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 팔도, 몸도 자유로운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 잡힐 것 같아. 무서워. 무서웠어. 돌아가서 다시 검은 천에 덮이고 싶지 않아. 죽은 것 같아. 살아있는데…. 하아.”

두서없이 감정이 몰아쳤다. 뭘 보고 있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생전에 생긴 상처를 구체적으로 물었나? 자신이 당할 거라서? 늘 이런 식이었나?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이 설지환이 아니라서 더 불안해하는 건가?

설지환은 없다. 안타깝지만 여기엔 그가 든든하게 느낄만한 인물도,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은 설지환과 다르다. 신우재는 저 모습을, 저 광경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현장에서 직접 겪었으니까.

과호흡엔 봉지가 정석이지만 봉지는 대화에 방해가 된다. 그의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 순 없다.

무너진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그를 껴안았다. 그와 맞닿은 곳마다 그의 떨림이, 두려움이 전달되어 온다.

“괜찮아요. 여긴 그곳이 아니에요.”

움츠린 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그와 저 사이의 좁은 공간을 만들었다.

“내 심장 소리를 들어요.”

“…….”

“내 숨을 따라 쉬어요.”

현실에서의 감각 때문일까. 악몽에서 깨어난 듯 움찔한 그의 숨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맞아요. 그렇게 심호흡해요. 그리고 차분히 말해보는 거예요.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디예요?”

“산. 검은 천이 벗겨진 후엔 줄곧 산이었어.”

이유빈 변사자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생전의 상처들에서 토양이 발견되었고, 성분 분석 결과 그 토양이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의 토양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소견이 나왔다. 살해된 장소와 발견 장소가 다르다는 얘기다.

“그 산을 잘 살펴볼 수 있어요?”

“시야가 고정되어 있어서 살펴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기억할게.”

“알겠어요. 계속해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낭떠러지를 굴렀어. 몸이 먼저 움직였어.”

태오는 바닥에 닿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마치 낭떠러지에 몸을 던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려는 것처럼.

“내가 죽으면 곤란하대. 하늘에 빌었어. 제발 이대로 죽게 해달라고. 그리고… 눈을 감았어.”

“내가 아니라 이유빈이예요.”

“이유빈이… 이유빈이……. 남자가….”

“남자요? 얼굴은요?”

봤어. 기억해. 기억할 수 있어. 그가 작게 웅얼거렸다.

태오는 그곳에서 숨진 피해자였다.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되새기게 하는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할 필요 없다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는 기억해야만 했다. 그가 보고 있는 산이 어디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면 알아내야 했다.

태오는 사건과 관련 없는 타인이다. 형사도 아니고, 피해자나 목격자와도 달랐다. 그는 오직 신우재를 위해 피를 마셨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죽는 순간 외로움이 사무쳤어. 시골을 나가고 싶어서 부모님과 자주 싸웠거든. 화가 나기도 했고, 평생 이렇게 바보처럼 살까 봐 불안해하기도 했어. 그리고 처음 시골을 벗어나던 날 기대감만큼 두려움이 공존했어.”

태오가 다시 몸을 움찔거렸다.

“기도를….”

“네?”

“기도를 드렸어. 강당인가? 예배당? 사람들이 모여있고 누군가 설교를 했어. 아니, …설교가 아니라 예언이야. 며칠 뒤에 그 예언이 딱 들어맞았어.”

죽는 순간이 드디어 끝났구나. 하아. 안도감이 몰려왔다.

태오는 계속해서 모여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으로, 모두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고, 다만 목사는 베일을 쓰고 있지 않으니 그녀의 얼굴을 최대한 기억해보겠다고 중얼거렸다.

“공연을 보러 갔어. 무대가 반짝반짝해. …무척 행복했어.”

태오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울컥거리는 마음을 숨기려는 듯 태오가 연신 침을 삼켰다. 이유빈이 얼마나 그 순간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알 것만 같았다.

“공연에 가는 것도, 핸드폰으로 누구랑 연락을 하는 것도 즐거웠어.”

하아아. 깊은 숨을 쉰 태오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알 수 있었다. 끝난 것이다.

“다 봤어요?”

“응.”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때마침 속눈썹에 맺혀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분명 그는 무표정한데, 왜 지치고 처연해 보이는 걸까. 저도 모르게 뺨에 흐른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너무….”

“네.”

“…답답해. 팔에 힘 좀 풀어줄래?”

“네? 저요?”

“응.”

아, 너무 꽉 안고 있었나.

팔을 풀고 일어나 두어 걸음 물러섰다. 답답했던 건지, 민망했던 건지 태오의 목과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눈을 돌리면서 멋쩍게 목을 만져대는 것 보면 후자 같은데.

“크흠, 목격자는 피의자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거지?”

“네. 그냥 눈깔이 미친놈처럼 희번덕거렸다, 피 떡칠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런 추상적인 것만 기억했어요.”

그때만 해도 돌은 새끼라고는 생각은 했는데, 살인에 식인도 부족해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진짜 사이코패스였다.

“우선 남자 얼굴을 그려줄게. 목격자에게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렴풋이 기억할 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연설하던 여자의 얼굴과… 아! 민다영…이랬나? 그 여자도 봤어. 20대 초중반으로 보였고, 사진으로 봤던 것과 비슷한 시기인 것 같아.”

이어 태오는 기억의 시점이 일인칭이기 때문에 기억의 시기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대부분 도심이었던 걸로 봐선 상경한 후의 기억이 많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이전까지 큰 탈은 없었지만 어머니와 다툰 기억이 자잘하게 보였다고 덧붙였다.

태오는 언제 과호흡이 왔냐는 듯 담담했지만, 그의 하얀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덤덤하게 보이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응. 생각보다 많은 게 보여서 다행이야.”

