진 않았지만. 네 생일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누가 눈치 없이 내 생일을 챙기겠어? 그래도 엘저 씨가 은근슬쩍 와인병 하나를 찔러넣어주더라. 눈치챘어? 글씨체가 좀 이상하지……. 취했을지도 몰라. (노래 가사가 삐뚤빼뚤하게 적혀있다) (지운 흔적)

(낙서) (지운 흔적) (지운 흔적) 내가 성인이 되는 해 생일에는 내가 태어난 해에 담근 포도주를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이건 겨우 8년 전 와인이야! 

알겠어, 쳐다보지마. 쩨쩨하게 이런 걸로 따지지 않을테니. 라겐펜더 지하 술창고에서 슬쩍한 거라고 하시더라. 네 주머니를 턴 거니까 네게 받은 거나 다름 없지. 조금 모자라지만 이걸로 퉁칠게. 그리고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 오랜만에 식사가 땡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물로서 제값을 다한 것 같아. 

11월 30일, 내가 라겐펜더 집안에 거두어진지 딱 10년이 되는 날이야. 내 가족으로 있어줘서 고마웠어, 다이루크. 네가 설령 날 혐오하고 경멸한다 하더라도 난 널 원망하지 않아, 절대로. 내가 심술궂은 말을 해도 그게 내 진심이 아닌 걸 알아주었으면 해. 난 (지운 흔적) 그 날 내가 했던 말은 전부, 전부 진심이 아니었어. 널 하루라도 가족이라고 여겨보지 않은 적이 없어. 지금도 네가 그리워.


XX57년 11월 30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12월 31일. 새해를 축복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며 너에게 편지를 보내. 내년에도 포도밭의 수확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 나이 쯤 됐으면 이제 술은 어느 정도 마실 줄 알겠지? 몇 달 후면 스물한 살이잖아. 내가 본 너는 언제나 미성년자였으니까, 나이든 네 모습을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워. 뭐, 여전히 술을 못 마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조금 고생이 늘어날 뿐이지. 의무상 몇 잔 마셔야하는 자리가 수두룩하잖아? 그래도 스네즈나야 사절단이 참가하는 자리에선 반드시! 대타를 내세우도록 해. 불의 물, 말로만 들어봤는데 진짜 독하더라. 아닌가? 이미 마셔봤어? 어떤 맛이었어? 

뭘 마시고 살고 있긴 해? 밥은 잘 먹고 다녀? 

매일 이런 걱정만 하는 내가 이젠 지긋지긋해.

네가 없는 1년이 또 끝나가, 다이루크. 


XX57년 12월 31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생각해보면 다음주가 진의 생일이야. 

뭘 선물해줘야 할까? 그녀에겐 평소에도 많은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다행히 월급은 아직 넉넉해. 그녀가 축하받는 걸 어색해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만약, 그런 난감한 장애물을 뚫고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뿌듯하고 보람찬 일은 없을 거야. 고민거리가 늘었네.

(의미 모를 낙서) 난 그녀에게 바바라와의 시간을 선물해줄 생각이야. 어때, 괜찮지? 적당한 시간대에 둘을 몰래 꾀어내고 나는 슬쩍 빠지면 될 거야.


XX58년 3월 9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스물한 번째 생일 축하해, 다이루크. 네 생일이야.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혼자 보내는 생일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잖아.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이 네 생일이라고 말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태어난걸 축하받아줘.

그리고 오늘은 아버지의 세 번째 기일이야. 휴가를 받고 하루 종일 교회 뒷뜰에서 기다렸어. 

난 내가 30년은 더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이젠 저 무덤을 혼자서는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아.


XX58년 4월 30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행복한 날들이 많았어. 저택에서 가까이 있는 호숫가로 나들이를 간 걸 기억해? 사용인들까지 다 같이 말이야. 내가 저택에 온 지 1년 좀 넘었을 떄의 일이었지. 정말 어색하고 긴장되었었는데. 결국엔 다 같이 술판을 벌였잖아. 너랑 나는 과자나 주워먹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이 놀러가자 말하는 건 죄다 술자리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갑자기 왜 이 이야기를 하냐고? 맞춰봐. 바로 하르파스툼 축제야. 평소에 주당꾼으로 이미지를 잡아놨던게 실수였나봐. 사흘 연속으로, 저녁마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셨어. 정신 차려보니 성당이더라. 이틀을 잤대. 바르카가 근무태만을 핑계로 근신령을 내렸어.

역시 돌바닥보단 침대가 나아. 아무리 더럽고 저렴한 여관이라도 침대에서 자도록 해. 나도 잘게. 자도 자도 잠이 모자라. 

그럼…… 굿나잇.


XX58년 6월 30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어쩐지 몸이 무겁고 졸리다 싶더니, 어서와. 없으면 섭섭한 여름 감기야. 항상 감기에 걸리는 건 나였지. 

근신이 휴가로 바뀌었어. 며칠 동안은 책이나 읽어야겠어.


XX58년 7월 1일

와이너리에서, 케이아가


P.S. 누가 아델린에게 내가 아프다는 말을 전한 거야? 숙소방에서 쉬려 했는데 꼼짝 없이 잡혀왔어.








다이루크에게


소설책을 읽는게 몇 년만인지 모르겠어. 요즘은 너무 빡빡하게 살았잖아. 서류, 숫자, 계약, 이런 것들만 상대하다 보니 뇌까지 굳어버렸나봐. 아무리 자도 자도 피로가 안 풀리는 느낌이야.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폰타인에서 발간된 최근 유행하는 소설책이야. 너도 읽어봤을지 모르겠다. 기계가 아주 발전한 사회가 배경인데,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 수-화-기?라는 것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철로 만든 배에 날개를 달아서 별과 별 사이를 이동한대. 허무맹랑하지만, 무척 기발하고 창의적이야! ……폰타인에서 정말로 이 소설에 나오는 기계들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너도 알다시피 그 나라 사람들은 조금 괴상 (지운 흔적) 독특하잖아. 초콜릿이랑 민트 허브를 섞어 먹는다고. 어쩄든 뒷이야기가 무척 기대돼. 모험가인 잭 씨가 다음권을 빌려가서 감감무소식이래. 빨리 리사가 그를 잡아왔으면 좋겠어. 

딱 하나 소설 내용에 불만인 점이 있다면, 말 없이 달리는 마차를 묘사하는 부분이야. 내 생각에 이건 완전히 헛소리야.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말이 인간의 옆에서 사라질리 없잖아. 개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라면 말은 인간의 최고의 동반자니까. 그런 의미에서, 네가 네 흑마를 몬드에 두고 간 건 정말이지 최악의 선택이었어. 그 애는 여전히 마굿간에서 다른 말들을 괴롭히며 지루하게 살아. 가끔 그 애가 날 탓하듯이 보는 느낌이 들어. 


XX58년 7월 2일

와이너리에서,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아델린에게 미안해. 그녀도 가족을 잃은 건 마찬가지일텐데. 난 그녀에게 더 살갑게 굴어야 해. 하지만 어떻게 내가 '네 몫까지 대신' 그녀에게 잘해줄 수 있겠어? 그렇게까지 염치 없이 굴기엔 내 마음은 이미 충분히 무겁고 힘들어. 지금도 널 내쫓고 네 자리를 빼앗고 네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고 있는 나인데. 이 이상 네가 할 일을 내가 대신 하기 싫어.

빨리 돌아와. 아델린은 나만큼이나 널 그리워하고 있어. 네 방은 여전히 깨끗하고, 언제든지 네가 들어와서 잠들 수 있어. 

어쩌면 우리는 마주 앉아 같이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을 거야. 못한 이야기가 많잖아. 나도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 매일 종이만 바라보며 나 혼자 떠들고 있어. 


XX58년 7월 5일

와이너리에서, 케이아가






날 잊은 거야? 

네가 날 잊었을리가 없잖아.






다이루크에게


네 소식을 듣고 싶어, 제발.

바깥에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겠지. 어딜 가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너니까. 널 도와줄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서, 네가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걸어나가고 있을거야. 내가 날 가둬놓고 네가 와서 풀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너는 매일 같이 나에게서 멀어져. 하루하루 물 속에 가라앉는 기분이야. 저기, 다이루크.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다 정리되는 날 돌아와줘. 

나는 네가 어떤 답을 내리든 그대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어.


XX58년 11월 30일

케이아 라겐펜더가






다이루크에게


오늘따라 기분이 너무 이상해. 아무 이유도 없이 불안해. 네게 심상찮은 일이 생겼을 것만 같아. 