“말고. 태오요.”

“응. …익숙하니까.”

태오가 선을 긋듯이 그려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갈팡질팡 말했던 것들을 다시 되짚어보자고 권했다.

“마지막에 본 남자가 흡혈귀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인간이라면 피해자를 놓아주고 잡으러 다니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근처에 남자를 도와줄 다른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거든. 실수로라도 피해자를 놓치면 너무 위험하잖아.”

“하지만 확신할 수도 없겠네요. 피해자에게 고맙다고 말하라던 사람은요? 동일 인물입니까?”

“응. 같은 목소리였던 것 같아. 눈이 내내 가려져 있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그리고 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내 팔과 다리가 모두 속박당해 있었어.”

“산에서 풀어줬을 때 피해자 몸 상태에 이상은 없었습니까?”

“응. 며칠간 움직이지 못해 기운이 없고 몸이 굳어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어. 식사도 때마다 했고.”

태오는 범인이 예상했던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일 거라고 말했다.

“사람을 얕보기 때문에 몰이사냥을 즐기는 거야. 어차피 인간은 제 손안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애초에 요즘엔 직접 사람을 헤치지 않아도 피를 수급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이 없어.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고. 그런데 굳이 사람을 잡아다 풀어놓고 도망치라니….”

이유빈이 되어 도망치던 때가 기억났는지 태오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의식적으로 골랐다.

“조금 쉴까요?”

“괜찮아. 지금도 실종된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신우재가 낮게 혀를 찼다. 신경 쓰고 있었나? 실종자 얘기까진 하지 말걸. 하지만 식사 중에 금방 흘러간 얘기였다.

“네. 이유빈이 실종되고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피해자가 며칠 동안 결박된 상태로 지냈는지는 모르는 거죠?”

사망 추정 시간이야 있지만, 상대가 사람이 아닌 이상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태오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잘 모르겠어. 이유빈이 눈을 감은 날은 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어. 옷이 다 젖어서 발이 무거웠거든.”

비? 이유빈이 실종되고 비가 내린 날은 이유빈이 산에서 발견된 당일뿐이었다.

“살해된 날 전까지 이유빈은 죽지 않았다는 거네요. 아, 죽으면 곤란하다는 말도 했었댔죠.”

왤까? 장기 거래 때문에?

“산은요? 어디 산인지 알만한 단서가 있어요?”

“단서라…. 별 특색 없는 산길이었어. 그래도 피해자가 달렸던 그 길을 직접 가보면 알 수 있을 건 같은데…. 아! 처음 산에 도착했을 때 새벽은 아니었어. xx산은 밤에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편이야?”

“아뇨. 거기 산책로랑 가로등이 잘 되어있고, 길 따라 쭉 걸어가면 나오는 야경 스폿이 꽤 유명해서 밤에도 사람이 꽤 있는 걸로 알아요.”

“그럼 역시 피해자가 살해된 산과 발견된 산은 다른 데구나.”

태오는 본 산은 야경 스폿과는 거리가 멀었다. 산 아래로 밝은 곳은 건물 하나였고, 피해자를 풀어놓은 장소에서 꽤 가까웠다. 이유빈은 그 빛을 향해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도 쳐보았다. 소용은 없었지만.

“이유빈의 시야였기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엄청 크고 높은 건축물 있었어. 현대식은 아니었고, 밝은 색상도 아니야.”

태오는 이 건물과 산길도 그림으로 남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은 예배당이었다.

“내가 민다영을 본 건 여기와 공연장이었어.”

“아까 사람들이 전부 베일에 덮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기도가 끝난 후에 민다영이 베일을 걷어내는 걸 봤어.”

그럼 이유빈 대학교 친구인 김지연의 추측에 근거가 생긴다. 두 사람은 원래 알던 사이라는 것. 시기상 종교 활동을 하다 만난 친구였을 것이다.

“다른 친구는요?”

“다른 친구…. 직접 교류를 한 사람은 민다영 뿐이야. 하지만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친구들은 많았던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메시지는 아니었어.”

“네? 친구가 많았다고요?”

이유빈의 SNS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주민등록번호로 가입된 주요 채널은 이미 확인을 끝마쳤다. 특이점은 메신저에 있었다. 그녀가 이미 세 달여 전에 메신저 앱을 탈퇴했다는 것이다.

그 외 SNS는 방치에 가까웠다. 그나마 활발한 건 ‘파란 새’. 좋아요를 줄기차게 눌렀더라.

“내가 봤을 때 메신저를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게 3개월 내인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에세네스? 파란 새?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가 봤던 화면에도 파란 새가 그려져 있었어.”

“같은 사이트일 거예요. 활동을 하긴 했으니까. 거기서 다수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거죠?”

“응.”

“다른 건요?”

“아, 컴퓨터에 일기를 적어 올렸어. 이건 내가 아는 곳이야.”

태오가 핸드폰에서 검색 포털사이트를 켜서 내밀었다.

“유명한, 사, 사이트? 인지는 모르겠어. 설이가 설치해준 거라.”

“블로그를 했나? 블로그에 비공개 글도 없었다고 들었는데. 또 다른 건요?”

“하나 더 있었어. 이름이….”

태오가 모르는 언어라며 방에서 종이를 가져와 그림 그리듯 단어를 써 내려갔다. 영어였다.

“여긴 가입 없이 활동하는 익명 커뮤니티예요. 이유빈이 적은 글 중 기억나는 내용 있어요?”

태오가 생각을 더듬으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블루 블러드 보컬 김시형의 찬양 글이었다. 신우재는 바로 사이트에 접속해 내용 중 특정 단어로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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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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