납치되었다면? 노예로 팔렸다면? 아주 크게 다쳐서 누워있거나, 식물인간이 되었다면? 그래서 내게 영영 찾아오지 않는다면? 하루에도 수백번씩 그런 생각을 하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해. 겁이 나서 당장이라도 네 옆에 달려가 널 간호하고 싶어. 넌 조심성이 없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상처를 대수롭게 여기도록 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너의 안전이야. 

늘 조심해. 네가 무사하길 여기서 기도할게. 내게 기도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XX58년 12월 1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케이크를 예약해뒀던 걸 잊고 있었어. 늦게 떠올리는 바람에 생일도 아닌데 혼자 케이크 빵을 와인에 적셔서 먹고 있어. 이렇게 먹지 않는다면 한 조각 먹는 것도 힘들 것 같아.

두 조각 먹었어. 더 못 먹겠어서 다 버렸어. 음식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어릴 때라면 상상도 못했을 거야. 아, 어떤 케이크였는지 설명해주지 않았구나. 하얀 생크림에 시폰, 딸기와 라즈베리가 올라간 거야. (케이크 낙서) 그래도 작은 사이즈로 골랐는데. 너였다면 한 판 다 먹었겠지? 

어머니도 날 낳고 나서 케이크나, 과일이나, 고기 같은 걸 드셨을까? 애초에 나 같은 걸 낳고 싶긴 하셨을까? 얼굴도 못 본 딸이야, 한 번 쯤은 낳은 걸 후회하셨겠지. 나도 매순간 태어난 걸 후회하는데.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의 모습을 부모님들이 못 봐서 다행이야. 독사에 백 번 물리는 것만큼이나 마음이 아팠을 걸. 나는 최악의 자식이야.

'희망'. 아버지는 날 그렇게 부르셨어. 내가 그들의, 켄리아의 마지막 희망이래.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모두에게 잊힌 이 볼품 없는 여자애를 누군가는 희망이라 불러. 하지만 나도 알아, 모든 반짝이는 것들이 황금은 아니지. 이런 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겠어? 이미 있던 행복과 평화조차 내 손으로 망쳐버렸는데. 


XX58년 12월 3일

케이아가






왜 날 버렸어? 이럴거면 차라리 네 불꽃에 타죽는 게 나았어. 너도 그 편이 속이 후련했을 거야. 배신자를 몬드에 남겨두고, 네 자리를 모두 원수인 내가 차지하게 해놓고서,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 네가 무슨 성인군자라도 돼?

매일 밤 좁아터진 숙소 방에서 비참하게 웅크려 혼자 잠에 들어. 네가 남긴 흉터를 부여잡고 네 이름을 부르며 네가 나오는 꿈을 꿔. 이게 네가 내린 벌이야? 견뎌야해?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상상 속의 네 유령과 이야기해야 해? 

너무 외로워, 다이루크. 너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었다고 나도 모르는 새 후회하고 있어. 그런 나를 발견하고 매번 자괴감과 끔찍함을 동시에 느꺼. 난 어디까지 비참해지려는 걸까. 연기와 동정심으로 얻어낸 사랑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배워서 알면서. 그것들은 부서질 때면 꼭 유리와 유리가 서로 부딪혀 깨지는 소리를 내.

3년이 90년 같아. 


XX58년 12월 25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편지를 다시 쓰는 건 일주일 만이야. 오늘 아버지의 무덤을 들렸다 왔어. 작별인사를 하고 오려고.

시드르 호수 위에 달이 떠있었어.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은 언제나 소중하니까, 가만히 벤치에 앉아서 겨울의 호수 정경을 바라보았어. 그러고 있자니, 내 모든 시간, 내 모든 고통과 체념이 호수물을 따라 잔잔히 흘러내려가는 기분이었어. 

내 생각에 그 보름달이 아버지였던 것 같아. 클립스 어르신 말야. 어르신이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 바람의 신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어. 나는 오랜만에 후련함을 느껴, 다이루크. 그 말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어. 난 괜찮을 거야, 다이루크. 그렇지? 지금 행복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기억이 내 안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


XX59년 1월 2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누군가와 너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아버지에 대한 것들도 같이. 너도 알다시피, 몬드에선 그런 화제를 입에 담기 껄끄럽잖아.

내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강에 빠졌던 일을 기억해? 하얀색에, 투명한 장식천이 달린 모자 말야.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아마 버렸겠지. 그 강물, 어린애들한텐 꽤나 깊었어. 나뭇가지로 휘적휘적 거리고, 옷을 쭉 이어 조심조심 들어갔던 것도 그렇고, 재밌었어. 나름 머리를 써보겠답시고 끙끙 애쓰던게 웃기고 귀엽지 않아? 지금이라면 그냥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을텐데. 아닌가. 근처를 지나갈 일이 생기면 한 번 시험해봐야겠어. 나중에 결과를 알려줄게.

음, 또 다른 게 뭐가 있지……. 너 술 취해서 계단에서 굴렀던 거, 웃겼어. 그 때 너무 크게 웃어서 미안해. 그런데 너도 그것 때문에 삐져서 그날 밤까지 내내 툴툴거렸잖아. 서로 잘못한 걸로 치자.


XX59년 1월 3일

케이아가






다이루크에게


우스운 상상을 했어. 우리가 노인이 된 뒤에 다시 만나는 거야. 네 빨간 머리도 전부 하얗게 세어버리고, 나는 네 얼굴을 잊었고. 네가 늙은 모습을 상상하기란 쉬워. 큰 어르신이랑 닮았겠지, 뭐. 하지만 내 늙은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아. 사실 난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지조차 의심스러워. 어제도 츄츄족한테 얻어맞았거든. 신호도 못 알아처먹는 얼빠진 신병 같으니. 거울을 보면 헛웃음이 나와, 오른뺨 전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

내 친아버지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사람 얼굴 낙서) (지운 흔적) (지운 흔적)

어릴 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어. 

(지운 흔적) (지운 흔적) 이젠 길거리에서 그가 나를 스쳐지나가도 나는 그를 붙잡지 못할 거야. (지운 흔적) 그런 생각을 하면 숨이 턱 막혀. 상대가 날 발견하고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해. 하지만 내게 먼저 찾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어. (지운 흔적) 마지막 희망. (지운 흔적) 넌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다. 한 번도 그 말을 잊은 적이 없는데. 그래서 난 아직도 여기서 아버지가 날 데리러올 거라 믿고 (지운 흔적)

네가 그리워. 늘 그리웠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리워. 미치도록 네가 보고 싶어. 


XX59년 1월 15일

케이아가





이 빌어먹을 보석은 왜 통신 기능이 없는 거야? 하루 종일 하는 거라곤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처럼 반짝이는 것밖에 없어!


XX59년 2월 14일






다이루크에게


내 인생은 너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어. 누군가가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경험이었으니까. 말하기 부끄럽지만, 다이루크, 넌 내 첫사랑이었어. 너는 내게 유일해.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 이런 종잇조각 위에 그려낼 수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다이루크, 너는 아니야.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너는 누가 라겐펜더 가문의 입양아로 들어왔었더라도 똑같이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줬을 거야.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있던 없던 네 유년기는 똑같이 찬란했을텐데. 무슨 배짱으로 내 옆에 돌아와달라고 부탁하는지 모르겠어. 생각해보면 내가 너에게 한 일은, 네 호의를 절망으로 보답한 것 밖에 없잖아. 마침내 나는 너에게 한톨도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어. 나도 그래. 나도 내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아. 환멸이 날 지경이야. 나도 이런 내가 싫어. 다이루크. 네가 날 싫어하는 만큼이나 나도 나를 싫어해.

내가 지금까지 무슨 글자를 적고 있었나 싶어. 전부 메아리밖에 되지 않는 것들이야. 어린애가 부르는 자장가도 이것보단 의미가 있겠지. 왜 항상 뒤늦게 깨닫고, 뒤늦게 후회하는 걸까. 난 이미 너에게 버림받았는 걸. 하나 남은 가족조차 실망시켜 정을 떼였는데. 너는 나 따위보다 훨씬 강하고 굳건하지. 그동안 내가 왜 널 걱정해왔는지 모르겠어. 늘 후회해. 왜 진작 더 일찍 나에 대한 비밀을 너에게 털어놓지 않은 걸까. 떠나가고 나서야 너의 그림자 자국을 밟으려 애를 써.

넌 이걸 받아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내 생각에 넌 벌써 날 잊은 것 같아. 

편지를 그만 써야할 때가 온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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